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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훗날 또 하나의 역사가 될 팬데믹 시대
조선시대 최고 전문가 신병주 교수
이번 키워드는 전염병이다!
철저한 고증과 사실적 기록에 입각한 조선시대 전염병의 역사
《향약집성방》, 《동의보감》, 《마과회통》 등 조선시대 대표적인 의서를 넘어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객관적인 기록서, 《양아록》, 《미암일기》, 《이향견문록》 등 개인적인 삶이 묻어 있는 다양한 일기와 문집까지 우리 역사 곳곳에 전염병의 흔적이 있다. 팬데믹은 과거에도 있었고,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크고 작은 전염병을 극복하며 끈질기게 삶을 이어나갔다. 철저한 고증과 역사적 사실에 주목하여 조선시대 전염병의 모든 것을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필요한 통찰력을 보여줄 것이다.들어가는 말
1부 조선시대에 전염병은 무엇이었을까?
역사 속 전염병에 대한 기록
전염병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양아록》에 남아 있는 전염병의 흔적
2부 전염병에 맞섰던 의료기관
왕실의 의료기관 내의원
백성들의 의료를 담당한 혜민서
전염병 치료를 전담한 활인서
조선 최초 근대식 병원, 제중원
3부 의녀들의 활동
의녀 제도의 시작
체계적이었던 의녀 교육
의녀의 전문분야와 활동
의녀의 대명사, 대장금
성종 시대 의녀 장덕과 귀금
선조 시대 의녀 선복과 애종
조선 후기 의녀 연생과 송월
의학적 소양을 지닌 사대부가의 여인들
4부 허준과 《동의보감》
허준의 생애와 기록
국가적 사업의 의서 편찬
《동의보감》의 구성과 의미
허준은 스승의 시신을 해부했을까?
5부 정약용과 《마과회통》
전염병 관련 의학서의 필요성
《마과회통》 저술에 영향을 준 《마진기방》
상당한 수준을 갖춘 홍역에 관한 의서
《마과회통》에 기록된 홍역 주기
홍역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분류
6부 종두법을 보급한 지석영
지석영은 누구인가?
종두기술과 서양의학
전국에 걸쳐 시행된 우두사업
갑오개혁 이후 의학교 교장으로 활약
7부 작은 마마, 홍역
천연두와 구별이 어려웠던 홍역
조선 후기 홍역의 대유행
한양에서 유행한 홍역의 여파
《한중록》 속 홍역 기록
홍역 관련 수칙과 창궐 상황
8부 조선 후기 최대의 전염병, 천연두
조선 전기, 기록 속 천연두의 등장
병자호란과 천연두
질병과 기근이 극심했던 현종 시대
조선 왕실을 점령한 천연두, 숙종 시대
천연두 전문 의원, 유상
9부 19세기 조선을 휩쓴 전염병, 콜레라
조선에 유입된 콜레라
콜레라로 혼란에 빠진 순조 시대
콜레라의 확산과 구호대책
1822년 조선을 강타한 콜레라
10부 시기별 전염병의 유행
문종 시대 악병의 유행
학을 떼고 싶었던 질병, 학질
15, 16세기 대표적인 전염병, 온역
온역에 대한 국가적 대응
조선시대 흔한 질병, 종기추천사
박시백(화백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저자)
팟캐스트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깊은 인연을 맺어 온 신병주 교수가 ‘역사 속 전염병’을 주제로 책을 출간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임’을 항상 강조하는 저자가 이번에는 역사 속 전염병의 유행과 대응이 현재에 어떤 통찰력을 줄 수 있는지 제시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역사적인 기록을 바탕으로 저술한 만큼 깊은 신뢰성을 준다. 닫기
최태성(소장, 《역사의 쓸모》 저자)
우리는 아직도 코로나19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지 정확한 방법을 모른다. 과학문명 시대를 살고 있다는 자부심이 한순간에 자괴감으로 바뀌는 매일이다. 옛 사람들은 전염병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쉽게 얻을 수 있는 자료는 파편화된 사실의 나열에 그친다. 답답하던 차에 드디어 조선시대 전염병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저술한 책이 나왔다. 가뭄에 단비 같은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역사서. 옛 선조들의 지혜를 빌려보자. 닫기
썬킴(교수 《썬킴의 거침없는 세계사》 저자)
신병주 교수님은 역사가 단순한 암기과목이 아닌 살아 숨 쉬는 드라마라는 것을 알려주는 분이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도 다양한 방향에서 바라보게 하는 뛰어난 능력이다. 조선시대 역사를 ‘왕’, ‘참모’, ‘왕비’의 관점에서 집필한 책에 이어 이번에는 전염병을 통해 역사를 관찰할 수 있는 책을 쓰셨다. 드라마를 통해서만 접했던 인물들이 실제 역사 속에서 어떤 활약을 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이 책 안에 답이 있다. 닫기
책 속으로
영조 때인 1733년(영조 9)에는 전라도에 역질이 유행하여 2,081명이 사망했고, 1741년(영조 17) 7월에는 관서지방에 역질이 들어 3,700명이 사망했다. 당시 평안도 지역의 인구수를 고려하면 엄청난 수의 백성들이 희생된 것이었다. 1750년(영조 26)에는 전국에서 역질이 유행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때에 8도에 역질이
성하여 죽은 자가 즐비하였다”고 하여 당시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다. 영조는 즉시 하교를 내렸다. “시신을 묻어주는 것은 왕정의 큰일이다. 더군다나 경외에 역질이 치성하여 사망자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아 해는 이미 바뀌어 만물이 모두 봄기운을 타고 있는데, 아 우리 백성들은 친척·형제·고아·과처가 울부짖고 서러워하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매 저절로 처절해진다. 경외에 분부하여 죽은 자는 방법을 다하여 거두어 묻어주고 산 사람은 특별히 구원하여 살려내게 하라”면서 사망자의 시신 수습과 산 자의 구휼 정책에 즉각 나설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처에도 불구하고 사망자의 수는 급격히 늘어갔다. 경기에서 3,487명, 강도(강화)에서 349명, 영남에서 1,933명, 해서(황해도)에서 464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엄청난 전염병이 폭풍처럼 영조 시대 조선을 휩쓸고 지나간 상황이 《영조실록》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 ‘1부 조선시대에 전염병은 무엇이었을까?’ 중에서
전염병이 대유행하고 있는데 세종 시대 한양에서만 많은 환자가 살아날 수 있었던 까닭은 활인원에서 보급된 치료약과 음식에서 찾을 수 있다. 이후에도 활인서(활인원)는 전염병 치료의 컨트롤타워가 되었다. 성종 시대에 전염병이 유행하자, “도성에는 인가가 즐비하므로 한 집에서 병을 앓으면 전전하여 서로 옮으니, 또한 염려스럽다. 앓는 서인·천례(천민과 노예)는 죄다 동과 서의 활인서에 내어다 두고 함께 치료하고, 그중에서 죽은 자는 그때그때 곧 묻어서 도성 근처에 주검을 버려두지 말도록 하라”고 한 기록이 대표적이다. 당시에도 전염병이 유행하면 기본적으로 환자나 시체를 격리하는 조치를 취했는데, 동서활인서가 격리시설로 주로 활용되었다.
- ‘2부 전염병에 맞섰던 의료기관’ 중에서
3월 22일이 기록에도 대간이 “의녀인 장금의 죄는 의원 하종해보다도 심합니다. 산후에 의대를 개어하실 때에 계청하여 중지하였으면 어찌 대고에 이르렀겠습니까? 형조가 조율(법규를 구체적인 사건에 적용하는 일)할 때에 정률을 적용하지 않고 또 명하여 장형을 속바치게 하니 매우 미편합니다”라고 하면서, 거듭 장금이의 처벌을 원했지만 중종이 이를 윤허하지 않은 상황이 나타난다.‘장금’이라는 이름은 1522년 이후 2년 후인 1524년 12월 15일의 기록에 다시 등장하는데, 흥미로운 것은 ‘장금’에 대한 호칭을 ‘대장금’이라 한 것이다. ‘대大’ 자를 장금 앞에 붙인 것은 의녀로서 그만큼 공이 컸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중종이 전교를 내려서, “다만 의녀 대장금의 의술이 그 무리 중에서 조금 나으므로 바야흐로 대전 안에 출입하며 간병하니, 이 전체아를 대장금에게 주라”고 한 부분인데 ‘전체아’는 조선시대 임시로 고용되는 계약직에 해당하는 체아직 중에서 풀타임으로 근무하고 급료의 전부를 받는 직책이란 뜻이다. 요즈음의 파트타임이라고 할 수 있는 체아직인 ‘반체아’와 구분된다.
- ‘3부 의녀들의 활동’ 중에서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어의였던 허준은 도성 밖으로 쫓겨났고, 사간원에서는 허준을 계속 중도부처하거나 위리안치할 것을 거듭 건의했다. 광해군은 세자 시절 자신의 두창을 치료한 허준의 공을 기억하면서 자신의 질병을 고치기 위해서라도 허준이 도성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허준은 광해군의 배려 속에서 귀양 중에도 도성을 출입하면서 의서 편찬 작업을 해나갔다.1609년 말 2년여의 유배에서 풀려난 허준은 본격적으로 의서 편찬에 매달렸다. 그리고 1610년(광해군 2) 8월 마침내 완성된 의서인 《동의보감》을 광해군에 바쳤다. 그의 나이 72세 때였다. 책 제목의 ‘동의東醫’란 중국 남쪽과 북쪽의 의학 전통에 비견되는 동쪽의 의학 전통, 즉 ‘조선의 의학 전통’이라는 뜻이고, ‘보감寶鑑’은 ‘보배스러운 거울’이란 뜻으로, ‘후대의 영원한 귀감이 될 책’을 뜻한다.
- ‘4부 허준과 《동의보감》’ 중에서
정약용 자신 또한 두 살 때 두창을 앓았다. 다행히 가볍게 지나가 큰 흔적이 없었지만, 오른쪽 눈 위에 조그만 흉터가 남아 있어 눈썹이 세 개로 나뉘게 되었다. 그래서 정약용은 어린 나이에 자신의 호를 스스로 삼미자三眉子(눈썹이 세 개인 사람)로 지었다. 그리고 일곱 살 때부터 짓기 시작한 시를 모아 열 살 무렵에는 《삼미자집》이란 책을 내기도 했었다. 정약용은 마진도 앓았다. 그때 그를 구해준 사람이 이헌길(생몰년 미상)이라는 의원이다. 이헌길은 마진에 대해 독자적인 연구를 펼쳐 치료서인 《마진기방》을 1759년(영조 35)에 저술하기도 했다. 그가 살린 아이들이 거의 만 명이나 된다고 했다. 즉, 정약용은 어렸을 때 마진으로 사망할 뻔했다가 이헌길의 도움으로 살아난 적이 있다고 술회하면서, 이에 은혜를 갚고자 책을 저술하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헌길이 제시한 ‘승마갈근탕’은 지금도 응용되고 있는 처방법이다.
- ‘5부 정약용과 《마과회통》’ 중에서
지석영이 종두법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 데는 1876년(고종 13) 사신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갔다 온 스승 박영선이 가져온 《종두귀감》의 영향이 컸다. 1876년 일본과 최초의 근대 조약인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조선 정부는 그해 선진 문물을 수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신사를 파견했다. 정사로 파견된 예조참의 김기수를 비롯한 76명의 사신단 중에 지석영의 스승인 박영선이 포함되어 있었고, 지석영은 스승으로부터 종두법에 대한 저술을 접할 수 있었다. 이후 1879년에 일본 해군이 세운 부산의 제생의원에 가서 원장 마쓰마에와 군의 도즈카로부터 2개월간 종두법을 배울 수 있었다. 이때 두묘(우두의 원료)와 종두침 2개를 얻어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처가가 있는 충청도 충주에 들러 40여 명에게 우두를 놓아주었다. 충주에서의 시술은 우리나라 사람에 의한 최초의 공개적인 종두법을 실시한 사례로 인정받고 있다.
- ‘6부 종두법을 보급한 지석영’ 중에서
《숙종실록》과 《영조실록》에는 홍역에 대한 기사가 빈번하게 보이고, 《한중록》 등에서 사도세자가 홍역으로 고생한 사례들을 보아, 홍역은 17세기 후반부터 시작하여 18세기 내내 조선에서 유행한 전염병임을 알 수 있다. 《숙종실록》 1707년(숙종 33) 4월 20일 숙종이 전교를 내려, “오늘 내전과 세자는 대내로부터 피신할 것이니, 정원(승정원)에서는 모두 알도록 하라”는 기록이 있다. 사관은 이에 “왕자가 홍역을 앓았기 때문이었다”는 논평을 달고 있다. 이때부터는 정확하게 원문에 ‘홍역’으로 기록하는데 홍역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 날 기사에는 왕자의 홍역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이 보인다. “왕자가 궁궐에서 홍진을 앓았는데, 임금은 끝내 나가 피할 뜻이 없었다. 우의정 이이명이 약방제조 2품 이상을 거느리고 청대(급한 일로 임금께 뵙기를 청함)하고, 정원과 옥당(왕의 자문 역할을 하던 관청)에서도 또한 같이 들어가 반복하여 힘써 다투었는데, 말이 몹시 간절하고 긴박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는 기록이다. 왕자가 홍역에 걸리자 중전과 세자는 피신, 즉 요즈음의 격리를 시키고, 숙종 자신은 피하지 않고 돌보려 하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또한 홍역과 홍진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7부 작은 마마, 홍역’ 중에서
1636년(인조 14) 12월 청 태종이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은 최악의 굴욕으로 마무리된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융복 차림으로 서문을 통해 남한산성을 내려와 삼전도로 향했다. 인조는 세자와 대신들과 함께 청나라 태종에게 삼배구고두의 항복 의식을 마쳤다. 그나마 전쟁이 47일 만에 종결된 것은 최명길을 중심으로 한 주화파들이 청나라 진영을 오가면서 군신 관계를 골자로 하는 항복 협정을 추진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최근 《승정원일기》와 청나라 측의 자료를 중심으로, 천연두의 유행이 전쟁의 종식에 큰 변수가 되었음을 지적하는 견해가 제시되어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병자호란 이전에 1627년 1월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전쟁인 정묘호란 시기부터 조선의 천연두 유행에 대해, 청나라 지휘부가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만주어 사료인 《만문노당》에는 “유목하는 몽골인, 관직이 있는 몽골인을 의주에 보내어, 우리 군대를 그쪽(조선)으로 데려가면 어떨지를 칸께서 생각해주십시오. … 병력을 보낸다면 생신生身의 대신들을 보내지 마십시오. 마마가 나옵니다”라는 기록에서 조선에 천연두가 유행하니, 천연두를 앓지 않아 면역이 없는 생신을 보내지 말 것을 청하는 내용이 보인다.
- ‘8부 조선 후기 최대의 전염병, 천연두’ 중에서
조선에서 콜레라에 대한 공식 기록은 19세기 《순조실록》에 처음 등장한다. 당시에는 병명도 몰라 ‘괴질’이라 했다. 점차 호열자虎列刺로 불렸는데, 콜레라의 음차인 호열랄虎列剌의 ‘랄剌’을 ‘자剌’로읽으며 ‘호열자’가 되었다. 호열자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그 증상이 호랑이가 몸을 찢는 것과 같은 고통을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중국에서는 ‘호열랍虎列拉’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했다. 호열랍이라? https://youtu.be/yUOs6fvxCIc
출판사 서평
지금 당신이 가장 궁금한
우리 역사 속 전염병의 모든 것
왕실의 운명과 백성의 인생을 뒤흔든 치명적인 흔적
팬데믹 시대 그 어느 때보다 전염병이라는 단어가 일상이 되고 있다.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전염병은 끊임없이 찾아와 왕실의 운명과 백성의 인생을 뒤흔들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와 같은 연대기 자료는 물론이고 개인의 일기나 문집 등에 조선시대 전염병에 대한 기록이 존재한다. 전염병을 극복해 나가는 방법 또한 사회적 격리, 의학적인 방법의 동원, 의료인 양성, 전염병 발생 지역에 대한 국가적 지원 등 현재의 모습과 매우 닮아 있어 놀랍기도 하고 지금만큼 의학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대였기에 안타깝기도 하다.
의학적 치료와 함깨 굿을 하고 제사를 지내다
조선시대에도 전염병이 유행하면 기본적으로 격리하는 조치를 취했다. 한양에 전염병이 발생하면 일단 환자나 시체를 도성 밖으로 추방했다. 성 밖에서 전염병에 걸린 환자를 전담하던 곳은 활인서였고 의원과 무당을 배치했다. 이때 무당은 ‘의무’라고 하여 의술을 행하는 무당이었다. 활인서에서는 약물 치료보다는 죽 등의 음식물을 공급하여 죽음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귀신을 겁주어서 쫓아내는 방법도 동원되었다. 무당이 나서 굿을 통해 몸에 악귀가 붙지 않도록 부채와 방울도 흔들고 장구도 치곤 했다. 전염병을 예방하고자 하는 역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여제가 상시적 또는 임시적으로 진행되었고 전염병이 발생하면 왕은 자신의 덕이 부족한 탓으로 자책하고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전염병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당시 미신에 기댔던 것이기도 하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의학적 치료를 넘어 백성들의 심리적 안정을 위한 방편이었다.
백성을 위한 의서를 편찬하고 의녀 제도를 체계화하다
의서를 편찬하는 일은 국가적 사업이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고 쉽게 찾을 수 있는 약재를 활용한 모든 방법을 수집하여 제시한 《향약집성방》, 구하기 어려운 약보다는 침과 뜸을 통해 손쉽게 치료하도록 한 《침경요결》 등 그 당시 의서는 절박한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을 집대성한 의서는 단연 《동의보감》이다. 허준의 《동의보감》은 처음부터 국가의 지대한 관심에 따라 대규모로 기획되었다. 《동의보감》의 핵심은 병을 고치기에 앞서 병에 안 걸리도록 하는 예방을 중시했다는 것, 쉽게 적용할 수 있도록 조선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을 한글로 썼다는 것, 당대의 모든 의학 정보를 체계적으로 찾기 쉽게 뛰어난 방식으로 편집했다는 것과 같이 실질적인 것들이다. 한편 아무리 몸이 아픈 상황이라 해도 성별이 다른 사람에게 몸의 일부를 내보이는 것이 부담이 되었던 시대에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치료받을 수 있도록 의녀 제도를 마련했다. 의녀 교육은 혜민국에서 담당했으며 매월 성적을 매겨 세 번 불통한 자는 좌천시키고 다시 기회를 주어 조건을 충족하면 복귀시키는 등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의녀라면 기본적인 의학 지식 이외에도 진맥, 침과 뜸, 약 등 각각의 전문 분야를 가지고 있었던 점도 흥미롭다.
기록 속 전염병의 실체, 《양아록》과 〈농아의 광지〉
16세기를 살아간 조선의 선비 이문건은 직접 손자를 기르며 그 자라나는 모습을 기록한 《양아록》을 남겼다. 일종의 육아일기로 시작했지만 《양아록》에는 당시 유행했던 전염병으로 고생한 손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소근손은 5월 20일부터 몸이 불편하더니 드디어 23일에는 얼굴과 팔에 붉은 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두창이라고 얘기했고, 그 붉은 점의 수가 적지 않았으며 다음 날 소근손의 두창이 몸에 잔뜩 퍼졌다. 먼저 발진한 것은 뾰족해졌다고 전해 들었다” 등 이문건은 가장 먼저 노비 소근손이 걸린 데 이어 억복, 귀손녀, 아지, 만성, 숙녀, 유복 등 대부분의 식솔들이 감염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그 당시 천연두의 전파력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마과회통》을 집필하기도 했던 정약용은 본인도 천연두를 앓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자식들 6남 3녀 중 4남 2녀를 전염병으로 잃었다. 1799년 12월 2일에 태어난 막내아들 농아는 정약용의 유배 시절인 1802년 11월 30일에 사망했다. 정약용이 농아를 매장하면서 쓴 〈농아의 광지〉에는 전염병으로 자식을 잃은 심정이 슬프면서도 담담하게 기록되어 있어 그 당시 상황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조선 후기 최대의 전염병, 천연두
천연두는 조선 후기에 와서 특히 성행했다. 그 시대 관리들의 초상화 화첩인 《진신화상첩》 속 22명의 초상화 중 5명의 얼굴에서 선명한 곰보자국을 확인할 수 있다. 고위직을 지낸 관리들 상당수가 곰보였다는 사실에서 당시 관리들보다 열악한 환경의 백성들이 천연두로 크게 고생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천연두는 백성부터 왕실에 이르기까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고통을 주었다. 특히 천연두가 두드러지는 시기는 현종에서 숙종에 이르는 시대다. 경술년(1670)과 신해년(1671) 2년에 걸쳐 지속된 대기근을 경신대기근이라 일컬을 정도로 현종 시대는 유독 질병과 기근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현종은 조선 역사상 최악의 기근과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던 시기에 정치적으로는 예송논쟁에 휘말리며 잔병과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결국 30대 초반의 나이로 단명한다. 현종의 뒤를 이어 숙종이 즉위한 후에도 천연두는 극성을 부렸다. 숙종은 천연두로 왕비였던 인경왕후를 잃었으며 숙종 자신도 천연두에 걸려 고생을 했다. 숙종은 천연두의 위기를 잘 넘기고 회복되었지만 그 여파로 어머니 명성왕후도 잃게 되었다. 숙종 시대 이후에도 조선에 유행한 천연두는 왕실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나 공포의 대상이었다.
과거 선조들이 전염병을 극복해 나간 역사를 한 권의 책으로 남기는 것이 의미 있는 시대다. ‘홍역을 치뤘다’, ‘학을 뗐다’, ‘에이, 염병할 놈’ 등 그 옛날 전염병의 지긋지긋한 기억을 담은 말들은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다. 그만큼 전염병은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모든 조건이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던 조선시대에 우리 선조들이 전염병을 극복해 나간 역사는 코로나19 시대를 살았고 그 끝자락을 지켜보고 있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자산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