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金大中 전 대통령과는 총재 시절에 여덟 번 인터뷰를 했다. 한번 인터뷰에 2~6시간씩 걸렸다
나는 金총재와 인터뷰를 하러 갈 때는 질문을 준비한 공책을 가져 가 펴놓고 집요하게 캐물었다. 金 총재는 나와 인터뷰한 뒤에는 피로하다는 말을 했다고 전해 들었다. 金 총재와의 인터뷰는 결투 같았으나 그의 말을 정확하게 기록했으므로 月刊朝鮮이 나온 이후 그로부터 불만의 표시가 있었던 적은 없다. 내가 별로 호의적인 기자가 아닌데도 나와 이렇게 많은 인터뷰를 한 이유는 月刊朝鮮을 읽는 보수층 독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91년 1월13일 만난 金大中 평민당 총재는 지방자치제 선거 실시를 요구하면서 장기간 단식을 한 직후여서 핼쓱해보였다.
나는 "다음 대통령선거에서 이기든 지든 金총재로서는 마지막 시도가 되는 것이지요?"라고 운을 뗐다.
『제가 직접 간여하는 것으로는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단식 후에 체중이 많이 주신 것 같은데 건강은 괜찮습니까?
『체중이 더 줄어야 합니다』
―몇 시간 주무십니까?
『여섯 시간 자고, 낮에는 차중에서 5분, 10분씩 토막잠을 자서 피로가 축적되지 않도록 신경쓰지요』
그는 이때부터 북한정권을 흡수통일해야 한다는 데 반대했다.
―요사이 동구공산체제가 무너지고, 북한의 한심한 실정이 드러나면서 남한이 북한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통일할 수밖에 없다는 여론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金총재께서는 자신의 통일정책을 수정하실 생각이 없으십니까?
『없습니다. 독일식통일 발상은 위험합니다. 서독이 동독을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은 흡수하겠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서독이 자신의 체제를 잘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동독이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독일식 통일 운운하면서 북한을 코너로 몰면 金日成을 중심으로 한 보수강경세력을 도와주는 것이 됩니다. 저쪽의 개방세력을 도와주려면 이솝우화대로 바람이 아니라 햇볕을 보내 녹여야 합니다. 그런 햇볕을 보낼 힘을 우리 남한이 먼저 갖추어야 하고요. 북측이 총리회담에서 교류와 불가침선언을 동시에 하자는 데까지 우리 주장을 수용했는데 왜 우리가 북측의 제의를 안 받아들이는지 모르겠습니다』
―고朴正熙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박대통령이 하면 된다. 그러나 영구집권을 위해서 사회를 왜곡시킨 것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도시와 농촌, 지역과 지역, 노동자와 재벌 사이의 불균형을 조장하고 부정부패를 만연시킨 것이 박대통령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범죄 문제도 거기에 원인이 있는 것 아닙니까. 특히 역사의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은 지역감정 조장입니다』
―朴대통령 한 사람에게 경제발전과 정치발전까지 동시에 했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당위론으로서는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무리가 아닙니까. 고르바초프의 예에서 보듯이. 경제발전은 朴대통령의 임무고, 정치발전은 金총재 같은 분의 역할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씀에는 공감하는 점도 있습니다만 두 가지를 동시에 추진하되 역점을 두는 부분이 있으면 되지요. 적어도 방향은 제시 했어야지요』
―요사이 지역감정의 직접적인 원인은 金泳三, 金大中 두분께서 지난 대통령선거에 동시출마한 때문이 아닙니까?
『호남인은 대통령에 출마해선 안된다는 이야기와 통하는데, 호남인이 4반세기를 참아왔지 않습니까. 1963년 대통령선거 때 박정희씨가 15만표 차로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호남의 지지 덕분인데, 그 뒤에도 25년간 참으면서 지역차별이 해소되기를 기다리다가 그렇게 한 것을, 호남사람만 비난해선 안 됩니다』
―다음 대통령선거에 자신이 있습니까?
『대통령은 하늘이 만들어 주는 것 같습니다. 인간은 노력밖에 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 동안 정부를 많이 비판했지만 한 번도 대안 없는 비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모든 문제에 대해서 다 전문지식을 갖추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데 대한 생각은 분명합니다. 노력해도 대통령이 못되면 어떻습니까. 저는 지금까지의 정치생활이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대통령선거 때 컴퓨터 부정이 있었다고 지금도 믿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면 왜 재개표를 요구하지 않았습니까?
『저보고 물러가라는 소리가 요란할 텐데 그런 말이 먹혔겠습니까』
金大中총재는 역시 프로 정치인이었다. 어떤 질문에도 대답을 사양하지 않았다. 가끔 용어선택의 과장, 논리의 비약은 있었지만 나름대로의 진지함이 있었고 의미심장한 복선도 있었다. 그는 1987년 대통령 선거의 개표과정에서 컴퓨터 부정이 있었다는 억지를 인정하지 않았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자당의 金泳三 후보에게 패배한 후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던 金大中씨는 귀국한 직후 月刊朝鮮 부장이던 나에게 은퇴 후 최초의 인터뷰를 허락했다. 나는 1993년 8월24일 오전 서울 동교동의 金大中 전 민주당 대표 자택에 도착했다. 일산 신도시에 머물고 있던 金 전 대표는 토요일에 동교동으로 왔다가 일요일 예배를 보고 다시 일산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金 전 대표는 이날 인터뷰 장소로 동교동을 선택했다. 일산에서는 일체의 외부접촉을 끊고 연구와 집필에만 전념한다는 게 측근들의 설명이었다.
金 전 대표의 집은 한적했다. 휴가 중인 둘째 아들 弘業씨(당시 43세) 부부의 두 아들인 종대(7), 종민군(5)이 할아버지의 응접실을 휘젓고 다녔다. 손님에게서 받은 만원권 지폐를 한 장씩 손에 쥔 꼬마들은 『돈을 엄마에게 맡겨라』는 채근을 피해 응접실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오전 9시50분 쯤에는 전남 도의회 의원 10여명이 응접실에 들어와 權魯甲, 金玉斗 씨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응접실은 돌연 북적대기 시작했다.
10시 정각에 대문을 들어선 金大中 전 대표는 마당 잔디 위에서 전남 도의회 의원들과 어울려 기념촬영을 마치고 나서 잔디 밭에 새 모이를 뿌렸다. 도의원들과 분주히 인사를 나누던 金 전 대표는 『집에서는 도저히 조용하게 인터뷰를 하기가 어렵겠다』며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그래서 인터뷰는 동교동 부근인 서교호텔 음식점의 한 방에서 6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두 시간쯤 인터뷰를 하다가 냄비국수로 점심을 간단히 때울 때 權魯甲씨가 『흑산도에서 가져온 것』이라며 큰 접시에 가득 채운 홍어회를 내오도록 했다. 시중에서는 좀처럼 맛보기 어려운 잘 삭은 홍어였다. 『요즈음 홍어 철이 아니어서 어렵게 진짜 홍어를 구했다』는 權최고의 말에 金 전 대표는 영국에서 홍어회를 먹었던 일을 화제로 올렸다.
大選 패배의 충격 속에 영국으로 떠났지만 그에겐 영국에서의 생활이 대부분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제가 아는 분이 영국에 오는 길에 홍어를 사면서 「金大中 선생님 갖다 줄 거니까 좋은 걸로 주십시오」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내주려던 홍어를 집어넣더니 「그럼 진짜를 드려야 되겠네」라면 딴 고기를 주더랍니다. 이 분이 대한항공 여객기를 타고 오면서 사정을 설명하고 고기를 냉장고에 넣어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승무원이 그 분을 귀빈실로 모셨다고 합니다』
이런 에피소드를 소개한 金씨는 『홍어 덕에 1등석에 타고 온 사람도 있다』며 『세상 살면서 남에게 좋은 소리 듣고 살아야 한다』고 흐뭇해 했다.
『정치는 안하지만 정치가 잘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는 다시는 정치를 하지 않는다고 여러번 다짐했지만 비통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나는 목숨을 걸고 4천만 국민을 다 사랑했는데…. 그런 국민들이 「김대중이는 과격하다. 용공이다. 김대중이는 안된다」고 오해할 때는 피눈물이 났습니다. …선거 때만 되면 나를 빨갱이라고 몰아붙이고 선거가 끝나면 「잘못했다」고 비는 이런 부도덕한 행위를 나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당초 金 전 대표와의 인터뷰는 통일논의에만 주제를 국한하기로 하고 이뤄졌다. 그렇지만 金 전 대표는 기자가 주제 밖으로 던지는 질문에 대해서도 성실하게 답변했다.
「정치를 계속하겠느냐」는 질문에는 『세 번 심판을 받았으면 됐지 무슨 낯으로 또 나서겠느냐』고 짤막히 대답했다. 그는 『정치가 잘 돼야 통일이 되는데 왜 정치에 관심이 없겠느냐. 저술·강연을 통해 나의 정치적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겠다』며 자신이 앞으로 펼칠 정치활동의 한계를 그었다. 그는 『金泳三 대통령이 역사에 기록될 페이지와 내가 기록될 페이지는 다르다』고 했다. 金大中 총재와 그의 통일정책을 놓고 6시간 이상 토론이 이뤄졌다. 나와 인터뷰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金大中씨는 용공적이라고 비판받았던 자신의 통일방안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여 말했다. 아마도 이 달라진 통일방안을 선뵈기 위하여 나에게 인터뷰 기회를 준 듯했다.
우선 그는 공화국 연합제를 거쳐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통일 한국이 지향하는 최종적인 정치체제에 대한 비전을 명확히 했다. 그는 통일 국가의 성격에 대해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두 축으로 하는 사회체제다. 이를 지향해 북한을 유도하는 것이 통일의 방책』이라고 말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3단계 통일론을 제시한 이래 22년 만에 통일국가의 이념과 정치체제를 처음으로 명백히 함으로써 북한이 내세운 고려 연방제 통일안과의 차이를 확실히 한 것이다. 그는 『북한의 사회체제가 민주화되지 않고 시장경제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연방제나 완전 통일은 있을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통일 한국이 궁극적으로 어떤 사회여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항상 『통일을 이룰 그 세대가 선택할 문제』라고 유보적인 입장을 견지했었다.
―金총재께서는 역사에 자신이 어떻게 기록되기를 원하십니까.
『40년간 처음부터 정성과 노력을 다해 민주주의와 국민의 복리를 지키려고 노력했고, 그 목표를 위해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한눈 팔지 않고 매진했다. 선택을 강요받을 때는 목숨을 내놓고 국민을 택했다. 그래서 민주발전에 약간의 기여를 했고 후세 사람들의 삶에 참고가 됐다.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인터뷰를 끝냈을 때는 저녁 무렵이었다. 나는 "장시간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했더니 그는 『저보다도 인터뷰하신 분이 더 수고가 많았어요. 잘 정리해 주세요』라고 부탁했다. 인터뷰 기록을 맡았던 金演光 기자(현 월간조선 편집장)가 며칠 걸려 대화록을 정리하니 작은 책 한 권 분량이었다. 이를 金大中씨에게 돌려주고 발언이 정확히 기록되었는지 확인해달라고 했다. 며칠 후 수정된 대화록이 돌아왔다. 약3분의 1을 고친 것이었다. 맞춤법 교정을 본 것도 있고, 논란거리를 빼버린 곳도 있었다. 金씨는 가느다랗게 나오는 붉은 수성펜을 가지고 여백에다가 고치고 첨삭했는데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이 정확무비한 교정이었다. 金씨는 이 인터뷰 기록을 고치는 데 꼬박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그의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이 잘 드러나 있는 교정지를 보면서 나는 기자들에게 "이것을 보관하고 있으면 돈이 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金大中씨가 교정지에서 뺀 부분중 하나는 그때 金泳三 대통령이 조선총독부 건물이라면서 철거를 추진하던 국립중앙박물관(옛중앙청)에 관한 언급이었다. 金大中씨는 철거가 역사파괴라고 보고 있었으나 현직 대통령의 정책을 비판한 것이 활자화되는 데 부담을 느끼는 듯했다.
기자는 인터뷰 기사 뒤에 이런 ´後記´를 붙였다.
<기자(趙甲濟)가 金大中씨를 인터뷰한 것은 이번이 네 번째였다. 좋은 인터뷰는 공격적인 질문과 적극적인 방어로 이어지는 팽팽한 문답식인 경우가 많다. 기자는 金大中씨의 對北관계·통일방안에 드리워진 의문점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질문 설계를 했으나 초장부터 화살은 빗나갔다. 金大中씨가 의문점으로 남아 있던 몇 가지 부분에 대해서 분명한 입장을 밝혀버렸기 때문이다. 金大中씨를 코너로 몰고 항복을 받아내는 데는 실패했고 오히려 설득당하고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자는 이번 인터뷰가 성공적이었다는 自評을 했다. 무엇보다도 크게 달라진 金大中씨를 발견했고 그런 모습을 소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념적으로는 자본주의 경제―자유민주주의 정치 노선임을 분명히 했다. 한국 현대사와 전임 대통령들을 보는 눈도 객관적이고 따스해져 있었고 金日成과 북한에 대한 평가는 현실적이고 냉엄했다. 그의 설득력은 이런 분명한 입장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늘 표를 의식하던 현역 정치인의 입장에서 한발 뒤로 물러난 것이 그를 훨씬 자유롭게, 또 정직하게 만든 것 같았다.
金大中씨의 얼굴은 고독·고뇌, 그리고 무서운 노력의 이미지를 반영한다. 金泳三씨가 大權문제로 고민했다면 金大中씨는 삶과 죽음의 문제로 고뇌했고 고독했으며 오직 노력으로써 그 난관을 돌파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정계 은퇴 후에도 그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음을 이번 인터뷰에서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800만 표를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은 죽기 전에는 숙명적으로 정치를 그만둘 수 없다. 金大中씨는 정계를 떠난 것이지 정치를 떠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는 『趙부장이 기사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듯 나도 인터뷰나 강연 등을 통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金大中씨는 정계은퇴 후 종전과는 다른 스타일의 정치를 하고 있는 바 그 방향은 국민들에게 통일에의 비전을 제시하고 교육하며 설득하는 일인 것 같다. 일부에선 金씨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서 「통일」을 이용한다는 비판을 하고 있으나 金大中씨가 20여년 동안 오해와 의혹의 시선을 무릅쓰고 일관되게 자신의 통일론을 보완·수정·발전시켜온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통일론에 知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현존 정치인이 金大中씨다.
金大中씨의 가장 큰 변화는 북한과 金日성과 사회주의에 대한 확실한 평가이다. 金泳三대통령은 金日成에 대한 평가를 유보하고 있지만, 金大中씨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金大中씨가 과거에 애매한 태도를 취했던 것은 좌파세력의 표를 의식했던 때문이 아닌가 보여진다. 지난 대통령 선거를 통해서 그는 이념적으로 어중간한 태도가 득표보다는 감표요인으로 더크게 작용한다는 것을 실감한 듯하다. 유럽에서 바라 본 북한의 한심한 실상이 그의 생각을 더욱 굳힌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새 金大中은 보수화 된 金大中이다.
金大中씨를 다시 정치의 전면으로 불러낼 수 있는 것은 국민도 역사도 아니다. 金泳三 대통령의 실패만이 金大中씨를 정계로 복귀시킬 수 있다. 金大中씨는 「통일대통령 지망설」에 대해선 『남북연합제 하의 대통령은 실권이 없는 사회자에 불과하고 그것도 교대로 할텐데…』라면서 일소에 붙였다. 『金泳三대통령의 개혁이 성공하여 양金배제론의 허구를 입증해주었으면 한다』고도 했다. 그렇게 말하는 金大中씨의 표정은 진실되어 보였으나 그래서 金泳三대통령이 실패할 경우의 대비책을 생각하고 있지도 않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정치의 속성과 金大中씨의 인감됨을 모르는 이다.
金泳三 대통령 또한 金大中씨를 의식하는 듯한 몇가지 행동을 보였다. 너무나 서둘러 발표토록 한 호남고속전철 계획이나 한일 양국간에 새로운 외교분쟁을 부를지도 모를 金大中 납치사건 조사에 대한 정부의 협조지시 등. 양金씨의 대결이 金泳三씨의 대통령 당선으로 종막을 고했다고 보기엔 아직 이르다. 金泳三 대통령이 하기에 따라서는 또 한번의 라운드가 펼쳐질지도 모른다.
金大中씨가 정계로 돌아오면 한국의 정치기상도는 본질적인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金씨가 金대통령의 지지기반이던 중산층을 포섭하려는 이념과 정책을 들고 나온다면 대통령의 입지는 좁혀질 것이고, 金大中씨가 종전처럼 호남과 소외계층을 지지기반으로 삼는다면 불안해진 非호남권 중산층은 다시 金泳三 지지로 돌아서게 될 것이다. 金大中씨의 정계복귀 타이밍은 1995년 이전에 치러져야 하는 시·도지사 등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와 밀접하게 관련될 것이다. 큰 도의 도지사는 연간 수조원의 예산과 수만의 공무원을 관리한다. 이런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국회의원 몇 석을 얻는 것보다는 훨씬 더 큰, 國政에의 영향력 확보와 大權고지로 가는 교두보의 구축을 의미한다.
金大中씨의 지방자치에 거는 집념과 비전은 무서울 정도였다. 『지방자치를 실시한 뒤 대통령선거를 하면 자신 있다』는 말을 한 적도 있다. 金大中씨는 최근 1995년의 의미를 「남북연합의 원년」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金日成도 1995년을 「통일의 해」로 목표 설정한 바 있다. 金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의 성격을 띤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와 북한의 핵개발 및 對南전략이 이 해에 합쳐져서 소용돌이칠 때, 金大中씨까지 정계에 복귀한다면 국가적으로 중대한 전기를 맞게 될 것이다>
13년만에 이 後記를 다시 읽어보니 나는 金大中씨의 말로부터 한 가지는 속고 다른 한 가지는 속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의 통일방안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고 誤判했으나, 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1995년 地自體 선거를 전후하여 그가 政界에 복귀할 것이란 예측은 적중했다.
이 인터뷰가 실린 월간조선 1993년 10월호가 시중에 깔린 직후 金大中씨는 나와 金演光 기자를 점심에 초대했다. 그는 대뜸 "인터뷰만 쓰지 後記는 뭣하러 썼어요?"라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1995년 8월13일 광복 50주년 기념일을 이틀 앞둔 세종로와 태평로 일대는 평소보다 어수선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8월15일 첨탑을 철거하는 기념행사를 앞두고 얼룩덜룩한 막을 두르고 있었다. 이날 오전 7시30분, 金大中 새정치회의 창당준비위원장(71)이 서울 광화문의 코리아나 호텔 일식당에 도착했다. 인터뷰를 하기에는 다소 이른 시각이었지만 金위원장은 감색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 입고 활기찬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는 그해 6월27일에 있었던 地自體 단체장 선거 직전에 새로운 당을 만들면서 정계에 복귀하여 서울시장 선거에 趙淳 후보를 공천하여 당선시키는 등 큰 성공을 거둔 뒤였다. 나는 2년 전의 인터뷰 後記를 인용했다.
―1993년 8월25일에 金위원장님이 저와 인터뷰를 하셨습니다. 93년 10월호 月刊朝鮮에 실린 그 인터뷰에 제가 後記를 썼습니다. 얼마 전에 읽어보니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金위원장은 정계를 은퇴한 것이지 정치를 은퇴한 것은 아니다. 800만 표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숙명적으로 정치를 떠날 수 없다. 金泳三 대통령의 실패가 金大中씨를 정치로 불러낼 것이다. 金大中씨가 정계로 돌아오는 시점은 1995년 지방자치제 선거 전후일 것이다. 그것은 地自制에 대한 金大中씨의 평소 집념으로 보아…>
저에게는 적어도 金위원장께서 ´예측가능한 정치´를 한 셈입니다. 요즘 인터뷰를 할 때마다 기자들이 ´정치를 안한다더니 왜 약속을 어겼느냐´는 질문을 하지요. 그때마다 金위원장께서는 드골 前 프랑스 대통령과 닉슨 대통령 그리고 1980년 10월 金泳三 대통령의 정계은퇴 선언을 예로 드시면서 합리화를 하려고 하시던데, 金泳三대통령의 경우 정계 은퇴를 발표한 것은 상당히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행해진 것 아닙니까.
"우리들은 다 잡혀가서 감옥살이하고 고문당하고 사형선고 받을 때, 그럴 때 그 양반은 신변보호를 위해서 정치를 떠나겠다고 선언을 했거든요. 보통 정치인도 아니고 지도자인데… 그러나 한 가지 강조할 것은 저는 정계은퇴의 약속을 못 지킨 것을 분명히 사과했습니다. 여기에는 변명이 없습니다"
―金위원장님의 이번 정계복귀는 인간으로서는 큰 도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평가를 받기를 원하셨고 ´무엇이 되는가보다는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번 일에 있어서는 정말 고민도 많이 하고 주저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제 소신으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때로 비난받고 욕을 먹고 일생을 망칠 우려가 있다 해도 국민과 민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라면 한다는 겁니다. 무엇이 되느냐 하는 것, 즉 국민들에게 존경받고 좋은 말 듣고 명예를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명예를 후세에 맡기고 결단할 것은 결단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어떻게 사느냐의 또 하나의 단면입니다. 이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저에게 가장 큰 교훈을 주고 참고가 된 것은 링컨 대통령이었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미국의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처음에는 남쪽을 철저히 응징하고 규탄하겠다고 했지만 승리가 다가오면서 링컨의 판단은 달라졌습니다. 남쪽이 진 후에 남쪽을 철저하게 응징하면 결국 남쪽은 미국에서 떨어져 나가 적국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지요. 링컨은 국민들에게 남쪽을 용서해야 한다고 설득을 했지요. 그때 그가 자주 한 말이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그러나 악의는 누구에게도 갖지 말라(Charity for all, malice to none)´였지요. 국민들과 링컨의 공화당은 일제히 그를 비난했습니다. 링컨을 가리켜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고 했지요. 링컨은 자신의 본심을 몰라주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 게티스버그에 사는 친구에게 긴급히 상의할 일이 있으니 빨리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가 링컨을 만나러 갔을 때 링컨은 앉으라는 말 한 마디 없이 한 시간 반 동안 방안을 걸어다니면서 억울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도 결단을 했던 겁니다. 후세의 史家들은, 그때 링컨이 그 비난을 감수하면서 결단을 내리지 않았으면 미국이 두 개로 나뉘어졌을 것이라며 그의 결단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당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고 金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실망을 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2년 반을 모두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야당이라도 잘 해야 하는데 이미 말한 대로 그럴 가망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안이 필요한 것입니다. 신당 출현의 필연성이 여기 있습니다"
그는 金泳三 대통령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세번째는 金대통령의 리더십인데, 리더로서의 덕성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어요. 특히 나와 아태재단에 대해서는 갖은 방법으로 방해를 합니다. 다른 때 같으면 8월13일이나 8월14일에 해야 할 광복절 사면-복권 발표를 우리가 창당발기인대회를 하는 날에 하는 것 보십시오.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에요. 대통령이 이 정도로 반대파에 대해서 여유가 없습니다. 언론에 대해서도 우리에 대해 제대로 보도하지 못하게 합니다. 도청, 감시, 파괴공작을 군사정권 때보다도 실제 더 합니다.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가지고 있는 시간을 보낼 노리개가 있어야 하는데 나에게서 그걸 다 빼앗아버린 겁니다. 그러니 내가 살기 위해 할 수 없이 다시 정치를 하게 된 면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나를 정치에 다시 끌어온 것도 金泳三 대통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지난번 6·27선거 지원에 나가서 연설하면서 하고 싶은 말 다 하니까, 좀 과장해서 말하면, 10년 먹은 체증이 다 내려가더라니까요"
그는 이날 인터뷰에서는 국립중앙박물관 철거 계획에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박물관을 옮기더라도, 새 박물관을 먼저 지어야지요. 문화재를 보존하는 데는 온도·습도·통풍 등을 조절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던데 일의 先後를 바꿔 가면서 저렇게 서둘러야 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중앙박물관 철거 문제는 두 가지로 그 의미가 요약될 수 있어요. 우선 일제 잔재를 없앤다는 의미에서 철거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일제를 극복한다는 의미에서 그대로 사용할 수도 있는 겁니다. 문제는 국민들의 의견수렴 과정을 거치지 않고 정부가 일방적으로 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언론에서도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에는 48년의 초대 대통령 취임식 이래 제헌국회, 9·28 수복 등 많은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 긍정적인 부분을 충분히 논의한 뒤에 철거를 결정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정부 단독으로 결정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첨탑 부분을 철거했으니까 상징성은 확보한 것 아닙니까. 그 후에는 새 박물관을 지을 때까지 철거를 보류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金泳三 정부의 對北정책도 굴욕적이라고 비판했는데 그 논리가 지금 읽어보니 매우 재미 있었다.
"金대통령이 국민들에게 가장 불안을 주는 분야는 통일정책입니다. 어떤 때는 초강경으로 나갔다가 어떤 때는 超저자세로 나아갑니다. 저자세를 넘어서 굴욕적인 것이 이번 쌀문제를 둘러 싼 일련의 태도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北核문제 일괄타결과 카터 訪北을 주장했을 때 金대통령은 끝까지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제네바에서 美北합의가 이뤄지자 사흘도 못 가 수락을 했어요. 결국 국가적 위신과 위치만 약화시키고 계속 수세로 몰리는 겁니다. 그 동안 핵문제를 다루면서 우리나라가 북한 외교에 판판이 졌어요. 그쪽 사람들은 한 자리에서만 5∼10년씩 일한 전문가이고 그 동안 中蘇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면서 익힌 노하우도 만만치 않습니다. 깔봐서는 안됩니다.
북한을 다룰 때는 서두르지 말아야 합니다. "북한은 개방하지 않을 수 없다. 개방하지 않으면 망한다. 그러니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말아라"는 식으로 느긋하게 대하면서 미국과 일본과의 협조만 유지하면 됩니다. 즉 남북 협력 없이는 北美관계도 北日관계도 개선될 수 없다는 원칙만 확실히 하면 되는 겁니다. 조건은 우리에게 유리한데 왜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지 걱정입니다. 제일 위험한 것은 통일문제를 국내정치로 이용하고 있다는 인상을 북한에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북한에 약점을 잡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쌀 주면서도 한국産이라는 표시도 못하고 15만t이나 되는 쌀을 주면서 뺨을 맞아야 하는 상황이 된 겁니다. 너무나 걱정스럽습니다"
대통령이 된 뒤 金泳三보다도 훨씬 더한 超저자세로써 김정일 정권에 굴종했던 金大中씨의 당시 비판은 사리에 맞았다. 그때만 해도 아직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필요가 없던 시기였다. ´통일문제를 국내정치로 이용하려 하면 북한에 약점이 잡힌다´는 그의 지적은 이제 자신에게 해야 할 말이 되었다. 2000년 남북정상 회담 발표를 총선 나흘 전에 했고, 그 회담을 유치하기 위해서 5억 달러의 금품을 김정일 정권에 바침으로써 약점이 잡힌 상태에서 회담에 임하여 對南적화방안을 그대로 수용한 6.15 선언에 합의했던 金大中씨가 또 다시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을 만나고 연방제 事變을 일으키려고 한다.
金大中 전 대통령은 2006년 1월31일 訪北희망을 밝히는 자리에서 또 북한정권의 달러위조 사건과 관련하여 미국을 공격하고 범인인 金正日 정권을 감쌌다. 金씨는 왜 이런 이해할 수 없는 행태를 보이는 것일까. 이는 그의 불안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200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좌파정권이 종식된다면 새로 들어설 정상정권하에서는 지난 10년간 좌파정권이 저질렀던 반역과 부패의 非理가 폭로되고 조사될 것이다. 金大中씨는 여론의 심판이나 法網을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를 둘러싼 수많은 의문들이 있다.
1. 對北불법송금은 밝혀진 5억 달러뿐인가? 2. 왜 국정원을 시켜 하필 김정일의 비자금 계좌로 수억 달러를 송금했던가? 3. 그는 국정원의 불법도청에 관여하지 않았던가? 4. 그의 재산은 얼마이고 어디에 있는가. 해외 유출 재산은 없는가? 5. 鄭夢憲 현대그룹 회장의 자살과 그가 스위스 은행으로 송금한 3000만 달러는 金씨와 무관한가. 6. 6.15 선언에 나오는 남측의 연합제는 국가공식통일방안이 아닌 金씨의 私的 통일방안인데 왜 이런 바꿔치기가 이뤄졌는가? 7. 그는 김일성 김정일에게 어떤 약점이 잡혔던가? 8. 黃長燁씨가 증언했던 ´김일성의 김대중에 대한 금품제공설´은 사실인가? 9. 일본인 납치범 辛洸洙를 왜 북송시켜주었던가? 10. 노벨평화상 로비에 국정원을 어떻게 개입시켰던가? 11. 해방후 좌익활동가였던 그는 과연 사상적으로 전향했는가?
2002년 大選에서 정상정권이 들어섰더라면 위의 의문은 풀렸을 것이다. 그에 따라 김대중씨는 합당한 평가와 심판을 받았을 것이다. 盧武鉉 정권이 金씨에 대한 비호를 철저히 하는 바람에 그는 對北불법송금과 관련하여 진술 조서 한 장 쓰지 않고 피해갈 수 있었다. 부시 행정부가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 은행과 김정일의 비자금 거래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김대중 정부와 관련된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을 가능성도 있다.
김정일 정권이 무너져도 김대중씨가 쌓아올린 허위의 탑은 허물어질 것이다. 김정일이 북한사람들 손에 의하여 단죄될 때 김정일에 굴종하면서 國益과 國富를 넘겨준 김대중씨의 권위도 동시에 붕괴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김대중씨는 좌파정권의 재집권과 김정일 정권의 존속에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걸지 않을 수 없다. 즉, 金正日-金大中-盧武鉉 공동운명체론이 성립한다. 그는 총력을 다해서 김정일 독재정권의 존속과 좌파정권의 재집권을 위해 노력하려 할 것이다. 그가 생전에 험한 꼴을 보지 않는 길은 이뿐인 것 같다.
그는 김정일 정권도 사실상 시인한 달러위조에 대해 ´미국이 직접적인 증거를 갖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정일도 이 말을 듣고는 失笑할 것이다. 김대중 정부하의 국정원도 북한의 달러위조에 대해서 여러번 경고하는 자료를 낸 사실을 그는 아예 무시한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전직 대통령이 어떻게 부끄럼 없이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해답은 "체면을 따질 겨를이 없을 만큼 사정이 절박하다"일 것이다. 그는 방북하여 김정일을 만나면 노무현과 김정일 사이의 회담을 중매하고, 이 회담에서 ´연방제(연합제) 통일 개시 선언´이 나오도록 유도하려 할 것이다. 이는 김대중-노무현 지지세력, 그리고 남한내 친김정일 세력 및 김정일 정권을 하나의 反대한민국 통일전선으로 묶는 효과를 낼 것이다.
그가 방북해선 안되는 사유는 너무나 명백하다.
1. 그는 김정일과 함께 6.15 선언이란 반역적 사기문서를 만들어 국민들을 속였던 정치적 전과자이다. 반성도 하지 않고 응징도 받지 않은 그가 또 訪北하도록 방치하는 것은 再犯을 허용하는 것과 같다.
2. 그는 2000년 6월에 뇌물을 주고 약점이 잡힌 상태에서 김정일과 협상했기 때문에 국익을 치명적으로 손상시켰다. 그는 이번에도 약한 입장에서 김정일을 만나기 때문에 國益을 갖다 바치는 야합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3. 그는 김정일로 하여금 서울 답방 약속을 지키도록 하는 데 실패했다. 약속을 어긴 김정일에게 계속 굴종하면서 그를 또 찾아가 알현하듯이 만나는 것은 김정일로 하여금 앞으로도 계속해서 약속을 깨라는 이야기와 같다.
4. 그는 건강이 좋지 않다. 심신이 정상적이지 않는 사람이 평양에 가서 김정일을 만나면 정상적인 대화가 되지 않고 반드시 국익을 손상시키는 합의나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5. 동맹국인 미국을 공개적으로 모함하고 앞장서서 공격한 전직 대통령이 敵將을 찾아가서 만나는 모습은 한미동맹에 금이 갔다는 것을 만방에 알리는 일이다.
6. 그가 굳이 기차를 타고가겠다든지 4월에 가고싶다고 말하는 것은 5월의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노무현 정권을 도와주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7. 국가반역혐의로 고발까지 된 적이 있는 그가 또 다시 국가와 민족에 죄가 될 일을 하는데 盧정권은 이를 응원하고 언론과 야당은 비판하지 않는다. 김대중씨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해도 무조건 지지하는 계층이 있다고 믿고서 국민들을 없신여긴다. 그는 대한민국을 너무 가볍게 본다.
나는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한번도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 인터뷰 신청도 하지 않았다. 그가 대통령임엔 틀림이 없으나 인터뷰를 할 가치가 있는 인물이란 느낌이 들지 않게 된 것이었다. 경쟁잡지에서 그를 인터뷰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좋은 기사를 빼앗겼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2000년 6월15일 이후 김대중씨는 나에게 인터뷰 대상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입에서 진실이나 고급정보가 절대로 나오지 않으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기자의 흥미를 끌지 못하는 정치인의 생명은 끝난다. 김대중씨의 言行은 지금도 다른 기자들에게는 기사꺼리가 되고 있고 그의 정치적 생명력은 여전하다. 그가 어떤 惡行을 해도 무조건 지지하는 사람들이 建在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아직도 풀지 못한 숙제가 있다. 김대중씨는 왜 사는 것일까. 그의 인생의 목적과 보람은 무엇일까? 나는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