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천읍성 안은 지금의 성내동(城內洞)으로 옛 웅천의 다운타운이었다
웅천우체국과 치안센터, 행정복지센터, 노인복지회관 등 행정기관과
웅천농협과 하나로마트, 웅천시장, 웅천고등학교 등이 있다
주기철 목사가 다녔던 옛 웅천개통학교(지금의 웅천초등학교)도 이 성내동에 소재하였고
13세부터 다녔던 웅천교회도 이곳에 있었다
웅천초등학교와 웅천교회는 2018년과 2015년에 각각 남문동으로 이전하였지만
이제는 주기철 목사의 인생역정을 따라 발자취를 따라 가본다
벧엘교회
좁은 성내동 안에 벧엘교회를 비롯한 교회가 4개나 있다
이 벧엘교회가 옛 웅천교회가 남문동으로 이전하기 전의 교회였다
구 웅천초등학교가 위치했던 곳에는 곰내유치원이 자리잡고 있고
웅천초등학교의 체육관이였던 웅비관은 바로 옆의 웅천고등학교 대강당이 되었다
주기철 목사 생가터와 기념관은 성문 밖 길 건너편에 있다
주기철 목사 기념관
기념관 옆 주기철 목사의 생가터에는 2022년 7월 복원된 건물이 있고
그 앞에는 명상에 잠긴 주기철 목사의 동상이 있다
항일독립운동가이자 신사참배거부 항쟁으로 옥중 순교한 주기철(朱基徹) 목사(1897~1944)는
1897년 11월 25일 경남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현 진해시 웅천 1동)에서 태어났다
1906년 웅천 개통학교에 입학 후 개통학교 졸업반 때 춘원 이광수의 강연을 듣고 감명을 받아
이광수가 교사로 있던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 1913년에 입학하여 1916년 3월 제7회 졸업생으로 졸업을 한다
1916년 4월 신설 학교로서 총독부 설립 인가가 나지 않은
서울의 조선예수교대학교(연희전문학교의 전신) 상과에 진학했으나 일 년도 안되어 학업을 중단한 뒤
1922년 3월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본격적으로 신학공부를 시작하여 목사가 되었다
이제 주기철 목사 기념관 안으로 들어 간다
기념관은 2015년 3월에 개관하였고, 2021년 11월 30일에 국가보훈부 보훈 시설로 지정되었다
2022년 4월 18일에는 기독교 사적 제41호로 지정되었다(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1층에 제1 전시실(면류관), 영상실(다목적홀, 임마누엘), 화장실이 있으며
2층에 제2 전시실(나라사랑), 기획전시실, 소양홀, 구국기도실(십자바위), 사무실, 회의실, 수장고가 있다
1923년 봄부터 경남노회 소속 양산읍교회 조사(助事/전도사)로 부임하여 첫 목회에 발을 들여 놓았다
1925년 12월 22일 평양 장로회신학교 제19회 졸업생으로 졸업하고
12월 30일에 열린 제20회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에는 부산 초량교회(1926.1.10~1931.7), 마산 문창교회(1931.9.1~1936.7)를 거쳐
평양 산정현 교회(1936.7~1944.4.21)를 마지막 시무로 순교하였다
기독교 학교에 대한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로 인해
당시 평양에서는 전통 깊은 기독교 학교들이 폐교될 위기에 처했다
주기철 목사는 1938년 봄 신사 참배 거부로 평양경찰서에 1차 구속을 당하였고
같은 해 8월 다시 검속되었고 1939년 1월 29일 대구경찰서에서 석방되었다
이후에도 신사 참배를 하지 않는 목사나 장로는 주일 예배에서 설교나 기도를 하지 못하도록 했으나
주기철 목사는 개의치 않고 산정현교회에서 설교를 계속했고 1939년 10월에 다시 3차 구속이 되었다
1940년 9월 20일 신사 참배 거부자에 대한 일제 검거 때 주기철의 마지막 검속도 이 무렵에 이루어졌다
1944년 4월 13일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병감으로 이감되었다가
1944년 4월 21일 밤 9시경 4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유해는 평양의 돌박산 기독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19년 기미독립운동 때에는 '웅천 20인 지도부'의 일원으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체포된 뒤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캘리그라피 작가 청현재이(淸炫才怡)의 캘리그라피 작품들
2016년 6월에는 모두 4코스로 이루어진 '주기철목사 성지순례길'이 조성되었다
주기철목사기념관 → 웅천초등학교 → 옛 웅천교회 → 현 웅천교회 → 경남선교120주년기념관,
→ 마산 문창교회 → 호주선교기념관 → 함안의 손양원목사기념관 및 생가로 이어지는 코스다
<참고사진> 마산 무학산의 십자바위
마산 문창교회 목사로 봉직하면서 무학산 학봉 인근의 십자바위에 올라
나라와 교회를 위한 눈물의 기도를 드렸다는 곳이다
<참고사진> 2021. 8. 15. 십자바위에서의 신형화
기념관 바로 앞에는 대한예수교 장로회의 경남노회가 있다
이제 주요한 유적지 답사는 끝이 났으나
이효준의 글에 묘사된 나머지 황포돛대노래비와 흰돌메공원, 웅포해전기념비를 보러 간다
특히, 흰돌메공원과 웅포해전기념비에서는 와성만 건너편의 남산(웅천왜성)을 바라보며
그 옛날 웅포해전의 현장에서 치열했던 전투를 가까이에서 실감해보고 싶었다
주기철 목사 기념관에서 택시를 불러 황포돛대노래비에서 내려 웅포 방향으로 되짚어 걸어 가면서
흰돌메공원이랑 웅포해전기념비를 답사할려고 하였는데
택시기사가 황포돛대노래비를 지나치고 이곳에 내려주는데 노래비가 있는 곳은 이미 지나와 버렸다
택시기사도 흰돌메공원은 알고 있던데 노래비는 처음 듣는단다
나도 황포돛대노래비가 왜 강가가 아닌 바닷가 거기에 있는지 자뭇 궁금하였다
택시에서 내린 곳은 남양동 남양항 바닷가였다
하는 수 없이 노래비가 있는곳까지 약 800m 거리를 터덜터덜 걷는 수 밖에...
쏟아져내리며 찌르는 한여름 뙤약볕 아래의 800m는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다^^
황포돛대노래비
바로 뒷쪽이 와성만과 웅동만, 안골만이 서로 맛물리는 잔잔한 바다인데
와성만 북쪽 해변의 매립공사를 한다고 가림막이 처져있다
작은 돛단배 모형을 앞에 두고 우뚝 선 두 개의 돛대 형상의 탑에는
노래 가사에 등장하는 석양 무렵의 해와 갈매기, 파도가 그려져 있는 것이 보인다
마지막 석양빛을 깃폭에 걸고 흘러가는 저 배는 어디로 가느냐
해풍아 비바람아 불지를 마라 파도소리 구슬프면 이 마음도 구슬퍼
아~ 어디로 가는 배냐 어디로 가는 배냐
황포돛대야
(작사 이용일, 작곡 백영호, 노래 이미자)
이 노래비가 여기에 있는 사연은
이 노래를 작사한 이일윤(필명 이용일) 씨가 이곳 진해시 대장동 출신이라서
2003년 9월에 당시 진해시에서 영길만 도로변에 건랍하였다
작사가가 경기도 연천의 포부대 근무 당시 세모를 앞둔 12월 어느 눈 오는 날 밤
고향 바다인 영길만을 회상하며 노랫말을 만들었다고 한다
가림막 사이 공사차량 출입문에서 촬영한 광경
와성만 남쪽은 예전에 일직선으로 매립이 다 이루어졌고
지금은 북쪽 해안을 대대적으로 매립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웅포해전 당시의 와성만 폭이 약 600m였다고 하였는데 이 공사가 끝나면 도대체 얼마나 좁혀질려나?
흰돌메공원
와성만을 내려다 보는 전망대와 화장실, 주차장이 있고
육교를 건너면 백석산 쪽에 흰돌메공원이 있다
흰 돌이 많은 산이라고 백석산(白石山)이라 부르는데 우리말로 흰돌메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지척의 와성만 모습 / 매립공사로 만의 폭은 계속 더 좁아지고 있다
수륙 협공의 웅포해전 당시, 이순신 장군은 의병과 승병을 웅천왜성 서쪽의 제포로 보내어 상륙하게 하고
이억기 휘하의 일부 선단에게도 흰돌메공원 동쪽 남양리로 상륙하게 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수십 척의 조선 함대들도 이곳 와성만 입구까지 진입해 들어가
남산의 웅천왜성을 향해 포격을 퍼 부었다
웅포해전 기념비와 남산
지금은 와성만이라는 말이 없어지고 와성지구로 부른다
남산 기슭 바다 끝에는 ‘와성마을’이라고 새겨진 표지석이 있는데 몇 호 되지 않는 조그만 마을이란다
삿갓 모양의 남산 모습
남산은 임진왜란 때 웅천왜성(남산왜성)이 있던 곳이다
웅천왜성은 전체 왜성 가운데 울산의 서생포왜성 다음으로 크다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가 진을 치고 있던 일본 수군의 전진기지였으며 부산포왜성 다음의 제2거점이었다
이번 답사를 위한 자료만 잔뜩 챙겨놓고 날씨 때문에 미룩미룩하다가 차질없이 답사를 마치고나니
해묵은 숙제를 해결한듯 후련하다
버스정류장에서 땀을 식히며 20여 분 기다리다가 315번 버스를 타고 용원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