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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30일 [연중 제3주간 목요일]
마르코 4,21-25
내 안의 작은 불꽃 발견하고 키우는 법
오늘 복음은 두 주제가 하나로 합쳐진 내용인데, 그 내용 전체의 의미를 올바로 깨닫기는 쉽지 않습니다.
첫 번째 주제는 이것입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두 번째 주제는 이것입니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이 관계 없어 보이는 두 주제를 하나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 안에 분명 작은 빛 하나는 있습니다.
이 빛은 등경 위에 올려지면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능력입니다.
그런데 만약 등경 위에 올려져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불빛은 더 커질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닐까요? 능력이 없어 감추어두면 있는 것마저 꺼져버릴 것이란 말씀이 아닐까요?
요즘 사제가 되지 않으려는 이유 중 첫 번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는 자기 꿈이나 결혼을 위해서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랍니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원치 않아서라고 합니다.
스마트폰만 보며 살던 아이들이 사람들 앞에 나서서 평가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것도 하나의 능력입니다.
그 빛을 감추어두면 어떻게 될까요? 사장됩니다. 마치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벙어리 삼룡이’라고 할 정도로 말을 잘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잘하는 편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꺼내어 등경 위에 두기로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조금씩 더 능력이 커지는 것을 느낍니다.
만약 불빛이 작다고 없는 것처럼 덮어버렸다면 분명 꺼져버렸을 능력입니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주인공 윌 헌팅은 MIT에서 청소부로 일하면서도 비범한 수학적 천재성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탁월한 지능을 숨기고, 무명의 단순한 삶을 선택합니다.
윌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그의 깊은 감정적 상처와 두려움에 있습니다.
학대적인 환경에서 성장한 윌은 타인에 대한 깊은 불신과 취약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트라우마는 그가 사람들을 밀어내고, 기회를 거부하며,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거나
실패와 거절의 가능성에 직면하는 상황을 피하게 만듭니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심리학자 숀 맥과이어와의 상담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숀은 윌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가 두려움에 직면하도록 도전합니다.
숀은 윌에게 그의 실패와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온전한 삶으로부터 얼마나 막고 있는지 깨닫게 합니다.
특히 숀의 유명한 대사인 “네 잘못이 아니야”(It’s not your fault)는 윌의 방어막을 허물고, 그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내려놓고 자신을 믿기 시작하도록 돕습니다.
우리 각자 안에는 주어진 ‘빛’이 있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쓰라고 주신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어둠을 비추는 빛처럼 자기 안에서 빛을 찾아 등경 위에 놓고 세상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사용해야 더 큰 은총을 받게 됩니다.
영화 ‘헝거 게임’은 디스토피아 세계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로, 이 세계에서 정부인 캐피톨은 ‘헝거 게임’이라는 잔혹한 이벤트를 매년 개최합니다. 이 게임은 각 지역에서 어린 소년소녀들을
‘조공’으로 선발해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경기장에서 죽음의 전투를 강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잔혹한 이벤트의 목적은 두려움을 심어 캐피톨의 지배를 유지하는 데 있습니다.
주인공인 캐트니스 에버딘은 그녀의 어린 여동생 프림이 조공으로 뽑히자 그녀를 대신해 자원하여
참가합니다.
이로써 캐트니스는 자신을 희생하며 여동생을 보호하려는 사랑과 내면의 강인함을 보여줍니다. 게임에 참가한 캐트니스는 가혹한 상황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는 강한 도덕성을 가지고 경기에 임합니다.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캐트니스는 자주 이타적인 행동을 하며 다른 사람들을 돕습니다.
그녀는 어린 조공인 루와 동맹을 맺고 그녀를 자신의 여동생처럼 보호합니다.
루가 비극적으로 죽은 후, 캐트니스는 그녀의 시신을 꽃으로 장식하며 존경을 표합니다.
이 행동은 캐피톨의 잔혹함에 대한 반항으로 비춰지며, 이를 지켜보는 각 지역의 사람들에게
희망과 저항의 불씨를 심어줍니다.
게임이 계속되면서 캐트니스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고,
캐피톨의 권위에 도전하는 과감한 결정을 내립니다.
마지막 순간, 그녀와 동맹인 피타 멜라크는 서로를 죽이는 대신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위협하며 캐피톨이 그들 둘을 승자로 선언하게
만듭니다.
이는 캐피톨의 조종과 권위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상징적인 행동이 됩니다.
캐트니스의 여정은 여동생을 구하기 위한 이타적인 행동에서 시작되었지만, 그녀는 용기와 연민, 그리고 자신의 도덕적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는 의지를 통해 억압받는 지역들에게
희망과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 잡습니다.
그녀의 작고 선한 행동은 결국 혁명의 불씨를 지피며 거대한 불꽃으로 번져갑니다.
이는 작은 불꽃이라도 목적과 정의라는 연료를 만나면 거대한 화염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주님은 우리 안의 작은 불빛이 이렇게 키우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웃을 위해 무언가라도 도움이 되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안의 빛이 어떤 능력인지를 알아볼 수 있고 그 능력에 집중하여 더 키워나갈 수 있습니다.
‘나는 능력 없는 사람이야.’라는 패배주의에 져서는 안 됩니다.
우린 안에 누구를 막론하고 온 세상을 태울 작은 불씨가 있습니다.
그 불씨는 등경 위에서만 성장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30일 [연중 제3주간 목요일]
복음: 마르 4,21-25
우리 각자의 얼굴에는 스승 예수님의 얼굴이 반영되어야 합니다!
요즘에야 찾아보기가 힘들어 골동품 가게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데,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시절,
중요한 가재도구 중에 하나가 밤을 밝히는 등잔이요 등잔을 얹어두는 등경이었습니다.
제 어린 시절 전기는 들어왔지만, 전력 수급이 여의치 않아 자주 정전이 되었습니다.
그럴 때 마다 선친께서는 다락방에서 등잔을 꺼내 불을 붙이고 높은 곳에 위치한 등경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하필 그럴 때, 라디오에서는 처녀 귀신, 몽달 귀신, 달걀 귀신 등 각종 귀신들이 총 출동하는 전설 따라 삼천리가 흘러나왔는데, 듣지 말아야지 하면서 듣다가 화장실도 못가고 끙끙대던 일이
엊그제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등불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무엇을 강조하고 계시는지, 조금 아리송합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마르 4,21-23)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등불은 다른 무엇에 앞서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당신 존재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따라서 당신께서는 거듭되는 박해와 살해의 위협 앞에서도 당신의 신원을 드러낼 수 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또 다른 그리스도로 살아야 하는 우리도 마찬가지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그분의 가르침으로 인해 어떤 소중한 깨달음이나 깊은 통찰을 얻게 되었다면, 그것은 나만 비밀스럽게 간직해야 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꽁꽁 숨겨 둬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 소중한 은총을 동료 인간들, 그리고 세상과 나누고 공유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께서 선물로 주신 복음, 즉 구원의 기쁜 소식을 자신 안에 붙들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 만민 모두가 아무런 차별없이 골고루 혜택을 받도록 그분의 복음을 적극적으로 전파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비밀리에 가르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회당에서, 광장에서, 공개석상에서, 공적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분 가르침의 진의(眞意)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이 종래의 지도자들과는 달리 판이하게 신선했고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열두 사도들 가운데서도 최측근 제자들과 아주 소수의 특정인들만 그분의 말씀을 이해했고,
하늘나라의 신비를 정확히 파악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결코 소수의 특정한 사람들만의 것이 절대 아닙니다.
복음은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할 보편적인 가르침입니다.
복음은 모든 인류에게 비춰져야 할 큰 빛입니다.
‘가톨릭’이라는 용어가 지니는 의미는 ‘공번되다.’ ‘보편적이다.’ ‘두루두루 광범위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가톨릭교회 공동체가 지향하는 바는 열린 교회입니다.
너그럽고 관대한 교회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우리끼리, 마음에 드는 소수의 사람들끼리만 비밀리에 운영되는 공동체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거나 파벌을 형성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느님 현존의 구체적인 표지가 되어야 하며,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을
증거해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특별히 불림을 받은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제자 자신들에게 큰 영예고 은총이지만, 그것을 자신들 안에 가둬두고 자신들의 영광으로만 돌린다면, 큰 죄악이 되고 맙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값진 보물입니다.
그러나 그 보물은 인류를 위해 사용하라고 맡겨놓은 보물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깨달음은 공동체와 인류를 위해 봉사하라고 주신 선물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등불 같은 존재여야 마땅합니다. 활활 타올라야 하고, 동료 인간들의 어두운 삶을
환히 비춰줘야 합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스승 예수님의 얼굴이 반영되어 있어야 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주간 목요일 강론>
(2025. 1. 30. 목)(마르 4,21-25)
<내가 먼저 잘 살아 있어야 남을 살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 4,21-25)”
1)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겠느냐?”는, “등불을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지 마라. 등경 위에 놓아라.”이고, 이 말씀은 “자신의 신앙을(복음을) 감추지 마라.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고 선포하여라.” 라는 명령입니다.
신앙을 감추는 것은, 신앙을 부정하거나 부인하는 것과 같고, 그래서 신앙을 감추는 것 자체가 큰 죄가 됩니다.
실제로 어떤 장소나 상황에서 자기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감추고, 신앙인이 아닌 척 행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박해 때에는 박해받는 것이 두려워서 그런 경우가 있었는데, 요즘에는 따돌림 당할까봐 두려워서, 또는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할 것이 신경 쓰여서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신앙을 감추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복음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삶’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만일에 복음을 감추고 아무것도 안 한다면, 그것도 역시 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2티모 4,2).”
복음을 전하는 일은 성직자들이나 선교사들만의 직무가 아니라, 모든 신앙인의 의무입니다.
2)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라는 말씀은, “숨기거나 감추지 말고 드러내라.” 라는 명령으로 읽을 수도 있고, “너희가 숨기고 감추어도 언젠가는 드러날 때가 온다.”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숨기거나 감추지 말고 드러내라.” 라는 말씀은,
등불에 관한 말씀과 ‘같은 명령’입니다.
“너희가 숨기고 감추어도 언젠가는 드러날 때가 온다.”로 읽으면,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구원 사업은) 언젠가 때가 되면 완성될 텐데, 동참하지 않은 사람은 그날 받을 몫이 없다.” 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그 나라 건설에 동참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무임승차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복음 선포 활동은(선교활동은)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사랑 실천’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는 사랑 없이 믿음만으로는 들어갈 수 없고, 믿음과 사랑 실천이 하나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즉 믿음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사랑 실천으로 믿음을 증언하는 사람만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모든 사람의 구원’과 ‘사랑’입니다.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사랑 실천’은
우리가 실행해야 하는 ‘하느님의 뜻’ 가운데에서
첫 번째입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라는 말씀은, “잘 새겨듣고 실천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3) 복음서에서 말하는 ‘빛’은 ‘생명’을 뜻합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을 받아서, 그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그 생명력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선교활동입니다.
그런데 우선 먼저 나 자신이 그 생명력으로
건강하게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남을 살리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이 먼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어야 남에게
신앙생활을 권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루카 6,39)”
그 생명력은 이웃에게 나누어 준다고 해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 줄수록 오히려 더 강해지고 커집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의 신비입니다.
신앙과 복음으로 바꿔서 말해도 마찬가지인데,
이웃에게 나의 신앙을 증언하면 할수록 나의 신앙이 더욱 튼튼해지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주면 줄수록 내 안에서 복음의 힘이 더욱 단단해집니다.
4) 신앙인은 세상을 밝히는 ‘등불’인 사람이고, 등불을 들고 앞장서 가는 사람이기도 합니다(마태 5,14.16).
어둠 속에 있는 세상 사람들은 그 등불의 인도를 받아서 ‘죽음의 어둠’에서 벗어나 ‘구원의 빛’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인은 올바른 길을 가리키고 안내하는 표지판 같은 존재이기도 하고, 멈추어야 할 때와 걸어가야 할 때를 알려 주는 신호등 같은 존재이기도 합니다.
만일에 ‘신앙인의 삶’이 잘못되어 있다면, 즉 믿음 없는 사람들의 삶과 다르지 않게 산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하느님과 이웃과 자신에게 아무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되고, 아무 쓸모가 없으면 하느님 나라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버려집니다(마태 5,13).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