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춘-편지83) 가난예찬은 가진 자의 노림수?
2002. 5. 16
제가 보내드린 <부자아빠가 부러운 신세대> 편지에 몇몇 분들이 우려의 답장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가운데 한 분의 답장을 읽어드릴게요.
저는 아직 젊어서 그런지 고등학교 선생님의 아름다운 편지글이 현재까진 잔잔한 감동으로 와 닿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우선 인사부터 하고 드리고 싶은 말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무례를 저지르게 됩니다.
저는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 조○○라고 합니다. 저 또한 손석춘
선생님의 글을 좋아하는 자칭 '손사모(손석춘을 사랑하는 모임)'의 열렬한 회원입니다. 평소 오프라인의 한겨레 지면에서 뿐만 아니라 온라인의 하니뉴스메일을 통해서도 손석춘 선생님의 글을 읽고 생각하며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런 중에 하니뉴스메일 2002년 5월 6일 편지 "부자아빠가 부러운 신세대?"를 보고 선생님의 생각에 감히(?) 동의할 수 없어 이렇게 메일을 보내게 됩니다. 물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것처럼 '행복과 돈은 일치한다거나 비례관계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건 너무나 당연한 생각으로 어느 누가 그 말을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랑은 가난을 겪은 사람들의 특권"이라거나 "가난이 부족하여
사랑과 나눔이 부족한 게 아닐까"라는 글 앞에서 저는 엄청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가난해야만 행복하다거나 가난해야만 사랑할 수 있다는 그런 감상적이고 기만적인 마스트베이션(자위행위)을 할 수 있을까요. '가난이 미덕이다'라는 이런 류의
말도 안되는 말도 모두 가난한 이들을 또 한번 억압하는 가진자들, 즉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가 아닐까합니다. 두서도 없이 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건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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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젊은 벗이 그 선생님의 글을 다소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선생님께 젊은 벗의 편지를 전자우편으로 보내드렸더니 조금 전 다시 답장이 왔습니다. 그분의 편지를 당신과 더불어 읽고 싶습니다.
"부자들은 가난을 미화합니다. 그들은 부를 존속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가난은 고통스러운 생존이기 때문입니다. 부자들은 거짓말을 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진실을 말합니다.
명백히 가난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든 잘못된 사회구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누가 이런 왜곡된 정치현실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누가 가난을 강요합니까? 저는 가난한 현실을 미화하거나 이를 지속시키려는 거짓된 이데올로기를 칭송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정치현실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은, 그러나 험난하고 가난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다고 봅니다.
가난한 노동자를 만나보셨습니까? 그와 눈빛을 마주치며 이야기를 건네 보셨습니까?
그들의 소박한 상상력을 이해하십니까? 가난한 민중의 사랑으로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가난한 민중의 특권입니다.
가진 자들은 아름다운 집을 짓지 못합니다.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오만함과 편협함, 그리고 억압의 도구들뿐입니다. 그들에게서 새로운 이념과 인류애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들은 사랑할 줄 모르는 족속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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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가요. 그 선생님의 진의가 조금은 더 드러나지 않았나요.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편지를 당신께 보낸 것은 결코 가난을 예찬하고 싶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이지요.
미친 듯이 불어오는 부자아빠 신드롬 앞에서 저는 그것이 부자신문의 노림수임을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책 제목이 다소 오해가 있을 수 있지만 『부자신문 가난한 독자』도 결코 가난한 독자를 예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판하고 있습니다.
민중의 사랑을 토로한 그 선생님의 글에 사족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지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자랄 때 저는 그 사람이 인생의 깊이를 얼마나 알 수 있을 지에 회의적입니다. 외로움의 깊이만큼 사랑도 깊어지는 게 아닐까요.
논설위원 손석춘 son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