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립(崔震立)(1568~1636) 장군
1626년에는 경흥부사를 거쳐 공조참판을 지냈다. 1630년(인조 8년) 전라좌수사를 거쳐 경기수사에 올랐으며,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게 되었다.
1632년에는 교동부사가 되었고, 1633년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를 거쳐 덕원부사에 제수되었다. 1634년인조 12년)에는 전라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명으로 공주 영장으로 감사 정세규의 좌영장으로 출진하여 용인 험천에서 청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사후 1637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경주의 숭렬사(崇烈祠), 경원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출처 : 위키백과)
경주 최씨는 최치원을 시조로 시작해서 총 26파로 나뉘며,
그중 사성공 최예의 6대손이자 최눌의 손자 정무공 최진립장군이 기거한 충의당 건물
(최진립 장군은 1568년 경주의 현곡이라는 동네에서 태어남)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이조3길 28-17
지정 현황: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99호 (1993.02.25 지정)
현재 이 건물이 최진립 장군이 기거하시던 사랑채로서 처음에는 흠흠당(欽欽堂)이라고 하였으나 1760년 경 중수를 하고난 뒤에 충의당(忠義堂)으로 고쳤다고 함
임란 의병장, 69세에 병자호란 다시 참전
1636년 12월 13일,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나라 군대는 며칠 지나지도 않은 12월 16일에 인조가 피신한 남한산성까지 포위했다. 조정은 부랴부랴 각 도에 공문을 보내 임금을 지킬 것을 명령했다. 서울에서 거리가 가까운 충청도 관군이 가장 먼저 북으로 달려갔고, 최진립 역시 69세라는 많은 나이에도 군사를 일으켜 남한산성을 향해 진격했다. 그가 전장으로 달려가기 직전, 충청감사 정세규가 '늙어 전장에 나가기 마땅치 않다'고 했지만 장군이 "내가 늙어 싸워서 이길 수 없더라도 한번 죽어 나라에 보답할 수는 있다"고 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chosun.com ckawh)
충노비각
최진립 장군과 함께 순절한 충노(忠奴) '옥동'과 '기별' 비(碑)
최진립 장군의 15대손인 서예가 최채량 옹은 충노각 앞에 친필로 직접 '主爲忠臣不爲忠奴乎(주위충신불위충노호)'라 쓴 빗돌을 세웠다. '主爲忠臣不爲忠奴乎'는 조선 시대의 경주 지리지인 <동경지> 충의편에 나오는 말로 '주인이 충신으로 나라에 몸을 바치려는데 어찌 충노가 되지 못하리오'라는 뜻이다. 이 문장은 용인 험천 전투*에서 장군이 자신을 평생 모시느라 환갑을 넘긴 두 노비에게 "너희는 집으로 돌아가 목숨을 지키도록 하라"고 명령했을 때 두 노비가 주인에게 대답한 말이기도 하다.
(chosun.com ckawh)
최진립 장군이 손수 심었다고 전하는 회나 무
(일제 강점기와 6.25 당시 한때 고사했으나 다시 소생하였다고 함)
2018. 4. 8 대경상록자원봉사단 일행은 충의당을 방문하고 역사의 영웅이며 난세를 지키신 위대한 그분들을 추모하였다.
(김성호 부단장, 임영태 부단장겸 대구시행정동우회 여행클럽 재무, 사진작가 정승진 선생님)
1636년 병자호란 발발 후 69세의 노구를 끌고 청군과 싸우다 용인 험천 전투에서 순절했다. 전사 1년 후 시신이 수습될 당시를 기록한 글에 따르면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박혀 있었다고 한다. ...........................................................................................................
조선 역사의 숨은 영웅 '최진립 장군'의 위대한 애국정신을 현지에서 제대로 알게된 후 좁고 작은 사당문을 나오는 찰나 뒤에서 준엄한 목소리가 귀청을 찔렀다.
"너는 이 조국을 위해서 무슨 일을 했느냐?'
아! 말문이 막히고 고개를 제대로 들 지 못하는데 주위에는 동백꽃, 진달래꽃, 박태기나무의 진한 자주꽃 그리고 벛꽃들의 무수한 낙화들이 거센 바람을 타고 내 가슴을 파고 들었다.................
최진립의 손자 최국선은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이가 없도록 하라는 마음가짐으로 곳간을 열어 사람들을 먹여살렸고, 이는 '경주 최부잣집'의 명성으로 이어진다.
최국선
조선시대 선조 ~ 현종 때 살았으며, 본관은 경주 최씨이다. 조부는 최진립, 아버지는 최동량이며 조부인 최진립은 청나라와의 전쟁 (병자호란)에서 전사하였다.
최국선은 농사 기술을 밤낮으로 연구 하고, 세금을 깎아주고 담보 문서도 태워 없앴으며,
나그네 에게는 늘 후한 대접을 하고, 흉년이 들었을 때에도 사방 100리 이내에는 굻어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방침을 세워 배풀었다. 최국선은 이런 마음 씀씀이로 인해 조선 전체 중에 가장 부자인 가문중 하나로 꼽힐수 있게 된 것이다.
최국선은 백성을 돕고 실생활에 쓰이는 학문 (농업) 을 연구하여서 실학자라는 말도 있다.
사진 촬영(2018. 4.8) : 가야돌 (아마추어)
감사합니다.
첫댓글 수고 많았습니다
안보이는 부분까지 잘 알려 주시어 감사합니다
잘 정리해서 보고 이해가 더 존네요
잘 보았습니다
문화재해설문 펀집술 정말 전문가 답습니다. 평소 열심하신 보람이 여러면에서 발휘되고 있어 자랑스럽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잘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늦게사 역사의 현장에서 가치를 알게 된 자신이 부끄러울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