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不惑)을 넘긴 것은 벌써 몇 해 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공자(孔子)가 틀렸다. 나는 여전히 세상이 혼란스럽기만 하다. 40해를 넘기며 얻은 것이라곤 주름살의 깊이요, 잃은 것은 내 이름 석 자였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내 이름 대신 '신 과장'이라는 익숙하지만 지겨운 그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난 그것이 너무나도 끔찍하다.
나는 직장인이다. 그냥 평범한 인생이란 소리다. 20여 년을 똑같은 시간에 출근을 하고, 똑같은 날짜에 월급을 받고, 매 달 저축이다 적금이다 해서 은행으로 빠져나가는 돈을 맞추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만 했다. 몇 년 전에 무리해서 바꾼 소나타 승용차는 어느덧 주차장에 세워두기 민망할 정도로 구형이 되어 있었고, 비싼 돈을 들여 맞춘 양복은 그 엉덩이 부분이 윤이 날 정도로 반질반질 거렸다.
회사를 위해 젊음을 투자한 결과물은 참으로 암담했다. 세 개의 예금 통장 -이는 그나마 VIP 통장도 아니었다-, 두 개의 적금 통장, 그리고 한 장의 보험 증서, 그것이 다였다. 그리고 나는, 만년 과장이었다. 이쯤 되다 보니 내 소원은 첫째도 부장 진급이요, 둘째도 부장 진급이요, 죽었다 깨어나도 내 소원은 이 만년 과장 딱지를 떼어버리는 것이 되었다.
#1. 진급 시험, 30일 전
얼마 전부터 내 몸에 이상한 현상이 생겨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코가 그랬다. 어느 순간부터 이 코라는 녀석이 민감하게 반응을 하더니, 예전엔 느끼지 못했던 미묘한 냄새까지 맡아 버리는 것이었다. 절대후각(絶對嗅覺), 굳이 표현을 하자면 그랬다. 요사이 시청률 50% 대를 기록한다는 모 드라마 여 주인공이 절대미각(絶對味覺)이라는 말은 들었어도, 이건 참, 절대후각이라니..... 그리고 내 기억으론 그 여 주인공에게 절대미각은 천부적인 재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 있어 이러한 현상은 재능이기는커녕, 가뜩이나 회의적(懷疑的)인 내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어갔다.
나도 몰랐던 내 주위의 냄새들, 그것은 때론 하수구 냄새 같기도 했고, 언젠가 우리 집 다락에 죽어 썩어 있던 쥐새끼에게서 나는 냄새 같기도 했다. 밥을 먹을 때도, 길을 걸을 때도, 사무실에 앉아 있을 때도, 심지어 잠드는 그 순간까지 그러한 냄새들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오늘도 나는 먼지가 뿌연 소나타를 몰고 출근을 한다. 사무실로 들어가니 익숙한 얼굴들이 형식적인 인사를 건넨다. 형식에 형식으로 답한 내가 자리에 앉고, 쳇바퀴를 돌리기 위해 책상 위에 쌓여진 결재 서류를 펼친다. 과장, 부장, 이사, 사장. 결재 난의 순서는 그러했다. 내가 소원대로 부장이 된다 하더라도 최종 결정자가 될 수는 없다는 현실을 입증(立證)하는 것이었다. 난 이다지도 소박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을........
"부장님 나오셨어요?"
"안녕하세요, 부장님. 오늘 근사하신대요?"
우리 사무실의 가장 활기 찬 시간이었다. 부장의 출근. 그는 항상 멋진 차림으로, 당당한 걸음으로 내 앞을 가로질러 가장 중앙에 마련된 고급스러운 책상에 앉는다. 그리고 한껏 여유롭게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둘러본다.
최상식. 이제는 최 부장이 되어버린 내 오랜 벗. 같은 나이에 대학을 입학하고, 같은 나이에 군대를 제대하고, 또 같은 나이에 회사에 입사한 내 동료. 우리의 평행한 걸음에서 내가 뒤 처지기 시작한 것은 3년 전, 그가 부장으로 진급하면서부터였다. 다시 말해 난 지난 3년 간 진급 시험에서 떨어지면서 홀로 제자리걸음을 해대고 있는 것이었다.
"..... 장님!! 신 과장님!!"
어느새 내 책상 앞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정 대리가 서 있었다. 그는 입사 일년만에 그 능력을 인정받아 대리 자리에 앉은 엘리트 신세대였다.
"으, 응?"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후후... 참, 이번 달 경비 내역섭니다. 결재 해주세요."
"어, 어.... 그러지."
나는 마치 수업 시간에 딴 짓 하다 게슈타포에게 걸린 학생 마냥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몰랐다. 얼굴 마저 후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요즘 건강이 안 좋으신 거 아닌가요? 일도 좋지만 좀 쉬엄쉬엄 하세요. 그러다 정말 건강 잃으실까 걱정입니다."
내가 걱정스러워 죽겠다는 듯한 녀석의 과장된 표정. 하지만 난 저 말의 의미를 알고 있다. 무능력한 퇴물 주제에 집에서 쉬지 뭐 하러 출근은 하냐는, 그 속내를 말이다.
"안 좋기는 무슨!! 난 아직 생생해!!"
그렇게 정색하며 버럭 소리 지르는 날 보며 녀석은 무안한 듯 머리를 긁적여 댔다. 난 아직 너 같이 새파란 것들한테 밀려날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구!!! 그런 생각이 들자 볼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무슨 경비를 이렇게나 많이 쓰는 건가? 자기 돈 아니라고 이렇게 무절제하게 쓰다니. 하여간 요즘 젊은 사람들은... 쯧..."
모르면 잠자코 있으란 말투였다. 무능력한 주제에 일일이 따져 대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 그건가? 여전히 빙긋거리는 그에게서 상쾌한 향수 냄새가 났다. 내 코는 그 냄새를 맡고야 말았다. 저것은 분명 여자를 꼬시기 위한 녀석의 페로몬 냄새다!!! 순간 기분이 확 상해버린 나는 결재 난에 아무렇게나 휙 휘 갈려 사인하고는 서류를 책상 위에 던져 버렸다. 내 행동에 당황한 주제에 끝까지 내색하지 않는 저 뻔뻔함이란.
"참, 부장님."
서류를 집어 든 녀석은 이번엔 상식에게로 다가갔다. 그를 바라보는 녀석의 시선은 조금 전과 판이하게 틀리다. 무언가 존경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다음 번 필드에 나가실 때도 꼭, 저 끼워 주셔야 합니다. 부장님 드라이버 샷은 정말 예술이었다구요."
"하하하. 그랬는가? 그럼 이번 주말에도 같이 가지."
"정말이시죠?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상식과 녀석은 뭐가 그렇게도 즐거운지 계속 웃어댔다. 저 녀석, 입사 초기엔 내 비위를 맞추느라 여념이 없었던 놈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자신이 서야 할 줄이 내가 아니라 상식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모양이다.
골프라... 내겐 딴 세상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건 있는 놈들이 나 돈 많소, 하며 뻐기는 사치 스포츠라는 것이다. 그랬는데, 저 어린 녀석이, 겨우 대리 딱지를 단 저 녀석이 그걸 즐긴다 생각하니 또 가슴에서 욱하는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동시에 정신을 마비시킬 것 같은 기분 나쁜 냄새가 난다. 난 눈을 질끈 감으며 깊은숨을 몰아 셨다. 처음엔 코부터 막았던 나였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코를 막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근본적으로 썩은 이 냄새는 아무리 코를 막아도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2. 진급 시험, 10일 전
올해 진급 시험이 10일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붙어야 한다. 그래서 나를 무시하는 사무실 직원들과 언제나 내 앞에서 당당한 상식이 녀석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어야 한다.
오늘도 나는 여전히 퇴근과 동시에 집 앞 독서실로 직행했다. 그 곳 특유의 매캐한 곰팡이 냄새가 이제는 익숙해지기까지 한다.
"오셨수?"
주인 영감쟁이, 오늘도 변함 없이 한심스럽다는 눈빛으로 내 아래위를 훑어본다. 이 나이에 독서실을 들락거리는 내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난 그의 눈빛에 울컥하는 마음을 겨우겨우 추스르며 입을 열었다.
"대체 열람실 청소는 하는 거요, 마는 거요? 구석구석에서 썩는 내가 진동을 한단 말이오. 책상 위는 또 어떻고. 더러운 걸레 냄새 때문에 도저히 집중이 안 된단 말이지!! 당최 사람들이 양심이 있는 건지 말이요. 이런 돼지우리 보다 못한 곳에다가 내 피 같은 돈을 얼마나 쏟아 부었는지 알기나 하시오? 쳇!!"
난 그렇게 쏟아 부어 버리고 그 영감이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몸을 돌려 열람실로 들어가 버렸다. 내 뒤에서 영감의 혀 차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미 불쾌해질 대로 불쾌해진 다음이기에 책을 펴도 그 내용이 머리 속에 들어올 리가 만무했다. 같은 문장에 볼펜 줄을 수십 번씩 그어대던 나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몸을 일으켜 휴게실로 향했다. 아무래도 카페인이 필요할 것 같았다.
휴게실 커피 자판기. 그것은 손을 대기가 꺼림칙할 정도로 더러웠다. 이미 내 코는 이 안의 썩은 냄새에 반응하고 있었다. 신경질적으로 동전 네 개를 밀어 넣은 나는 종이컵이 떨어지는 소리, 뜨거운 물이 채워지는 소리, 기계 돌아가는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곧 자판기가 조용해지고, 손가락 끝으로만 조심조심 컵을 끄집어냈다. 잔돈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저것까지 꺼내기에는 병균의 침투가 두려웠다. 병균이 내 손가락을 뚫고 들어와 내 혈관을 찢고, 내 허파에 구멍을 뚫고, 내 눈을 파먹을 것만 같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얼른 몸을 돌려 휴게실에 마련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조금 전부터 요상한 눈길로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저 아이. 짧게 줄인 교복 치마가 허벅지에 딱 달라붙어 있었고, 풀어헤친 블라우스 사이로 가슴 선이 드러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경악할 노릇은 저 어린 년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는 담배... 난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 왼쪽 눈가를 간지럽히는 시선에 나도 모르게 다시 고개를 돌렸고, 이번에는 그 아이, 아예 본격적으로 내게 눈빛을 보내기 시작한다. 담배를 입술 사이에 끼운 채 깊숙이 빨아들인 아이는 날 향해 의도적으로 연기를 뿜어낸다. 그리고 그 입술 사이로 보이는 붉은 혀 끝. 난 당혹함을 감추기 위해 뜨거운 커피를 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내게서 당혹함을 발견한 아이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나 아저씨 아는데. 여기 매일 오지? 그 나이에 무슨 공불 그렇게 해?"
허연 허벅지 사이로 내 오른쪽 다리를 끼워 넣은 아이는 손끝으로 내 얼굴을 쓸어 내리고 있었다.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한 나는 얼어붙은 채 침만 꼴깍꼴깍 삼켜댔다.
"아저씨. 나 용돈이 좀 필요하거든? 아저씨가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 어디 조용한 데로 갈까? 응?"
나는 그만 내 손에 쥐고 있던 커피 잔을 툭하고 떨어트리고 말았다. 커피 잔여물이 내 구두 위로 튀었다. 아이의 얼굴은 더 이상 어린 여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남자의 육체를 유린하는 요부, 남자의 이성을 갉아먹는 악마였다.
"왜 대답이 없어? 응?"
아이의 다리가 좀더 안으로 다가서고, 그 순간 나는 맡고야 말았다. 비릿한 피 냄새. 생선의 머리를 딸 때 풍겨 나오는 그 피 냄새를 말이다. 아이가 다가올수록, 아이의 교복 치마가 펄럭거릴수록 내 코는 미친 듯이 그 냄새를 좇고 있었고, 더 이상 참지 못한 나는 아이의 풀어헤쳐진 블라우스 안으로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다.
"꺄~~~악!!!"
아이는 재빨리 내게서 떨어졌고, 자신의 몸 안으로 흘러내리는 오물을 떨쳐버리기 위해 치마 속으로 밀어 넣은 블라우스를 끄집어내어 흔들어댔다.
"이거 완전 미친 새끼 아냐? 어디다가 게워 내고 지랄이야? 아, 씨팔. 재수가 없으려니까 별 거지같은 게 앵겨서는. 에이 퉷!!"
아이의 입에서 나온 끈적한 가래침이 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것에서 나는 니코틴 냄새에 나는 다시 한번 토악질을 해야만 했다.
그 날 밤, 집으로 돌아간 나는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내 딸아이의 방문을 세차게 열었다. 광분해 있는 내 표정에 놀란 딸아이, 하지만 나는 내 딸의 얼굴에 감춰진 또 다른 얼굴이 의심스러웠다. 독서실의 아이는 내 딸아이와 비슷한 연배였다. 내 딸도 음습한 어느 독서실에서, 혹은 다른 곳에서 그 아이와 비슷한 짓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 빠?"
난 딸아이를 밀쳐 버리고 미친 듯이 서랍이며 옷장이며 할 것 없이 뒤지기 시작했다.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나 역시도 몰랐다. 하지만 이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아빠!!!!!!!"
"........ 여보!!!!!!"
날 붙드는 아내와 딸의 손을 거칠게 뿌리쳐 버린 나는 고개를 돌려 벽에 붙어 있는 브로마이드고 뭐고 할 것 없이 몽땅 뜯어내 버렸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딸아이와 아내의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후였다. 둘은 더 이상 울 기운도 없는 지 간혹 쉰 소리만 뱉어내고 있었다.
".. 헉... 헉... 너.. 잘 들어라. 앞으로 학교 마치는 즉시 집으로 와!! 독서실도 안 돼!! 알겠어? 매일 체크할 테니까 딴 짓 할 생각 꿈에도 하지마!! 만약 어기면... 그땐... 정말 가만 안 둘 거다."
몸을 돌려 거친 걸음으로 방을 나서는 내 뒤로 딸아이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아빠 미쳤어? 그래?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왜!!!! 죽어버릴 거야. 그냥 죽어버릴 거야!!!!"
#4. 진급 시험, 5일 전
그동안 시험이다 뭐다 해서 신경이 날카로웠던 것 같다. 직원들에게 신경질적으로 대했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리고 최 부장, 상식이 녀석도 내 눈치를 살피느라 말 한마디라도 조심히 건넸다는 것을 안다. 사실, 생각해 보면 변한 건 없었다. 내 자격지심(自激之心) 불러일으킨 일종의 상실감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난 모처럼 큰 용기를 내어 퇴근 무렵 이런 제안을 했었다.
"오늘 다들 약속 없지? 오랜만에 단합회 겸해서 한번 뭉칠까? 술값은 내가 내지. 응? 어때?"
내가 생각해도 참 어색한 말주변이었다. 이런 얘기, 몇 년 만인지. 하지만 어색하든 뭐하든 간에 뱉고 나니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 그동안 너무 빡빡하게 살았다....
"이거 어쩌나? 나는 오늘 접대 술자리가 잡혀 있는데."
상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거절의 말들이 터져 나왔다.
"저도 오늘 동기 모임이 있어서 말이에요."
"전 오늘 엄마 생신이에요."
"요즘 한약을 먹고 있어서요. 당분간 술은 자제해야 하거든요."
"저는......"
어렵사리 꺼낸 말이 거절당했을 때의 기분이란. 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애써 숨기며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럼 관두자고. 사실 나도 학원에 가봐야 했어."
그 말만 남긴 채 나는 얼른 사무실을 빠져 나왔다. 늘 이런 식이다. 난 어느덧 무능력한 퇴물인 동시에 이지메의 대상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젠장, 젠장, 젠장!! 만약 이 제안을 상식이 했다면 저들은 과연 저 따위의 핑계를 댈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한 달 전에 등록한 영어 학원. 불행히도 딴 나라말인 영어는 진급 시험에서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직장인 반이라 해도 우리 클래스에서 나는 가장 나이가 많은 학생이었다. 이 나이에 영어를 배우러 다니는 내가 그들에겐 의아하기도 했겠지만 만학도(晩學徒)를 꿈꾸는 것도 아닌 나 역시 환장할 노릇인 건 매 한 가지였다. 난 왜 지금 이 시간에 이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는가? 반드시 배워야 한다는 의무감과 그 '왜'라는 물음에 답하지 못하는 무기력 사이에서 오는 괴리감(乖離感)이 날 딜레마에 빠지게 했다.
이 나이에 영어를 다시 공부한다는 것은 미지(未知)의 세계를 개척하는 것과 같았다. 나는 학력고사 세대이다. 영어라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학습이 아니라 수학 공식과 같은 암기력과의 싸움이었다. 그 시절의 영어 능력은 회화 수준의 경중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누가 더 많은 단어와 숙어를 외우고 있느냐 하는 기억력의 문제일 뿐이었다. 그런 내가, 단지 진급 시험을 위해 영어 책을 다시 펼쳐야만 했던 것이다. 180도 변해버린 영어 교육 환경 속에서 말이다.
"오우, 신!! 그렇게 입술을 붙이면 안 돼요. '에프'는 윗니로 아랫입술을 이렇게 살짝 깨물어 주면서, '-프으', '-프으', 따라해 보세요. '-프으'."
샐린가 샌딘가 하는 호주에서 온 여자, 날 '신'이라고 부르는 노랑머리의 저 여인이 우리 클래스의 강사이다. 그녀는 수업 시간마다 내 발음을 물고늘어지기 일쑤였다.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답게 발음한다는데 왜 그걸 무능력이라 치부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녀 역시 우리말은 서툴지 않는가. 저 딴 발음의 한국말이라니. 그래 놓곤 내 영어 발음을 비난한다? 그녀는 꽤나 뻔뻔한 사람인 것이다. 난 버터가 줄줄 흐르는 혀 꼬인 발음 따윈 질색인 사람이다. 진급 시험만 끝이 나면 이 딴 영어 따윈 쳐다도 안 볼 거다, 그 말이다.
여전히 '브브' 거리는 내가 한심했는지 그녀는 어느새 내 책상에 손을 짚은 채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그리고 잘 보라는 듯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키며 그 느끼한 '프으' 소리를 질러댔다.
냄새가 나기 시작한 건 그쯤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불쾌감을 넘어선 충격이었다. 언젠가 우리 집 냉장고 구석에서 썩어가던 마가린 냄새, 한 여름 버스 안에서 맡을 수 있는 지독한 암내, 그녀의 숨결이 내 속눈썹을 흩날리고, 그 악취는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신, 따라해요. '-프으', '-프으'........."
그녀의 노랑 내 나는 타액이 내 눈 속으로 들어갔다. 각막에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듣기 싫은 영어 소리, 끊임없이 내 코를 침범하는 저 악취,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1초라도 더 머뭇거리다간 내 온 몸에서 노란 기름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신?"
소 같은 눈을 껌벅이는 그녀를 힘껏 밀쳐 버렸다. 악취의 근원. 저 년이 문제였다. 육중한 몸집이 나 뒹굴어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나는 상기 된 표정으로 책상까지 쓰러트려 버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내 거친 걸음 뒤에서 그 보다 더 거친 꼬부랑 말이 들려왔다. 알아듣지는 못해도 저 말이 욕이란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온 나는 쓸쓸히 시내를 따라 걸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 다른 생각을 파생시켰다. 시험까지 5일 남았다. 이번에도 떨어지면 정말 회사와는 이것으로 그 인연을 정리해야 할 지도 모른다. 하긴 내 쪽에서 정리하지 않더라도 그럴싸한 명목으로 날 쳐낼지도 모를 일이다. '명예퇴직'이라는 미명 하에...
걸음이 점점 무거워진다.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은 인생의 낙오자, 딱 그 꼴이었다. 내게도 열정으로 가득 찬 젊은 시절이 있었다. 세상을 바꾸지는 못해도 적어도 내 회사에서만큼은 없어서는 안 될 인재가 될 자신, 있었다. 그것은 자신감이었고, 패기였고, 야망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꼴을 보라. 세월이 휩쓸고 간 이 초라한 남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유령 같은 내 발걸음은 계속되었다. 한 발 딛고, 쇼윈도를 돌아보고, 한 발 딛고, 다시 쇼윈도를 돌아보고. 다른 모습으로 비치길 바라는 내 염원(念願)이 담긴 행동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쇼윈도를 돌아보는 내 눈이 크게 떠졌다. 하지만 그것은 염원이 이루어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깔끔한 삼겹살 집, 삼삼오오 짝을 지어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 세상에 근심 따윈 없다는 모양으로 크게 웃는 사람들, 그리고 그 속에 끼어있는 내가 아는 얼굴들. 분명히 오늘 저녁에 이런 저런 사정이 있다며 내 제의를 거절한 이들이었다. 여기가 접대 술자리인가? 여기가 동기회 모임 자리란 말인가? 여기가 생일 파티 자리야? 여기가? 여기가??!!!
머리가 어지럽다. 저들 틈에 왜 나만 빠져 있는 것인가? 머리가 어지럽다. 저들은 왜 날 배척하는 거지? 머리가, 머리가 아파 온다. 새빨간 피를 머금은 살덩이가 불 판 위에 올려지고, 곧 지지직거리며 연기가 솟아오른다. 냄새가 난다. 살이 타는 냄새, 피비린내... 돼지가 비명을 지른다. 미처 떨어지지 않은 목을 달랑거리며 돼지가 울부짖는다.
나는 귀를 막은 채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그 곳에 더 있다간 나도 불 판 위에 올려진 저 돼지 신세가 될 것만 같았다.
#5. 진급 시험 당일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아침이었다. 평소와 같은 아침이지만 평소와는 전혀 틀린 아침이었다. 머리는 감지 않기로 했다. 미신을 믿는 건 아니었지만 오늘 같은 날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니까.
아침 식사, 아내는 명태 국을 끓였다. 딸아이는 학교에 가고 없었다. 그 날 이후, 나와는 눈도 맞추려 하지 않았다.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왜, 더 드시지 않구요?"
두 어 번 젓가락질을 하던 내가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아내가 말했다. 저 속 편한 여편네 같으니라고. 오늘이 지 남편한테는 인생이 왔다 갔다 하는 날인 것을...
"됐어. 갔다 올게."
현관을 나서는 날 보면서 아내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오늘이 시험 날인 것을 잊은 걸까? 신발을 신은 채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나에게 아내는 새삼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왜요?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며 시험을 치는데,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자고 뜬구름을 향해 팔을 허우적거렸냔 말이다. 괘씸한 여편네. 그래, 내 인생은 그렇다. 언제나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죽도록 버거운 것이다.
시험을 치는 내내 머리 속은 하염없는 생각들로 빽빽이 들어 차 있었다. 볼펜을 끄적이고는 있지만 합격을 위한 답안인지 어쩐 지는 이미 관심 밖의 일이었다. 인생은 허무한 것이다. 시험에 통과해 부장이 된 들, 과연 내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런 불명확한 결과를 위해 동료를 등지고, 가족을 외면하고, 외톨이가 되었던 것일까? 아, 모르겠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6. 사건 당일
내일이면 진급 시험에 대한 결과가 나온다. 내일 아침이면 회사 로비에 합격자 명단이 떡 하니 붙어있겠지. 그것을 보며 기뻐할 사람도 있을 것이고, 3년 동안 내가 그랬듯 세상 다 산 기분을 느끼며 비통해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무렴 어떠랴. 이제 내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을...
오늘도 여전히 직원들은 날 외면한다. 군중(群衆) 속의 소외감, 그것이 얼마나 지독한 경험인 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왜 나는 저들에게 먼지와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일까? 축 쳐진 몸으로 퇴근하는 내 등뒤에서 그들은 무언가를 수군거린다. 보지는 못했지만 손가락질까지 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난 어느덧 철저하게 혼자가 되고 있었다.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을 한다. 내 후각이 비정상적으로 예민해 진 것이 아니라 어쩌면 세상은 정말 썩어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이었다. 40해를 훌쩍 넘어 살아오도록 내 삶은 점점 비참해져만 갔다. 나아질 게 없는 삶이라면 한 해 한 해 살아 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 사는 건 그런 것이라오. 세상이 던져 놓은 거짓말들에 속으며 그 속에 존재하는 진실들을 보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라오. 아무렴 어떻소? 그래도 물은 아래로 흐르는 것을. 그래도 우리는 행복한 것을. 인생은 정말 아름다운 것이라오. 인생, 오, 그 향기 나는 삶이여.......]
한 레코드 가게 앞에서 난, 발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나이가 지긋한 남자의 노래 소리. 인생을 노래하는 그의 낮은 음성.
당신은 인생을 아시오? 인생을 다 알아 그런 노래를 부르는 것이란 말이오? 당신이 틀렸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단어들 중 가장 언어도단(言語道斷)인 것이 그 '그래도'라는 말이오. 힘들지만 그래도 행복하다, 슬프지만 그래도 행복하다, 버러지 같이 살지만 그래도, 그래도 인생은 아름답다.... 다 쓸데없는 말이오. 제대로 된 말이란 이런 것이지. 부자다, 그래서 행복하다. 명예를 가졌다, 그래서 행복하다. 그래서, 그래서 인생이 아름답다.... 제대로 알기나 하고 말하란 말이오!!!
어느덧 내 다리는 날 한강으로 데리고 왔다. 그 잔잔한 수면을 지켜보자니 눈물이 울컥하고 솟을 것만 같았다. 내 인생이 언제부터 이렇게 슬픈 것이 되어 버렸단 말인가? 앞만 보고 열심히 달린 것의 보상이 겨우 이런 모습이란 말인가? 강이 운다. 내 슬픔을 알아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이 넓은 강이라면 초라한 내 몸을 따스히 안아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죽자......
구두를 벗었다. 한켠으로 가지런히 놓여진 구두를 보며 나도 몰래 웃음이 터졌다. 갑자기 물에 뛰어드는 사람들은 왜 신발을 벗어 놓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세상에 다녀갔다는 흔적을 이렇게 라도 남기려는 것일까? 아니다. 그들이 신발을 벗는 이유는, 더 이상 그것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발이 없으니까 말이다. 후후후.....
그러고 보니 '그래도'라는 단어가 적절하게 쓰이는 단 하나의 상황이 있었다. 인간 신만호가 죽는다. '그래도' 세상은 잘도 돌아간다........
천천히 다리를 움직여 난간으로 다가섰다. 조금 전부터 눈은 감고 있었다. 이제 한 발자국만 더 내딛으면 그것으로 내 인생은 끝이 난다. 마지막은 내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그리고 내가 발을 떼려던 그 순간, 세상을 버릴 수 있는 그 찰나에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내 코는 그 바람의 냄새를 맡았다. 쌉소롬한 물 냄새, 그 냄새는 추억의 향기였다.
그 추억 속엔 젊은 신만호와 그의 젊은 아내 지영애가 있었다. 그 날도 이런 강가 어느 곳이었다. 대학 시절, 과 남학생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영애, 하지만 그 날 강가에서 그녀의 입술을 가졌던 이는 만호였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설레어 오던 첫 키스. 젊은 만호는 이 여자만 가질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 눈에서 어느덧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영애, 내 사랑하는 아내, 지영애. 잠시 잊고 있었다. 그녀가 내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던가 하는 것을. 나는 그 곱디고운 여자를 데리고 와 이제껏 고생만 시키고, 이렇게 무책임하게 홀로 떠나려 했던 것이다. 이건 아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영애야, 내가 간다. 널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 신만호가 간다.
숨이 턱까지 차도록 뛰고, 또 뛰었다. 내가 맨발이라는 사실도 대문을 열면서 알았다. 내 발이 지나간 자리마다 붉은 핏자국이 찍혀졌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여보!!!"
현관문을 벌컥 열며 그렇게 소리쳤고, 거실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던 아내는 나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허..억.... 여, 여보....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그게 말이지...."
짧은 숨을 헐떡이던 내가 아내 가까이로 다가섰고, 나는 순간 아내의 눈에서 당혹감을 읽었다.
"왜 그렇게 놀라는 거지?"
"그, 그야, 당신이 갑자기 들어오니까.... 어, 어쨌든 오셨으면 어서 씻으세요. 저녁 드셔야죠."
그러면서 부엌으로 몸을 돌리던 아내가 미심쩍다. 한번도 본 적 없는 흐트러진 모습. 무언가 숨기는 게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잠깐!!"
내 옆을 지나가는 아내의 팔을 홱 잡아 내 앞으로 세웠다.
"여, 여보......"
"뭐야? 왜 이렇게......"
킁킁... 킁... 이 냄새는...... 그랬다. 사무실 정 대리 녀석에게서 나던 그 향수 냄새. 그런데!! 이 냄새가 왜 영애에게서 나는 거지? 그리고 지금 내 손안에서 그녀는 왜 이렇게 떨고 있는 거야? 순식간에 내 감정은 손 쓸 틈도 없이 격해져 왔다.
"솔직하게 말해봐. 정 대리.... 그 새끼 왔었지?"
"다, 당신이 어떻게 그걸.......?"
"더러운 년!!! 그 새끼랑 내 집에서 무슨 짓을 한 거야? 어?"
"여보, 잠시만 내 얘길.. 아앗!!!"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일이었다. 어느덧 내 손에는 스탠드가 쥐어져 있었고, 내가 정신이 들었을 땐, 이미 내 온 몸은 피를 뒤집어 쓴 후였다. 몇 번을 내리 쳤는 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바닥에 널 부러진 아내의 왼쪽 머리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뭉개져 있었다. 피 냄새가 났다. 독서실의 아이에게서 맡은 끈적한 피비린내가 났다. 노랑머리 강사 입에서 난 누릿한 악취가 났다. 그리고 내 코는 강의 냄새를 잊어버렸다.........
그리고,
뻥!! 뻐, 뻥!!!
갑작스러운 폭죽 소리, 동시에 안방 문이 열리며 우수수 쏟아져 나오는 낯익은 이들.
"승진 축하드려........ 어헉!!!!"
먼저 부장이 된 상식이, 그리고 정 대리, 사무실의 미스 서, 미스 최, 다들,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지? 내 손에 들려 있던 스탠드가 스르륵 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미스 서의 새빨간 입술이 쩍 하고 벌어지며,
"꺄~~~~~ 악!!!!!!"
다들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내게,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구!!!
▶▶ REPLAY
진급 시험 30일 전,
어깨가 축 쳐진 만호가 사무실을 나가자 자리에서 일어난 정 대리가 최 부장에게로 다가간다.
"그 회원권 말씀인대요."
"알아봤나?"
"네. 저희 친척 중 한 분이 컨트리클럽 한 군데를 관리하고 계시거든요, 시즌이 지났긴 했지만 구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거 잘 됐구만."
"한 달 정도면 발급 가능합니다."
"그래? 그럼 봄 시즌부턴 신 과장하고 필드에 나갈 수 있겠군. 잘 됐어. 내가 그동안 사는 게 바빠서 친구 녀석한테 소홀했던 게 늘 신경이 쓰였는데 말이야. 이제야 큰 소리 좀 치겠는 걸? 하하하..."
"네. 정말 잘 됐습니다. 안 그래도 요즘 진급 시험 준비하시느라 많이 힘들어 보이시던데 이번 일을 계기로 신 과장님의 그 푸근한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겠군요. 정말 잘 됐어요."
진급 시험 10일 전,
퇴근 무렵 직원 전용 주차장에는 뿌듯한 표정으로 서 있는 정 대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고무장갑을 끼고, 새카매진 걸레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흐뭇한 시선을 따라, 어느새 깨끗해진 만호의 소나타 승용차가 서 있었다.
진급 시험 5일 전,
손님들로 북적이는 삼겹살 집, 만호의 동료들은 조금 전부터 심각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무튼 그러니까 신 과장이 시험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게끔 하자구. 어지간한 결재 서류는 내게로 바로 가지고 오고 말이야. 일 적인 부분으로 신경 쓰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들 해 줘. 이제 며칠 안 남았어. 알았지?"
"알겠습니다.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까 부장님도 너무 걱정 마십시오."
"그래도 요즘 신 과장님, 뵙기 안 돼 보여요. 살도 많이 빠지시구."
"맞아요. 오늘도 술 먹자는 말씀 거절하면서 어찌나 마음이 아팠던지....."
직원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퇴근 무렵의 일을 생각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오늘 자신들의 행동은 너무도 냉정했다.
"자, 자. 며칠 안 남았잖아. 시험만 끝나면 몇 배로 갚아주자구. 자, 마시지."
술잔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리며 그들의 술자리는 물어 익어갔다.
사건 당일 아침, 만호의 집,
영애는 어느새 가방을 매고 부엌으로 들어오는 자신의 딸을 돌아봤다.
"벌써 가니?"
"응. 학교 가기 전에 성당에 들렸다 가려구."
영애의 입가로 흐뭇한 미소가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딸을 따뜻하게 안아주며 등을 토닥거렸다.
"착한 우리 딸. 아빠 시험 치신다고 성당 가는 거야?"
"응... 아빠한테 그렇게 소리친 게 미안하기도 하구. 생각해 보면 아빠 입장에선 그러실 수도 있지 뭐. 분명 밖에서 여중생의 사고 소식 같은 걸 듣고 오셨을 거야. 그치?"
"어유 이쁜 것. 누굴 닮아 이렇게 기특해?"
"피.... 나도 이제 다 컸다 뭐. 그런 것쯤 다 안다구."
이제 영애의 품에서 벗어난 아이는 도시락을 챙기기 전 자신의 엄마를 돌아보며 짐짓 단호한 음성으로 말한다.
"엄마. 아빠한테 시험 잘 치라느니 떨지 말라느니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아셨죠?"
"왜?"
"그게 더 부담스럽단 말이야. 나도 시험치는 날 엄마가 걱정해주면 안 하던 긴장도 되고 그렇거든."
"그랬니?"
아이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다시 한번 다짐을 하듯 얘기했다.
"그러니까 평소와 마찬가지로 대하세요. 아빠가 괜히 부담 느끼시지 않게. 응?"
영애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행복하게 웃었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사건 당일, 만호의 사무실
상기 된 표정으로 정 대리가 뛰어 들어왔다. 모두들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는 말하기도 벅찬지 몇 번씩이나 크게 웃고는 입을 열었다.
"됐어요. 과장님 진급 하셨다구요!!!"
"발표가 내일인데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내가 누구야? 이 회사 마당발 정 대발 아냐. 후훗. 인사과에 친구 녀석한테 정보를 슬쩍 빼 왔지."
"어머, 그게 정말이에요? 정말 잘됐네요."
들뜬 사무실 분위기, 모두들 이 소식에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사건 당일 1시간 전,
만호의 집을 방문한 그들은 눈물을 머금은 채 문을 열어주는 영애를 보며 또 한번 가슴이 뭉클해져왔다.
"제수씨, 그동안 마음 고생 많으셨죠? 이제는 편히 지내실 일만 남았네요. 정말 고생 많았어요."
"아니에요. 그래도 최 부장님이 곁에서 계셔 주니까 한결 편했는 걸요. 정말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요..."
눈물을 찍어내는 영애를 보며 모두들 이 날의 행복을 가슴 깊이 느끼고 있었다. 그 침묵의 감동을 멈춘 것은 정 대리였다.
"자, 그럼 빨리 준비하자구요. 신 과장님, 아니 신 부장님을 위한 서프라이징 파티!!!"
"그래요. 빨리 서둘러요. 곧 부장님이 오실 건데. 자, 자 빨리 들어와요."
모두들 부산하게 파티 준비를 시작했고, 영애는 계속 눈물을 훔치기 바빴다.
"정말, 모두들 고맙습니다. 그이를 위해서 이렇게 신경을 써 주시다니요."
"그런 소리 마세요, 사모님. 부장님은 저에겐 스승 같으신 분이세요. 입사 초기에 부장님이 안 계셨더라면 그렇게 빨리 적응하지 못했을 겁니다."
정 대리는 특유의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 참. 이거요."
그가 내민 것은 푸른 색 병에 든 향수였다.
"사모님 선물이에요. 제가 쓰는 향수랑 똑 같은 건데 향이 은은해서 좋으실 겁니다."
"맞아요, 사모님. 살짝만 뿌리시면 아마 부장님께서도 좋아하실 거에요."
그리고, 사건 당일 같은 시각.
만호를 깜짝 놀라게 해 주기 위해 안방에 숨어 있던 그들이 폭죽을 터트리며 거실로 나오고, 한없이 행복한 오늘을 축하하던 그들의 그늘 하나 없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꺄~~~~~ 악!!!!!!"
단말마와 함께 미스 서가 바닥으로 꼬꾸라져 버리고, 이 믿을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어느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는가? 몇 분전까지 행복하게 웃고 있던 영애가 지금 저 모습으로, 머리통이 박살이 난 채 피를 낭자하게 흘리며 바닥에 구겨져 있는 모습을, 그리고 온 몸을 피로 물들인 채 넋이 나간 눈동자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저 불쌍한 만호의 모습을...
사는 건 그런 것이라오. 세상이 던져 놓은 거짓말들에 속으며 그 속에 존재하는 진실들을 보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라오. 아무렴 어떻소? 그래도 물은 아래로 흐르는 것을. 그래도 우리는 행복한 것을. 인생은 정말 아름다운 것이라오. 인생, 오, 그 향기 나는 삶이여.......
첫댓글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빈님의 글이군요. 사빈님 글 읽을때마다 항상 -웃! 저 엄청난 필체!- 하면서 감동한답니다 T^T 앞으로도 좋은 글들 많이 부탁드리구요. 정말 안쓰럽네요. 저 신과장 ㅡㅡ^
나이는 어리지만 왠지 공감이 가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맘이 너무 아파요..너무 재미나게 잘 읽었네요...^^*
아 진짜 전율이 흐르네요. 전율이...
늘 잘보고 있어요... 건필하세요^^
망가져가는듯한 인생을 보여주다가...충격...제대로 앉아있지도 못하겠다...건필하세요~
순간 찌릿~~했다는 ㅠ-ㅠ
아-_-불쌍하다.
슬프군요.
그렇게 된거구나... 너무 안타깝다... 에휴.. -_-
우우우와~~감탄,감동,감격...준비했다던 글이 이거?? 너무 잘 봤습니다..다 읽고나서도 여운이 지워지지가 않는군요. 딱딱한 문자에 생명을 불어 넣는 빈양의 힘에 감복할 따름입니다. 다음작품도 벌써 기대가 되네요^^
이상하군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걸까요..엄청난 반전인데도 대단하다 놀랍다 보다는 자꾸 쓸쓸하다 쓸쓸하다 우리네 인생이 정말로 쓸쓸하구나 하는 생각만 자꾸 드니까 말이지요...
처음엔 아내와 정 대리가 바람이 난 줄만 알았는데..엄청난 반전이네요'-'* 너무 재밌었어요> < 지푸라기라도 잡고 심정이니까 →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니까
멋지네요....반전..........
가슴아프면서도...반전이...짱이네요.
너무 슬픈 공포네요. 마치 블랙코미디 한편을 보고 있는 것도 같아요. 참 멋지게 표현 하셨네요.[세상이 던져 놓은 거짓말들에 속으며 그 속에 존재하는 진실들을 보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라오]라니...
아... 정말 안타깝고 그렇네요..........;;;
예술입니다.감동입니다.잘읽었어요.
오타 수정했습니다. 즐겁게 읽어 주신 분들 감사드립니다. 리플에 큰 힘을 얻습니다. ^^ 언제나 과분한 말씀을 남겨주시는 분들께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다음 글에 대한 행복한 부담을 안으며 줄입니다. 월요일입니다. 기운 내세요. ^^
REPLAY 전까지만 봐도 굉장한 글인... 간만에 공소방에서 멋진글 읽고갑니다 +_+ 건필하세요!
외인구단을 읽고 난 후 촉촉히 젖어있던 눈시울이 채 마르기도 전에 다시한번 감동을 주시는 군요^^ 너무 잘 읽었습니다~
우웃.. 사람의 상상이란.. 사람은 비관적인 생각에 계속 빠지면 그 생각을 현실로 느낀다는뎅.. 신과장이란분.. 넘 안됐네요..
ㅠㅠ 정말 너무 안됐네염..안타가워염...
하아.. 정말 마음이 아프네요. 사빈님 늘 기쁜 맘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건필하세요
우와아~ 반전 멋있어여+_+
참을 인자 석자면 살인을 막는다니... 저번에 트러블에.. 수학 경시 대회 잡쳐서 자살도 생각해 봤는데... 역시 관두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즐감했습니다.
진ㅉ ㅏ 슬프당.......그래서 사람이란건....마음을 통하면서 살아야 하나봐요~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따뜻한 마음이 통하는 세상이 왔으면.....건필~~
공포라기보단 멜로틱,,ㅠ_ㅠ 너무 슬퍼요,,혹시 울 아빠도 저런 생각을?!
정말......넘 슬프고 가슴아파요,,,,정말 가슴아프다는 말밖에는...역시 사빈님이에요...ㅠ.ㅠ안타까운 이 마음 ...
사빈님.너무 잘 읽었습니다.마지막에 넘 슬프고 맘이 아파서 눈물이 찔끔했어요...ㅠㅠ
忍 忍 忍.......
다시 시간을 되돌려서 행복한 결말로 해주세요...ㅜ_ㅜ 맘이 아프네요...
얼마나 울었던지.....가슴이 너무 아파요ㅡ.ㅜ
후우.. 인생의 냄새.. 그거 참 지독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