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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코복음 4,26-34
예수님께서 마르코복음 4장에서 하느님나라에 관하여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는 것이 두번 나옵니다.
그러나 두비유의 뜻은 사뭇 다릅니다.
첫번째 비유는 말씀의 씨를 받아들이는 마음 밭에 대한 말씀이라면 오늘 복음은 씨를 뿌리고 그 열매를 거두는 사이의 시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씨를 뿌린 다음 할일은 땅이 싹을 틔우기를 기다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땅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어떤 때 일의 결과가, 수고의 열매가 보이지 않더라도, 또 기도를 했는데도 하느님께서 침묵하며 응답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믿고 기다려야 한다는 거지요. }
뿌려진 씨는 밖으로는 보이지 않더라도 땅속에서 어떻든 싹트고 자라고 생명이 뿌리 내리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듯이 우리가 아무것도 볼수 없고, 보이지 않는 그 시간에 우리가 심은 선한 행위도, 간절히 했던 기도도 영글어 가고 있음을 믿는 것이지요.
{그리고 열매맺는 일은 하느님 몫이며 그래서 낟알이 영글어 낫을 대어 수확하게 될때에는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임을 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
그리곤 두번째 비유가 이어집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겨자씨가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는 비유입니다.
하느님 나라도 이처럼 시작이 보잘 것없어 보이더라도 믿고 복음의 씨를 뿌려야 한다는 거지요.
혹, 백마리째 원숭이 현상을 기억하십니까?
임의의 장소에서 누군가 어떤 좋은 행동을 하면 집단은 그것을 흉내내고 그 흉내가 일정 비율에 달하면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시작되며 사회 전체로 확산되어 가는 현상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이나 구조란 깨달은 10%의 사람에 의해 바뀝니다. ᆢ
백명의 사람이 의식을 바꾸고 지혜롭게 행동해 가면 사회와 세계를 바꿀수 있습니다.
세상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하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좋다고 생각하는 일을 지체 없이 시작하는 것 입니다.
어찌 압니까 내가 백번째 사람이어서 변화를 일으킬지 ᆢ
(천 사비나 수녀님)
1월31일 [연중 제3주간 금요일]
마르코 4,26-34
참사랑은 지칠 수 없는 이유
오늘 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는 하느님 나라는 땅의 씨가 누구도 모르게 자라듯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는 내용이고, 두 번째는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아서 어떤 것보다 작지만, 땅에 뿌려지면 큰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깃들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같은 내용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행복입니다.
행복은 그 씨앗이 뿌려져 저절로 자라게 되고 그 열매를 맺게 되면 많은 이들에게 쉼과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사랑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사랑은 마치 씨앗처럼 떨어지고 그것이 나중에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다가 지치는 이유는 사랑이 씨를 뿌리는 행위이지, 그것을 자라게 하는 것은 하늘이 하는 일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교사 K씨는 학급의 문제아 A군을 변화시키려 열정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A군이 1년 동안 변하지 않자 ‘내 능력 부족’이라 생각하며 포기했습니다.
훗날 A군은 K씨에게 “선생님이 매일 말 걸어준 게 제게 희망이었습니다.”라고 고백했지만,
K씨는 이미 교직을 떠난 후였습니다.
교사 K씨는 자신이 씨도 뿌리고 열매도 맺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열매만 바라고 있으니 씨를 뿌리는 것에서부터 가치가 있었던 일이었음을 깨닫지 못하고 지쳐버렸던 것입니다.
이런 일은 부부 사이에서도, 친구 사이에서도, 모든 관계에서 일어납니다.
제임스 그레고리와 넬슨 만델라의 이야기입니다. 그레고리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교도관으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아래에서 흑인들을 열등하게 보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넬슨 만델라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고, 처음에는 그를 단순한 ‘범죄자’로 여겼습니다.
“넌 그냥 테러리스트일 뿐이야!”라고 말하며 냉담하게 대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레고리는 만델라의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만델라는 그레고리에게 존중과 친절로 대하며, 그의 아들에게 줄루어를 가르쳐 주기도 했습니다.
그레고리는 점차 만델라의 리더십과 인간성에 감화받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만델라가 수감 생활 중에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고, 동료 수감자들과 교도관들에게까지
존중과 사랑을 베푸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용서는 분노와 증오의 쇠사슬을 끊는 것이다,”라는 만델라의 말은 그레고리에게 사랑이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시간과 인내를 요구하는 실천임을 깨닫게 했습니다.
그레고리는 만델라와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편견을 완전히 버렸고, 두 사람은 평생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나는 만델라를 통해 진정한 인간성을 배웠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희생과 인내를 요구하는 실천임을 깨달았다.”라고 그레고리는 고백했습니다.
넬슨 만들라는 지치지 않았습니다.
그저 씨를 뿌릴 뿐이었습니다.
넬슨 만델라는 27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남아공 대통령이 되었을 때 취임식 날 그레고리를 초대하였습니다.
그가 이런 열매를 기대하고 사랑하고 용서했다면 분명 지쳤을 것입니다.
27년을 버티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랑은 그저 씨앗을 뿌리고 나머지는 주님 뜻에 맡기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지치지 않았고 그래서 때가 되었을 때 많은 소출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 예로, 마더 데레사와 빈민굴 청년의 이야기를 들 수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인도 콜카타의 빈민굴을 방문하며 가장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돌보았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한 청년을 만났습니다.
청년은 술에 찌들어 방탕한 삶을 살고 있었고,
방 안은 어둠에 싸여 있었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그의 방에 들어가 등잔불을 켜려 하자, 청년은 화를 내며 등불을 껐습니다.
그러나 마더 데레사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청년의 방에 등잔불을 켜 놓고 떠났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다시 방문했을 때 청년은
등잔을 창문 밖으로 던져 깨버렸습니다.
하지만 마더 데레사는 다시 새로운 등잔을 사서 방에 가져가 불을 켜 놓고 떠났습니다.
10년이 지난 어느 날, 마더 데레사 사랑의 선교 수녀회의 한 젊은 수녀가 그 빈민굴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수녀는 그 청년을 다시 만났습니다.
청년은 이제 깨끗한 옷을 입고 직장도 다니며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청년은 수녀에게 말했습니다.
“그 키 작은 그 수녀에게 전해주시오.
그때 그분이 내 방에 켜 놓은 빛이 아직도 내 마음 안에서 빛나고 있다고.”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시간과 인내를 요구하는 실천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이 즉각적으로 변하지 않아도 꾸준히 사랑을 베풀 때, 그 사랑은 절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열매가 늦게 맺어질지라도, 우리는 실망하지 말고 끝까지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만델라와 마더 데레사처럼, 우리도 상대방이 즉각적으로 변하지 않아도 꾸준히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은 식을 수 없습니다.
농부는 주인이 주는 씨를 뿌리면 그만입니다.
뿌리지 않으면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인은 계속 씨를 주십니다.
그러니 주님이 지치지 않는 이상 그 씨를 뿌리는 이도 지칠 수 없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31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복음: 마르 4,26-34
힘들면 언제든지 오라토리오로 달려오너라. 내가 네 아버지가 되어줄테니!
돈보스코의 제자 중에 아버지로부터 상습 폭행과 아동 학대를 받던 펠리체 레빌리오가 돈보스코의 오라토리오에 들어오게 된 스토리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아버지는 어린 펠리체에게 하루 온종일 중노동을 시키고 먹을 것을 제대로 주지 않았습니다.
한창 성장기에 있어 밥 먹고 돌아서면 배고팠던 아이는 혹독한 굶주림에 늘 울고 다녔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돈보스코가 아버지 몰래 펠리체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펠리체! 얼마나 힘드니? 얼마나 배고프니?
혹시라도 더 이상 안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땐, 도망쳐서 오라토리오로 달려오너라.
내가 네 아버지가 되어줄테니.”
더 이상 아동 거듭되는 아동학대와 굶주림을 견디기 힘들었던 펠리체는 마침내 가출을 한 다음
돈보스코의 오라토리오로 달려왔습니다.
안그래도 죽을 고생을 하고 있던 펠리체를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돈보스코는 만면에 가득 미소를 짓고, 두 팔을 활짝 펼치며 펠리체를 온 몸과 마음으로 끌어 안았습니다.
펠리체는 그 은혜로웠던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하며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제가 죽을 만큼 힘들었던 순간 돈보스코가 보여주었던 친절과 자비와 환대는 죽어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돈보스코에게로 달려갔을 때, 어머니 맘마 마르가리타는 굶주린 제게 따뜻한 스프와 빵을
마음껏 먹도록 준비해주셨습니다.
이어서 두 분은 손수 제 잠자리를 챙겨 주셨습니다.
이렇게 저는 돈보스코 오라토리오에 받아들여진 두 번째 아이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돈보스코의 오라토리오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청소년들을 기꺼이 환대하고, 양육시키고, 성장시키고, 성화시키는 본당이요, 학교요 운동장이 되었습니다.
지난 주 광주대교구 용봉동 성당 설립 25주년 기념 특강을 다녀왔습니다.
놀랍게도 용봉동 성당 주보 성인이 돈보스코였습니다.
사목적 열정으로 가득한 주임 신부님께서는 본당 설립 25주년을 맞이하여 교우들과 함께, 향후 10년을 위한 시노드 작업을 하셨습니다.
8가지 실천 과제를 마련하셨는데, 그 가운데 청소년•청년을 위한 실천 과제 첫 번째 항목이,
본당 안에 청소년 청년을 위한 공간-오라토리오-마련하기였습니다.
점점 노쇠화되어가는 우리 가톨릭교회입니다.
청소년과 청년들 얼굴 보기가 하늘에 별따기인 우리 교회입니다.
이런 면에서 용봉동 성당에서 준비하고 있는 본당내 청소년•청년을 위한 공간(오리토리오) 마련하기는 정말이지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청소년•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가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일까, 성찰해봅니다.
그들이 선호하는 역동성과 활력의 심각한 부족이 아닐까요?
적극적인 환대와 배려의 부족이 아닐까요?
호감과 매력의 상실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을 진지하게 고민해봅니다.
오늘 우리 본당과 수도회, 수녀회는 진심으로 청소년•청년들을 환대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우리 울타리에 들어와서 신명나게 기도하고 역동적으로 뛰어놀고,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꺼리’들이 준비되어 있는가요?
오늘 돈보스코 축일을 맞이하며, 우리 모든 사목자들 안에 그분께서 살아생전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그 뜨거운 사목적 열정이 되살아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이들 한명 한명에게 기울였던 그 각별하고 개별적인 사랑이 흘러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청소년을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에 그들로부터 사랑받는 교육자들이 더 많아지길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 교육자들, 과연 아이들로부터 사랑받고 있습니까?
그런 체험을 단 한 번이라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사랑은 일방적이어서는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우리 사목자들, 교육자들이 우리에게 맡겨진 양들을 사랑하는 것도 무척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양들로부터 사랑받는 것입니다.
그 체험은 양들을 위한 더 깊은 헌신과 희생에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주간 금요일 강론>
(2025. 1. 31. 금)(마르 4,26-34)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하느님은 ‘모든 것’의, 또 ‘모든 일’의 주님이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마르 4,26-34).”
1)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건설 과정에 초점을 맞춘 비유이고, ‘겨자씨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었을 때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 비유입니다.
그리고 두 비유 모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비유입니다.
여기서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열매를 맺게 하시는데” 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저절로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라는 말씀의 뜻은, “인간은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지 못할 때가 많다.”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들 모르게 일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들이 보려고 하지 않고, 믿으려고 하지 않아서 못 알아보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거나 그분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였지만 바보가 되었습니다(로마 1,20-22).”
<여기서 ‘그들’은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입니다(로마 1,18).>
2)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고, 인간은 협력자일 뿐이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의 주님이신 분이고, ‘모든 일’의 주님이신 분입니다.
주님께서 주님 뜻대로 하실 것이니, 우리가 걱정하거나 불안해 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잘 되고 있다고 교만해도 안 되고, 잘 되지 않는다고 좌절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또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면 되고, 결과는 주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는 사람들의 올바른 태도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1-34).”
<이 말씀은 먹고사는 문제에 관한 말씀만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 건설에 관한 일과 교회 운영에 관한 일도 모두 포함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당신의 나라이고, 교회는 당신의 집이니, 당신이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3) ‘겨자씨의 비유’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작고 초라하고 보잘것없더라도, 하느님께서는 그런 것에서 위대한 결과를 만들어 내십니다.
<우리 눈에는 놀랍게만 보이지만, 하느님께는 당연한 일입니다.
반대로,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대단하게 보이는 것이라도, 하느님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이 말씀은, 이리 떼 가운데로 들어가서 하나의 겨자씨가 되라는 명령입니다.
두려워하지도 말고, 결과를 미리 예단하지도 말고,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수행하면 됩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라는 말씀에서 ‘뱀’은 지혜를 상징합니다.
그 지혜는 세속의 처세술 같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는 신앙인의 지혜입니다.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 라는 말씀에서 ‘비둘기’는 평화와 온유함의 상징입니다.
이리 떼 같은 세상 한가운데에서 하나의 겨자씨가 되는 일은 갈등과 분열과 싸움을 일으키는 일이 아니라, 이 세상에 ‘주님의 평화’를 심고 키우는 일입니다.
겨자씨가 아주 작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한, 주님의 겨자씨’ 라는 점이 중요할 뿐입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주님의 겨자씨’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