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한자]驕慢(교만)
[字解]
驕 (뻣뻣할 교)
慢 (거만할 만)
[意義]
스스로 잘난 체하며 겸손하거나 온유함이 없이 건방지고 방자함을 이르는 말.
[解義]
한자성어 중에 '猿猴顚蹶失木枝'(원후전궐실목지)라는 말이 있다.
원숭이도 자빠져 나뭇가지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는 것이다.
원숭이는 그만큼 나무도 잘 타고 재주 잘 부리는 동물로 여겨졌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재주를 믿고 驕慢을 부리다 낭패 당하는 존재로도 여겨진다.
[西遊記]에 나오는 손오공만 해도 그렇다.
여의봉을 휘두르고 온갖 둔갑술과 복제술을 행하면서 자유자재로 요술을 부리는 존재지만,그도 결국은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재롱부리는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재주 있는 사람들은 驕慢하기 쉽고 원숭이처럼 작은 재주를 믿고 날뛰다가 봉변을 당하기 일쑤다.
'猿猴取月'(원후취월)이라는 한자성어에 담겨 있는 뜻이 그러하다.
원숭이가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고 한다는 뜻이다.
재주를 잘 부리는 원숭이라도 분수를 모르고 함부로 덤벼들다가는 물에 빠져 죽듯이,사람이 잔재주를 믿고 제 분수에 넘치는 일을 하다가는 도리어 화를 당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才勝德薄(재승덕박)인 것이다.
재주도 많고 영리한 원숭이지만,때로는 어수룩한 존재로 인식되기도 한다.
'朝三暮四'(조삼모사 )의 고사에 등장하는 긴팔원숭이가 그러하다.
송나라에 사는 狙公(저공)이 원숭이를 길렀는데,먹거리가 다 떨어져갔다.
그래서 원숭이를 속여 먹이를 줄이기로 했다.
먼저 원숭이에게 '아침에 상수리를 3개 주고 저녁에 4개 주면 괜찮겠느냐?'고 하자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내었다.
조금 있다가 다시 '아침에 4개 주고 저녁에 3개 주면 괜찮겠느냐?'고 하니 원숭이들이 모두 그 뜻에 따르면서 좋아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列子](열자)에 실려있다.
잔 재주를 믿고 驕慢을 부리는 자는 고개를 숙일 줄을 모른다.
驕慢의 驕가 그런 뜻이다.
驕의 喬는 '높다'는 뜻이니,驕는 키가 크고 힘센 말을 가리킨다.
키가 6척이 넘는 이런 말들은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하는데,이런 말처럼 억세고 뻣뻣한 상태를 驕라고 한다.
驕僭(교참) 驕婦(교부: 남편을 업신 여기는 아내)의 驕가 그런 뜻으로 쓰인 예이다.
慢은 대개 '게으르다' 또는 '더디다'는 뜻으로 쓰인다.
怠慢(태만) 慢性(만성) 緩慢(완만)의 慢이 그러하다.
이와 달리 傲慢(오만) 驕慢(교만) 등의 慢은 '잘난 체하다'는 뜻이다.
원숭이같은 재주나 여의봉이라도 있으면 좋겠지만,그보다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驕慢하지 않는 마음일 듯하다. 출처:부산일보 <김성진·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參考]
성서에서는 교만한 자란 하느님을 신뢰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이나 자신이 선택한 수단을 더 신뢰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조상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자(루가 3:8), 사회적 지위나 도덕적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자들을 비난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적 도덕에 따르면 교만은 죄이다.
따라서, 자아(自我)를 객관적으로 보는 대신 주관적으로 보는 일은 죄스러운 교만의 씨앗이 된다. 그래서 교만의 대상은 자아이다.
교만과 호색은 인간의 죄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간주된다.
R.니부르(1892∼1971)는 교만과 색욕은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게 하는 두 가지 요소라고 지적하였다.
[English]
교만 驕慢 pride; haughtiness; arrogance -하다 (be) proud; haughty; arrogant; vainglorious; conceited; puffed-up ·교만한 사람 a conceited[stuck-up] person; a smart aleck 《미》 ·교만하기 짝이 없다 be as proud as Lucifer[as a peacock] ·교만하게 굴다 bear oneself haughtily; act in a lordly manner ·그녀는 사과하기에는 너무 교만하다 She was too proud to apologize. ·그의 교만한 코를 꺾어 놓겠다 I'll teach him to act so arrogantly!
출처:NAVER영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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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驕慢),자존(自尊)할수 없는 자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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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식학’에서 말하는 7가지의 교만
교만이란 것은 자기를 지나치게 믿고 타를 업신여기는 것, 오만불손한 것을 말하는데 불교의 유식학(唯識學)에서는 이를 7가지로 나누고 있다.
1) 만(慢) :
가문 재산 재능 외모 등을 기준으로 우열을 가르고 그에 따라 자신보다 열등한 자에 대하여 자신은 그 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가치, 존재의 가치라는 것은 가문이나 재산이나 재능이나 외모 등으로 우열을 가를 수 없는 것임에도 우열을 가른다는 것 자체가 이미 교만이라는 이야기다.
달리 말하면 존재적 가치가 아닌 것들에 의해서 존재의 가치를 저울질한다는 것은, 하위적 가치가 상위적 가치를 능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교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2) 과만(過慢) :
가문 재산 재능 등에서 대등한 자에 대해서도 자신은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 또는 자신보다 우월한 자에 대해서도 대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3) 만과만(慢過慢) :
자신보다 우월한 자에 대해서도 자신이 우월하고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것
위에서 ‘만(慢)’의 경우를 보았지만, ‘과만’이나 ‘만과만’은 더 문제가 있다.
가문, 재산, 재능 등의 평가기준에 문제가 있는 것은 ‘만’과 같지만 우열에 대한 평가가 불가능할 정도로 자기도취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음에도 제가 잘 낫다고 생각하는가 하면 저 보다 분명히 잘 난 사람에 대해서조차도 자신이 더 잘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세속적 가치판단, 우열의 판단도 불가능한 처지에 빠져있다는 이야기다.
4) 아만(我慢) :
저 잘난 줄만 알고 남이 잘 난 것을 도대체 알아볼 수 없는 자기중심적 사고에 매몰되는 데서 빚어지는 것이다.
존재의 세계성, 관계적 합리성을 인식할 수 없는데서 오직 ‘나’ ‘내 것’만에 의지하게 되는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에서 초래되는 교만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모든 교만은 ‘아만(我慢)’의 변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5) 증상만(增上慢) :
뛰어난 깨달음을 얻지 못했는데도 그런 것처럼 행세하는 것이라든가 조금 아는 것을 가지고 전부를 알고 있는 것인 양 타인을 가르치려들고 군림하려는 것, 정신적으로 지배하려는 것 등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이 경우는 세속적 가치에 의한 지배의 야만은 포기한 것 같지만 그러나 영적 정신적 지배의 야만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을 뿐이라는 데서 더 지독한 교만일 수도 있다.
6) 비하만(卑下慢) :
가문 재산 재능을 기준으로 자신은 타인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이 있다. 비하감, 열등감도 여지없는 교만이라는 것이다.
없다고 해서 또는 갖지 못했다고 해서 비굴한 자는, 그것을 갖게 되면 반드시 교만할 자이기 때문이다.
열등감이나 비하감이란 것은 교만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7) 사만(邪慢) :
덕이 없으면서도 덕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덕이 없으면서도 사람을 지배하고 세상을 지배하려는 드는 것을 말한다.
이상에서 교만의 7가지를 살펴보았다.
교만이란 것, 결국 자타(自他)의 관계를 우열관계로 만들어 놓아야 속이 풀리는, 너와 나가 평등해서는 도대체 살맛이 나지 않는, 평등한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지배의 야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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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만, 자존(自尊)할 수 없는 자존심
자존심(自尊心)이란 것은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것으로 알고 있다.
또 자신의 재능이나 능력 등에 대한 자부가 강한 사람을 두고 자존심이 강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그러한 자존심이란 것은 교만일 뿐이다,
정말 자존심이란 것은, 무엇에 의지하고 기대지 않고 존재 그 스스로가 존귀한 줄을 아는 것이다.
우리의 통상적 자존심이란 것은 무어가 있어야 한다.
재능이 있어야 하고 돈이 있어야 하고 명예가 있어야 하고 외모가 있어야 한다.
존재적 가치랄까, 최소한 생명의 가치와도 무관한 그런 가치들에 근거해서 자존심이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말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이 말하는 자존심이란 것은 사실은 자존감이 없어서이다.
그러니까 스스로 존귀한 줄을 모르기 때문에 존재적 가치를 몰각하기 때문에 존재 외재적 가치에 의지해서 자부심을 갖는다는 이야기다.
결국 자존감이 없어서 교만한 것이다. 자존감 없는 자존심 그것이 교만이다.
인간이 자존할 수 없다는 것, 자기 가치를 모른다는 것, 존재 외재적 가치에 자기를 팔아넘기는 것, 그것이 교만의 기원이고 비극의 시작이라는 이야기다.
예컨대 교육학에서 도덕적 행위의 발달 단계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첫 째 단계는, 벌을 피하기 위해서 규칙을 따른다. 두 번째 단계는, 칭찬을 듣기 위해서, 다른 물질적 정신적 보상을 받기 위해서 규칙을 따른다. 세 번째 단계는, 사회적 비난이나 타인의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 규칙을 따른다. 네 번째 단계는, 사회적 계약이나 관습 때문에 규칙을 따른다. 마지막 단계는 자기 죄책감에서 규칙을 따른다.
참고) <콜버거 도덕발달의 철학>(김민남역)의 <도덕단계의 정의>에서는 6단계로 정리하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이해의 편의상 그것을 그대로 옮기지 않고 필자가 5단계 정도로 그 요지만을 편집했다. 이점 양해를 구한다.
그러니까 진정한 도덕성은 어떤 징벌이나 보상에 의존하지 않는다.
다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자존감 때문에,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서 자기 죄책감에서 할 뿐인 것이다.
진정한 도덕성은 그 어떤 외재적 구속이나 대가에 구애되지 않는다.
오직 자존감에서 발휘된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이것이 자존심의 진면목이라고 할 수 있다.
수행(修行)이란 것이 여러 가지로 정의될 수 있겠지만 인간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공부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가치가 아닌 것들, 잡다한 가치들에 스스로를 팔아넘기고 그에 휘둘리며 살았고 또 남을 휘둘면서 살았던, 그래서 이래저래 만신창이가 된 자기를 수습하고 회복하는 공부, 자기 가치를 발견하고 사이비 가치로부터 해방되는 것, 진정한 자존심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수행이라는 공부의 목적이 아닐까?
출처:문화일보 글.배영순(영남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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