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뚜껑을 따듯 오리의 목을 자르자 붉은 고무 대야에 더 붉은 피가 고인다 목이 잘린 줄도 모르고 두 발이 물칼퀴를 젓는다 습관의 힘으로 버티는 고통 곧 바닥날 안간힘 오리는 고무 대야의 벽을 타고 돈다 피를 밀어내는 저 피의 힘으로 한때 오리는 구름보다 높이 날았다 죽은 바람의 뼈를 고향으로 운구하거나 노을을 끌고 둔드라 지대를 횡단하기도 하였다 그런 날로 돌아가자고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더 세차게 뿜어져 나오는 피 날고 헤엄치고 걷게 하던 힘이 쏟아진다 아니, 벌써 따듯한 호수에 도착했나 발아래가 방금 전까지 제 안쪽을 흘러 다니던 뜨거운 기운인 줄 모르고 두 발은 계속 물갈퀴를 젓는데 조금씩 느려지는데 오래 쓴 연필처럼 뭉뚝한 부리가 붉은 호수에 떠 있는 흰 병을 바라본다 한때는 제 몸통이었던 물체를 붉은 잉크처럼 쏟아지는 내용물을 본다 길고 길었던 여정이 이처럼 간단히 요약된다니! 목 아래에서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발 담갔던 호수들을 차례로 떠올리는 오리는 목이 마르다 흰 병은 바닥난 듯 잠잠하지만 가을이면 그래도 몇 모금의 붉은 잉크가 더 쏟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