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날을 기억하라(신명기 32:1~14절)
신명기 32장은 31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시기를 원하셨던 이 노래 말씀의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노래이면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평생 부르고 또 불러야 할 노래였습니다. 31:30절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총회에 이 노래의 말씀을 끝까지 읽어 들리니라.” 그럽니다. 그러니까 32장은 모세가 읽었던 그 노래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 말은 이 노래의 말씀이 이 땅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이 기억하고 기억해야 할, 특히 풍요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이 노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신명기 31~34장은 가나안 입성을 두 달 열흘 앞둔 상태에서 가나안 입성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돌이켜 우상을 숭배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입니다. 32장을 간략히 분석해 보면 이렇습니다. 1~4절은 이 노래의 서론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이 노래의 말씀이 얼마나 유익한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5~14절에는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시며 온갖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이 지적되어 있습니다. 4절에서 악을 행하니 삐뚤어진 세대라고 책망하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창세로부터 시작하여 출애굽 전후 역사와 미래 가나안에서의 복된 생활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는 하나님이 분명하게 역사의 주권자이시며 이스라엘의 복의 근원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까지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15~25절에서는 “그러나 여수룬이”로 시작하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주신 풍요로 인해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교만해짐으로 진노를 당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의 말씀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는 것은 어쩌면 이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기회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이 이런 길을 걸어갔다는 것이 역사의 아픔이며 아이러니입니다. 기막힌 일입니다. 26~43절에는 하나님이 패역한 이스라엘을 대적들을 통하여 징계하실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럴 때 대적들이 자만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조롱하고, 또 그것이 여호와의 징벌이 아니라 자신들의 수단이 높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교만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도 징벌하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노래를 끝마친 모세가 44~47절에서 율법에 대한 순종을 다시 권면하고 48~52절에는 하나님께서 임종을 앞둔 모세에게 명하사 당신의 사랑하는 종에게 느보산에 올라가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가나안 전역을 두루 살펴보게는 하십니다. 그러나 그의 범죄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사실을 숨김없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32장이 끝납니다.
비처럼 이슬처럼(1~4절)
이 단락은 2절과 4절이 핵심입니다. 2절의 내 교훈, 그리고 4절은 여호와의 속성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럼 1절부터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러야 할 이 노래의 말씀을 시작하면서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그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구체적으로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있는 출애굽 2세대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먼저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보통 우리가 ‘하늘이여! 땅이여!’라고 부를 때에는 이렇게 슬프고, 애끊는 심정을 노래할 때거나, 천인공노 즉 하늘과 사람이 함께 분노할 만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가증스러운 분노를 표현할 때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늘과 땅을 부르는 것으로 노래의 말씀이 시작되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이여! 땅이여!’란 표현은 하나님의 한탄과 슬픔의 표현입니다.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부른 것입니다.
그러면서 2절에 내 교훈, 즉 이 노래 말씀의 성격을 규명하고 있습니다.
“내 교훈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 같도다.” 그럽니다.
내 교훈과 내 말은 둘 다 이 노래의 말씀, 진리의 성경 말씀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1절에서 이 노래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 천지를 불러 증인으로 삼는 장엄한 음성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2절에서는 이 교훈의 말씀이 삭막하고 메마른 대지를 적시는 가는 비와 아침의 이슬에다 비유하여 이를 듣고 순종할 때 그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갔던 메마른 대지에서 비처럼 내린다는 것은 그 말씀이 그들에게 생명수와 같이 소중하고 귀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끔 농사를 지으시는 분들이 스프링클러를 이용해서 물을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리는 비는 스프링클러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온 대지를 골고루 적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리는 비는 모든 백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읽어집니다. 생명을 주고 힘을 주고 살아갈 수 있도록 적셔주는 귀한 말씀입니다.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힌다고 표현합니다.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 같다고 말씀합니다. 연한 풀과 채소는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미할 것입니다. 연약하고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력을 줍니다. 아침에 맺힌 이슬, 단비와 같은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이미지들이 말씀의 속성을 가르쳐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 아침 이슬, 가는 비, 단비는 모두 메마른 땅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수와 같은 소중함을 일깨웁니다. 그리고 연한 풀, 채소는 그 메마른 땅에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읽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진리의 말씀은 생명수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노래의 말씀, 이 교훈은 절대로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생명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2절의 표현에서 말씀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 다시 깨닫습니다.
하늘과 땅을 증인 삼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교훈, 이 노래의 말씀은 내리는 비와 같고 아침 이슬과 가는 비와 같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살아낼 자양분입니다. 헛되고 헛된 세상,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로 가득한 세상에서 생명의 꽃을 피우며 그리스도인으로 생존할 수 있게 해 주는 바로 유일한 길이 이 노래의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그분은 반석입니다. 반석이라는 표현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조변석개하는 연약함과 대조되어 늘 변함없이 우리를 지키시는 우리의 피난처요, 거처가 되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그 하시는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다고. 고백합니다. 공의롭고 바르신 하나님입니다. 변함없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다(5~14절).
그런데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런 배반은 15절에도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진실하심에 대해 이스라엘은 어떻게 행동했습니다.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요,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라고 할 때’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그가 스스로 부패케 하였다'가 됩니다. 구약에서는 종종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나타낼 때는 단수로 표현하기도 한다는 점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흠 없이 낳으신 자식들이 잘못되어 비뚤어지고 비꼬인 세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빛의 자녀처럼 행동하지 않고 비뚤어진 길을 걷는다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를 향하여 행하는 그들의 악은 스스로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일어난 일은 아닙니다. 물론 지금 우리의 관점에서는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아직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 이 노래의 말씀은 그런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경계의 말씀이면서 기회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리석고 지혜롭지 못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6절) 라고 책망합니다. 여기 어리석다는 말은 나발(lb;n:)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말이 어리석고 무분별하다는 말인데 삼상 25장에 등장하는 나발과 같은 단어라는 것입니다.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며 어리석은 사람 나발입니다. 다윗이 도피 중일 때 바로 이 나발에 도움을 청한 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생업이 갈 메일에 있는데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 마리, 염소가 천 마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름처럼 어리석고 욕심이 많아서 다윗의 사환들에게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고 물으면서 요즘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 떨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말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합니다. 그 일로 나발은 다윗의 미움을 사게 되어 죽을 위기에 처합니다. 그때 그의 지혜로운 아내 아비가일의 지혜로 위기를 모면하지만, 다윗에게 죽을 뻔했다는 소식을 들은 나발은 그 이름처럼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다고 하나님께서 치시매 죽었다고 말씀합니다. 이 나발은 탐욕스럽고 베풀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그런데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이라는 말이 바로 그렇게 분별력이 없고 욕심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는 네 아버지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6절) 할렐루야! 이 위대한 말씀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 아버지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시고 세우신 분입니다. 여기 지으셨다는 말 카나(hn:q;)는 '창조하다', '세우다'가 기본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에서 '사다'(purchase), '얻다'(gain)라는 의미가 파생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너의 아버지'라는 말과 연결해 볼 때 '창조하다', 혹은 '낳다'라는 뜻으로 보는 것이 적절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사건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옛날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얻으시고”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세우셨습니다. 얻으셨습니다. 창조하셨습니다.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만드시고’ 그럽니다. '만드시고'의 '아싸'(hc;[;)는 '만들다', '행하다', '모으다'란 뜻으로 하나님에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학대와 억압으로부터 구원하여 거룩한 백성, 곧 성민으로 삼으셨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셨다는 의미가 강한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세우셨도다'라고 할 때의 '쿤'(@WK)은 '세우다'. '준비하다', '확정하다'란 뜻으로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여 언약과 율법을 주고 가나안 땅을 상속할 확실한 후사로서 준비시켜 영원한 하나님의 민족으로 확정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들을 종합해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셨습니다.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시고 양육하셨습니다. 값을 지불하시고 사셨습니다. 그런 후에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확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아버지로서 그들의 양육자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단어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올바르게 아는 사람은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값 주고 사셨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옛날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초대합니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게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7절) 그럽니다. 여기서 옛날과 역대의 연대, 곧 한 세대 한 세대가 지나온 세월은 아브라함 때부터 출애굽, 그리고 광야 시대부터 가나안에 이르기까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것은 곧 아득한 조상 때부터 언약을 맺어 오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인도하셨으며, 어떠한 일들을 행하셨는지, 그 아비와 어른들에게 묻고 마음속 깊이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억하다'라는 말 자카르는 신명기에서 16번이나 나오는 언약적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단어입니다. 즉, 봉신이 군주에 대해 충성심을 가지게 되는 근거가 바로 그의 은혜를 기억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생각하라'라는 말 '빈'은 '이해하다', '유의하다', '인지하다'라는 뜻으로 분별력있게 주의하여 인식하라는 의미입니다. 이어지는 네 아비에게 물으라는 말도 정상적인 가정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움과 동시에 자녀들도 관심을 가지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큰일을 배우려고 힘써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래서 7절은 하나님을 향하여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 세대를 질책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가 네게 설명한다는 말 '나가드'는 본래 '정면에 두다'라는 뜻으로, 어떤 역사적인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여 명백하게 입증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조 때부터 역사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그가 주신 계명과 언약을 잊거나 부인하지 않도록 하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살아가지 않으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나누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그럽니다. 여호와께서 일찍이 각 민족들의 영토를 나누어 분배하실 때부터 이스라엘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그들 자손의 수효대로 영토를 배정해 주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볼 때 한곳에 정착하여 국가의 형태를 이룬 시기가 다른 민족들에 비해 크게 뒤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열국과 같은 시기에 필요한 만큼의 영토를 이스라엘을 위하여 준비해 놓으셨음을 밝히면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여호와께서 열국들을 시작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간섭하신다는 사실과 또한 각민족마다 분깃으로 받은 고유한 땅에서 살도록 허락하셨음을 보여 줍니다. 인종을 나누시기도 하셨습니다. '나누다'의 '파라드'는 '흩뜨리다' '나누다'라는 뜻으로, 곧 사람의 자손을 흩어서 여러 민족으로 나누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면서 9절에서 야곱 그 택하신 기업이라고 말씀합니다. 10절에서는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그럽니다. 여기서 '황무지'는 황량하고 황폐한 땅으로 애굽을 상징하며, '광야'는 짐승이 우글거리는 척박한 사막으로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을 연상시킵니다. 그러나 사실 '황무지와 광야'는 모두 비유적으로 사용되어 이스라엘이 얼마나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는가를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그처럼 황폐한 땅에서, 광야의 들짐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만나시고 지키셨다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이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수룬이 이런 복을 발로 찼다는 것입니다.
이 노래의 말씀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여 내신 역사, 그들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노래의 말씀을 늘 부르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5~6절 말씀을 보면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5절에는 여수룬,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복을 발로 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깨달아지는 순간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택하시고 세우시고 부르시고 양육하시고 돌보시고 먹이시고 입히십니다. 다만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감사할 줄 모르고 살아갈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노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이 노래의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책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노래의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그분은 이 말씀, 이 교훈을 비처럼 가는 비처럼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세우시고 양육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인생의 과거에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여기까지 도우셨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든 하지 못하든 하나님은 우리의 반석이 되셔서 변함없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고 지혜가 없어서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평생을 살아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아버지의 사랑을 온 마음과 인격으로 깨닫는 축복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을 올바르게 깨닫게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 신앙생활을 한 단계 성숙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로서 간절히 바라기는 이 노래의 말씀에 담긴 아버지의 마음이 가슴으로 깨달아지는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어리석고 지혜 없는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아버지께서 이 노래의 말씀을 주시는 이유입니다.
월요일 아침입니다.
신명기 31장, 32장은 참 마음이 아프고 힘듭니다.
감추어진 일을 나타난 일로 말씀하시며 이런 결과가 오지 않기를 바라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노래의 핵심은 옛날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비처럼 이슬처럼 내리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청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압 평지에서 하신 이 말씀, 이 노래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고 또 불렀지만, 풍요의 광야에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내 삶이 이들과 같이 되지 않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한다는 성령의 음성으로 들려졌습니다.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다고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음성이 가슴이 미어지게 들려오는 아침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풍요의 광야에서 우리는 옛날을 기억하라는 아버지의 음성을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고 구원의 은총을 허락하셨는데 지금 우리는 이 노래의 말씀을 어떻게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느냐는 음성처럼 들려지기 때문입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이 노래의 말씀은 또한 우리에게 증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는 묵상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위대하신 계획과 섭리가 선명하게 깨달아지는 귀한 말씀입니다.
[출처] 옛날을 기억하라(신명기 32:1~14절, 2024년 4월 22일 월요일 성경묵상)|작성자 꾸준함의 능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