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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서점(책방)
姜明求(통계공-청풍공-忠烈公종회) 추천 0 조회 163 17.08.11 06:11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서사(書肆)



서사(書肆)란 서적방사(書籍放肆)의 준말로, 오늘날의 서점(書店)이다.

 

서적이 거리낌 없이 널려 있는 곳이란 뜻이다.

 

조선 후기  이규경(李圭景 임금이 만난 흑인 편에서 설명 : 주인장)은 '서적 방사에 대한 변증설'에서 "우리나라 풍속이 예로부터 서적을 귀하게 여기지 않아서 서적 방사가 없었다"라면서 순조 29년(1829)~30년 효명세자가 대리청정할 때 서울 보은단동(報恩緞洞:미동→현재의 강남구 청담동 롯데호텔 일대:주인장 해석)에 서사를 열었으나 곧 문을 닫았는데, 무뢰한들이 재상 집에서 왔다고 속여 가져가고 대낮에도 도둑을 맞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역으로 그만큼 책이 인기가 있었다는 뜻이다.


중종 17년(1522) 문신 어득강(魚得江)은 '중국에는 서사(書肆)가 있으니 한양에도 서사를 설치하면 사람들이 편리하게 여길 것'이라면서 서점 설치를 주장했다.

 

어득강(魚得江) 1470-1550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함종(咸從). 자(字)는 자유(子游), 호는 관포(灌圃)·혼돈산인(渾沌山人). 아버지는 훈도(訓導)를 지낸 어문손(魚文孫)이다. 할아버지는 별장(別將) 어효원(魚孝源), 증조할아버지는 교도(敎導) 어변질(魚變質)이다. 처는 진주강씨 강인범(姜仁範)의 딸과, 나빈(羅彬)의 딸인 나주나씨가 있다.


[생애]

1470년(성종 1)에 태어났다. 1492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495년(연산군 1)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곡강군수(曲江郡守) 등을 거쳐서 1510년(중종 5)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1518년에는 헌납(獻納), 1521년에는 교리가 되었고 1529년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1549년(명종 4)에 상호군(上護軍)으로 사직한 뒤 벼슬을 하지 않고 진주로 내려가 살다가 1550년에 죽었다. 문장을 잘한다는 평이 있었으며, 특히 농담과 수수께끼를 잘하였다고 한다.


과거에 오른 후로 여러 번 외직을 청하고, 성품이 담백하여 물러가기를 좋아하였다. 벼슬하는 데 뜻이 없어서 조정에서 좋은 벼슬로 불러도 모두 나가지 않았다. 조그만 집을 산수 사이에 지었는데 가족들과 함께 거처하지 않고, 아이 종 하나만을 데리고 조석으로 밥을 지어 먹었으니, 살림살이가 중의 것처럼 담박하였다.


부친상을 당하여 여막 옆에 방 하나를 만들어서 현판을 ‘우애(寓愛)’라 붙이고 명절이나 기일에 제사 드리는 장소로 하였다.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두 절구의 시를 지어 그 행적을 기록하였다.

 ▲ 조선 전기의 문신, 효자. 저서로는 『동주집(東洲集)』이 있음.

경상남도 고성의 갈천서원(葛川書院)에 제향

 


이에 대해 중종은, "지난 기묘년(1519)에 이미 절목(節目)을 마련했다"면서 아직 설치하지 않은 이유를 해조(該曹)에 묻겠다고 답했다.

 

'국조보감(國朝寶鑑)' 중종 14년(1519) 7월조에는 실제로 "경성에 서사를 설치했다"는 구절이 있으니 서사 설치를 명한 것을 설치한 것으로 착각해 썼든지 그해 11월 조광조 등이 피화(被禍)하면서 덩달아 없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국조보감 (國朝寶鑑 조선 역사서)

조선시대 역대 왕의 업적 가운데 선정(善政)만을 모아 후세의 왕들에게 교훈이 되도록 편찬한 편년체 역사책.


90권 28책. 활자본. 세종(世宗)이 처음 편찬을 명한 이래 계속 편찬이 이루어져 시기별로 각기 다른 분량으로 간행된 5종류가 있다. 순종(純宗) 때에 총 90권으로 완성되었다. 이밖에 별편(別編)이 2종 있으며, 1782년(정조 6) 간행할 때 정조 어제(御製)로 된 서문을 별도의 책으로 만든 〈국조보감서 國朝寶鑑序〉 1책이 있다. 〈국조보감〉을 편찬하는 주무기관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세조 때에는 수찬청(修撰廳)을 특별히 설치했고 숙종 때에는 실록청(實錄廳)에 1당상(堂上)을 더하여 편찬·편집하도록 했다. 영·정조 때에는 찬집청(纂輯廳)이 주관했고, 순조(純祖) 때에는 규장각(奎章閣)에서 이를 맡아 편찬했다. 특히, 전학수덕(典學修德)의 요체, 경천존조(敬天尊祖)의 실상, 절용(節用)·애민(愛民)·흥교(興敎)·정속(正俗)의 방법 등이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왕의 업적 중심의 기사가 많고, 편찬의도가 지나쳐 예찬 일변도의 문장이 대부분이다. 내용은 주로 실록초(實錄草)에서 발췌하였으나, 헌종(憲宗) 때에는 조인영(趙寅永)의 의견에 따라 〈일성록〉·〈승정원일기〉 및 각사(司)의 장고(掌故) 등의 기사에서도 뽑아 수록했다. 제왕학 연구에 필수적인 사료이나 수식이 많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 갑인자로 찍은 〈국조보감〉




서점 설치는 지식의 확대를 뜻하기 때문에 권력과 지식 독점을 원하는 훈구(勳舊) 세력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후한서(後漢書) 왕충(王充) 열전'은 집이 가난했던 왕충이 낙양(洛陽)의 서사(書肆)에서 책들을 훑어보면서 명저 '논형(論衡)'을 저술하는 대유(大儒)가 되었다고 전한다.

 

후한서 (後漢書 중국 역사서)

중국의 기전체(紀傳體) 역사서 24사(二十四史) 가운데 하나.


유수(劉秀)가 스스로 황제에 오른 25년부터 위(魏)의 조비(曹丕)가 칭제하여 후한이 망한 220년까지의 후한시대의 역사를 기록했다. 현재 전하는 것은 120편 130권이다. 후한시대 역사연구에서 빠질 수 없는 귀중한 문헌자료이다. 남조(南朝)의 송나라 범엽(范曄 : 398~446)이 지었다. 이 책 이전에 이미 후한의 역사를 기술한 20여 종의 다양한 사서들이 세상에 나와 있었다. 범엽은 이 책들에서 번잡함을 줄이고 모자란 것은 보충했고, 정확한 기록을 광범하게 수집하여 후한에 대한 훌륭한 사서를 만들었다. 때문에 범엽의 〈후한서〉가 나오자 다른 책들은 모두 폐기되어 전하지 않게 되었다.


〈후한서〉는 10기(紀), 10지(志), 80열전(列傳) 등 모두 100편이었으나 이중 10편의 지(志)는 범엽이 죽음을 당한 관계로 미처 완성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범엽의 〈후한서〉는 원래 제후기(帝后紀) 10권, 열전 80권(기·전 가운데 각각 10권은 상하 2권임)이었다. 지금 전하는 〈후한서〉의 지(志) 30권은 북송시대에 진(晉)의 사마표(司馬彪)가 지은 〈속한서 續漢書〉 중의 팔지(八志)를 범엽의 책에 함께 묶은 것이다. 이 책은 제기(帝紀) 뒤에 황후기(皇后紀)를 별도로 두었고, 표(表)는 없으며, 지(志)에는 식화(食貨)·예문(藝文)·하거(河渠) 등의 편이 없다. 열전은 〈사기〉와 〈한서〉에 나오는 순리(循吏)·혹리(酷吏)·환자(宦者)·유림(儒林)은 전례대로 두었으나 그 외에 당고(黨錮)·문원(文苑)·독행(獨行)·방술(方術)·일민(逸民)·열녀(列女) 등 6종류의 전(傳)을 새로이 두어 매우 독창성을 띠었다. 지금 전하는 〈후한서〉의 주(注)에서 팔지의 주는 남조의 양(梁)나라 유소(劉昭)의 보주(補注)이고, 기(紀)와 전(傳) 부분의 주는 당나라 장회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이 달은 것이다. 청나라 학자들은 〈후한서〉의 표·지·주에 대한 보완작업을 상당히 진행시켰다. 그 가운데 혜동(惠棟)의 〈후한서보지 後漢書補志〉와 왕선겸(王善謙)의 〈후한서집해 後漢書集解〉는 매우 상세한 것이었다.


뤄양 [낙양] 중국 허난 성[河南省] 북서부에 있는 시.

통칭 허난[河南]으로 불린다. 9개 나라의 수도이자 불교중심지로 중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도시였다. 뤄양은 동시(東市)와 서시(西市)로 나뉘어 있다.


주나라(BC 12세기말) 초기에 낙읍(洛邑:뤄양의 옛 이름)은 오늘날의 서시 근처에 왕들의 주거지로 건설되었다. 이 도시는 BC 771년에 주나라의 수도가 되었고, 그후 오늘날의 동시의 북동쪽으로 이전했다. 이 도시가 뤄양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뤄수이 강[洛水] 북쪽(중국어로 '陽'은 북쪽을 뜻함)에 있었기 때문인데, 이곳에 남아 있는 유적은 오늘날 뤄양 고성유적지(古城遺跡地)로 유명하다. 한대(漢代:BC 206~AD 220)의 시가지는 대체로 옛 낙읍의 자리에 있었지만 뤄양이라고 불렸으며, 이 이름은 근대까지 허난 부라는 이름과 함께 쓰였다. 뤄양은 후한(後漢) 초기인 1세기에 이르러서야 국도(國都)가 되었지만, 이 도시의 경제적 중요성은 그 전부터 인정받고 있었다. AD 68년에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사원 가운데 하나인 바이마 사[白馬寺]가 오늘날의 동시에서 동쪽으로 약 14㎞ 떨어진 곳에 건설되었다.



4세기에 뤄양은 동진(東晉)·후조(後趙)·연(燕)의 통치자들이 번갈아 차지했고, 494년에 북위(北魏:386~534)의 효문제(孝文帝)가 뤄양을 재건할 때까지는 번영을 누리지 못했다. 그후 뤄양 남쪽에 있는 룽먼[龍門]에는 북위 황제들의 명령에 의해 석굴사원이 건설되었다. 이 석굴사원은 중국 불교의 가장 큰 중심지가 되었으며, 오늘날 남아 있는 석굴사원의 조각품들은 중국 예술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뤄양은 당(唐:618~907)의 동쪽 수도(東京)로서 규모가 커졌고, 오늘날의 동시를 이루고 있는 부분이 새로 건설되었다. 그러나 8세기 중엽에 반란이 일어난 뒤 경제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고, 이 경제적 침체는 20세기 중엽까지 지속되었다. 1949년부터 트랙터 공장을 비롯한 여러 공장들이 세워지면서 곧 중요한 공업 및 상업중심지가 되었다. 이 도시에서는 면화·밀을 비롯하여 주변 지역에서 재배하는 농작물을 가공한다. 뤄양은 여러 간선도로의 중추이며, 쑤저우[蘇州]와 시안[西安]을 잇는 룽하이[?海] 철도 연변에 자리잡고 있다. 인구 759,752(1990).

▲ 사원,상인조합집합소,민간은행,여관,학교,신문발행소같은 예날 건물이 잘 보존돼있는 중국 고대 상업도시 허난성 홍지안시의 전경

 

 


왕충이 살던 1세기에 중국에는 이미 서점이 있었다.

 

홍대용(洪大容)은 기행문 '연기(燕記)'에서 북경 유리창(琉璃廠 : 북경에 있는 대표적인 골동품 골목→주인장 해석)의 '서점 한 곳의 책만도 수만 권이나 된다'고 놀라고 있다.

 

홍대용 ([洪大容 조선 후기의 실학자·과학사상가) 1731(영조 7) 서울~1783(정조 7).


북학파

(北學派) 실학자의 한 사람이며, 지전설(地轉說)을 주장하는 등 조선 후기 과학사상의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덕보(德保), 호는 담헌(湛軒)·홍지(弘之).


생애

할아버지는 대사간 용조(龍祚)이며, 아버지는 목사 역(?)이다. 일찍이 당대의 석학이자 노론학파의 중심적 인물인 김원행(金元行)에게서 주자학을 배웠다.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하여 중앙정계에 진출하지 못한 가운데 박학다식한 학문적 소양을 쌓아나갔다. 1765년(영조 41)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가는 숙부 억(檍)을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따라가 3개월 동안 베이징[北京]에 체류했다. 이때 중국인 학자 엄성(嚴誠)·반정균(潘庭均)·육비(陸飛) 등과 친교를 맺고, 독일계 선교사로 흠천감정(欽天監正)인 A. 폰 할러슈타인(중국식 이름 劉松齡)과 부정(副正)인 A. 고가이슬(鮑友管) 등과 면담하면서 청나라 고증학과 서양의 문물을 접하고 사상체계에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의 베이징행은 북학파 가운데 가장 이른 것으로 당시 교우관계에 있던 박지원(朴趾源)·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 등에게 영향을 주어 북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베이징에서 돌아와 3년간 중병을 앓은 후, 1774년 음보(蔭補)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고 곧 세손익위사시직(世孫翊衛司侍直)이 되었다. 1777년(정조 1) 사헌부감찰이 되었으며 1778년 태인현감(泰仁縣監), 1780년 영천군수(榮川郡守)가 되었다. 1783년 모친이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서울로 돌아온 후 곧바로 중풍에 걸려 죽었다.


학문

그는 주자학자들이 입으로는 정학(正學)이니 구세(救世)니 하면서 실은 무심(務心)·승심(勝心)·권심(權心)·이심(利心)의 불순한 마음으로 허(虛)에 빠지고 있다고 개탄하고 공리공론의 해악으로 실(實)을 잃은 나라의 장래를 걱정했다. 그의 실학적인 학문경향은 18세기 중엽 민중의 생활안정과 번영을 추상적인 도덕론보다 상공업의 발달과 기술혁신을 통해 이룩하자는 북학파의 효시를 이루었다. 그는 베이징 기행문인 〈연기 燕記〉의 시사(市肆)·음식·가옥·기용(器用)·병기·악기·축물(畜物) 등 여러 항목에서 중국에서 본 바를 조선의 문물과 비교하면서 그 실익을 취하도록 서술하고 있다. 그는 화이(華夷)의 구분은 지역상의 구분일 뿐 중국은 어디까지나 외국이요 조선을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시대풍조인 숭명반청(崇明反淸) 사상을 지양하고 '학중국'(學中國)하여 경제생활의 개선 등을 도모하자는 북학론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허에 대립하는 실의 학문으로서 실학을 자신의 학문적 중심으로 세워나갔으며, 실을 찾는 새로운 연구영역을 개척해갔다. 경세론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천문·율력·산수 등 자연과학의 영역에까지 연구가 확대된 것은 이러한 학문활동의 특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회개혁론

그의 학문과 사상의 주관심사는 유교적인 원리론보다는 군국(軍國)과 경제에 대한 것이었다. 봉건적 신분제를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놀고 먹는 자는 신분의 여하를 막론하고 형벌을 주며, 재주와 학식이 있는 자는 신분의 고하에 관계없이 중직에 임명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어떤 신분이라도 교육의 기회를 주고 과거제 대신 공거제(貢擧制)를 실시하여 능력 있는 자를 중용하며 공적인 발언권을 허용할 것 등을 주장했다. 토지제도에 대해서는 균전법(均田法)에 따라 전국 토지를 기혼 남자에게 각 2결씩 분배할 것을 주장했으며 상마(桑麻)의 재배를 권장하고 저축을 강조했다. 관제에 대해서는 불필요한 관아는 혁파하고 폐할 수 없는 관아는 모두 왕 직속의 경(卿)에게 소속시켜 명령계통을 확립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내수사(內需司)와 관결(官結)을 폐하여 호조에 소속시켜 왕실의 재정과 국가의 재정을 일원화할 것을 주장했다. 병제에 대해서는 100만 명의 병력 보유와 각 지역의 성곽의 정비, 무비(武備)의 철저 등을 강조했다. 이러한 개혁을 통해 균전제·부병제(府兵制)를 실시하여 농민의 최저 생활을 보장하는 동시에, 국가재정의 기반인 세원과 국방의 기반인 인적 자원을 확보하고자 했다.


자연과학사상

당시 천문학·수학·의학 등 자연과학은 신분상 특수 계층이 담당하는 낮은 학문으로 취급되고 있었는데, 그는 과학기술을 '정신의 극치'라고 보아 중시했다. 자연과학 가운데서도 특히 천문학에 관심을 기울여 베이징에 갔을 때도 흠천감의 할러슈타인과 고가이슬을 만나 많은 질문을 하고 천문시설 등을 자세히 관찰했다. 천문학과 관련된 그의 가장 대표적인 주장은 지전설이다. 그는 지구의 둘레는 9만리, 하루는 12시간이고 하루 동안 지구가 1번 돈다고 주장했다. 그의 지전설은 독창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중국을 통해서 들어온 서양학설에서 시사받은 것이었다. 그가 베이징에 갔던 무렵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太陽中心說)은 중국에 비교적 널리 소개되어 있었다. 당시 지구가 둥글다는 지구설(地球說)은 이미 우리나라에 들어와 이익(李翼)·김만중(金萬重) 등이 언급했고, 지전설은 17세기에 이민철(李敏哲)·김석문(金錫文) 등이 말했으나 그의 지전설은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에 시사받으면서도 그것을 사고하고 체계화시키는 데 동양적 논리를 전개했으며 또한 당시 중국의 서양선교사나 천문학자들에 의해 지전설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이를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그의 이론은 지구의 자전만을 말한 점에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과도 근본적으로 차이점이 있다. 한편 그는 〈주해수용 籌解需用〉을 저술하여 일반 산술에서 대수학·기하학에 이르는 수학 전반을 정리했다. 또한 베이징에서 사귄 친구들이나 베이징에 왕래하는 사람들을 통해 과학관계 서적과 기구를 들여왔는데, 천주교 및 서양 과학의 총서인 〈천학초함 天學初函〉을 10년에 걸쳐 구입하기도 했다. 또 자신의 집에 농수각(籠水閣)이라는 별실을 지어 혼천의(渾天儀)와 서양에서 만든 자명종(自鳴鐘)을 두고 연구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담헌서 湛軒書〉가 있다.

 

 ▲ 홍대용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

 

 

▲ 홍대홍의 이미지 그림

 

 ▲ 홍대용이 만든 혼천의는 물을 사용해 움직이던 이전

혼천의와는 달리 기계시계를 톱니바 퀴로 연결해

      움직이게 한 것이다. 홍대용이 발명하였다고 전해지는

톱니바퀴식 혼천의, 혹은 혼천시계라고도 부른다.

현재  숭실대 박물관에 소장중으로 알려지고 있다

 

 ▲ 충남 천안시 수신면에 있는 홍대용의 묘

 

▲ 중국으로 파견된 사신행렬을 그린<항해도 천도>의 일부

 

 

필자는 중국 어느 도시에 가든지 꼭 신화서점(新華書店)에 들르는데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가득해서 놀라게 된다.

 

중국의 저력이 이 독서인구에 있는 것이다.

 

한국 출판계가 극심한 불황에 시달리고 있다.

 

깊이 있고 종합적인 지식과 정보가 담겨 있는 유일한 매체는 책이다.

 

책을 외면하고 불황을 타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덕일·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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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첫댓글 제가 바둑(오로 6~7단)을 좋아해서...
    바둑관련 월간지 수집(한때 전질 수집완료)을 하기 위하여
    지금으로부터 3~40년전인 1970~80년대에
    청계천6가~9가를 따라 쭈욱 펼쳐져 있던
    지금은 사라진 헌책방순례를 하던 때가 그립습니다.
    오늘도 내 책꽂이에 가득한 그 시절의 바둑지,정석책등
    바둑관련 서적들이 빽빽하지만
    그냥 세월만 타고... 읽고 감상할 틈도 없네요.

    어제는 국회도서관을 찾아가
    <國朝榜目> 영인본 확인과 <조선사연구>제12집의
    <조선전기 晋州姜氏 啓庸派 家系 연구-韓忠熙 계명대 사학과 교수>를
    복사해 와서 읽고 있습니다.
    위 글중 '국조보감(國朝寶鑑)'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앞으로 꼭 찾아봐야 할 책이라...

  • '간서치(看書癡)'란 '독서를 최고의 즐거움으로 여기는 책 바보'를 의미하며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가 자신에게 붙인 말이다.

    이덕무의 일화에서 따온 '책방 간서치'는 갈수록 독서량이 부족한 현대인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일종의 독서 권장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프로그램은 일반시민들이 참여해 헌책을 판매하는 책방과 책쾌(서적 중개상)가 진행하는 책 경매로 구성된다.

    '책쾌'란 조선시대 전국을 돌아다니며 책을 팔던 상인으로
    서민들이 책을 접할 수 있게 한 유통경로이자 인문학적 연결고리다.

    이번 '책방 간서치'는 민족 고유의 대명절 추석을 맞아
    고서(古書) 경매 행사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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