나치의 유대인 학살인 홀로코스트가 없었다고 부인해 바티칸 교황청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영국인 주교 리처드 윌리엄슨이 지난 29일(현지시간)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일간 텔레그래프가 31일 전했다. 1988년 내려진 파문 조치를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2009년 1월에 철회하기 직전 그가 홀로코스트를 전면 부인하는 발언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작지 않은 파문이 일었다.
윌리엄슨은 프랑스 대주교 마르셀 르페브르(1905~91)가 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의 개혁에 반대하기 위해 1970년에 세운 초전통주의 단체 성 피우 10세(SSPX) 연구회 회원이었다. 1988년 르페브르는 윌리엄슨과 다른 세 명의 SSPX 사제들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동의 없이 주교로 임명했다. 이렇게 해서 네 명 모두 자동으로 파문됐다.
2007년 베네딕토 교황은 트리엔트 공의회(Tridentine Rite)에 대한 제한들을 없애 르페브르를 따랐던 이들과 화해하는 쪽으로 한 발 나아가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에 따라 2009년 1월 21일 교황은 1988년의 파문 조치를 철회했다. 그 연구회의 주교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서 정당한 성직에 복무할 수 없었지만 교황은 파문을 철회함으로써 연구회 회원들과 교조의 차이에 대한 "더 차분한" 토론이 가능해지길 기대했다.
그런데 교황의 바람과 달리 윌리엄슨이 2008년 11월 스웨덴 텔레비전 인터뷰(파문이 철회된 날 방송될 예정이었음)를 통해 나치가 가스실을 쓰지 않았으며 수용소의 유대인 사망자 수가 30만명을 넘기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바티칸은 윌리엄슨의 극단적인 반유대 신념을 담은 글들을 온라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데도 이를 전혀 알지 못했다고 발뺌했다. 그리고 르페브르를 따르는 이들이 바티칸과 갈라서는 정수 중 하나는 몇 세기 동안 유대 사람들에게 낙인 찍은 살신(殺神, deicide) 혐의를 부인하는 바티칸 2차 문서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Nostra Aetate, 우리 시대)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바티칸 당국자들은 2008년 3월까지만 해도 윌리엄슨이 세계 지배를 달성하기 위한 유대인의 음모를 밝혀낸다며 러시아 차르주의자들이 위조하기 시작해 악명 높은 '시온 장로들의 의정서'를 "정통"하다고 묘사한 사실도 알아채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윌리엄슨은 고전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혼이 썩은 찌꺼기"라며 "권위와 규칙이 들어설 자리에 친근함과 즐거움을 밀어넣어 부모와 자녀 간에 고장을 불러일으켰다"고 폄하했다. 이와 관련해 또 한 차례 법석을 피우기도 했다.
이 사달은 가톨릭의 대중 홍보에 재앙을 불러와 유대인 집단과 가톨릭 지도자들, 앙젤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비판을 불러왔다. 이스라엘 랍비 의장은 바티칸과 접촉을 미뤘다. 윌리엄슨은 나중에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한 혐의로 독일 재판에 넘겨져 유죄 판결과 함께 벌금 1만 2000유로를 토해냈다.
처음에 SSPX의 버나드 펠레이 총장상(Superior General, 선임 주교)은 윌리엄슨의 발언은 그만의 것이며, SSPX는 이 사달 때문에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인터뷰 한 달 뒤 SSPX는 이스라엘을 제외하고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살았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근처 교구장 직을 맡고 있던 윌리엄슨에게 열흘 동안 이 나라를 떠나라고 명령함으로써 부분적으로 징계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SSPX와의 불화를 치유하기 위해 세운 바티칸의 교회일치위원회( Ecclesia Dei commission) 성명을 통해 윌리엄슨은 완곡한 어법으로 “사과”한다며 자신의 홀로코스트 견해는 “당시 구할 수 있던 증거에 기반해 20년 전에 이뤄진 것이며 그 뒤로는 공적으로 표현한 적이 없다. 내가 한 말로부터 정직하게 스캔들을 취한 모든 영혼들에게 하느님을 앞에 두고 사과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홀로코스트가 가공의 것이란 자신의 견해를 철회하지 않았고 바티칸도 그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따라 그가 SSPX에서 최종 축출된 2012년 10월에야 다시 받아들였다.
그는 1940년 3월 8일 영국인 부친과 부유한 미국인 모친의 세 아들 가운데 둘째로 버킹엄셔주의 성공회 집안에서 태어났다. 윈체스터 칼리지(대학 진학을 겨냥한 중고등 과정)를 거쳐 케임브리지 대학과 클레어 칼리지에서 각각 영문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딴 뒤 교사가 됐다. 그는 영문학 전공자 답게 윌리엄 셰익스피어 연구에 조예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1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몇 달 동안 브롬프턴 오라토리오 수도회(Brompton Oratory)의 성소자로 있다가 SSPX 회원이 됐다. 그는 스위스 에콘에 있는 성 비오 10세 국제신학교에 입학해 1976년 르페브르 대주교에 의해 사제 서품을 받았다.
윌리엄슨은 미국으로 이주해 처음에는 코네티컷주 리지필드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 교구장으로 일했고 다음에는 미네소타주 위노나에서 주교로 임명된 뒤에도 교구장 역할을 계속 맡았다. 그는 이 기회를 로마 교회의 머리에 있는 독에 대한 신랄한 비난과 '에큐메니칼리즘이란 끔찍한 오류'와 관련해 유죄를 선고받은 교황에 대한 비난의 발판으로 이용했다. 2003년에 그는 아르헨티나 라 레하의 우리 성모님 공동 구속자(Our Lady Co-Redemptrix) 교구장을 맡았다.
파문이 철회됐을 때 윌리엄슨은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를 지어냈다고 발언한 것으로 보도됐으며, 그는 9, 11 테러 공격이 유대인의 세계 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미국 정부 음모의 일환이었다고 믿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역시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암살과 관련한 음모론을 지지하는 한편, 여성의 역할에 대해 극단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여성은 사상을 다루는 데 잘 제한할 수 있지만, 그녀는 한 여인으로서 적절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하는가 하면 다른 기회를 통해선 "여성들의 바지가 여성성에 대한 공격"이란 소신을 피력했다.
수정주의 역사학자 데이비드 어빙과 접촉한 사실이 들통나 아르헨티나에서 추방된 뒤에는 어떻게 하면 논란을 야기하지 않고 홀로코스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표방해야 하는지 묻기도 했다.
윌리엄슨은 또 가톨릭 교회 안에서 받아들여지게 하려는 SSPX의 노력에 맹렬히 반대해 "사탄의 권능" 아래 있는 인물로 여겨졌다. 파문이 철회된 뒤 연구회 안의 긴장은 더욱 높아졌고, 펠레이 총장상의 사임을 요청하는 등 많은 사건 끝에 윌리엄슨은 2012년 연구회에서 쫓겨났다.
조용히 지내길 거부한 채 그는 'SSPX 레지스탕스'를 결성해 스스로를 지도자로 내세웠는데 “자유주의나 모더니즘과 타협하지 않고 믿음을 실천하길 바라는 전통 가톨릭 집단"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여러 차례 더 주교 서품을 받았으며, 2015년 가톨릭 교회로부터 두 번째 파문을 당했다.
한편 나무위키에 따르면 고인의 학교 건축과 운영, 본인의 의식주, 성당 건물 매입과 관리, 산하 사제들에게 지원하는 사목 비용 대부분을 대한민국 서울의 환일 중고교를 운영하는 학교법인 운화학원이 대고 있다. 두 학교에서는 시험 기간을 제외하면 매주 월요일 3교시 예배를 보고, 입학식과 개교 기념일, 졸업식 날에는 모든 학생이 찬송가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