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속에서 핀 꽃이 아름답고 고귀하다.
“그림은 너무 어렵다......항상 잘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옛날의 거장들이 몇 에이커나 되는 작품들을
어떻게 그렸는지 신만이 아실 것이다.....
나의 경우는, 스스로를 닥달하여 초죽음이 될 때까지
힘을 써서 겨우 캔버스 50센티미터를 그린다.....
하지만 상관없다.....그것이 인생이니까?.....
나는 그리다가 죽고 싶다.“
위대한 프랑스 화가 폴 세잔과 오랜 세월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던
요하임 가스께가 폴 세잔의 말을 회고한 것이다.
예술도, 정치도, 학문이나 수행修行도 마찬가지다.
인생 전체를 걸고 매진했던 꿈을 이루고 못 이루고는
하늘의 뜻이다. 자신은 그저 살아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 꿈을 향해 매진하는 그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런데, 요즘은 인생에 전체를 걸지 않고
요행에 기대거나 돈과 권력에 기대어
그림을 자기가 그리지 않은 남의 그림을 가지고 이름난 화가가 되고,
대필로 논문을 써서 교수가 되고 박사가 되는 것은 이미 오래 된 관행이다.
그 것 뿐인가?
남의 글로 산문작가나 시인이 되는 것은 너무도 흔하고,
더러는 남의 글을 가지고 소설가로 등단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과정을 중시하지 않고 결과만 중시하는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다.
대다수의 정치가들은 오로지 대통령 병에만 걸려 있어서
자기의 잘못은 모르고, 남의 잘못만 꼬집고 있으며,
일부 종교인들은 수행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돈에만 한 눈을 팔고 있다.
하물며 돈을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하는 경제인들은 말해 무엇하랴.
이런 세상의 진정한 희망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오랫동안 <사람과 산>이라는 잡지에 우리나라의 ‘산’을 연재했었다.
그때 느낀 것은 힘겹게 한 발 한 발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글은 다 쓰여 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상에 올라 아주 쉽게 내려 올 때는 글이 한 줄도 안 쓰여 졌던 것이다.
‘인내는 쓰다. 그 열매는 달다.’는 옛말처럼
고통 속에서 글이 샘물처럼 저절로 넘쳐나는 것이다.
길다 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의 노정 역시 과정이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수백 개의 산을 오르면서 배웠다.
“인간이 얼마나 깊이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인간의 위계질서를 결정한다.”
독일의 철학자인 니체의 말이다.
고통 속에서 핀 꽃, 천둥과 번개와 비와 바람,
거센 눈보라를 맞고 또 맞은 인고의 세월 뒤에 피어난 그 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지고지순한 꽃이 아닐까?
그 고통을 감내하지 않고 그저 어영구영 그 영광을 얻으려는 것은
자연의 순리와 인간의 위대성에 역행하는 것이리라.
‘자력갱생自力更生’ 내가 좋아하는 말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죽을힘을 다해 이룩한 것,
그것이 작고 소소한 것이든, 크고 화려한 것이든 가장 사랑스러운 것이며,
진정한 행복이 아니겠는가?
요행을 바라지 말라.
오늘 내가 나에게 건네는 말이다.
2016년 10월 21일(금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