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스 운전사 안건모 낮에는 버스 운전을 하고 밤에는 노동자들을 위한 잡지 <작은책> 편집장을 하는 안건모(45) 씨는 마르크스가 꿈꾼 이상적인 사회의 '노동자'의 면모를 갖췄다 할 수 있을 법하다. 배차시간 때문에 주기적으로 낮과 밤이 바뀌긴 하지만 말이다. 그는 초등학교 졸업 후 바로 생업에 뛰어들었다. 신문배달, 무덤 뗏장 나르기, 미장공, 화장지 납품, 자가용 기사 등 '노가다'로 치면 안 해본 일이 없다. 30년 이상 말 그대로 '노동자'였던 그가 노동자들이 읽는 <작은책>의 편집장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비정상적인 사회에서는 그 당연한 일이 낯설기만 하다. 그가 <작은책> 편집장을 겸업하게 될 때까지 3번의 중요한 계기가 있었다. 그리고 한번 바뀐 그의 모습은 또 다른 모습을 낳았다. 1985년 그는 시간 날 때마다 연습해 대형 운전면허증을 따서 버스 운전사가 됐다. 줄을 잘 선 턱에 영문도 모르게 보안대에서 군 시절을 보낸 그는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이 좋은 지도자라는 걸 한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그저 일만 열심히 하는 성실한(?) 노동자였다.
|
|
|
|
<작은책> 편집장 안건모 ⓒ프레시안 |
|
|
| 이랬던 그를 처음으로 바꿔 놓은 것은 만화책이었다. 홍제동에 살던 1992년 주민독서실에서 빌린 <쿠바혁명과 카스트로>(리우스, 오월 펴냄, 1988)가 그 책이다. "미국에 대항해 마침내 승리를 쟁취한 쿠바의 민중들에게 뜨거운 마음으로 이 책을 바친다." 첫 장에 쓰인 이 말을 읽고 그는 큰 호기심과 혼란을 느꼈다. 그 뒤 <태백산맥>(조정래, 해냄 펴냄), <노동의 새벽>(박노해, 느린걸음 펴냄)과 같은 책을 찾아 읽으며 그는 "죽어라 일만 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에게 또 다른 계기가 찾아왔다. 1996년 <한겨레>를 넘기다 눈에 들어온 <작은책>을 접하면서 그의 삶은 질적 변화를 겪게 된다. <작은책>에 실린 여성노동자의 글을 보고 용기를 내 쓴 글이 <작은책>에 실리면서 그는 글쓰기에 빠져들었다. 그 후 제7회 전태일 문학상 생활문학 부문에 입선했고, 2000년부터는 1년 남짓 <한겨레>에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그는 1998년 버스 운전기사들의 모임인 '버스일터'를 조직한 이래로 소식지도 정기적으로 발간하고 있다. "억울한 일이 너무 많아서 처음 글을 쓰게 됐다"고 말하는 그에게 글쓰기는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경영진의 행태에 맞서는 또 많은 사람들에게 노동자의 삶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유용한 도구이다. 소식지를 발간한 이유도 글쓰기의 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다. 이 탓에 그는 이름 모를 괴한으로부터 두 차례에 걸친 테러와 납치를 당하기도 했다. 처음엔 독자로 인연을 맺기 시작한 <작은책>은 그에게 편집위원을 제안했다. 2002년 5월부터는 아예 편집장을 맡아 2년을 넘게 이 소중한 책을 꾸려오고 있다. <작은책> 내부에서도 노동자인 그가 글을 보는 눈이 여타 지식인과는 다르다는 평가가 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쓴 '삶의 기록'을 조만간 묶어 책으로 낼 계획도 갖고 있다. <작은책>이 그를 변화시켰듯이 이제 그는 <작은책>을 더 좋은 '노동자 언론'으로 자리매김하는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는 모든 노동자들이 <작은책>을 읽고, 그처럼 목소리를 내는 사회를 꿈꾼다. 그런 세상이 가능할까? 그의 확신을 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안건모의 블로그 바로가기 포클레인 운전사 안재성 안재성(44) 씨는 '<파업>(세계 펴냄, 1989)의 작가'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다. 노동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 <파업>은 1986년 '노동3권 보장'을 외치며 분신한 한 노동자의 얘기다. 또 그의 20대와 우리의 1980년대에 관한 얘기이기도 하다. 1980년 6월 광주항쟁 직후 서울 종로에서 집회를 계획하다 경찰에 덜미를 잡힌 그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연루자로 지목돼 첫 수배를 당했다. 수배 중에 경찰이었던 이모부의 설득으로 자수를 했던 그는 80일간 조사를 가장한 "등뼈와 귀가 작살나는" 고문과 구타를 당한다. 그리고 3년간의 강제징집. 그의 1980년대는 이렇게 시작됐다. 동료들을 팔아먹을 것을 강요했던 악명 높은 녹화사업의 대상자였던 그는 보안사 요원의 눈을 피해 무작정 영등포 산업선교회를 찾아갔다. 당시 노동운동가들이 모였던 이 곳에서 그는 노동운동에 눈을 뜨게 된다. 1983년 구로공단 취업, 1985년 태백ㆍ사북ㆍ고한 등에서 탄광 노동자로 취업, 탄광 지역 노동운동을 조직하다 경찰에 다시 수배를 당하게 됐다. 수배 중에 탄광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그가 구로공단 인근에 월세 8만원의 쪽방을 얻어 2달 만에 쓴 것이 바로 <파업>이다. <쇳물처럼>의 정화진, <새벽출정>의 방현석 등과 함께 노동문학을 선도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한 그는 1993년 <피에타의 사랑>(웅진출판사 펴냄) 이후 돌연 펜을 놓았다. 20대와 1980년대를 온전히 역사에 헌신한 그로서는 '바뀐 세상에서 글쓰기'를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그는 포클레인 운전을 시작했다. 그는 부지런하게 포클레인을 운전해 모은 돈으로 경기도 이천에 땅도 좀 샀다. 최근까지 복숭아 과수원을 운영하다 복숭아 농사가 너무 힘들어서 접고, 그 자리에 소를 몇 마리 키우고 있다. 틈틈이 포클레인 기사로 일하는 게 가계에 보탬이 된다. 노동운동가에서 농부가 된 그가 10여년 만에 다시 소설을 가지고 돌아왔다. 2003년 <황금이삭>(삶이 보이는 창 펴냄)을 펴낸 데 이어, 2004년에는 <경성 트로이카>(사회평론 펴냄)를 펴냈다. <황금이삭>은 평범하고 착한 사람들의 일생을 좇으며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 근현대사 1백년을 훑고 있다. <경성 트로이카>는 다시 1930~40년대 일제 강점기 서울 지역에서 사회주의 운동에 헌신했던 '잊혀졌던 이들'의 모습을 우리 앞에 복원했다.
|
|
소설가 안재성 ⓒ프레시안 | "한 3~4년 전부터 1990년대에 나온 소설들을 훑어보니 너무 화가 났다. 지극히 사적인 체험들만 넘쳐나는 소설들, 내가 겪은 '희망의 시대'였던 1980년대를 모욕하는 소설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자기가 10여년 이상 떠난 노동운동 대신 역사 속 '착한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갔다. 하늘도 도왔다. <경성 트로이카>는 1930~40년대 서울 지역 사회주의 운동에 동참했던 이들 중 살아남은 이효정 할머니와의 우연한 만남에서 비롯됐다. 이효정 할머니는 불꽃같던 그 시절을 그에게 전하고 책이 출간되기 2달 전인 올해 6월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그는 지금 전태일부터 시작된 청계피복노동조합 사람들의 얘기를 기록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이타심이야말로 인류가 발전해온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이타심에 자기희생을 무릅쓴 사람들의 삶을 복원하는 일을 자신의 임무라고 여기는 듯하다. 그에게 1980년대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안건모ㆍ안재성 이야기 우리나라만큼 일하는 사람들이 '천대'받는 사회도 드물다. 그 때문인지 우리나라에서는 일하는 사람들이 유독 스스로를 '노동자'로 칭하는 것을 주저한다. 노동자 간의 연대에도 인색하기 짝이 없다. 부모, 자식, 동생, 조카 또 스스로가 일하는 사람인데도 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때마다 쌍심지를 켜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현실은 당혹스럽다. 전태일이 몸을 불사른 지 3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런 현실은 바뀔 기미가 안 보인다. 여기 특별한 두 사람의 노동자가 있다. 한 사람은 버스 운전사, 한 사람은 소를 키우면서 포클레인을 운전한다. 평범한 노동자이지만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안건모 씨는 끊임없이 글을 써 스스로가 노동자임을 선언한다. 또 노동자들에게 글을 써 스스로를 드러내라고 권유한다. 안재성 씨는 그렇게 '잊혀져 간 노동자'들의 삶을 복원하는 데 자기의 능력을 쏟아 붓고 있다. 일제 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일하는 사람들의 사연은 곧 우리 역사와 다름없다. 이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일하는 사람들이 제 목소리를 내는 사회 또 일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대접을 받는 사회다. 1970년 전태일이 자기의 몸을 불사르면서 알리고자 했던 것도 결국 일하는 사람들이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사회였다.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은 우리 역사 속의 수많은 전태일이다. 두 사람은 전태일이 그렇게 나설 수 있었던 이유를 남다른 '이타주의'에서 찾는다. "전태일은 자기연민에서 운동을 시작한 게 아니라, 자기와 비교해보면 더 열악한 상황에 처한 시다들을 위해서 행동에 나선 것이다. 자기가 고통스럽게 살기 때문에 임금을 더 받아야겠다, 이런 생각에서 행동한 게 아니다. 바로 타인에 대한 애정 때문에 노동운동을 시작했고 바로 그 것 때문에 죽었다." 우리 사회는, 우리 노동운동은 이런 '이타주의'를 잃은 것일까? 두 사람은 조심스럽다. 아니 오히려 낙관적이다. "그 엄혹했던 1970~80년대를 우리는 잘 버텨왔고 이만큼 이루었다. 너무 서두를 필요 없다. 반쯤 이루었다고 해서 또 이것밖에 안 된다고 해서 실망하지 말고 꾸준히 나아가자." 두 사람은 일 하는 사람들이 좀더 자신감을 갖기를 바란다. 그래서 자기들만 아는 글을 써대는 지식인들이 섭섭하고, 힘들고 고단했지만 보통 사람들의 희망이 넘쳐나던 1970~80년대를 폄하하는 사람들에게 분노한다. 가끔 매일 운전해 가는 길을 잃어버릴 정도로 힘들지만 또 농사와 포클레인 운전에 고되지만 그들이 오늘도 밤에 불을 밝히고 노동자들이 힘들게 써온 글을 읽고, 1970~80년대에 온 몸을 바쳤던 노동자들을 찾아다니며 육성을 녹음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그들의 수고를 좀 덜어줘야 하지 않을까? 그들과 한때 어깨 걸었던 그 많은 사람들은 지금 다 어디에 있는가? 혹시 겨우 이만큼 이룬 걸 가지고 쉽게 포기하거나, 다 이루었다고 자족하고 있지는 않은가?
|
|
ⓒ프레시안 | 안건모 씨와 안재성 씨의 <대화>는 지난 11월23일 인사동 근처 찻집에서 2시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다음은 전문. "억울한 게 많아 글쓰기 시작했다" 프레시안 : 일하는 사람들, 노동자들이 어느 때보다도 슬픈 시절이다. '희망이 없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올 정도로 절망감을 느끼는 노동자들이 많다. 두 분은 일하는 사람들,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서 또 그들 스스로 목소리를 내게끔 기운을 북돋아 주는 실천에 앞장서 왔다. 지금 노동자들이 갖는 절망감의 실체는 무엇인지, 또 과연 희망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이런 주제로 얘기를 해봤으면 한다. 안재성 선생은 포클레인을 운전하고 또 농사를 지으면서 소설을 쓰고 있고, 안건모 선생은 버스 운전을 하면서 글을 쓰고 <작은책>을 펴내고 있다. 글 쓰는 노동자는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낯선 게 현실이다. 일을 하면서 글을 쓰는 게 본인한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안건모 : 사실 노동자들은 억울한 게 많다. 제일 억울한 일은 정부-사용자-한국노총이 짜고 치는 행태였다. 그 안에서 버스 운전사들의 목소리가 반영될 여지가 없었다. 파업할 때마다 이미 각본이 다 짜인 상태에서 운전사들 의사와 무관하게 진행될 때가 대부분인데 언론은 버스 운전사들 욕하는 데만 열을 낸다. "난폭 운전하는 버스 기사들이 시민을 볼모로 파업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뭔가 얘기를 해야겠는데, 화는 나는데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다 1997년에 시내버스 파업에 대해 A4 2장짜리 글을 썼다. 그런데 말로 설명할 땐 잘 모르던 사람들이 그 글을 보여주니까, 막 무릎을 치고 웃으면서 ‘아, 파업의 진실이 이런 것이구나', 하더라. 그 때 '글의 힘'을 알았다. 프레시안 : 그전부터 혼자서 글쓰기 연습을 해왔나? 갑자기 글을 쓰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안건모 : 사실 난 1997년도 이전엔 맞춤법을 몰라서 글을 못 썼던 사람이다. 초등학교 나와서부터 공장에서 일을 했다. 검정고시를 통해 고교 2학년에 편입해 고등학교 졸업장은 있지만…. 책을 읽을 줄 안다고 글이 짤 써지는 건 아니잖아. 그러다 1997년에 <작은책>을 보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안재성 : <작은책>은 어떤 계기로 접하게 됐나? 안건모 : 1996년에 처음 봤다. <한겨레>에 아주 작은 광고가 실렸다. '노동자가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는 문구가 인상 깊었고, 정기구독료 1만원. '야, 이거 엄청 싸다', 이렇게 생각하며 보게 됐다. 그 때 1995년에 나온 창간호부터 다 신청해서 읽었으니까. 특히 '어떤 여성노동자의 꽃다운 운명'이라는 글이 인상 깊었다. 한 여성 노동자가 자기 살아온 얘기를 쓴 글이었는데, 그런 글은 그 때 처음 봤다. 그 글을 읽고 '아, 노동자도 이런 글을 쓸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이 참 중요했다. 그 때부터 '이런 글은 나도 쓸 수 있다', 자신감이 들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프레시안 : 처음에 글을 기고한 것도 <작은책>인가? 안건모 : 그렇다. '요즘 시내버스 어떻습니까'라는 글로 열악한 시내버스 운전사들의 사정을 썼다. 아마 그 때 <작은책>에서 원고지에 써서 보내라고 했으면 못 보냈겠지. 맞춤법 틀려도 자기들이 다 교정하니까 괜찮다고, 이렇게 얘기해서 망설이다 글을 보냈다. 그 다음에 <작은책>에 실린 글과 내가 처음에 쓴 원고를 비교해봤다. 내 글을 어떻게 교열, 교정했는지 보면서 글쓰기 공부를 시작했다. 그 다음에 이오덕 선생의 책도 사보고 그랬다. 프레시안 : <작은책> 편집 외에 동료들과 소식지도 내는 걸로 알고 있다. 안건모 : 전에는 책자로 냈는데 지금은 힘이 부쳐서 전단지 1장 분량으로 내고 있다. 사실 내가 동해운수에서 11년이나 버틸 수 있는 것도 글을 쓰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도 '글의 힘'을 아니까. 예를 들면 회사에서 징계를 한다고 하면, 난 징계위원회 풍경을 글로 써 동료들과 같이 읽는다. 사실 그 풍경이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유치하냐. 그런 풍경이 적나라하게 묘사가 되면 경영진과 징계위원회의 권위가 흔들리고.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주장을 글로써 밖으로 알리는 게 아주 중요한 일이다. "민중-민족문학도 지나치게 관념적" 안건모 : 너무 내 얘기만 한 것 같다. 안재성 선생도 할 말이 많을 텐데…. 프레시안 : 안재성 선생은 1989년 <파업>을 내놓으면서 노동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 벌써 15년여가 지났는데, <파업>을 쓸 때 가졌던 생각에서 변화가 있을 법도 하다. 안재성 : 사실 나 같은 경우에 글쓰기는 '기록'이다. <파업>도 소설을 쓴다기보다는 당시 노동자들의 현실을, 노동운동에 대해서 아무도 쓰지 않으니까 그것을 '기록한다'는 의미로 썼다. 사실 '노동문학'이라는 말도 <파업> 이후에 처음 나왔고. 처음 글 쓴 얘기하니까 생각나는 게 있다. 1984년에 방용석, 김문수 등이 '노동자복지회'를 처음 만들었다. 내가 1983년도에 처음 공장에 들어가서 1년쯤 됐을 땐데, 그때도 글을 쓰기는 썼다. 그 글을 회보를 만드는 데 가져다 줬더니 김문수가 나한테 '너는 글을 잘 쓰니까, 앞으로 글을 써야겠다', 이러면서 출판사도 소개해주고 그랬다. 지금은 김문수가 아주 다른 길을 가는, 다른 사람이 돼 내 글을 처음 인정해준 사람이 그라는 사실이 어이가 없지만….
|
|
|
|
|
ⓒ프레시안 |
|
| 안건모 : <파업>은 그 때부터 준비한 건가? 안재성 : 아니다. <파업>을 쓴 것은 여러 해 지나고 나서다. 구로공단에 있다 탄광에 갔고 그렇게 살다보니 글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수배가 돼 서울에 와서 지내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구로공단 시설 같이 했던 사람들, 노동운동을 같이 했던 사람들의 정당성을 알리고 싶었다. 그 전에도 수기 형식의 글은 있었지만 그런 얘기를 담은 소설은 없었으니까, 문학적인 형식을 빌려서 표현해보고 싶었다. 거기에는 당시 문학하는 사람들에 대한 불신도 있었다. 그 때 문학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관념적이었다. 백낙청 선생이 <파업>에서 주인공이 분신한 뒤 그 시신을 경찰에게 빼앗기는 장면을 지적하면서 '그 많은 사람들이 지키고 있는 시신을 경찰이 어떻게 빼앗을 수 있느냐, 너무 비상식적이다', 이런 평을 쓴 것을 읽었다(백낙청, '지혜의 시대를 위하여', <창작과비평> 1990년 봄, 통권67호). 사실 그 전에도 분신한 시신을 빼앗긴 일은 부지기수로 많았다. 그래서 나는 단순하게 서너 줄로 '(시신을) 뺏기고 말았다', 이렇게 썼는데 이걸 과장했다고 평가할 정도로 문학하는 사람들이 관념적이었던 것이다. 당시 민족문학계의 '대부'로 불렸던 백낙청 선생이 그렇게 썼을 정도니까. 프레시안 : 안재성 선생은 1990년대 초 이후에는 거의 소설을 쓰지 않았다. 1990년대에는 이른바 '후일담 소설'이 유행하던 때였는데, 사실상 침묵한 셈이다. 안재성 : '후일담 소설'이라는 것만 해도 그렇다. 사실 민족문학, 민중문학 한다는 작가들 중에서 실제로 현장에서 노동운동을 하거나, 취업을 해 노동자로 생활하다 감옥을 갔다 온 사람은 채 5명도 되지 않는다. 정말 없다. 노동운동이나 노동자의 생활을 작품의 소재로 생각하지, 그것이 진짜 자기의 삶이었던 사람은 거의 없다는 얘기다. 혹시 그런 경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1~2년 정도일 텐데…. 그런 경험을 평생 우려먹는다. 더 화가 나는 것은 그 짧은 경험을 소재로 노동운동과 노동자의 삶을 팔아먹으면서, 노동운동이나 진보운동을 폄훼하는 글을 쓴다는 사실이다. 이미 1990년대 초부터 이런 일이 많아서 <파업> 이후에 한 2~3권 책을 더 쓴 다음에는 10년 정도 책을 안 쓰고 살았다. 사실 노동운동을 그만 둔 뒤에는 글이 써지지도 않았고. 그러다 한 3~4년쯤 전에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된 뒤에 소위 진보적인 문인들이 쓴 책들을 훑어보니까 정말 화가 나더라. "1980년대는 변화의 희망의 시대였다" 안건모 : (웃음) 뭐가 그렇게 화가 났나? 안재성 : 가장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은 1980년대를 아주 슬픈 시대로 묘사했던 것이었다. 물론 슬픈 일도 많았던 시절이다. 하지만 그 시대는 1970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희망의 시기'였다. 세상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하고, 민주주의가 발전한 시기였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바뀌어지는 게 보이는 시기였다. 특히 1970년대부터 노동운동을 해왔던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더욱더 그랬다. 그런데 1990년대에 쏟아진 책들에서 묘사한 1980년대는 굉장히 슬프고 우울한 시절이다. 심지어 그 시절 단편적인 '운동의 경험'들조차도 아주 큰 상처로 묘사되곤 했다. 더구나 그런 '운동의 경험'들은 모두 작품을 치장하는 소재에 불과하고…. 좀 제대로 된 시각으로 노동운동에 대해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2002~3년부터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
|
|
|
ⓒ프레시안 |
|
|
| 프레시안 : 그때 낸 책이 <황금이삭>이다. 그 책은 20세기 한반도의 역사를 훑고 있다. 안재성 : 그렇다. 많은 문인들이 1980년대를 폄훼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제 강점기를 다룬 얘기들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 당시 조선 민중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일제에 저항해 싸워왔는지, 또 그렇게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해 왔는지에 관한 얘기들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김동인의 <감자>처럼 일제에 아주 비굴하게 살았던 모습들, 지식인들이 서울에서 술에 절어 사는 모습들, 이런 얘기를 써 놓고 문학이라고 했다. 사실 이육사처럼 베이징으로 건너가서 반일운동에 몸을 받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황금이삭>에서는 설사 직접 일제 강점기에 저항하지 않았더라도 결코 묵묵히 체념하고 순응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던 우리 조상들의 모습을 복원하고 싶었다. 그 뒤에 준비해서 쓴 <경성 트로이카>에서는 일제 강점기 하에서 노동운동했던 사람들의 헌신적이고 이타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직 그런 기록이 많이 없으니까…. 물론 난 역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사실에 근거에 기록하되 문학적으로 해보고 싶었다. 프레시안 : 여전히 문학이 갖는 '계몽의 힘'을 신뢰하는 것 같다. 안재성 : 그렇다. 여전히 계몽의 필요성을 염두에 둔다. 그래서 한계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하지만 여전히 계몽이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아니 지금이야말로 계몽이 더 절실할 때일수도 있다. (웃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언제 한국 문학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해왔는지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 문학의 시초가 식민지 시대에 시작해서인지 한국인 자체에 대한 폄하, 우리 역사에 대한 폄하, 진보에 대한 편견 등이 많다. 이런 편견을 온 몸으로 깨기 위해 노력해온 사람들, 그들의 얘기를 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식인들은 왜 쉬운 것도 어렵게 쓰나" 프레시안 : 안건모 선생도 <작은책>을 펴내면서 문인들이나 지식인들이 써온 글에 대해서 느끼는 게 있을 것 같다. 안건모 : 지난 2002년 5월부터 편집장을 맡게 됐다. 사실 아무래도 지식인들이 보는 것과 내가 보는 것과 좀 차이가 있다. 지식인들은 노동자들의 글을 자기 틀로 보게 되니까 글의 장단점을 보는 기준 자체가 나와 다르다. 나는 일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굳이 꾸미지 않고 자기 얘기를 있는 그대로만 써도 그 자체로 빛이 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일하는 사람들의 삶은 어떤 작가들보다도 노동자들 스스로가 가장 잘 묘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조정래 소설 중에 지금은 사라진 직업인 '버스 안내양' 얘기가 나오는데, 상황이 안 맞는 게 너무 많아서 내가 보기에는 좀 우습더라. 옆에서 같이 일했던 내가 훨씬 더 잘 썼겠다 싶었다. (웃음) 프레시안 : <작은책>에도 소위 지식인들이 쓴 글들도 있다. 어떤 점이 제일 아쉽나?
|
|
|
|
|
ⓒ프레시안 |
|
| 안건모 : 솔직히 지식인들 글이 노동자들이 써온 글보다 엉터리가 훨씬 많다. 어렵게 써오는 데다, 논리 전개도 엉터리인 경우가 많아서 실망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가장 아쉬운 것은 쉽게 쓸 수 있는 것을 굳이 어렵게 쓰는 것이다. 가만히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그렇게 어렵게 써야 배운 자와 못 배운 자가 구별된다. 어렵게 써야 정보가 배운 사람들끼리만 공유된다는 거지. 심각한 것은 사회를 바꾸겠다는 사람들, 운동하는 사람들이 말을 더 어렵게 쓰는 거다. 운동권에서 쓰는 용어들 봐라. 일반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게 대부분이다. 운동하는 사람들도 이런 점에서는 기득권 세력과 다를 바 없는 거다. 안재성 : 그런데 책들은 다 어디서 읽나? 버스 운전하랴, <작은책> 편집하랴, 시간이 안 날 텐데…. 안건모 : 차 안에서 읽는다. 차 막힐 때도 읽고, 신호 대기 중에도 읽고. 예전에 우이동까지 운전해서 다닐 때는 지하철 공사 때문에 차가 많이 막혔다. 그 때는 아주 책을 많이 읽었다. 시민들이야 짜증나겠지만 시내에서 집회할 때도 내게는 복 받은 시간이다. (웃음) 그런데 요즘엔 시간이 없어서 많이 읽지 못한다. <작은책>과 관계된 글 보는 것만으로도 바쁘니까. 사실 오늘 안재성 선생의 <파업>을 꼭 읽고 오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읽지 못했다. 안재성 : 어떻게 책을 차에서 읽나? 서울이 차가 많이 막히긴 막히나 보다. (웃음) 프레시안 : 안건모 선생은 책 많이 읽기로 소문난 양반인데, <쿠바혁명과 카스트로>라는 만화책이 계기가 됐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안건모 : 그때가 1992년이다. 사실 노동자들 중에는 평생 교과서에 나왔던 황순원의 '소나기' 같은 소설만 읽어본 사람이 대부분이다. 나도 그런 노동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 때 한 청년단체에서 <태백산맥>을 권하더라. 그런데 안 읽었다. <태백산맥>이 공산당 물리치는 소설로 알았거든. 내가 보안대 출신이라서 그런 얘기는 군대에서 많이 들었으니까. <태백산맥> 대신 그 옆에 있는 만화책을 집어 들었다. 그 책을 읽다보니 '어, 이상하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책 속에 그려진 쿠바의 바티스타 정권이 내가 겪어온 군사정권 시절과 너무 닮았거든. 그 전까지만 해도 난 박정희ㆍ전두환ㆍ노태우 대통령을 좋은 지도자로 생각했었는데…그 다음에 <태백산맥>을 읽었다. '아, 내가 거꾸로 된 세상에서 살고 있었구나',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부터 책들을 본격적으로 찾아 읽었다. "요즘 소설엔 자기 얘기밖에 없다" 안재성 : 그러고 보면 안건모 선생은 대단한 양반이다. 그렇게 우연한 계기를 통해 '각성'을 했고, <작은책>과 인연을 맺고 글쓰기를 시작한 것도 평범하지는 않다. 안건모 : 아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데 계기가 없어서 못하고 있을 뿐이다. 글쓰기만 해도 그렇다. 깨닫는 게 제일 중요하다. 사실 글 쓰면서 초등학교 때 배웠던 글짓기에 대한 편견을 벗어나는 게 제일 힘들었다. 글은 배운 사람이 어렵게 쓰는 것이라는 편견,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글을 쓰기가 힘들다. 그런데 그냥 내가 경험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쓴다고 생각하니까, 그 때부터 달라지더라. 그래서 요즘에도 주변 사람이 재미있는 얘기를 하면, '야, 그거 재밌겠다, 한번 글로 써 봐라', 그렇게 권유하곤 한다. 그렇게 몇 사람을 글을 쓰게 한 적이 있다. 프레시안 : 말하는 것을 듣고 보면 안건모 선생은 소설보다는 생활글에 더 가치를 두는 것 같다. 안건모 : 더 가치를 두는 것은 아니고, 소설에는 왠지 손이 안 간다. 전태일 문학상 소설 부문에 들어온 응모작들을 읽으면, 그냥 실제 얘기를 쓰면 될 텐데 왜 이렇게 소설의 틀을 빌렸을까,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안재성 : 이오덕 선생이 그런 주장을 많이 했었다. 이오덕 선생은 전태일 문학상에서 소설 부문을 아예 없애자고 했으니까. (웃음) 안건모 : 안재성 선생도 소설을 쓰기보다는 자기 얘기를 한번 써보지 그러나. 그런 '개인의 역사'야말로 제일 잘 알고, 잘 쓸 수 있는 것 아닌가? 안재성 : 글쎄, 그건 생활글의 시각이고.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한국 문학의 문제점 중 하나는 소설가들이 전부 자기 얘기를 쓰고 있다는 거다. 70~80%가 자기 얘기다. 근데 일제시대에 노동운동이나 사회주의 운동을 했던 사람들, 전쟁통에 학살당했던 사람들, 1970~80년대 노동운동했던 사람들, 이렇게 자기 기록을 남기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있다. 자기 얘기는 그렇게 많이 안 써도 된다. 직접 자기 삶을 털어놓지 않아도 작품으로 말하는 거니까. 그런데 요즘 소설은 거의 사소설이다. 1년에 한번씩 애인 바꿔가면서 소설을 써대는 작가들도 있고…. 정말로 인간과 역사에 대한 관찰과 애정을 가지고 표현하는 그런 글들은 드물다. 안건모 : 내 얘기는 그런 인간과 역사에 대한 관찰과 애정을 가지고 표현하는 글들에 자기 얘기가 담겨야 한다는 것이지. 안재성 : 물론 안건모 선생처럼 자기 얘기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노동자가 많아져야겠지. 그럼 그렇게 모두가 기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면 소설과 같은 문학이 무의미해지느냐.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비유를 하자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축물 중 하나가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이다. 또 나는 초가집도 아주 좋아한다. 부석사는 아무도 살지 않지만 초가집에 살던 사람들이 50년에 걸쳐 만들어낸 것이다. 소설, 시, 희곡, 영화, 이것들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굉장히 중요한 표현 방식이다. 영화 한 편, 소설 한 편이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사례가 수없이 존재하고. 그래서 나는 여전히 소설이란 표현 방식이 유의미하다 생각하고, 적어도 거기에는 자기 얘기가 아닌 창조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태일은 밝고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사람" 프레시안 : 두 분 다 전태일 문학상에 관여하고 있다. 지난 11월13일은 전태일 열사 기일이기도 했다. 요즘 새삼 전태일 정신을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많다. 안재성 : 지난 7~8월 두 달 동안 청계피복노동조합 출신들을 인터뷰했다. 청계피복노동조합의 얘기를 기록하는 게 지금 계획하고 있는 일인데, 이번에 취재를 하면서 전태일과 직접 생활을 같이한 여러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러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전태일이 과연 그 전태일이 맞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 예를 들어 전태일에 대한 영화(박광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1995)도 있었는데, 거기 보면 전태일이 너무 심각한 사람으로 나온다. 물론 전태일이 실제로 남다른 측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친구들이 증언하는 전태일은 다른 모습도 많이 가진 사람이었다. 안건모 : 다른 모습이라면 어떤 모습을 말하나?
|
|
ⓒ프레시안 | 안재성 : 우선 전태일은 베레모를 즐겨 쓰고, 까만 바바리 코트를 즐겨 입었다고 한다. 그 시대 사람치고는 독사진이 정말 많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사진을 많이 찍지 않았다. 그 어려운 시절에 가난한 노동자로 일했지만, 놀러가는 것도 즐겼고 놀러 가면 꼭 사진을 찍었다. 전태일 자신은 술, 담배를 안 했지만 술자리에서 친구들과 잘 어울렸다. 그의 충동적인 성격도 빼 놓을 수 없다. 전태일이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을 노동청(당시 노동부)에 가서 당시 노동자들의 상황을 진정한 일은 유명하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전태일 혼자서 생각해서 진정하려고 가다가, 우연히 만난 친구들을 같이 데리고 노동청에 간 것이지 조직적으로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나중에는 친구들은 바쁘다고 가버리고 전태일 혼자서 여러 신문사도 가고 그랬다고 한다. 그런 전태일을 보면서 친구들이 많이 느꼈다고 한다. 전태일은 또 굉장히 이상적이고 낭만적이었다. 지금 전태일은 꼭 '어두운 죽음의 상징'처럼 돼 버렸지만 일단 성격이 굉장히 밝고 감정이 풍부했다. 친구들은 전태일을 다 그렇게 밝고 이상적인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런 일화도 있다. 전태일은 평화시장의 노동 현실을 바꾸는 게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뒤에는 노동자를 위한 '꿈의 공장'을 만들겠다며 돈을 얻으려 다녔다. 전태일은 책을 읽어서 또 누구에게 교육을 받아서 노동운동에 뛰어든 게 아니다. 밥 굶는 사람에게 자기 주머니에 있는 돈 다 털어서 풀빵을 사주는 그런 인간에 대한 애정, 이타주의가 바로 전태일을 행동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야말로 인류의 역사를 바꾼 원동력이기도 하고. 프레시안 : 우리가 지금까지 전태일을 너무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안재성 : 그렇다. 아까 문학하는 사람들이 1980년대를 대단히 어두운 시대로 그리고 있는 것을 비판했는데, 마찬가지로 전태일을 그릴 때도 진짜 전태일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니까 영화를 그런 식으로 만든 것 같다. 항상 인상 쓰고 있는, 현실의 무게에 고통스러워하는 전태일, 그건 진짜 전태일의 모습이 아니다. "전태일은 '대학생 친구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 안했다" 안건모 : <전태일 평전>에 보면 '나도 대학생 친구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전태일이 말했다는 부분이 나오는데, 공감이 갔다. 사실 나도 초등학교 나와서부터 공장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노동자로서 내 위치를 성찰할 수 있는 기본적인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항의를 못 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버스 운전할 때도 상황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모른다. 3일 계속 일하면 매일 다니는 노선인데도 길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승객들이 와서 항의하는 것도 '웅웅'거리는 소리로만 들리고, 한참 뒷 차를 기다렸다 뒤를 따라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다 책을 읽게 된 뒤로 임금계산법을 배우게 됐다. 그런데 임금계산법대로 하니까 내가 30일 일 했는데도, 월급은 28일치밖에 안 나오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걸 항의하려다 보니 근로기준법도 알아야겠더라. 그래서 노동단체를 찾게 됐고. 그러면서 회사와 싸울 힘과 능력을 얻게 됐다. 이렇게 싸우고 있는 참에 <전태일 평전>을 읽게 됐는데, 딱 내 얘기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사람이 변하는 게 한 순간이다. 지금도 '옛날에 그렇게 일만 열심히 하던 사람이 왜 저렇게 됐나',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웃음) 안재성 : (웃음) 내가 다른 얘기를 하나 더 해보겠다. 좀더 취재를 해봐야겠지만 실제로 '전태일은 대학생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없다. 당시 상황에서 전태일이 거의 접해보지 못했던 운동권 대학생 친구에 대한 기대가 있었을 것 같지 않다. 전태일의 마지막 편지는 박정희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박정희 각하, 옥체 만강하시냐. 혁명 과업을 달성하는 데 대한 각하의 노력을 존경한다. 노동자들이 이렇게 어렵게 사는데 돌아봐 달라', 이런 내용이다. 그게 바로 당시 노동자들의 생각이었다. 운동권 대학생들에 대한 환상이 있을 수 없었다. 아마 전태일이 죽은 후 대학생들이 많이 와서 장례를 치르고, 시위도 하면서 나중에 이소선 여사가 '우리 태일이에게 이런 친구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했던 게 시간이 지나면서 전태일이 직접 한 얘기로 전해진 것 같다. 안건모 : 듣고 보니 그럴 듯하다. 전태일이 훨씬 더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전태일의 모습은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이 그린 모습이다. 안재성 : 우리가 직접 살아있는 전태일을 본다면 황당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웃음) 영화를 보면 꼭 전태일이 서울대는 다니지 않지만, 서울대 나온 사람처럼 그려놓았는데 실제 전태일은 전혀 그렇지 않다. 전태일 본인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게 그의 일기인데, 그 일기만이라도 젊은 사람들한테 읽힐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 프레시안 : 안재성 선생이 전태일 평전을 다시 한번 써야겠다. (웃음) 안재성 : 아니다. 조영래 변호사의 평전은 정말 잘 쓰인 책이다. 그 평전도 거의 전태일 일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고. 부분적으로 아쉬운 점이 있지만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자기 연민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애정이 운동의 동력" 프레시안 : 얘기를 듣고 보니 전태일이 행동을 했던 것도 단순히 비참한 노동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안재성 : 물론 1970년대에 평화시장의 노동 조건은 무척 나빴다. 그런데 막상 당시 노동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상당수는 최악의 노동 조건에 대한 별 감각이 없었다. 대부분이 그 전에 너무 어렵게 살았었기 때문에 오히려 돈을 버니까 좋았다는 사람도 많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전태일이 자기가 너무 가난해서, 너무 비참하게 살아서 행동을 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 사람은 자기연민에서 운동을 시작한 게 아니라, 자기와 비교해보면 더 열악한 상황에 처한 시다들을 위해서 행동에 나선 것이다. 자기가 고통스럽게 살기 때문에 임금을 더 받아야겠다, 이런 생각에서 행동한 게 아니다. 바로 타인에 대한 애정 때문에 노동운동을 시작했고 바로 그 것 때문에 죽었다.
|
|
|
|
|
ⓒ프레시안 |
|
| 전태일은 10살 때부터 미싱을 배운 미싱사였다. 당시 평화시장에서는 A급 미싱사가 재단사보다 돈을 더 많이 받았다. 그런데 전태일은 재단사가 됐다. 이것도 본인한테는 큰 의미가 있는 실천이었다. 그는 재단사가 돼 시다들한테 잘 해주고 싶었다. 재단사가 됐는데도 자기가 시다들에게 아무 도움이 안 되는 현실, 바로 이런 현실이 갑갑해서 노동청에 진정도 하고 신문사도 찾아다닌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런 이타심이야말로 인류가 발전해온 원동력 아닐까. 나는 1970년대에 자기희생을 무릅쓰고 운동했던 사람들 사이를 관통한 정신이 바로 이런 전태일과 같은 이타심이었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볼 때 이런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존중을 발견하고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안건모 :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희생정신'이라고도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에 두산중공업에 가서 배달호 열사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한번 움직이면 한 1천 명 정도가 같이 움직였다고 한다. 아마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도, 내가 여기서 희생하지 않으면 조합원들이 다 죽을 수 있다, 이런 절박한 심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안재성 : <파업>의 실제 주인공은 1986년에 '노동3권 보장' 등을 주장하며 분신한 박영진이다. <파업>에서 이름은 다르게 썼는데…. 박영진에 대한 기억이 바로 그렇다. 그 때가 분신하기 6개월 전인 1985년 추석 즈음이었을 거다. 그 뒤로 죽을 때까지 한번도 못 봤으니까. 구로공단에서 모임을 하고 나오다 우연히 만났다. 갑자기 '형, 떡볶이 좀 먹고 가자'고 해서 분식집에 들어갔다. 둘이 떡볶이를 먹으면서 '요즘 어떻게 사냐', 이렇게 물어서, '그냥 그렇다. 요즘 죽겠다', 이렇게 무심히 답했다. 당시 나는 결혼해서 애가 둘이었고, 돈벌이도 없는 상태였다. 그러더니 영진이가 떡볶이 값을 자기가 계산하고, 샤프펜슬을 손에 쥐어 주더라. 친구들 주려고 회사에서 훔쳐왔다는 거야. 당시 3백원 정도 했었는데…. 그리고 다시 5천원을 줬다. 추석 보너스로 2만원을 탔는데, 그걸로 떡볶이 사주고 5천원을 쥐어 준 거야. 돈이 문제가 아니고 마음이 문제다. 영진이도 그 때 무척 어려웠는데…. 영진이가 죽었을 때 청계피복노조에서 일하고 있을 때다. 갑자기 영진이가 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영진이가 분신한 거는 절대로 잘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영진이가 살아 있었으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훨씬 더 많이 했을 거야. 영진이 때문에 행복해지는 사람들도 많았을 테고. 분신한 사람은 전태일 하나로 충분하다. 조영래 변호사도 <전태일 평전>을 읽고 분신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많이 마음 아파했다. 전 세계에서 분신을 하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베트남의 승려들뿐이니까. 하지만 그래도 온 몸을 불에 내던진 사람들 그 사람들이 말하고자 하는 게 뭔지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사람들은 꼭 기억해야 한다. "정규직이 특혜가 아니라 비정규직이 비정상인데…" 프레시안 : 방금 배달호 열사 얘기도 나왔지만 전태일이 그렇게 분신을 한 지 30여 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분신할 정도까지 벼랑 끝내 내몰린 노동자들이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또 한 편에서는 노동운동 자체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많다. '정규직, 대기업, 남성 중심'의 현재 노동운동이 노동운동 내 약자나 사회적 약자들 돌보지 못한다는 비판도 그 중 하나다. 그러면서 '순수성을 잃었다'는 얘기도 들리고. 오늘 얘기와 맞물려 얘기를 해보면 비판의 가장 핵심은 노동운동이 이타적이었던 전태일 정신을 잃고 자기 밥벌이에 치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재성 : 글쎄…. 안건모 : 사실 그런 비판은 조ㆍ중ㆍ동이 주도하고 있지 않나. 수구언론 때문에 노동운동에 대한 시각이 왜곡되는 측면이 있다. 건강한 비판이 아닌 것 같아서…. 프레시안 : 조ㆍ중ㆍ동이 그런 분위기에 편승이 '노동운동 때리기'에 나선 면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이런 애기들이 노동운동 안에서도 나오는 것을 보면 단순히 매도라고 볼 수도 없는 형편이다. 안건모 : 일단 노동운동하는 사람들부터 다 조ㆍ중ㆍ동 애독자다. 최근 공무원 노조의 파업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느냐. 조ㆍ중ㆍ동은 물론 MBC, KBS 전 언론이 비판에 나서고 있지 않느냐. 조ㆍ중ㆍ동같은 극우 언론의 논조를 전 언론이 따라가고 있는 현실에서 현재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은 순수하기보다는 정치적인 '노동운동 죽이기'다. 안재성 : 어려운 문제다. 물론 안건모 선생 말대로 언론이 노동운동에 호의적이지 않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1970~80년대와 노동자들 또 노동운동이 처한 상황이 달라진 것도 사실인 것 같다. 그 때는 노동자들이 살기 어렵다는 사실이 너무나 명백했다. 그런데 지금은 노동자의 3분의 2는 비정규직이고 나머지는 정규직이다. 정규직은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데, 나머지는 비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런 3분의 2의 노동자가 보기엔 마치 3분의 1의 정규직이 자기들의 희생에 기반을 둔 특혜로 보이는 거다. 지난번 LG정유 파업에서도 이런 게 드러났다. 사실 그들이 주장한 게 '비정규직 차별 철폐'였는데, 무조건 임금 높은 잘 먹고 잘 사는 노동자들이 파업한다고 비난받았다. 민주노총이 비정규직의 처우 개선을 위해서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맨 앞에 내세우며 파업해도 똑같은 이유로 욕먹는다. 이것은 상당히 정치적인 문제이고, 조ㆍ중ㆍ동이 개입하는 것도 이 부분인 것 같다. 프레시안 : 노동운동 지도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과거엔 헌신에 기반을 둔 도덕적 기반이 있었다. 안재성 : 그렇다. 노동운동 지도부에 대한 평가가 상당히 안 좋은 것 같다. 그런데 노동운동을 안 한 지 10년이 넘어서 함부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얘기를 못 하겠다. 그래, 이런 게 있는 것 같다. 일단 노조가 경제적 보상만을 추구하는 전형적 조합주의로 나아가는 것인데,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노동자가 사회 전체를 변혁시켜야 한다는 책임을 자임하는 것과, 노동자가 사람답게 대우를 받기 위해 나서는 것이 똑같지 않다. 어쩌면 사회 전체에 대한 변혁의 전망이 없다는 것이 현실에서 이런 식의 갈등으로 나오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운동이 다른 약자들에게 눈을 돌릴 여유가 없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프레시안 :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노동운동의 위기가 가속화되는 과정에서 진짜 전태일 정신을 가진 노동자들, 헌신적이고 자기희생적인 노동자들이 제일 상처받는다는 사실이다. 공무원 노조 파업만 해도 끝까지 파업대오를 지킨 분들이 징계를 당할 텐데, 따지고 보면 그분들이야말로 공무원 사회를 변화해보려는 진짜 의지를 가진 분들 아닌가. 그런 분들이 현장에서 쫓겨나는 거니까, 그게 제일 안타깝다. 안건모 : 멀리 봐야 한다. 전교조 때도 그랬다. 전교조가 무너지고 나서 한 10년 가지 않았나. 이번에 공무원 노조가 저렇게 나설 수 있었던 것도 전교조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일 테고. 좀더 낙관적으로 멀리 보면 여유가 생기지 않겠나.
|
|
ⓒ프레시안 | "젊은 작가들 어떤 책이 잘 팔리나 고민부터 하니…" 프레시안 : 일하는 사람들이 살아남는 것도 힘든 시대라는데, 글을 쓰는 것은 더 힘들어진 시대인지 모른다. 두 분 다 10~20여년 이상 노동자로서 글을 써왔다. 그 동안 큰 시대적 변화가 있었다. 이런 변화를 어떻게 봐야 할까? 또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안재성 : 1970년대 초 황석영이 처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썼다. 당시에는 민중문학, 노동문학 이런 용어도 없을 때지만 그 때도 소외된 계층에 대한 얘기가 많이 있었다. 그게 아무도 대변해주지 않는 그런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분명히 했었고. 1980년대 넘어서야 유동우 등이 처음으로 노동자의 현실에 대해서 직설적으로 얘기를 했고 많은 감동을 줬다. 그 후 노동자의 삶을 다룬 몇 편의 작품도 있었고, 그런 흐름을 지식인들이 노동문학이라고 딱지 붙이고 부풀리기도 했고…. 그 때 내 소설에 또 노동자의 삶을 다룬 작품들에 노동문학이라는 딱지를 붙였던 지식인들 중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다들 대학교에 자리 잡아 안온한 삶을 보내고 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 개인의 책임인 것 같다. 평론가들이 뭐라고 하든, 독자들이 뭐라고 하든 작가 개인이 크게는 역사를 위해, 당장은 노동자를 위해, 인간을 위해 자기가 해야 할 얘기는 뭔지, 할고 싶은 애기는 뭔지, 또 할 수 있는 얘기가 뭔지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부끄럽지 않은 좋을 글을 쓰기위해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프레시안 : 요즘 글 쓰는 후배들을 보면 아쉬운 점도 많을 것 같다. 세상의 변화와 함께 글 쓰는 사람의 자세도 많이 변했다. 안재성 : 그렇다. 작가 지망생이나 작가로 자리 잡은 지 얼마 안 된 친구들과 대화하다 보면 정말 놀랍다. 얘기의 상당 부분이 어느 책이 잘 팔리는가이다. 그걸 가지고 굉장히 고민을 한다. 뭐가 바뀌어도 크게 바뀌었다. 안건모 : 사실 잘 팔려야지. (웃음) 잘 팔려야, 널리 읽히고 가지고 있는 생각도 여러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그런 거 아닌가? 또 글 쓰는 것으로 먹고 살 생각까지 하면 더 그렇다. 안재성 : 그게 틀린 생각이다. 공부는 하나도 안 하면서 시험 잘 볼 궁리하는 거와 똑같은 거다. 진짜 작가로 성공하고 싶은 사람은 이 짧은 생애 동안 내가 무엇을 이룰 것인가에 대해서 진지한 자기성찰이 있어야 한다. 자기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쓰는 것, 이걸 고민해야지 연예인도 아닌데 왜 남에게 잘 팔릴 상품을 만들 궁리를 하나. 안건모 : 그거야 안재성 선생은 포클레인으로 돈도 많이 벌고, 농사도 짓고 그러니까…. (웃음) 안재성 : 맞다. 그래서 난 글 써서 돈을 버느니 버스 기사를 하든지, 포클레인 기사를 하든지 그런 게 낫다고 본다.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지만 먹고살려고 덤벼들면 수는 다 있다. 소설책 아주 잘 나가봤자 수백만원 버는 현실에서 스스로 글쓰기를 폄하하는 일을 왜 하나. "서두르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프레시안 : 이제 대담을 마무리할 때가 된 것 같다. 두 분의 앞으로 계획을 듣고 싶다. 우선 안재성 선생은 청계피복노조 역사에 대한 책을 준비하고 있다는데 어떤 내용이 될 것 같나? 안재성 : 청계피복노조사는 전에 청계피복노조에서 일할 때도 한 번 정리했었다. 청계피복노조 투쟁사였다. 그 때는 사건이 어떻게 진행됐는지가 중심이었는데, 이번에는 청계피복노조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또 34년이 지난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이런 인간사를 목표로 준비하고 있다. 문제는 내 능력 같은데, 등장인물이 너무 많고 시간도 34년이나 되다 보니 이걸 책 두 권으로 쓴다는 게 쉽지 않다. 일단 청계피복노조와 관련된 개인의 삶들을 최대한 집어넣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당분간은 이 일에 매달려야 할 것 같다. 안건모 : <경성 트로이카> 읽을 때도 전개가 갑자기 빨라지는 느낌이 있었다. 안재성 : 그것도 마찬가지다. 다루는 시간은 길고 사건은 많은데, 지면은 한정돼 있으니까. 불가피한 점도 있는데, 청계피복노조사든 일제 강점기 때 사회주의 운동사든 얘기를 가공하고 싶지 않더라. 그냥 내가 취재한 사실을 그대로 그려 넣고 싶었다. 사실 내가 쓴 소설은 모두 다 98%가 사실이고 2% 정도만 가공한 것이다. <파업>부터 <경성 트로이카>까지. 프레시안 : 독자 입장에서는 불만일 수도 있다. 안재성 선생 입장에서도 소설적 형상화에 대한 욕심이 있을 테고.
|
|
|
|
|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월간 <작은책>. ⓒ프레시안 |
|
|
|
|
|
|
|
안재성, <경성 트로이카>(사회평론사 펴냄). ⓒ프레시안 |
|
| 안재성 : 언젠가는 진짜 '소설'에 부합하는 소설을 쓸 지도 모르겠지만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만큼은 최대한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싶다. 조사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부풀리고 싶지 않다. 조사가 안 됐으면 그냥 넘어가야지.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사계절출판사 펴냄)처럼 문헌에 서너 줄만 나온 걸 가지고 10권짜리 거짓말을 쓸 수 있든지…. (웃음) 프레시안 : 안건모 선생이 <작은책>을 펴내는 데 관여한지도 벌써 2년이 넘었다. 이제 <작은책>을 통해 이것 저것 해보고 싶은 게 많아졌을 것 같다. 안건모 : 별로 없다. (웃음) <작은책>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는데…. 노동자 언론으로 자리를 잡고 싶은데 쉽지 않다. 그나마 인터넷이 발달해서 좀 나아졌긴 했지만 노동자들이 자기 얘기를 공개적으로 털어 놓을 공간이 별로 없지 않나. <삶이 보이는 창>, <작은책>, <노동자> 정도가 그런 공간일 텐데. 아무튼 노동자들이 언제든지 찾아 읽고, 또 자기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공간,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희망이 움트는 그런 공간으로 <작은책>을 자리매김하는 게 목표라면 목표다. 프레시안 : 마지막 질문이다. 개인적으로 바라는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있을 듯하다. 일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희망을 가지는 게 가능할까? 안재성 : 난 낙관적이다. 이제 절반 정도 이뤘고 앞으로도 가야할 길이 많은데 벌써 희망 운운하면 어쩌나. 사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수립된 게 그냥 된 게 아니다. 지난 30년 동안의 민주화 운동의 결과이다. 그것은 고스란히 우리 노동자들이 힘겹게 그 세월을 버텨온 힘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 시대가 갖는 한계도 있다. 일단 우리는 여전히 50여년이 지난 한국전쟁의 상처를 안고 있다. 한국전쟁을 경험한 세대들이 쉽게 북한의 다른 체제를 용납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지금이라도 북한이 남한을 공격한다면 그 사람들하고 원수될 사람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당장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파괴될 테니까. 조지 W. 부시가 아무리 잘하려고 노력해도 이라크에서 잘 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을 테고. 우리나라는 독일과는 다르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우리의 진보적이거나 민주적인 운동은 여전히 미완성일 수밖에 없다. 좀더 세월이 지나고 한국전쟁의 상처가 아물고, 남북한 함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할 때, 그 때야 좀더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여전히 과도기이다. 그런 점에서 너무 서두르거나 지레짐작으로 포기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무조건 앞 세대들을 포기하지 않고 천천히 설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속적인 민주화를 위해서 냉소적이 되지 말고 이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같이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진보와 보수가 조화를 이루는 최소한 그 정도의 사회는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안건모 : 나 역시 비슷하다. 일단 상식적인 사회가 돼야 한다. 극우 세력들이 자신을 보수로 지칭하는 사회는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다. 진짜 보수, 예를 들어 강준만 교수 같은 사람이 보수를 대표하는 지식인이 되는 상식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계속 노력해야 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제 우리나라의 평화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평화, 세계 평화에 대한 책임을 느끼는 그런 사회가 됐으면 한다. 아시아 어떤 나라 중에서도 미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그런 자각이 우리나라는 물론 아시아와 세계 평화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안재성 : 관련해서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난 사실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이 큰 차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지자들만 놓고 본다면 민주당 지지자들은 우리나라의 진보주의자들과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더라. 어쩌면 미국 제국주의를 무너뜨리는 길은 그런 사람들과 연대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내 자랑인데, <경성 트로이카>를 일본에서 출판하기로 했다. 일본 쪽에서 출판사로 먼저 연락이 왔다. 생각해보니까 <경성 트로이카>에 나오는 사람들이 모두 일본에서 사회주의를 배웠고, 당시 그 사람들과 연대했던 일본 사람들은 다 좋은 사람들이다. 진보적인 사람들 간의 세계적 연대가 여전히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프레시안 : 어려운 시기일수록 연대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 자리는 연대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희망을 찾는 뜻 깊은 시기였던 것 같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