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9대 대통령을 역임한 호르스트 쾰러가 1일 갑작스럽게 81세 삶을 마쳤다고 AFP 통신이 전했다. 짧은 투병을 하던 쾰러 전 대통령이 이날 오전 베를린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고 관리들이 전했다. 하지만 앓던 질병이 어떤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쾰러 전 대통령은 경제학자 출신이어서 정치인 경력 없이 취임한 첫 독일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현 대통령은 쾰러의 미망인에게 전하는 편지를 통해 "호르스트 쾰러의 죽음으로 우리는 우리 나라를 위해, 세계에서 높이 존경받고 위대한 일들을 이뤄 아주 인기 있었던 사람을 잃었다"고 안타까워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 그는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로도 일했다. 또 공직과 은행 일도 했다. 그는 2004년부터 2010년까지 국가 수반 역할을 했으며, 당시 야당 지도자로 나중에 총리 직에 오르는 안젤라 메르켈의 종용을 받아 종종 앞으로 나선 끝에 대통령 직에 오르게 됐다.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쾰러가 대통령에 선출됐을 때 대중에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는데 빠르게 "많은 인정과 공감"을 받더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2009년 재임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듬해 5월 그는 한 인터뷰에서 "우리처럼 대외무역에 의존하는 나라는 비상시 우리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 행동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해당 발언을 두고 독일 헌법을 대놓고 무시하는 호전적 발언이라는 논란이 일자 사임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임기 도중 퇴임한 첫 독일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쾰러는 연설을 통해 종종 독일의 강인함, 국민들의 에너지와 창의성을 믿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아울러 그는 독일을 스스로의 미래를 꾸미고 세상에 착한 일을 퍼뜨리는 행동을 하는 "아이디어의 들판"으로 홍보했다.
대외 정책과 관련해서는 쾰러는 아프리카에 집중해 여러 차례 그 대륙을 찾았다. 쾰러 시절 대통령실 실장을 지낸 스벤 벤케는 "그는 결코 지치는 법 없이 글로벌 발전을 위한 아프리카 대륙의 중요성과 잠재력을 지적했다"면서 "그에게 아프리카와 연결되는 일은 지혜롭고 앞을 내다보는 일처럼 보일 뿐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의미심장한 일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고인은 또 2017~19년 유엔의 서사하라 특임대사를 맡아 수십년 이어진 모로코와 알제리가 지원하는 폴리사리오 전선의 수십년 내전을 종식시키려는 유엔의 노력을 이끌었다.
그는 또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었던 반기문이 2012년 설립해 2015년 이후 글로벌 발전 어젠다에 조언하라고 만든 패널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됐다.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고인이 독일에 "엄청난 것을 줬다"면서 "우리는 그를 우리 나라에 주어진 행운 때문에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고 추모했다.
쾰러 전 대통령은 연방 재무장관이던 1990년대 초반, 유로화를 도입한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이끌었다. 그는 IMF 총재와 독일 대통령으로 일하면서도 유럽이 식민주의적 사고를 버리고 아프리카와 동등한 관계에서 함께 글로벌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인은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3년, 독일군 점령 아래 폴란드의 자모시치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지금의 몰도바인 베사라비아 북부에 살던 독일인으로, 벌지 근교의 그 마을은 1865년 독일 이민자들에 의해 건설됐다. 1940년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옛 소련이 베사라비아를 병합하면서 점령지를 본국처럼 만들려고 폴란드 이주를 강제했다.
전후 그의 일가는 라이프치히 근교에 정착했지만, 독일민주공화국 정부가 집단 농장을 강요하는 것이 싫어 1953년 서베를린으로 이주,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난민 캠프에 들어갔다. 1957년 그의 일가는 간신히 루트비히스부르크의 땅을 얻어냈고, 쾰러는 김나지움에 들어가 1963년 졸업하면서 독일 연방방위군에서 병역을 이수했으며, 1965년 튀빙겐 대학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배웠고, 1969년에는 경제학 박사를 땄다. 이 해부터 1976년까지 같은 대학의 경제학 연구소에 속해 있었으며 1977년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일간 빌트에 따르면 고인은 하루 최소 5km를 뛰고 축구와 탁구를 좋아하는 스포츠광이다. 또 엘리베이터 타기를 싫어해 14층에 있던 뉴욕 IMF 총재 사무실에도 거의 늘 계단을 오르내렸다.
8남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난 그는 부친 사망 후 공장에서 일하며 뒷바라지해 준 노모가 팔순이 넘어 돌아가시기 전까지 모시면서 아침 저녁 이부자리를 살핀 효자로 알려져 있다.
성인이 된 뒤에야 배우기 시작한 그의 영어에는 투박한 독일 슈바빙 지역의 사투리가 물씬 묻어나 런던과 워싱턴에서 근무할 때 `슈바빙글리시' 때문에 핀잔을 들은 일은 없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매사에 진지하고 호기심이 많은 그는 대학 시절 이름깨나 알려진 포커꾼이기도 했다고 빌트는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