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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鐘聲
문득 들리나니 종소리는 어디서 오는고
(忽聞鐘聲何處來)
까마득한 하늘이 내 집(몸)일러라
(寥寥長天是吾家)
한입으로 삼천계를 고스란히 삼켰더니
(一口呑盡三千界)
물은 물은 뫼는 뫼는 스스로가 밝더구나
(水水山山各自明)
이건 나의 심정을 나타낸 글입니다.
당시 저녁 무렵이었는데, 종소리가 들렸습니다.
예배당 종소리였어요. 내가 있던 자리에서 삼 마장이나
사 마장쯤 떨어진 예배당에서 울린 소리를 듣고
그 감회를 나타낸 겁니다.
이 글을 지을 때의 심정을 얘기하죠. 당시 내가 공부를 할 때인데, 신 선생이라는 분을 비롯하여 남년 합쳐서 아홉 명이
절에 공부하러 갔어요. 서울에서도 인천에서도 갔죠.
다른 건 모르겠는데, 어찌 됐건 그곳에 가기 전에 내게 심경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한 이, 삼일 전부터 변화가 있었지만,
그 변화가 무엇인지는 몰랐죠. 좌우간 마음이 들떠 있었어요. 그렇다고 공부에 지장이 있지는 않았지만, 좌우간 좋은 방향으로 마음이 들떴습니다. 당시 보름을 예상하고 떠났는데,
이미 집에서부터 내 마음이 좀 들떠 있었어요.
게다가 그 절에 가니까 마음이 더 들떠요.
어떻게 된 일인지......
또 밥맛도 없는 데다가 밥을 먹어도 어쩐지 마음이 차분하지 않아요. 마치 내 보물을 내가 어디 간직해놓고 잃어버린 생각이 듭니다. 이상하다......
당시 내가 무자無字 화두를 가졌습니다. 처음 한 달이나 두 달은 화두가 잡히지 않아서 욕을 봤어요.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화두를 자꾸 놓쳤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화두를 놓치지 않을 각오가 됐는가? 정확히는 나도 모르겠어요. 다만 내 팔자가 나쁜 것이 큰 도움이 된 듯합니다.
소위 돈도 있고 지위도 있고 자녀들도 많으면 팔자가 좋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나는 다 나빠요. 돈도 지위도 없고 자식들도 없습니다. 그래서 내 자신을 돌아볼 때 늘 팔자가 나쁘다는 생각을 가졌죠. 말하자면 팔자가 나쁘기 때문에 이 공부를 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살면 뭐하겠는가? 그러나 이 공부를 해서 팔자를 좀 뜯어고칠 수 있다면 이 공부를 해야겠다, 말하자면 팔자가 나쁘기 때문에 화두를 갖게 된 거죠.
당시 신 선생과 노 선생은 불교 공부를 굉장히 오래 한 분들입니다. 또 공부를 하기 위해서 고생도 한 사람들이예요.
아마도 노 선생과 신 선생 두 분의 힘으로 공부를 한 것 같습니다. 무자 화두도 그때 들은 것 같아요. 나는 누가 말하면 그대로 믿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건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죠.예를 들면 누가 돈을 내일 갚겠다고 하면서 빌려달라면 빌려줍니다. 돈이 있으면 빌려줘요. 제 날짜에 갚지 않으면 기다립니다. 한 서너 번까지는 내가 참아요. 결국 누가 거스르는 말을 하지 않으면 내가 잘 속는 성질입니다. 남이 말을 하면 그대로 콱콱 믿어버려요.
아무튼 공부를 한답시고 하는데, 처음에는 화두가 잡히지 않아서 애를 먹었어요. 하지만 내가 팔자가 나쁘니 공부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 공부마저 못하면 진짜로 나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하면서 화두를 가졌죠. 그런데 자꾸 잊어버려요. 그때는 팔자가 나쁜 내가 화두를 잊어버리고 공부를 하지 않으면 되겠는가? 이렇게 각오를 다지면서 또 화두를 가집니다. 좌우간 한 달 반쯤은 자꾸 화두를 놓쳤어요.
그런데 두 달 가까이 되니까 화두가 슬며시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술자리를 가도 화두가 그대로 붙어있네요. 화두가 잡히기 시작하자 내 딴에는 재미가 났습니다. 술자리에서 방광放光하기도 했어요. 한 서너 달 되니까 화두가 딱 들러붙어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내 몸이 아팠어요. 화두를 들 땐 들게 되고 놓을 땐 떨어져야 편안하게 잠도 자고 건강에도 이로울 텐데, 화두가 떨어지질 않으니 큰일 났단 말이죠. 나중에 넉 달, 다섯 달쯤 가서는 이놈의 화두를 버리려고 애썼어요.
이놈의 화두 때문에 내가 죽겠거든요.
처음에 화두가 잡히지 않을 그때는 화두를 육조 스님의 말씀으로 알았습니다. 그만큼 내가 무식했어요. 조주 스님의 말씀이란 건 나중에 알았죠. 아무튼 그때 육조 스님의 멱살을 잡고 지근지근 씹다시피 했어요. 나중엔 집어삼키기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뱃속에서 ‘날 살려다오’해요. 나는 ‘왜 무無라고 했느냐’고 하면서 지근지근 씹고 마시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가서는 화두가 딱 들어붙는 바람에 내버리려고 무척
애를 썼어요. 하지만 ‘이놈의 화두 때문에 내가 죽겠다’고 해서 버리려고 하는 그것이 화두를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버리려고 해도 말이죠...... 그래서 고생을 하면서 병원에도 다니고 그랬습니다. 병원에 가도 화두가 딱 들어붙어서......
그것 참, 내가 너무 고지식해서 그런 것 같아요.
남의 말을 잘 믿고 고지식해서......
한 육 개월쯤 되자 내가 포기해 버렸습니다. 내버리려고 하는 짓을 포기한 거죠. 내버리려고 해도 내버려지지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단 말입니다. 되든 안 되든 그대로 갖고 가자. 또 이 친구들의 말을 들어보면, 화두를 깨면 굉장하다고 하니까 죽으나 사나 그대로 가야겠다. 화두를 잡아도 죽게 되고 화두를
버리지도 못해서 죽게 되니,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게 됐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이런 상황이 한 달 이상 계속됐습니다.
그런데 내일 산사山寺로 갈 날이거든요. 그 전에는 망상이
굉장히 일어났습니다. 처음에는 헛것이 보여요. 내가 과학,
과학 하는 습성이 있어서 과학적으로 딱 들어맞지 않으면 불교도 치워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한 달쯤은 이런
망상이 나타나다가 나중에는 차츰 차츰 좋은 게 뵈기 시작해요. 앉아 있으면 눈을 감고 앉았든 눈을 뜨고 앉았든 처음에는 흑백으로 많이 보입니다. 그때는 대체로 방에 불을 껐어요.
당시 환상이 보이는데, 머리가 열두 개 달린 사람이 다 보이고, 뱀 하면ㅡ그때는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어요ㅡ머리가 다섯 개, 여섯 개 달린 뱀이 나타나요. 또 돼지를 생각하면 돼지가 사람을 물려고 달려들어요. 망상이 이렇게 무서운 겁니다.
예전에 공부하다가 미치는 수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정말로 돼지가 날 물려고 달려듭니다. 이게 망상이고 환상이란 생각이 없었다면 날 잡아먹는 형국이예요. 하지만 다 내 마음이 부실해서 그렇다는 생각을 늘 가졌습니다.
이렇게 두, 세 달이 지나니까 색깔이 나와요. 푸른색, 붉은색 등등. 방 안에서도 산천이 그대로 보이고 파란 나무도 그대로 보입니다. 낮에 소나무를 보면 가지가 잔잔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방에 딱 앉으면 말이죠. 눈을 뜨고 보는 것보다 더 자세히 보여요. 솔잎 하나하나가 다 보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빛이 보여요. 해도 보이고 달도 보이면서 환히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것도 망상이다, 내 마음의 작용이다, 이 환상은 좋은 거다, 좋은 환상은 그냥 두어야 하지 않겠나?ㅡ내가 어째서
이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본래 지혜라는 것도 내가
모를 때인데 말입니다.
절에 가기 전날 밤에는 잠을 좀 자야 하는데 잠이 도저히
오지 않아요. 내일 출발인데도 당최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침 기상나팔을 불 때가 되었죠.
‘아이고, 이거 시간이 다 되었네. 한숨 자야 하는데......’
그래서 자려고 하는데 갑자기 방 안이 환합니다.
‘이거 또 망상이 일어나는구나. 하지만 이 망상은 좋구나.’
그러다가 옆을 보니 흰 옷을 입은 세 분이 앉아 있어요.
누군지는 모르죠. 망상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이 망상은 좀 이상한 망상이다. 두고 봐야겠다.’
당시 내 앞에 그림이 한 장 있었어요. 초등학교 5, 6학년 정도의 학생이 사람을 그린 겁니다. 눈썹, 코, 눈, 그리고 입 등을
그렸어요. 그때 한 분이 그림을 손으로 잡지는 않고 가리키면서 말했습니다.
“이 그림이 저 하늘의 달과 원리가 하나다. 그런데 기추 네가 말이지(내 이름을 딱 불러요), 분별이 많기 때문에 하나라는 원리를 모를 따름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그때 내가 깜짝 놀랐어요.
목소리가 바로 내 목소리였거든요. 그런데 참말로 쳐다보니까 달이 있습니다. 그때는 달이 없을 때라는 걸 내가 알고 있었거든요.
‘달이 없을 땐데 달이 있네. 그것 참 이상타.’
그러면서도 무슨 계시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저러나 목소리가 내 목소리이니 결국 내가 만든 하나의 망상이 아니냐는 결론을 내렸어요. 그러다가 세 분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드러누워 잠을 좀 잤죠. 한, 두 시간을 자고절로 갔습니다.
당시 함께 간 사람이 아홉 명일 거예요. 난 여전히 마음이
들떠 있었고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신 선생, 노 선생이란 분들이 자기들끼리 의논을 했다고 합니다.
“백봉이 좀 이상하니, 신 선생이 돌보아야겠다.”
이렇게 논의한 모양입니다.
일주일이 지나면서 차차 밥맛도 없어집디다. 식사 때만 되면 귀찮아 죽겠어요.
“젠장 밥이 뭐라고 안 먹으면 그만이지.”
이런 생각이 다 들어요. 나중에는 웬일인지 신 선생이 나에게 딱 달라붙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내게 말했습니다.
“형님 좀 나갑시다.”
당시 눈이 쌓인 겨울이었습니다. 나는 “응” 하면서 더 이상 대꾸하기 싫어 그만 따라 나섰어요. 어디로 가는지도 묻지
않았습니다. 말하는 것조차 귀찮았거든요.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르겠습니다. 신 선생이 나를 위해 그런다는 것도 알았거든요. 내가 밥도 잘 먹지 못하고 있으니, 날 위해 그런다는 것도 내가 알았어요. 그러니 고맙지 않스니까? 고맙다는 생각도
전혀 변함이 없어요. 그런데도 대꾸하기 싫어서 따라 나섰습니다. 어디로 가나 했더니 동네로 내려가잖아요. 동네가 한 삼십여 호 되는데, 그 동네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다 돌고 나니
어디 갈 데가 없어요. 신 선생이 평소 말 많은 친구인데 그때는 말이 도통 없어요. 난 말이 없는 걸 보고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이상한 점은 걸음을 디뎌도 발이 어디 놓이는지를 모르겠어요. 당시는 내 몸이 건강할 때인데도 말입니다.
나중에 동네에서 다시 절로 돌아가려고 할 때 나무가 한 그루 있고 잔디가나 있는 곳에서 내가 먼저 말을 했습니다.
“여기 좀 앉으세.”
그런데 도리어 신 선생이 말이 없어요. 눈을 똥그랗게 해서 쳐다보다가 내가 앉으니 자기도 앉아요. 당시의 내 심정이
이 노래에서 나오는 거나 한가집니다. 내 심정을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뭔가 알 듯한데 알지는 못해요.
“절로 가세.”
이렇게 말하자 신 선생도 아무 말 없이 불쑥 일어나요. 내가 앞장서서 절로 갔죠. 절에 가도 다른 사람들이 날 이상스럽게 보는 것 같아요. 내가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도 모르죠. 좌우간 일주일 후부터는 목탁 소리가 항상 두 개로 들려요. 그래서 신 선생한테 물었죠?
“목탁 소리가 난 두 개로 들리는데, 자네는 어떻게 들리나.
하나로 들리나 둘로 들리나?”
신 선생이 “하나로 들린다”고 그래요.
“그래. 하나로 들려야 옳다. 그래야 과학적이지 둘로 들리면 비과학적 아닌가?”
또 다른 사람들은 목탁을 치고 나면 견성성불見性成佛을 기원하면서 울어요. 하지만 난 눈물이 나오지 않아 애를 먹었죠.
다른 사람들이 울면 같이 울어줘야지 자기 고집을 부리면
못 쓰는 겁니다. 나의 대중생활 경험은 젊을 때 청년 운동 하면서 쌓은 거예요.
허나 눈물이 나오지 않아서 무척 애를 썼습니다. 어쩌다가
조금 눈물이 난다 싶으면 쏙 들어가버려요. 신장神將. 지금도
그림을 그리려면 그릴 수 있어요. 투구 쓰고 갑옷 입고 칼 차고, 신발도 우리가 장가 갈 때 신던 그런 신발이예요.
그래서 바로 옆에 있던 신 선생에게 물었습니다.
“신장이 보이는가?”
“신장이라니? 신장이 보일 리가 있나?”
“그럼, 그렇지. 요즘 신장 같으면 양복을 입고 권총을 차야
할 텐데, 도대체 옛날 모습의 신장이 보이니 내가 눈 병신이
되었구나. 없는 신장이 보이니,눈 병신이 아닌가.
또 목탁 소리가 두 개로 들리니 귀 병신이 아닌가.
아니, 이 공부를 하면 똑똑해진다고 하는데 눈 병신이 되고
귀 병신이 되다니, 아이고......”
그때 내가 좀 울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울음이 나오는구나 생각하자 눈물이 그만 쏙 들어가버려요. 참 애를 먹었어요.
그 다음에는 방에 앉아 있지를 못했습니다. 방에 앉아 있어도 뭐라고 할 사람도 없는데 말이죠. 그래서 눈 쌓인 산에서 바위 하나를 찾아서 앉았습니다.아주 참 편해서 엉덩이 아픈 줄도 몰랐어요. 당시 내가 굉장히 열이 났나 봅니다. 머리와 어깨 위에 눈이 쌓였는데, 무릎 위에 놓인 손에 닿은 눈은 전부 녹았거든요. 가만히 보니까 밑에 얼음도 보여요. 아마 눈이 녹을 만큼 뜨거운 열이 있었나 봅니다.
(그러다가 온몸이 언 채 바위 위에 앉아있는 백봉거사를 신 선생이 방으로 안고 들어가서 몸을 주물러 녹였다). 이제 방에 들어갔단 발이죠. 신 선생이 나에겐 큰 은인입니다. 그때 신 선생이 책을 한 권 내밀어요. 이게 뭐냐고 물으니까 어록語錄이라고 합디다. 그때까지도 난 어록 한 번 못 봤어요. 신 선생이 책장을 넘기는데 직심직불直心直佛이 나와요. 또 신 선생이 다른 수단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문제를 제시할 따름이예요.
신 선생이 다시 내 얼굴을 보더니만 한 장인가 두 장인가
넘겼어요. 그때 비심비불非心非佛이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직심직불이 나왔다가, 한 장이나 두 장을 넘기자 비심비불이 나와요. 여기에 내가 놀랐습니다. 그래서 내가 벌떡 일어났어요.
먹먹할 뿐인데, 나중에 신 선생 하는 말이 공부하는 사람들이 전부 나에게 절을 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때는 전혀 몰랐어요. 당시 방에는 창문이 하나 있는데, 창을 통해 산을 보니
별다른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도 변한 것이 없어요.
변했다면, ‘아하, 이거 또 망상을 부리는군’이라고 했을지도
모르죠.
그때 종소리가 울려왔습니다. “문득 들리나니 종소리는 어디서 오는고”라고 지었지만, 예배당 종소리인 줄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예배당이 예배당이 아닙니다. 예배당만이 아니라, 유정과 무정이 본래의 지혜로부터 나와서 유정과 무정으로 갈렸지만 그 당처는 하나에요. 물론 쓰는 데 있어서는 유정과 무정이 영 다르죠. 돌멩이와 사람이 영 다르지 않습니까? 영 다르지만 그 출처는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종소리 나는 곳도 한 군데 아니겠어요? 우리가
분별해서 예배당 종이다 뭐다 할 뿐이죠(물론 분별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 당처는 하나로서 바로 ‘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바로 온 누리가 ‘나’에요. 나를 여의고서 누리가 있을 수 없고 허공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삼라만상이
벌어져요. 만약 삼라만상이 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즉 이 종소리가 나한테서 온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종소리가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 말입니다. 그 당처가 하나이므로 바로 부처님과 나는 일체一體입니다. 내가 부처님하고
아무 상관이 없다면, 내가 불교 공부를 아무리 해도 공부가
되지 않아요. 원래 부처님과 내가 뿌리가 하나이기 때문에
공부해서 부처를 이루는 겁니다. 이런 등등의 생각이 번개같이 지나가요. 정말로 번개같이......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절하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럼, 홀연히 들리는 이 종소리는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 생각해보세요.이 종소리가 예배당에서 오지만 예배당 자체가 나와 한 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까마득한 하늘이 내 집일러라”ㅡ내 집안이 어디냐. 허공 전체가 내 집입니다. 허공이
내 몸이나 마찬가지예요. 몸 신身자를 쓰려고 하다가 집 가家자를 썼습니다. 아무튼 몸이라고 했든 집이라고 했든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리고 “한 입으로 삼천대천세계를 마셔버렸는데”, 이 구절은 “한 입으로 서강의 물을 마신다”고 한 어느 조사의 말과 비슷해요. 이 “한 입으로 삼천대천세계를 마셔버린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물론 이 몸뚱이, 육신으로는
감히 말이 되지 않지만, 가만 생각해보세요, 내가 어떻게 삼천계를 마시겠습니까? 당시의 심정은 허공이 바로 내 몸이었습니다. 욕계, 색계, 무색계뿐만 아니라 천당과 지옥도 전부
허공성의 작용이라서 이러한 말이 나온 것 아니겠어요?
‘허공이 나’라는 생각이 들면, 여러분이 달라집니다.
이 ‘나’를 여의고는 어떤 것도 있을 수 없어요. 내가 없는데
바다가 있겠습니까? 내가 없는데 부처님이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부처님과 나는 뿌리가 하나에요. 문제는 우리가
중생놀이 하는 것도 이 무정물(즉, 육신; 편자 주) 때문에 중생놀이 하는 것이고, 또 우리가 공부를 해서 부처가 되고자 할 때도
이 육신을 방하착하는 곳에 부처가 있지 이 놈을 그대로
가져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이건 마음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여러분에게 자살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저 육신을 하나의
작용으로 알아서 잘 쓰되 거기에 들어앉지 말라는 뜻일 뿐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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