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오빠와 화로
임화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던 오빠의
거북무늬 질화로가 깨어졌어요.
언제나 오빠가 우리들의 ‘피오닐’ 조그만 기수라 부르는 영
남이가
지구에 해가 미친 하루의 모든 시간의 담배의 독기 속에다
어린 몸을 잠그고 사온 그 거북무늬 화로가 깨어졌어요.
그리하여 지금은 화젖가락만이 불쌍한 영남이하고 저하고처럼
똑 우리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남매와 같이 외롭게 벽에 가
나란히 걸렸어요.
오빠!
저는요 저는요 잘 알았어요.
왜 그날 오빠가 우리 두 동생을 떠나 그리로 들어가실 그날
밤에
연거푸 말은 궐련을 세 개씩이나 피우시고 계셨는지,
저는요 잘 알았어요, 오빠!
언제나 철없는 제가 오빠가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
녁을 잡수실 때 오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가 난다고 하면
오빠는 파란 얼굴에 피곤한 웃음을 웃으시며
......네 몸에서는 누에 똥내가 나지 않니
하시던 세상에 위대하고 용감한 우리 오빠가 왜 그날만
말 한 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 속을 메워 버리시던 우리
용감한 오빠의 마음을 저는 잘 알았어요.
천장을 향하여 기어 올라가는 외줄기 담배 연기 속에서 오
빠의 강철 가슴속에 박힌 위대한 결정과 성스러운 각오를
저는 분명히 보았어요.
그리하여 제가 영남이의 버선 하나도 채 못 기웠을 동안에
문지방을 때리는 쇳소리 마루를 밟는 거치른 구두소리와
함께 가버리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우리 위대한 오빠 불쌍한 저희 남
매의 근심을 담배 연기에 싸두고 가지 않으셨어요.
오빠! 그래서 저도 영남이도
오빠와 또 가장 위대한 용감한 오빠 친구들의 이야기가 세
상을 뒤집을 때
저는 제사기(製絲機)를 떠나서 백장에 일전짜리 봉통(封筒)
에 손톱을 뚜러트리고
영남이도 담배 냄새 구렁을 내쫓겨 봉통 꽁무니를 뭅니다.
지금-만국 지도 같은 누더기 밑에서 코를 고을고 있습니다.
오빠! 그러나 염려는 마세요.
저는 용감한 이 나랄 청년인 우리 오빠의 핏줄을 같이한
계집애이고,
영남이도 오빠도 늘 칭찬하던 쇠 같은 거북무늬 화로를 사
온 오빠의 동생이 아니에요?
그리고 참, 오빠, 아까 그 젊은 나머지 오빠의 친구들이 왔
다 갔습니다.
눈물나는 우리 오빠 동무의 소식을 전해주고 갔어요.
사랑스런 용감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청년들이었습니다.
화로는 깨어져도 화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않았어요.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 영남이가 있고
그리고 모든 어린 ‘피오닐’의 따뜻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
직도 더웁습니다.
그리고 오빠!
저뿐이 사랑하는 오빠를 잃고 영남이뿐이, 굳세인 형님을
보낸 것이겠습니까?
섧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고마운 청년 오빠의 무수한 위대한 친구가 있고
오빠의 형님을 잃은, 수없는 계집아이와 동생
저희들이 귀한 동무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다음 일은 지금 섭섭한 분한 사건을 안고 있
는 우리 동무 손에서 싸워질 것입니다.
오빠 오늘 밤을 새워 이만 장을 붙이면 사흘 뒤엔 새 솜옷
이 오빠의 떨리는 몸에 입혀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누이동생과 아우는 건강히 오늘날마다를
싸움에서 보냅니다.
영남이는 여태 잡니다. 밤이 늦었어요.
-누이 동생-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명시 100선 중 40
part 2 그대의 입술은 꽃으로 말하리
채빈 엮음
[작가소개]
임화(林和)
일제강점기 「담-1927」, 「네거리의 순이」, 「어머니」 등을 저술한 시인.
평론가, 문학운동가.
이칭 : 임인식, 성아, 김철우, 쌍수대인, 청로
분야 : 현대문학
성격 : 시인, 평론가, 문학운동가
성별 : 남
출생~사망일 : 1908년~1953년
저작 : 지구와 빡테리아, 담1927, 우리 옵바와 화로, 어머니
<정의>
일제강점기 「담-1927」, 「네거리의 순이」, 「어머니」 등을 저술한 시인. 평론가, 문학운동가.
<개설>
본명은 임인식(林仁植). 서울 출생. 문필 활동을 시작하였던 1926년에는 성아(星兒)라는 필명을, 1928년부터는 임화·김철우(金鐵友)·쌍수대인(雙樹臺人)·청로(靑爐) 등의 필명을 썼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21년 보성중학에 입학하였다가 1925년에 중퇴하였고, 1926년부터 시와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하였으며 영화와 연극에도 뛰어들었다.시 「지구와 빡테리아」·「담(曇)-1927」 등이 잘 일러주고 있는 것처럼 이 무렵 그는 다다이즘(dadaism)과 프롤레타리아사상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으며, 바로 이러한 전위사조에 대한 모방욕이 무산계급문학운동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낳은 것이라 할 수 있다.「담-1927」은 서양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의 죽음에 대한 추모의 정과 부르주아 정부에 대한 증오심을 표현한 것으로 프로시와 이야기시의 유형에 넣을 수 있다. 1928년에 박영희(朴英熙)와 만났으며, 윤기정(尹基鼎)과 가까이 하면서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가담하였다. 1929년에는 「우리 옵바와 화로」·「네거리의 순이(順伊)」·「어머니」·「병감(病監)에서 죽은 녀석」·「우산받은 ‘요꼬하마’의 부두」 등의 시를 써냄으로써 일약 대표적인 프로 시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이들 작품들은 프롤레타리아사상으로 요약되는 주제와 이야기시 또는 단형서사시라는 형식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1930년 일본으로 가서 이북만(李北滿) 중심의 ‘무산자’그룹에서 활동하였고, 이듬해 귀국하여 1932년에 카프 서기장이 되면서 카프 제2세대의 주역이 되었다.카프 전주사건이 터진 그 이듬해인 1935년에 카프 해산계를 낸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의 임화의 삶은 폐결핵, 시집 『현해탄(玄海灘)』·『조선신문학사』 간행, 출판사 ‘학예사’ 운영, 일제 신체제문화운동에 대한 협조 등으로 점철되었다.해방이 되자마자 ‘문학건설본부’의 간판을 내걸고 많은 문인들을 규합하였다. 1946년 2월에는 ‘조선문학가동맹’ 주최의 제1차 전국문학자대회를 성황리에 개최하였다.1947년 11월에 월북하기 전까지는 박헌영(朴憲永)·이강국(李康國) 노선의 민전의 기획차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월북 후에는 6·25까지 조·소문화협회 중앙위 부위원장으로 일하였다. 6·25 때는 다시 서울에 왔다가 그 뒤 낙동강 전선에 종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휴전 직후 1953년 8월에 남로당 중심 인물들과 함께 북한정권의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서 ‘미제간첩’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하였다. 당시 그의 옆에는 이원조(李源朝)·설정식(薛貞植) 등의 문인들이 있었다.19세부터 시·평론을 발표하였던 임화가 남긴 시집으로는 『현해탄』(1938)·『찬가(讚歌)』(1947)·『회상시집(回想詩集)』(1947)·『너 어느 곳에 있느냐』(1951) 등이 있고, 평론집으로는 『문학의 논리』(1940)가 있으며, 편저로는 『현대조선시인선집』(1939)이 있다. 비록 미완으로 그쳤지만 조선신문학사 서술 작업도 꾀한 바 있다.
생전에 80편에 가까운 시와 200편이 넘는 평론을 쓴 것으로 집계되고 있으며, 한국 현대시사와 비평사 그리고 현대문학연구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1920∼1930년대의 프로문학과 해방 직후의 좌익문학을 논할 때 필수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존재이다. 그는 문학운동사·한국 현대문학사에 있어서는 핵심적인 인물이 된다.
<참고문헌>
『임화연구』(김윤식,문학사상사,1989)『해방기한국시문학사』(김용직,민음사,1989)『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김윤식,한일문고,1973)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임화(林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