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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라
딤전 1:1-11
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3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5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6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8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9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10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11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딤전 1:1-11 / [인사] 우리의 구세주 하나님과 우리의 희망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나 바울이 2)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주님 안에서 나의 아들이 된 디모데여, 그대에게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비와 평화가 함께 하기를 빕니다. 3-4) [거짓 교설에 대한 경고] 내가 마게도냐로 떠날 때 간곡히 일러둔대로 그대는 에베소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릇된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의 입을 막으시오. 그들이 조작해 낸 이야기나 신화, 그리고 끝없는 족보 이야기를 그치게 하시오. 그린 것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데 방해가 될 뿐 아니라 쓸데없는 의문과 논쟁을 불러 일으키게 합니다. 5)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이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가득 차고 생각이 정결해지며 믿음이 굳세어지는 일입니다. 6) 그러나 이런 거짓 교사들은 이 전체적인 목표를 보지 못하고 논쟁과 어리석은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7)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명성을 얻으려고 하지만 그 율법이 실제로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8)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사용되기만 한다면 율법은 좋은 것입니다. 9) 하지만 율법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미워하고 저주와 욕설을 퍼부으며 반항하는 자, 부모를 거역하고 살인하는 죄인들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10-11) 즉, 율법은 부도덕하고 불결한 자들, 곧 동성연애에 빠진 자, 어린이를 유괴하는 자, 거짓말하는 자, 거짓 증거하는 자 그리고 그 밖에 우리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을 알아내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 복음을 전하는 심부름꾼으로 임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편지의 수신자인 디모데에게 인사와 축복을 하고,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둔 이유가 다른 교훈을 전하는 자들을 경계하게 하기 위한 것임을 밝힙니다.
인사(1-2) 바울은 디모데를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라고 부릅니다(2). 바울은 디모데의 회심에 관련된 인물이고, 디모데는 바울의 사역에 동참했으며, 바울의 가르침과 본을 성실하게 따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를 표현함으로 교회에서 디모데의 권위를 세워가고자 했습니다.
다른 교훈(3-7) 바울은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둔 이유를 밝힙니다.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3). 거짓 교사들은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대한 이야기를 가르치며 의롭지 못한 삶을 정당화 합니다. 그들이 가르쳤던 신화는 거짓으로 꾸며낸 어리석고 무익하고 허황된 이야기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들이 가르친 다른 교훈은 하나님의 경륜(계획)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4). 바울은 이 교훈을 전하는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입니다(5). 청결한 마음은 영과 내면이 죄로부터 깨끗해진 마음입니다. 선한 양심은 옳은 것을 행하고 그른 것을 거부하는 양심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은 아무것도 꾸미지 않는 천연의 모습을 가진 믿음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믿음은 거짓되고 때 묻은 동기, 자기의 권위와 이익을 위한 동기가 아닌 신실한 동기를 가지고 믿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은 이와 같은 목적에서 벗어나 자기 이익을 위해 쓸데없는 논쟁을 일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율법의 선생이 되고 싶어 했지만 자신들이 가르치는 말을 확실히 알지도 못했던 자들이었습니다(7). 다른 교훈이 있고 잘못된 믿음의 동기가 있다는 것은 참된 교훈과 바른 믿음의 동기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율법(8-11) 거짓 교사들은 선생이 되고 싶어 했지만 결국 자신들이 하는 말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것은 율법의 본질과 기능을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바로 사용한다면 선한 것이라고 말합니다(8). 율법의 선한 목적은 죄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죄인들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9).
적용: 거짓 교사들은 잘못된 믿음의 동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당신의 믿음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상대적으로 자신이 조금 더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무의미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 때 죄에 대한 형벌을 보게 되며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절망하게 됩니다. 그때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보게 되고 일평생 예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 설 교 >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
딤전 1:1-11 / 이수영 목사
사도 바울의 서신 중에는 <로마서>로부터 <데살로니가후서>까지의 편지들처럼 교회공동체에 보낸 것도 아니고, <빌레몬서>처럼 사사로운 개인에게 보낸 편지도 아니며, 교회의 책임 있는 직책 담당자에게 보낸 편지들이 있습니다. 디모데에게 보낸 <디모데전서>와 <디모데후서>, 그리고 디도에게 보낸 <디도서>가 그런 편지들입니다. 이들 편지에서 사도 바울이 다루는 전체적인 주제는 기독교공동체에서의 지도력입니다. 이 지도력과 관련하여 바울은 교회 안에서 거짓 교사들이 그릇된 교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해야 함을 말하고, 교회의 조직과 행정, 그리고 예배에 관해 말하며 지도자들이 가져야 할 성품을 말합니다.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의 훌륭한 종이 되는 방법과 그 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디모데나 디도 같은 자기의 동역자들이 자기에게서 위탁받은 교회들을 잘 돌보게 하기 위해서 쓴 일종의 목회지침서 같은 편지들이기에 그것들을 한 데 묶어서 <목회서신>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소아시아 출신의 젊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유대계 어머니와 그리스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때 그의 선교사역에 동반자와 보조자의 역할을 하도록 발탁되었습니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의 여러 서신에서 공동발신인으로 언급될 정도로 그의 가장 절친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믿음 안에서 참 아들”(본문 2절)이라고까지 불렀습니다. 그것은 그가 바울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신실성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고전4:17에서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라고 쓴 것으로 봅니다. 그 디모데를 바울은 자기의 선교활동으로 생긴 신생 교회를 방문하도록 자주 파송했습니다.
본문 2절에서 사도 바울이 쓰기를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한 것처럼 <디모데전서>는 교회에 보낸 편지가 아니라 개인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본문 3절에서 사도 바울이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이라 쓴 것은 이 디모데전서가 사도 바울이 디모데로 하여금 에베소 교회를 목회적으로 잘 돌보게 하기 위해서 쓴 목회지침서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이 그의 제3차 전도여행의 초기에 거의 3년 간이나 에베소에 머물며 세운 교회입니다. 바울은 그의 제3차 전도여행의 끝 무렵에 거짓 교사들의 출현이 에베소 교회를 병들게 할 것을 예감하고 그 교회 장로들을 불러 경고한 바 있습니다(행20:17-30). 그때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행20:29-30) 그가 마게도냐로 가면서 디모데를 데리고 가지 않고 에베소에 머물게 한 것은 그곳 교인들이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하며 경계하라 한 에베소 교회에서의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은 1세기에 교회를 위협했던 영지주의 운동과 관련이 있고 유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율법 규정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교회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편지의 첫 머리에서 의례히 쓰는 인사말인 1-2절에서 우리가 먼저 주목할 말은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소망이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은혜의 언약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모든 사람에게 유일하게 참된 길이시고 진리이시며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문이시고, 그의 재림이 우리의 구원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는 우리에게도 이 세상에게도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연달아 일어나는 방화사건, 가족 살인사건, 아동폭행사건 등을 보며 소망이 있다고 여겨집니까? 정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와 소망을 줍니까? 그 어떤 여건 속에서도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는 용서와 구원과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무리 험하고 악하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천국과 복된 삶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에나 어떤 여건 속에서도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2절 하반절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하는 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동일하게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우리에게 임할 것으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소망이 되시는 것은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와 동등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3-4절에서는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로 갈 때 디모데는 에베소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면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에베소는 오늘날의 터키에 해당하는 소아시아의 수도로서 로마 제국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마게도냐는 오늘날의 북 그리스에 해당하는 로마의 점령지였습니다. 데살로니가가 그 수도였으며 빌립보도 마게도냐에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봅니다: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영지주의적 체계에서는 신화와 신들의 족보와 구약성경의 인물들에 대한 사변적 해석을 자세하게 늘어놓는 것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고 교인들이 거기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게 했다는 말입니다. 교인들이 만일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 다른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따르면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청지기가 되어 그의 뜻을 충실하게 받드는 일보다는 쓸데없는 사변과 논쟁만을 일으킬 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 신자들이 자기가 전해준 교훈만을 따르게 할 것을 디모데에게 지시하며 그 이유를 제시합니다. 본문 5절에서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하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의 다른 교훈이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인 반면에 사도 바울의 교훈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말은 우리에게 우리의 신앙생활의 중요한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게 합니다. 그것은 곧 사랑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신학적 사변과 논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에 있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냥 아무런 사랑을 말하지 않습니다.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을 말합니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받아들임으로써 회복해야 할 것이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이며 그것들을 가지고 이루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우리의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자리 잡아야 하지만 참된 사랑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임을 명심하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런 마음과 양심과 믿음을 주시기를 날마다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자기가 가르친 교훈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밝힌 후 이를 따르지 않는 자들의 행태를 지적합니다. 본문 6-7절입니다: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복음을 바로 알지 못하고 그 바른 교훈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계속해서 율법을 들먹거리며 그것을 멋대로 해석하고 자의적으로 적용하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말하고 확증하는 것이 무슨 말인지조차도 모르며 헛소리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안의 거짓 교사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사용한다고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율법을 오용하고 있다고 선언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새로운 계명을 세우려고 하면서 율법을 제멋대로 오용하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율법은 범법자들을 고소하는 것이지 복음을 따르는 이들을 고소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며 거짓 교사들이 말하는 어떤 새로운 계명에 미혹되지 말고 복되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영광의 복음에서 나오는 바른 교훈만을 따를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본문 8절 이하를 봅니다: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율법의 행위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그렇다고 율법이 폐기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주신 선물이고 하나님의 백성의 표지입니다.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율법을 적법하게 쓰는 것이겠습니까? 먼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참된 의도와 그 바른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조명되어야 율법의 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두 가지 사랑으로 요약하셨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 사랑을 모를 때, 사랑이 없이 율법을 대하고 율법대로 행할 때 위선과 온갖 범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 9-10절에서 언급한 온갖 종류의 사람들 즉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와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 하는 자들”은 모두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랑을 모르거나 사랑이 없는 자들입니다.
10절의 “남색하는 자”란 요즈음 흔히 하는 말로 “동성애자들”을 가리켜서 한 말입니다. 동성애자들이 분명하게 불법하는 자들 명단에 들어있음을 똑똑히 보아야 합니다. 그것도 사랑이라고 그들은 강변할지 몰라도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참된 사랑을 모르거나 참된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러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날이 갈수록 이 세상에는 온갖 요사스러운 말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미혹되기 쉬운 세상입니다. 사탄의 궤계는 교묘한 말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변질시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그 꾀와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가 해석해주시고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말씀과 사도들이 받아 전해준 바른 교훈을 충실히 따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마지막 절에서 쓰기를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했습니다. 그가 가르친 교훈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복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복음의 교훈을 따르면 복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전한 복음은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입니다. 그 복음을 따르며 그 교훈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영광을 누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각종 이단의 침투에 매우 취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스스로 보수정통이라고 주장하는 교단일수록 이단들의 온상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연합기구가 분열되어 있고 그 사업도 좌초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성경적 복음의 순수성과 사도적 신앙의 전통을 바르게 지켜나가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교회입니다. 이 교회 안에서 말씀 위에 바로 서고 건강한 신앙인으로 날마다 더욱 성숙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
딤전 1:1-2 / 양향모 목사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목회에 필요한 서신을 쓰면서 먼저 간단하게 인사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인사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그리스도 예수님”이라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우리 편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너무나 귀한 것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구주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은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의 편이 되시지만 특별히 우리를 죄에서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하시는 일에 우리의 편이 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서셔서 우리만 특별히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보내주셨고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셔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서신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간단하지만 아주 중요한 사실로 수식을 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사도바울이 그런 하나님의 사도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하시는 분이고 바울 자신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그런 일에 대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바울 자신이 하는 일은 그런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그런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사명을 받은 사람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편지를 쓰는 사도바울에 대해서 그 편지를 받는 디모데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이지만 그 편지를 받는 디모데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중점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오늘 설교의 목적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
본문 1절에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라는 말의 헬라어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라는 단어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사도라는 칭호는 원래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배운 열두제자에게 쓰는 호칭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열두제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도라는 호칭을 썼습니다. 바나바, 디도, 아볼로, 실라, 디모데에게도 사도라는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이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특별히 부르심을 받아서 복음 전파자로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예수님의 사도라는 것에 대해서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예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비난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다가 감옥에 가두기도하고 죽이기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사도성에 대해서 시비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임명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기사를 세 번이나 기록함으로 자신이 예수님께 직접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예수님을 만나서 제자가 되고 사도가 된 것이지만 바울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에 계시는 예수님을 보고 만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면서 고난 당하시는 모습이나 아니면 기적을 행하시는 그런 모습에 익숙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설교할 때도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설교를 합니다.
바울은 승천하셔서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 계시는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이 계시는 그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해서 설교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나 바울이 전하는 것은 다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라는 것을 서로 합의하고 동의하였습니다. 베드로의 복음이나 바울의 복음은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고 오직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만이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에 합의했습니다.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부수적으로 얻은 지식은 베드로와 바울이 동등한 지위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주로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바울은 주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두 사람의 지위는 다 같이 사도로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을 일으키면 바울도 그렇게 일으킵니다. 베드로가 죽은 사람을 살리면 바울도 죽은 사람을 살립니다. 두 사람이 전하는 복음도 동일하고 성령님께 받은 능력도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과 예수님 이름 앞에 ‘구주’와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붙여서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주나 그리스도나 다 같이 구원과 관계된 호칭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사망에서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을 받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에 보냄을 받은 자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 사도들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도 사도신경이라고 부릅니다. 사도들의 신앙고백을 잘 정리하여 고백을 하기 때문에 사도신경이라고 하고 사도신경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전한 그 복음을 따르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행한 일을 기록한 책이 사도행전이고 그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우리가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사도들이 시작한 그 교회입니다. 사도들이 세계만방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웠고 오늘날 우리나라까지 그 복음을 따라 교회를 세우고 함께 교회에 모여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사명도 이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된 모든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계만방에 전하게 하는 사명을 가지게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선교를 하는 이유는 교회의 사명이 그것이고 우리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사명도 복음을 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개혁주의 선교회를 통하여 필리핀과 태국과 인도네시아에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개혁주의 선교회는 우리 주변의 개혁주의 목사님들이 시무하는 14개 교회가 모여서 함께 선교하는 단체입니다.
선교회 이름을 개혁주의 선교회라고 한 것은 선교사들이 선교한다고 하면서 그들이 가장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지 않는 선교사들이 많기 때문에 복음을 바르게 전하는 선교사들을 돕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개혁주의 선교회라고 했습니다.
제가 2월 3일부터 일주일간 인도네시아에 단기선교를 나갑니다. 인도네시아에 있는 현지 목사님 50명에게 개혁주의 설교가 무엇인지 복음을 설교하는 것이 무엇인지 특강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현지 목사들을 개혁주의 목회자로 계속 재교육하는 일을 우리 선교회에서 맡아서 하기 위해서 현지 상황을 둘러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는 지역아동센터나 청소년 공부방도 다 선교를 위한 기관입니다. 해외 선교는 복음을 외국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라면 국내 선교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선교라고도 합니다.
아동센터가 옛날에는 많은 아이들이 교회로 오게 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이들도 교회 오기를 싫어하니까 그 역할을 잘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많은 노력을 해서 아동센터를 세우고 우리 성도들이 후원해서 운영하고 있는데 그저 아이들 공부나 시키고 일하는 사람 월급이나 주는 곳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목적이 전도라는 것을 알고 전도를 위한 선교센터가 되도록 기도해주시고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난 6년 동안 베드로나 바울을 위시한 사도들이 세계선교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희생하고 헌신하는 모습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살펴보는 것으로 끝나고 나도 그런 각오로 선교해야 하겠다고 다짐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안타깝습니다.
올해는 우리 전 성도들이 선교를 위해서 노력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선교를 나가기도 하고 선교를 후원하기 위해서 선교헌금을 꼭 작정하시고 매달 선교헌금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로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말로만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을 고백하는 진정한 성도로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
본문 2절 상반 절에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의 편지를 일차적으로 받는 사람은 디모데이며 바울은 그를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라고 말합니다.
디모데와 바울의 만남은 사도행전 16장을 설교할 때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디모데가 누구인지 잘 설명해 드렸습니다. 디모데는 로가오니아 사람입니다. 바울이 소아시아지방인 더베와 루스드라에 갔을 때 디모데를 만났는데 더베와 루스드라가 있는 지역을 로가오니아라고 합니다.
사도행전에 바울이 루스드라 지방에 두 번 간 일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방문 때 디모데가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것으로 보이며 3년쯤 지난 후에 두 번째 방문했을 때 바울을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함께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디모데는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에게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헬라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기보다는 어머니와 외할머니와 함께 자라면서 유대인으로의 성장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의 이름인 디모데의 뜻은 “하나님을 공경한다.”라는 뜻입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으로 자랐으며 바울을 만났을 때 그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인데 어디 가든지 먼저 그곳에 사는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 자신이 유대인으로서 유대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성경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쉬웠을 것이고 그들을 먼저 기독교인이 되게 하여서 그들과 함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가 쉬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부모님 때부터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있고 부모님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지만 자신이 먼저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이 두 신앙이 서로 장단점이 있습니다.
부모님께 신앙을 물려받은 사람은 자신의 체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신앙이 미지근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뿌리가 든든해서 쉽게 흔들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체험적이고 스스로 깨달음이 있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그 신앙이 뜨겁게 보입니다. 그러나 뿌리가 깊지 않아서 쉽게 흔들린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모태신앙의 장점은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신앙을 보고 자라서 주일을 지키고 주일날마다 교회에 나가는 것은 잘합니다. 교회 생활이나 헌금 생활이 무엇인 줄 알고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보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주일을 지키는 것이나 교회에 헌신하는 일을 잘하는 것이 비교적 어렵습니다. 주일날마다 교회에 나오는 것이나 교회를 위해서 헌금하는 일은 그렇게 쉽게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가 쉽게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고 또 바울을 따라 목회자로 나설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어려서부터의 신앙 경험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미 율법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율법의 핵심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뜻이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임을 알았을 때 쉽게 그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디모데가 처음 바울을 만났을 때 모습을 늘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4장에 그때의 상황이 기록되었습니다. 바울이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악감을 품게 하였고 그 악감을 품은 사람들이 바울을 모욕하고 돌로 치고 죽이려고 달려들었을 때 디모데가 살고 있는 루스드라로 도망하여서 거기서 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안 디모데가 보통 마음으로 바울을 따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안전이 보장된 것도 아니고 출세가 보장된 것도 더더욱 아니고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서 죽임을 당할 줄도 모르는 그런 일에 쉽게 따라나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모데가 바울을 따라서 그런 험한 일을 하기 위해 따라나선 것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고 하나님께 대한 공경심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천국 복음을 전하면 바울 시대처럼 돌멩이로 공격을 받지는 않지만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천국보다는 이 세상에서 복을 받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천국 복음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른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디모데는 그런 불리한 환경을 잘 알았지만 바울을 따라나섰습니다. 바울과 함께 선교도 다니고 함께 옥에 갇히기도 하고 그러다가 에베소교회의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를 “나와 함께 수고하는 자”(롬 16:21)라 하였고 “내 귀하고 신실한 아들”(고전 4:17)이라고 했고 오늘 본문에서 “믿음의 참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믿음의 아들이요 신실한 후계자로서 바울을 이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로서의 삶을 산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디모데전서의 발신자인 사도바울과 수신자인 디모데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산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이 교회 안에서 실천될 수 있도록 노력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성경의 핵심으로 알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그들의 뒤를 따라서 복음을 전도하고 선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 복음을 따라 사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바른 교훈 따라서
딤전 1:1-11 / 박조준 목사
오늘부터 디모데전서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디모데서는 소위 목회서신이라고 일컬어지는 바 울의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간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소아시아 일대에 중대한 복음적인 충격을 던졌습니다. 에베소에 주님의 몸된 교회가 세워지고 에베소 교회를 중심으로 인근 지역까지 복음이 활발하게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떠나면서 앞으로 자기가 떠나면 그가 복음의 씨를 뿌리고 양육했던 이 교회가 신앙적인 면에서나 사상적인 면에서 어려움을 당하게 될는지 모르겠다는 예 견이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바울의 그 예견이 적중했습니다.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떠나면서 교회의 지도자들에 게 에베소 교회에 대한 부탁을 하면서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고 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교회의 지도자의 책임은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의 양무리를 잘 양육하 는 일입니다. 그 다음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자기들로 끌어 자기를 쫓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 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 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떠난 다음 에베소 교회에 중 대한 신앙적인 시련이 닥치리라는 예견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예견 그대로 바울이 떠난 후 에베 소 교회의 성도들은 그들의 신앙을 흔들게 만드는 이단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까 든든히 서 있는 성도들도 있었지만 일부 성도들 가운데는 신앙적인 시험에 빠져 믿음이 흔들 리기도 했고 더러는 교회를 떠나기까지 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수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믿음의 제자요. 아들이 라고 불리는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게 하고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신앙적인 안정을 위해 돕도 록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디모데전서를 쓰게 한 중요한 배경입니다. 이 디모데전서는 사도 바울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기록한 편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에서는 올바른 신앙생활의 지침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첫번 째 로마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에 쓴 것으로 주후 63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러면 그 당시 에베소 교회의 형편이 어떠했습니까? 성경학자들은 그 당시 에베소 교회를 위 협했던 그릇된 신앙의 조류를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주의고 다른 하나는 영지주의입니다. 율법주의란 유대인들에게서 파생된 것으로 복음을 역행하고 있는 그릇된 사상 중에 하나였습 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는 온전하고 새로운 길을 열었습니 다.
가령 인간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후 하나님이 그들을 불러 가죽옷을 해 입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죄 지은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습 니다. 그러므로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때는 대신 짐승의 피를 흘려야만 했습니다. 그래 서 그 때부터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돌아가시기까지 얼마나 많은 짐승 의 피를 흘렸는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할 때 애굽 사람의 집에서는 장자가 죽는 일을 당했지만 이스라엘 집 가정에는 이 화를 면하게 된 것도 미리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른 때문에 하나님의 사자가 문설주에 발린 피를 보고 넘어가고 지나가게 된 것입니다. 유월절은 어린양 예수님의 피의 그림자였습니다. 이처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의 공로를 믿는 사람은 죄에서 용서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인정받는데 유대인들 가운데는 율법을 행해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소위 율법주의입니다. 그리고 영지주의라는 것은 소위 그노시스주의(Gnostecirm)라고 부르는 것으로 그 당시 강력한 헬라 사상의 발산지인 헬라를 중심으로 신앙의 형태를 띠고 등장했던 특별한 이단 사상입니다. 영지주의는 영적인 지식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 데서부터 유래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원론적 인 종교 사상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영지주의는 복잡하고 다양한 사상 체계를 가지고 있 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계시된 성스러운 비밀인 지식 이야 말로 인간의 기원자이고 운명이며 그것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초월적이고 알 수 없는 하나님과 소위 데미우르고스 로 표현되는 창조주 하나님을 구별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지식은 종종 생명의 불꽃 으로 표현되었고 그 지식이 인간 속에 주입되므로 구 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초월적인 하나님과 인간이 사는 물질의 세계 사이에는 상하 창조와 피조 관계로 불려지는 소 위 아이온 (aeons)의 서열이 있는데 데미우르고스는 초월적인 존재인 하나님에게서 나온 고위 아이온 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이같이 데미우르고스로 해석하므로 절대자 하나님과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도 말하자면 이 지식을 전달하러 온 절대자 하나님의 특사라고 했습니다. 신적인 존재인 그리스도는 잠시 사람의 몸을 빌어 거했을 뿐 본질적으로 사람이 아니셨고 따라 서 죽지도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십자가 처형 전에 이미 떠났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수난을 당하지 않았다고 주 장합니다. 이런 주장을 한 것은 영지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도케티스트들도 같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이단 사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고 완전한 사람이셨습니다. 이 율법주의와 영지주의가 독자적으로 혹은 연합해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순결한 복음적인 신 앙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초대 교회 때부터 등장해 있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4절에 보면 그들은 특별히 신화와 끝없는 족보라는 잘못된 수단을 통해서 그 당시 그리스도인을 미혹하고 있었습니다. 신화 란 말은 단순히 이야기들 이라고 번역해도 되고 신기하게 조작된 이야기 라고 해도 무방 합니다. 특별히 그 당시 영지주의 자들은 성경이 아닌데도 그들 사이에서 은밀히 나누어진 조각 된 어떤 이야기들을 신령한 지식으로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하나님 앞에 설 수 있 는 가장 중요한 조건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 모임에서는 그런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도 저히 주님 앞에 나아갈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신앙이 뛰어난 것처럼 영적인 우월감을 과시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화는 이런 소위 영 적인 이야기를 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을 미혹했던 또 하나의 수단은 끝없는 족보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유대인을 배경으 로 해서 이러한 족보 사상이 만연했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고 신앙의 올바른 가르침 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들이 그들의 신앙에 있어서 더 중요한 관심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런 사람들에게서 돌이키라고 말합니다.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니까 오늘 주신 말씀에서 크게 두 가지 문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릇된 교훈을 경계하라는 것과 율법과 복음의 관계가 그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오늘 주 신 말씀에서 그릇된 교훈을 어떻게 경계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릇된 교훈을 분별할 수 잇는 세 가지 척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이것이 우리를 믿음 가운데로 인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러 변론을 내는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살 찌게 하는 올바르고 건강한 교리는 언제나 우리를 믿음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어떤 사람이나 어 떤 교파의 가르침이 우리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온전한 믿음 가운데로 인도하지 못한다면 그 것은 그들이 아무리 아름다운 단어를 사용해서 논리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설득한다 하여도 그것 은 생각해 볼 여지도 없는 것으로 치부해도 될 것입니다. 그릇된 교리를 분별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첫 번째 방법은 이 가르침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 님의 뜻을 이루는 온전한 믿음 가운데로 인도하고 있는가 우리의 믿음을 더해 주는가 그래서 믿 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의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해주는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신뢰하게 하는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 시고 온전하신 뜻을 받아 드리게 하는가 그것을 위해서 내게 자주하고 도전을 주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하고 있지는 않는가? 깊이 생 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이 우리를 삶의 변화와 덕을 세우는데 인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사상이나 가르침, 그러니까 이단 사상은 우리의 삶의 변화와 덕을 세우는데 인도하기 보다는 단순히 우리로 하여금 교리를 논리적으로 변론하도록 부축입니다. 이단에 속한 사람들은 우리의 삶이 말씀 앞에서 얼마나 달라졌는가 하는 것을 묻지 않습니다. 가만히 보세요. 이단이 나 사이비는 먼저 싸우려고 덤빕니다. 다시 말해서 변론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벌써 그들이 주장하는 교리의 밑바탕이 잘못되어 있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들으세요. 성경의 교리라는 것은 단순히 지식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성경 공부를 하는 것은 얼마나 좋은 것이고 얼마나 중 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 공부는 절대로 지식의 전수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닙니 다. 우리를 지식으로만 인도하는 것이라면 엄격히 말해서 유익보다 손해입니다. 가장 훌륭한 성 경 공부는 그것이 우리의 삶과 인격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느냐 하는데 목표를 두고 거기에 초점 을 맞추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앞에 놓고 변론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가장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 앞에 우리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정 말 중요합니다. 이 말씀이 내 삶을 어떻게 만들고 있습니까?
말씀에는 생명력이 있어서 좌우에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여 우리의 심령을 쪼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을 때마다 끊임없이 말씀 앞 에서 씨름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세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종종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우리에게 접근해 오는 이단 사상의 경우, 그들에게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우리가 과연 구원의 길로 인도 되는 가? 하는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변론을 통해서 현재 내가 서 있는 이 신앙의 자리에서 나를 떠나게 하는 것입 니다. 그래서 그들은 먼저 변론의 방법으로 우리에게 접근해 오는 것입니다. 그들이 내 영혼의 구원 문제나, 삶의 변화보다도 내게 어떤 교리적인 변론을 일 삼으려고 할 때 우리는 먼저 그들 의 동기를 의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여호와의 증인 같은 사람, 몰몬교 선교사들 그 밖에 이단 사상이나 사이비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믿지 않은 사람보다 믿는 사람에게 접근합니다. 우리 성경에 대해서 한번 토의 해 보 실까요?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사랑으로 인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5절을 보면 우리에게 경계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 니다.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다 고 했습니다. 여기에 중심 되는 단어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기반으로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이 강조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을 통해서 일어나는 사랑 이 사랑이야말로 모든 가르침의 결론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무엇입니까? 계명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가령 10계명을 보세요. 첫 계명부터 넷째 계명까지는 하나님을 이 렇게 사랑하라 하는 계명입니다 다섯째부터 열번째까지의 계명은 사람을 이렇게 사랑하라 한 것 입니다. 그런데 열 가지 계명을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랑이라는 한마디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 다.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면 우상을 숭배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한 마음으로 사랑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날을 외면 할 수가 없습니다. 많은 계명과 교훈이 있지만 결국 이 모든 계명은 사랑이라는 한 단어 속에 요약이 됩니다. 어 떤 교훈이나 어느 사람이나 어느 단체의 가르침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도록 그리고 이웃을 참으로 사랑하도록 인도한다면 일단 궁극적으로 받아들여도 될 것입니다.
어느 사람이 아무리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형제를 사랑 하는데서 우리를 떠나게 한다면 우리는 귀를 막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잘못된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미혹케 할 이런 다른 교훈 을 경계하라고 디모데에게 가 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다른 교훈이 아닌 바른 교훈 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5절 이하에 보면 바울은 율법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당시 율법주의자 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율법주의적인 접근 방법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 상당한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7절에 보면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하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리스도 인들이 그 당시 율법주의자들에 의해서 미혹을 당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자세히 보면 율법주의자들의 문제점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저들은 선생 의식을 가졌습니다. 이 말은 율법주의자들은 배우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가르치기만을 원했 지 배우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선생 이라는 말을 별로 좋은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 습니다. 선생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가르치라는 말씀을 하시지 전에 배우라 는 초청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 주님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사람은 평생 배우는 학생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 앞에 와서 자기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쉼을 얻고 구원을 얻은 사람들에게 주님이 제일 먼저 요구하시는 말씀을 배우라 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배우는 것보다 먼저 선생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헛된 말을 즐겼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의미 없는 말, 신앙생활에 전혀 유익을 주지 못하는 말, 말을 위한 말, 토론 을 위한 토론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6절에 보면 사람들이 이에 벗어나 헛된 말 에 빠져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이루어야 할 참된 사랑의 자리에서 떠나 헛된 말에 빠졌다는 이 야기입니다. 헛된 말 이란 것은 전혀 의미 없는 이야기 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유익하지 못하고 비생산적 인 말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들은 율법의 정신을 몰랐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은 가르치기는 하면서도 율법이 의도하는 진정한 교훈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7절 말씀 보세요.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 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신 앙의 심각한 타격을 입지 않을까 염려되었습니다. 사실 율법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율법 자체에는 잘못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과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율법으로 성도들은 잘못된 신앙의 자리로 인도하 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 율법주의자들 때문에 일어난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가령 율법 가운데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할례를 받게 되어 있는데 이 런 특별한 조항을 지키는 것이 구원의 절대적인 조건처럼 강조해서 복음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의 잘못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헛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우리가 율법의 어떤 조항을 행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라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 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1절에 보면, 바울이 그러한 잘못에 빠질 것이 염려되어 이렇게 말했 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 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율법 자체만을 강조했습니다.
율법은 이것을 하라 는 것과 이 것은 하지 말라 의 두 가지 명령으로 요약됩니다. 율법을 계속 강조할 때 우리의 죄를 계속적으 로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떠나서 율법만을 강조할 때 우리는 점점 더 심각한 죄책감 을 느끼게 되고 마침내는 절망의 구렁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만 강조하면 그리스도를 보 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랑하는 믿음의 중요한 것이 디모데에게 바른 사역을 강조하면 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바른 교훈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1절에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10절의 마지막 부분에 강조된 바른 교훈을 강조하면서 이 바른 교훈이 바로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른 교훈이 무엇입니까? 율법을 무시한 복음만의 강조는 우리를 피상적인 자리로 인도하고, 복음이 강조되지 않은 율 법만의 강조는 우리를 절망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율법 앞에서 죄를 깨닫고 이 십자가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죄를 담당하 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의 구속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구속의 사역을 통해서만 우리가 주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 을 수 있다는 이 놀라운 사실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요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앞으로 계속 강 조해야 할 사역의 기초라고 믿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할 일이 또한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 위해 살고, 복음 위해 일하고, 이 복음을 바로 전해야겠습니다.
기독교 가르침의 목적
딤전 1:5 / 김남준 목사 / 열린교회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딤전 1:5)
I. 본문해설
디모데전서는 당시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디모데에서 사도 바울이 쓴 첫 번째 편지이다. 사도 바울은 마케도냐로 가면서 디모데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며 목회하도록 지시하였다. 당시 에베소 교회는 영지주의라는 이단의 괴롭힘을 받고 있었다. 영지주의는 그리스 철학과 동방의 신비주의 속에 기독교 가르침을 가미한 이단이었다. 극단적인 지식주의를 강조하고 영혼을 아는 초월적인 지식을 통해 구원받음을 강조함으로 지식인에게 상당한 매력을 끼치고 있었다.
Ⅱ. 기독교 가르침의 목적
사도 바울은 기독교 가르침의 목적을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이라고 말함으로 그 목적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난 뒤에는 순수한 사랑의 감동이 솟아올라서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겠다는 감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기독교 가르침의 효과인 것이다.
A. 청결한 마음
희랍어 성경에는 ‘카타라스 칼디아스’라고 나오는데 ‘칼디아’는 심장, 마음이란 뜻이고 ‘카타라스’는 물 같은 것을 뿌려서 깨끗이 씻어내서 정결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청결한 마음은 제사나 율법에 의해서 씻긴 마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씻긴 마음이다. 그러므로 청결한 마음을 얻는 길은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마음이 가득한 상태가 됨으로써 가능하다. 십자가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분의 사랑에 마음이 녹아져서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때 모든 이기심과 더러운 욕망으로부터 벗어난 청결한 상태가 된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는 천국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고 애통하는 자에게는 위로를, 마음이 온유한 자에게는 땅을 주시겠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그리고 마음이 청결한 자는 팔복 중 최고의 복을 받는다. 바로 하나님을 뵈옵는 것이다.
B. 선한 양심
‘선한 양심’이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본래의 목적대로 기능하고 있는 올바른 양심을 가리킨다. 양심을 가리키는 희랍어 단어 ‘시네이데시스’는 ‘함께’라는 단어와 ‘알다’라는 단어의 합성어이다. 즉 양심이란 인간의 의식에 부착되어서 무엇이 선하고 악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정신 작용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양심에도 한계가 있다. 그것은 우리는 죄인이라는 것과 스스로 구원 얻을 수 없고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복음적인 사실은 양심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선한 양심’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 말은 선한 양심이 따로 있고 악한 양심이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다. ‘선하다’는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지은 목적을 향하여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선한 양심은 자동적인 자연 양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양심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을 향해서 선한 양심으로 그분을 찾아가는 것이 세례의 의미라고 말하였다(벧전 3:21). 올바른 양심으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세례의 효과이며 진정으로 구원 얻은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C. 거짓 없는 믿음
거짓이 없다는 말은 ‘안휘포크리토스’인데 가식이나 허위, 즉 안에 있는 것을 감추어서 다른 것으로 착각을 하게 만들기 위한 위장이 없는 그런 믿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믿음이 참된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올바른 지식에 기초한 믿음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믿음이고 올바른 해석에 기초한 믿음이다. 자기 이익이나 자기의 편의에 의해서 굽어진 믿음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거짓이 없는 믿음은 그 진리에 합당한 삶으로 이어진다.
D. 거기로부터 나온 사랑
기독교 가르침의 목적은 이런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 아가페이다. 이 아가페 사랑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있던 것인데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에,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받고 그 사랑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회기적인 사랑이다.
Ⅲ. 결론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또한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된 사람들이 되었는가. 이 기독교 가르침의 궁극적인 열매는 사랑이다. 듣지 않으면 이런 사랑을 알 수 없고 듣기만 하는 신앙도 이런 사랑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듣고 이 가르침들을 통해 온전히 변화되는 새사람이 되기를 빈다.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
딤전 1:9-11 / 이수영목사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율법이 옳은 사람을 위해서 세운 것이 아니라 옳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세운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옳지 못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본문 중 9-10절 말씀을 다시 보면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여러 종류의 옳지 못한 사람들을 언급하는 순서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는 사실상 십계명의 순서를 따라 그 각 계명을 어기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선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한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십계명 중 보다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우리가 지켜야할 계명들인 첫 네 계명을 어기는 사람들을 대충 가리키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라 한 것은 모두 율법을 거스르는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율법을 거스른다는 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과 같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제1계명을 어기는 행위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이라 했는데 여기서 “경건하지 않다”는 것은 마음속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겉모양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지만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이해가 결핍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 하나님을 온갖 피조물의 형상으로 만들어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한 제2계명을 어기는 일입니다. 유다서 15절에서는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라는 말로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을 하나로 묶어놓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는 순서가 바뀌기는 했으나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제3계명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제4계명을 위반하는 자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보다 명확하게 십계명의 순서를 따라 그 계명들을 어기는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라 한 것입니다. 제일 먼저 어떤 사람입니까?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입니다. 이것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을 어기는 자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다음은 “살인하는 자”입니다. 이것은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을 어긴 자입니다. 그 다음에는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입니다. 이것은 “간음하지 말라”는 제7계명을 어긴 자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인신매매를 하는 자”입니다. 십계명의 순서대로 하면 “도둑질하지 말라”는 제8계명을 어긴 자를 언급해야 할 자리에 “인신매매를 하는 자”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다루려고 합니다. 그 다음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입니다. 이것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제9계명을 위반하는 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끝으로 제10계명 즉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한 계명을 어긴 자를 언급해야 할 자리에서 사도 바울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사도 바울이 십계명의 어느 계명에 명확하게 딱 들어맞는 언급을 하지 않은 부분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옳지 못한 자들을 열거하며 십계명의 순서에 따라 각 계명을 어기는 자들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제8계명인 “도둑질하지 말라” 한 계명을 어기는 자를 말하는 대신 “인신매매하는 자”라고 한 사실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십계명의 제8계명을 이해하려고 할 때 사실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제10계명과의 관계입니다. 제10계명이 무엇입니까?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와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제8계명은 “남의 것을 훔치지 말라는 것”이고, 제10계명은 “남의 것에 대해 탐내는 것조차도 하지 말라”는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두 계명 다 남의 소유에 관계된 계명들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만일 계명이 수십 개라면 그 중에는 더러 겹치는 것들이 있다 해도 이해가 가겠지만 이 수평적 인간관계에 관한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을 포함시켜도 여섯 가지 뿐인데 그 중 두 계명이 소유에 관계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뭔가 균형이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8계명을 제10계명과 꼭 같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남의 소유에 손대는 일을 금하는 계명이라기보다 도둑질 중 가장 악질적인 도둑질인 사람도둑질, 즉 납치를 특별히 지목해서 금한 계명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성경의 말씀으로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의 사도 바울의 말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도둑질하는 자”라고 할 법한 자리에서 “인신매매를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인신매매가 뭡니까? 사람을 도둑질해서 팔아먹는 것입니다. 납치는 살인과 간음에 이어서 사형에 처해질 범죄행위라는 것이 구약성경의 규정입니다. 반드시 자기의 생명으로 갚아야 될 만큼 아주 악하고 중한 범죄라는 것입니다. 출21:16을 보면 “사람을 납치한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 지니라” 했습니다. 신24:7에서는 “사람이 자기 형제 곧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을 유인하여 종으로 삼거나 판 것이 발견되면 그 유인한 자를 죽일 지니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 지니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납치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임이 분명합니다.
아프가니스탄에 봉사활동을 하러 갔다가 그곳의 반정부 무장집단인 탈레반에 의해 납치된 23명의 한국 젊은이들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을 당한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그 가족들과 우리 한국교회와 온 국민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을 당하고 있습니다. 납치행위는 살인행위와 다름없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납치를 저지른 사람은 이미 살인까지도 할 수 있는 자임을 증명한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납치행위는 피랍자를 살해하는 일로 귀결되곤 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이번 아프가니스탄 인질사태가 더 이상의 희생 없이 하루 속히 끝나기를 위해서, 그리고 다시는 이 지구상의 어디에서도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인 납치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또 우리 자신도 납치행위의 극악무도함에 대해서 보다 깊은 인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납치는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들을 우리와 본질적으로 다른 어떤 외계인들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사실 그렇게 악독하기 이를 데 없는 범죄인 납치사건이 우리 한국 사회에서도 자주 발생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린이를 납치해서 앵벌이 시키거나 돈을 주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일이나 여인들을 납치해서 매춘을 강요하는 일이나 남자들도 납치해서 외딴 섬에서 강제노동을 시키는 일이 결코 남의 나라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뿐 아닙니다. 정당한 사유 없이 또는 법적 권한이 없는 사람들에 의해 행해지는 온갖 감금은 또 얼마나 많았습니까? 요즈음은 없어졌다고 하지만 옛날 그 소리만 들어도 소름끼치고 무시무시해지던 “중앙정보부”니 “안기부”니 “보안사”니 하는 기관에서 얼마나 사람들을 잡아다가 구금하고 고문하고 그랬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악하기 이를 데 없는 범죄를 국가기관에서부터 저질렀던 것입니다. 국가기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회에서는 빚쟁이들도 빚 받아 내려고 납치 감금하는 수가 종종 있습니다. 빌려준 돈을 돌려받기 위해서 그런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안 되는 것입니다. 채권자라고 채무자를 납치하고 감금할 권리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국가수사기관뿐 아니라 옛날 운동권 학생들도 툭하면 총장도 납치 감금하고 교수들도 잡아 가두고는 며칠씩 안 놔 주곤 했으며, 파업하는 근로자들도 툭하면 사장, 전무 등 잡아 가두기 일쑤였습니다. 허긴 국회의원들부터 걸핏하면 국회의장을 감금하고 방에서 못나가게 하고 의사당에서 사회도 못 보게 하곤 하니 누군들 안 하겠습니까? 최근에는 재벌총수가 자기 아들이 어디서 얻어맞았다고 사람들을 납치해다 직접 폭행까지 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과 그의 십계명을 아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자유민주국가의 정상적인 시민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납치가 왜 나쁩니까? 첫째로 납치는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는 범죄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납치는 가족들로부터 부모나 형제자매나 자녀를 강탈함으로써 가정의 행복을 파괴하고 가정을 송두리째 파탄 내는 범죄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개구리 잡으러 나갔던 어린아이들이 갑자기 없어진 사건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소위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입니다. 그 부모들의 삶, 그 가족들의 삶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납치는 살인보다 더 악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온 가족에게 일생 고통과 불행을 안겨주며 가슴에 피멍과 원한이 맺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죽었다 하면 그것으로 빨리 단념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납치되어 가지고 돌아오지 않으면 일생을 그 가족들은 피멍을 안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를 납치당한 부모가 어찌 편한 마음으로 직장을 다니겠습니까? 직장 관두고 집도 팔고 있는 것 다 팔아 가지고 아이 찾는 데 일생을 바치느라 가정이 다 파탄 나고 맙니다.
“~ ~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형식으로 주어진 모든 계명들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로 해석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제8계명을 납치금지법으로 이해한다면 그 계명의 보다 적극적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것입니다. 자유는 인간이 인간답기 위하여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했습니다. 자유의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는 자유는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자유 없는 삶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유는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인간은 그 자유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참 인간이기 위하여 생명과도 같은 것이 자유이기에 그 자유를 박탈하는 납치는 바로 인간을 죽이는 행위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납치행위는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중심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납치는 생명만큼이나 중요한 자유를 짓밟는 폭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의 자유로움을 방해하거나 제약하는 모든 행동을 삼가야 합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 같아도 다른 사람의 자유를 조금이라도 침해하거나 제약하는 행위는 제8계명의 정신을 위배하는 것입니다. 남의 자유에 대한 존중심이 없이 멋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심해지면 납치까지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으며 살인까지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조직폭력패들만 폭력배가 아닙니다. 누구나 자칫하면 폭력배가 될 수 있습니다. 지하철 안에서 다리 꼬고 앉거나 다리 벌리고 두 사람 앉을 자리 혼자 차지하고 있는 것, 차안에서 또는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떠들거나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것, 금연구역에서 담배 피는 것, 주차 아무렇게나 해서 다른 사람의 주차를 방해하는 것 등 아주 간단한 행동들부터 조심하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폭력배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주차봉사단의 안내를 따르지 않고 자기 편한 대로 주차하는 행위도 스스로를 폭력배가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나의 자유를 생각하기 이전에 남의 자유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남의 자유를 박탈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보다 더 적극적으로 제8계명을 지키는 행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남을 먼저 배려할 줄 아는 훈련을 하고 습관화해야 합니다. 남에 대한 배려는 달리 말하면 사랑입니다. 말에 있어서나 행동에 있어서 남을 배려할 줄 모르며 사랑을 논하는 것은 공허한 일입니다. 듣기 싫은 꽹과리소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랑으로 남을 배려하는 노력, 그러한 노력이 이루어질 때에 우리 사회는 하나님의 정의가 서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사랑으로 남을 배려하는 삶을 살기를 힘씁시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행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길이고 해야 할 일들만을 열심히 행할 수 있도록 이끄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