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6일 화요일.여행 18일 차.
지난 밤, 이번 여정 중에 제일 잘 잤다. 눈을 뜨니 여명의 시간 다섯시 반, 창 밖은 이제 막 밝기 시작했다. 누운 채로 기지게를 켜본다. 여태껏 대부분은 숙면을 취했지만 그래도 뒤척이는 시간이 많았었다. 강도(强度)가 만만치 않은 이번 여정에 체력 소모가 많아 나도 모르게 긴장했던 결과이리라. 어느덧 여행의 막바지, 이제는 도시관광 정도의 일정만 남았기에 마음이 놓였던지 골아 떨어져 세상 모르게 잤다. 온 몸이 개운하다.
확실히 나는 체질이 도시여행 쪽은 아닌가보다. 작년 여름 한달 여 동안 중앙아시아를 돌아다닐 때에도 전반기 카자흐스탄과 키르키즈스탄의 대 자연을 찾아다니던 이십여일 동안에는 비록 몸은 고달펐으나 마음은 신나는 여행이었다. 그러나 이후 우즈베키스탄에서의 열흘 일정이 거의 역사 탐방과 도시 관광을 위주로하여 소일하다 보니 마치 청소년시절 수학여행을 나온 느낌에 도리어 힘들었다. 이번에도 비슷한 양상이다. 몸 편한 것이 도리어 편안하지 못하다. 더군다나 우리와는 역사적 연관성이 많지 않은 나라이기에 관심도가 낮아서 그랬으리라.
어제 저녁은 탄두리 화덕에서 구워 낸 양갈비구이를 체면 불구하고 배불리 먹었다. 기름이 쫙 빠진 상태인데도 퍽퍽하지 않았다. 이미 복만이와 친숙한 갈빗집 주인은 "우리 가게는 반드시 당일 갓 잡은 양만 쓴다."며 자부심을 내보인다. 술안주로도 최고인 양갈비를 앞에 두고 이번 여행의 금주 약속을 지켜내느라 힘들었다. 이 나라는 술에 엄격한 나라이지만 늘 편법은 있는 법. '훈자 워터'로 위장된 현지의 뽕술을 친분이 있는 업소에서 눈감아주는 식이다. 만일에 재수 없는 경우 신고라도 당하여 종교경찰이 개입하는 상황이 되면 아주 골치 아픈 상황이 된단다. 술을 구입하는데도 라이쎈스가 필요한 나라다.
어떻든 술 없이 콜라와 함께 저녁을 잘 먹고서 호텔에 오니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인근에 중국인들이 설계와 건설을 맡았다는 주상복합 건물이 있다해서 반바지 차림으로 슬슬 나섰다. 지금 기온 37도, 체온을 웃도는 날씨다. 게다가 습도까지 높아서 무덥기까지하다. 이제까지 다녔던 건조지대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그다지 밝지 못한 가로등을 따라서 걷기를 십여 분, 예의 그 건물이 나타났다. 하부 몇개 층은 백화점이고 상부는 주거용 아파트로인데 여기 이슬람아마드에서 최고층 빌딩이란다. 최고 높이라야 십 몇층에 불과한데 여기가 한 나라의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고층빌딩이 거의 없어 도시 전체가 몹시 편안한 느낌을 준다.
기관총을 든 경비원이 모든 내방객을 검문한다. 몸 수색까지는 하지 않아도 휴대한 가방 등은 레이저 검색대를 통과해야한다. 이게 일상인 나라이다보니 이방인에게만 험한 상황으로 보일 뿐 이들에게는 정말 별 일이 못된다. 대한민국은 외국인들에게 북한과의 관계 때문에 몹시 위험한 나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막상 우리는 아무 일 없듯이 편안한 일상을 살아내는 것 처럼. 그러고 보니 아까 양갈비집 입구에서 기관총을 들고서 경비 근무 중이던 중년의 사내도 해맑은 미소로 우리와 어울렸다. 어깨동무로 촬영에 응하며 하는 말이 '이 총은 사실은 빈총'이란다.
더운 나라에서 백화점 안은 피서지나 마찬가지. 북적이는 틈에 끼어 이곳저곳 들여다 본다. 지갑 안에 쓰이지 못한 루피가 좀 남았길래 처분해볼까 하고 신발 가게에 들렀다. 쎈달 등산화가 하나 필요하다. 괜찮은 디자인을 골라 발에 끼워보니 좀 불편하다. 여기의 표준 발모양이 좁고 길어서 넙적한 족형을 가진 내게는 맞지 않았다. 일단 포기. 급 피곤이 몰려온다. 역시 백화점 체질이 아니다.
아까 백화점을 찾아 올 때 큰 길을 따라서 특정 지형지물을 짚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돌아가는 길이 조심스럽다. 현제 IMF 관리 체제 중인 이 나라는 전기 사정이 좋지 못하다. 그것과 꼭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씩 건너 뛰어 밝혀진 가로등이 희미하여 오는 길에 점찍어둔 사물들이 쉽게 눈에 띠지 못한다. 지도를 열어보니 지척의 거리이긴 해도 네비상 길 표시가 좀 이상하여 헷갈린다. 되짚어 가는 길이 생각보다 멀다. 그래도 길 눈 밝은 일행이 있어 골목 안쪽 길을 바로 찾아내었다. 그리고서 들어와 샤워 후 잠깐 침대에 누웠나 싶었는데 내쳐 일곱시간을 쉬임 없이 잔 것이다. 역시 잠은 최고의 보약. 그간 누적되었던 피로감이 일거에 날아갔다.
오늘은 좀 쉬어가는 날이다. 원래는 이 곳의 랜드마크인 '파이잘 모스크'를 찾아가려 했지만 상기(上記)한 '아슈라' 때문에 인산인해가 될 것이고 그로 인해 위험하기도 하단다. 그래서 그 곳은 내일로 미루고 인근의 '다마네코 공원'에 올라가 시내의 전모를 가늠해보기로 했다. 서울로 치면 남산 격인 이 곳에서는 '이슬람 아마드' 시내를 한눈에 내다 볼 수 있다. 호텔서 불과 이십분 거리.
다마네코에 오르니 멀리 시내 전모는 물론 바로 오른편 아래로 파이잘 모스크가 손에 잡힐 듯 보인다. 한 눈에도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내일을 기약한다.
이번 여행의 현지 가이드인 복만이가 자기 집으로 우리 일행 8명을 초대했다. 좀 처럼 없는 일이란다. 그의 성의가 고맙다. 그의 집은 수도 이슬람아마드에서는 조금 떨어진, 서울에 비유하자면 '분당'같은 신도시인데 이 곳에서 상당한 부촌에 속한단다. 공원에서 한시간 가까이 달려 그의 집을 찾아가니 마을 초입에서 부터 경비원이 통제를 하는 고급 주택 단지이다. 때 마침 염색약을 잔뜩 바른 채 편안한 차림으로 마중 나온 복만이는 어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시원하게 빗어 넘긴 헤어 스타일로 한결 시원해진 이마가 훨씬 멋져보인다.
집 안에 들어가니 이십 여 평의 넓이에 방과 거실이 나뉜 간단한 구조다. 하지만 천장이 현저히 높아 아주 쾌적하다. 나이 오십에 아직도 혼자인 그가 일 때문에 한 달 가까이 비워둔 채 였다는데 아주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다. 이번 여행 내내 보여 주었던 그의 깔끔한 진행과 일 처리는 평소 생활의 발로였음을 알겠다. 접대용으로 내온 시원한 보드카와 맥주. 금주가 규율인 나라에서 몰래 술잔을 나누는 맛도 아슬아슬하니 괜찮겠다. 물론 나는 금주의 결심을 어기지 않았다. 콜라 맛이 오늘 따라 더욱 상쾌하다.
점심은 복만이 동네의 스테이크 하우스. 식당의 내부 모습이 영국의 어느 곳을 방불케 한다. 오랜 동안 영국의 지배 하에 있었기에 그럴 것이다. 식탁과 의자, 벽에 걸린 장식을 위한 소품들. 많은 부분에 유럽풍이 묻었다. 으깬 감자에 어울린 스테이크의 맛이 훌륭하다. 오랜 만에 온전한 내 몫의 고기에 칼질이 되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 쇼핑을 위하여 대형 슈퍼마켓인 '그린밸리'에 들렀다. 살인적인 햇빛 아래에서 돌아다니다 보니 썬크림이 거의 떨어져간다. 매대를 찾아보니 +75 짜리 제품이 있다. 한국에서는 흔하지 않은 강한 썬블럭이다. 하지만 가격을 확인하고서는 그냥 올려두었다. 국민 소득이 낮은 이 나라의 공산품 가격이 되려 한국보다도 훨씬 비싸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이었다. 거의가 수입품이기에 그럴 수 밖에 없으리라. 그 대신 꿀이나 농산물 등 일차 상품의 가격은 아주 저렴하여 구매할 만 하겠다.
잠시 쉬어가자. 카페에 들러 커피를 주문한 뒤 가격표를 확인하니 한국과 거의 같다. 이곳 보통 시민의 평균 소득이 한달에 20만원 쯤 이라던데 커피 한잔 값이 하루치 임금에 해당한다. 중산층은 아예 없고 빈부 격차가 엄청난 나라다. 그래도 인구가 무려 2억이니 부자의 숫자도 그 만큼 많을 것이다.
도로 가에 '부겐베리아'가 때를 만나 가득 피었다. 더운 나라에 가면 늘 보았던 꽃이다. 그 곁에 손수레 좌판에서 망고의 한 품종인 '춘사망고'를 샀다. 이곳 펀자브 지방의 특산품 춘사(chaunsa)는 풍부한 맛을 지녀 전 세계로 수출되는 효자 과일이다.
원래 오늘을 쉬는 날로 잡았어도 이래 저래 다시 피곤하다. 그만 호텔로 가서 쉬자.
점심에 스테이크를 썰었던 여파일까. 나가서 먹는 저녁 식사가 귀찮다. 그냥 호텔방에서 한국 라면으로 해결하자. 애초에 집에서 출발 할 때 여행용 전기포트와 라면 몇 개를 비상용으로 챙겨 넣었다. 오늘이 바로 그 비상의 날이다. 한국 라면 두개로 룸메와 함께 행복했다.
소화도 시킬 겸 밤거리 장 구경에 나섰다. 여전히 덥긴해도 낮 시간에 비해 견딜만 하다. 오늘은 한 낮 최고온도 39도를 찍었다. 밤 아홉시를 넘겼어도 식당들은 성업 중이다. 건설현장도 더운 낮을 피해서 밤시간에 일을 이어간다. 저 높이 타워크레인도 열 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