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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프로의 희망이 99프로의 절망을 이겨 낸다.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모든 일은 그 1프로가 가진 힘으로 해내는 것이다.
-99프로의 절망을 이기는 힘 中-
아침 운동장을 돌고 있을 때 빗방울이 떨어진다. 세찬 비는 아니었지만 황사와 미세먼지가 침투했을 것이란 생각에
입고 있던 점퍼로 머리를 가리고 서둘러 집으로 들어왔다.
비를 피해서 들어왔다고 생각하니 문득 궁여지책으로 부동산에 집 월세를 내 놓던 날의 부동산 사장님 말씀이 떠오른다.
"일단 소나기는 피하고 봅시다."
내 사정을 듣던 부동산 사장님은 월세를 조금 싸게 내 놓으면 이사철은 아니라도 집이 나갈 거라고 급한 불은 꺼야 한다고
위로를 해 주셨고 역시 며칠 정도 지나고 나서 월세가 나갔던 것이다.
두 번의 사기로 맘 고생을 하며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던 옥련동을 벗어나 친정같은 느낌이 드는 도심 속 전원 마전동으로
이사를 해서 살고있을 때였다.
직장에 다니던 남편은 그동안 사기로 잃었던 돈에 대해 마음을 비울 수가 없었던지 어느날 그동안 잃은 돈을 만회할 기회가 생겼다며
중국에서 유기농사업을 한다는 회장님을 따라 중국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두 번의 사기를 지켜 본 아이들이 아빠 말이라면 늘 백 프로 믿으며 함께 동조하는 엄마를 보고
엄마라도 좀 말리지 그러냐고 이야기를 한 적도 있지만 희한하게 말을 듣다 보면 매번. 이번에야 말로 틀림 없을 것
같다는 믿음에 어김없이 동조를 하게 된다.
아무리 나중에 당했다는 걸 알게 되더라도 그 당시 생각할 때 전혀 무모한 것에 승부수를 둔 것은 아니었으므로...
생각해 보면 참 헛된 욕심이 화를 불렀었다는 느낌에 씁쓸할 때가 있지만 그 늪을 벗어나 지금의 숲으로 왔다는 사실에
가슴 쓸어내리며 다시는 되밟지 않을 오점을 훈장처럼 달고 헛된 욕심을 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평정을 되찾은 이제는 잃은 것은 다 잊고 얻은 것에 감사하면서 담담한 추억담처럼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절대 후회하지 마라. 좋았던 것은 추억이고 나빴던 것은 경험이다.'라는 명언을 가슴에 새기면서...
아뭏든 또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그 아침 청운의 꿈을 안고 떠나는 남편을 공항까지 배웅을 했다.
남편은 매일 사이트를 통해 비료가 생산되는 과정과 판매 루트등을 알려오며 희망적인 소식을 보내왔고
나 역시 이번에야 말로 그동안 잃은 것들을 만회할 기회를 잡았구나 생각하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록 비료생산과 판매만 계속될 뿐 돈은 하나도 보내오지 않았다.
남편 역시 그곳 회장님 처분만 기다릴 뿐 뾰족한 수가 없는 것 같았다.
통역하는 조선족이 어떻고 동업하는 위구르족이 어떻고 그들 사이의 분란들 속에서 곧 해결이 되어 수금할 돈만
나누면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만...
또다시 빚이 쌓이기 시작했다.
옥련동 아파트만 팔리면 5천 만원의 차액이 생길 거라는 기대를 안고 그 5천만 원이라도 만회한다고 팔리기도 전에
대출을 잔뜩 받아 마전동 아파트를 계약을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대출 많은 아파트 두 채와 역시 대출을 받아 빌려주고 여태 월세를 받아 이자까지 내고 있는 단지내 상가...
이렇게 시련을 겪고 난 뒤엔 알곡은 다 빠지고 대출만 잔뜩 있는 쭉쟁이만 남았던 것이다.
아파트만 팔리면 차액이 5천 만원 정도 될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부동산 시장은 꽁꽁 얼어붙어
싸게 내 놔도 팔릴 기미조차 없었다.
그 뿐 아니라 부동산 값은 양쪽에서 뚝뚝 떨어져 그나마 싸게 샀던 마전동 아파트까지 또다시 몇천 만원이나 떨어져
완전 하우스 푸어로 양 쪽 다 팔아 봐야 남는 것도 없었다.
한창 오르다가 내리막으로 돌아섰던... 부동산 푸어가 늘고 있던 시기였었다.
세상엔 분명 머피의 법칙과 셀리의 법칙이 있다는 걸 체험을 통해 알고 있다.
넘어지면 더 밟히고 일어서면 사방에서 풀린다는 것을...
이제 다시 마전동 부동산도 회복을 했고 그곳에서 나오는 월세로 대출이자를 갚고 이곳 월세까지도 내고 있다.
내 직장도 든든하고 남편의 월급도 적지 않으니 참고 견디면 다시 풀린다는 이치,
그것이 바로 참고 견디며 기다린 희망 1프로가 안겨주는 힘인 것 같다.
아이들도 부모의 귀 엷음에 당했던 날들을 지켜보며 돌다리도 두드리는 교훈을 얻어
블로소득을 바라지 않고 자신의 길을 얼마나 성실하게 잘 닦아 나가는지...
어쨌든 애초의 계획엔 마전동은 시세보다 싸게 산 것이고 옥련동은 시세대로 받으면 될 것 같았던
내 나름대로의 계산법이 큰 착오였던 것이다.
세상이 생각과 계획대로만 착착 진행된다면 어떤 어려움이 따르겠는가...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삶이기에 늘 변수를 생각해 둬야 했는데 우리는 그때까지도 그 변수에 대한 생각을
미쳐 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남편은 사기로 나는 계산착오의 일 벌림으로 우린 양쪽 다 피장파장이라
서로 각자 내탓으로 돌리고 있으니 그나마 그 와중에서도 싸움은 없었던 것 같다.
또 다시 빚의 행진이었지만 그나마 곧 중국에서 수금액만 나누면 목돈을 보내오겠지하는 기대를 안고 햇살론 등 빚으로
빚을 갚아 나가던 중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사채 외의 돈을 구하기 힘들었을 때 궁여지책으로 생각했던 것이
그나마 월세 보증금으로 빚을 좀 갚고 작은 곳으로 옮기는, 즉 보증금 활용을 하자는 마음이었다.
마침 아들은 군대에 있고 딸은 고시원에서 공무원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남편은 중국에 있으니 나 혼자 생활하는 것
집이 클 필요가 없었다.
그때의 부동산 사장님은 어떻게 그런 명언을 남겨 주셨던지 그 말씀과 진심어린 염려의 표정이 눈에 선하다.
"일단 소나기는 피하고 봅시다..."
보증금이 싼 집을 골라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할 계획을 세우고 남은 보증금으로 빚을 갚으니 조금 숨통이 트였다.
그러나 드디어 이사를 하게 된 날 남편이 십원 한장 받아오지 못하고 빈손으로 귀국을 했다.
조선족인지 위구르족인지 회장인지 누구한테 당했는지 아직 알 길이 없다. 단지 그 회장이란 사람도 빈 손으로 나왔다는
정보만 뒤에 접했을 뿐이다.
그나마 함께 했던 소장이란 분은 자신의 집을 담보로 1억을 투자해 하나도 못 건졌는데 우리는 돈 투자는 하지않고
세월 투자만 한 것이니 예전 사기당했을 때처럼 뚜렷이 사기라는 명분을 내세울 수 없다는 것 뿐...
하루하루가 막막했다.
갑자기 외국생활 2년 만에 들어오니 직장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햇살론 카드론... 내가 버는 돈으로 이자를 내기도
어려웠을 때 그나마 또 아슬아슬하게 옥련동 아파트가 팔렸던 것이다.
그것 역시 급하게 팔았기에 밑바닥에서도 이사 비용을 2백만원이나 해 주고 꽉 막힌 상태에서 간신히 응급처치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번 빚을 지게 되니 갚는다고 갚아도 또 다시 빚은 장마철 풀 자라듯 자라나는 것이었다.
그나마 남편이 전공이 아닌 직장이라도 잡게 되어 돈을 좀 벌어왔지만 부부가 월급을 타도 어디서 얼마가 나가는지
정리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빚으로 빚을 갚는다는 말처럼 위험하고 무모한 것은 없겠지만 그래도 당장 안갚으면 안되는 상황이기에 한치앞이 막막했던 순간들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얼굴을 보면 남들은 아무 걱정 없는 것 같은데 당장 한달 앞이 막막했던 나는 늘 가슴이 답답했었다.
이젠 중국에서 목돈을 가져올 거라는 기대도 없는 상태가 되고 보니 뾰족한 수가 없는 것 같았다.
그때 또 지푸라기라도 잡고있던 희망의 끈이
"99프로의 길이 끝난다 해도 1프로에서 다시 길이 시작된다"는 누군가 보내준 엄홍길 대장님 말씀이었다.
그 힘겨운 와중에서도 가까운 친구들조차 내 고민과 걱정을 알지 못했다. 분명 뭔가 길이 있을거라는 믿음,
아마도 그런 것이 나를 절망의 늪에서 구해줬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딸이 공무원시험에서 합격을 했다.
엄마의 고민을 눈치챘던 딸은 공무원 대출로 빚을 갚으라며 엄마를 위로했다.
그렇게 해서 딸 앞으로 2천만원을 대출 받아 삼년을 갚아 나가기로 하니 내 월급으로 이자와 원금을 갚아 나가도
생활비로 보탤 돈이 남았다.
벌써 2년 2개월을 갚았으니 10개월만 갚으면 내 빚이 완전히 청산이 된다.
윤곽도 뚜렷해서 이제 어디서 얼마가 나가는지 계산때문에 복잡해서 막연히 나가는대로 맥 놓고 있던 시절에서
벗어난지 오래다.
한번 풀리기 시작을 하니 남편도 다시 감리 단장 자리로 본연의 업무를 찾아 갔고 아들도 자격증도 따 놓으며 졸업 후 취업에 대비해 두고 있다.
마전동 집은 애초엔 2년 후에 다시 들어가야 겠다 생각했었으나 처음 이사오셨던 목사님이 1년 반 만에 새집 청약을 받아
들어가셨기에 1년 반 만에 또 다른 세입자와 다시 2년 계약을 했었는데 그 세입자도 사정이 생겨
1년 반 만에 이사를 가게 되었기에 또 다른 세입자와 다시 2년을 계약해 놓은 상태이다.
지금 살고있는 이 집이 너무 편안하고 좋아서 어차피 좀 더 살아도 좋을 것이기에 순리대로 따르는 중이다.
목사님이 이사를 가시고 두번 째 계약을 했던 젊은 분들이 예전의 무모했던 우리집 모습 같아 마음에 애잔하게 남아 있다.
사기를 당해 집을 팔고 월세로 들어왔으나 빌렸던 돈을 갚기 위해 2년도 못 채우고 보증금을 빼서 빚을 갚고
자신들은 보증금 하나도 없는 신축 빌라를 사서 이사를 간다고 했다.
신축빌라 값이 만만치 않은데 돈 한푼 없이 은행이자와 캐피탈 이자로 1억 5천이나 되는 대출을 받겠다고 하니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극구 말렸었다.
이사가는 것은 좋은데 보증금 싼 곳으로 가서 일단 시간을 벌어보라고 했지만 계약하는 날 가 보니 그대로 감행했던 것이다.
남편이 버는 돈에서 얼마, 자신이 버는 돈에서 얼마, 이자를 갚아나간다는 계획에 딸까지 투입시켜 계산을 해 놓고 있었다.
세상이 계획대로만 되는 것은 아닌데...
몇 번 계획의 오점을 체험했던 내 의식에서 자꾸 안스러운 생각이 물밀듯 밀려왔다.
부동산에 모였을 때 새로 이사오시는 분들 역시 사업을 하다가 큰 집을 팔고 월세로 들어오게 된 사연을 이야기 한다.
동병상린의 마음으로 계약을 마쳤다. 그리고...
작년 봄 출간한 내 시집 <무늬>에 나는 그날의 심경을 기록하듯 한편의 시로 남겨 함께 실었던 것이다.
연민
평지에서의 단조로움은 애당초 원치 않았다
늘 춤을 추게 하는 길이라야 직성이 풀렸고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다가 지푸라기를
잡는 묘기 앞에서는
손뼉까지 쳤었다
굴뚝에서 쏟아내는 굴뚝새의 화신들이
접힌 날개로 연신 허리를 꺾으며 날아가고
기세등등해진 대기의 찬 기운이 레깅스 다리 위로
매섭게 달려들 때
소나기에 흠뻑 젖었던 날들을 만나기 위해 버스를 탔다
강철로 여문 젖은 날의 기억들은
더 이상 추위에 굴복하지 앟았고
추위를 조롱하듯
잠자리 날개 같은 꽃분홍 스카프를 보란 듯 내둘렀다
지난날의 나처럼
소나기를 피해 가는 그녀에게
고개 너머 평지에 환한 진달래밭이 있을 거라고
진달래꽃 같은 스카프를 연신 휘날렸다
부동산에서도 차 안에서도 은행에서도
내 진달래밭 예찬에 끄떡이던 그녀,
희망 한 다발 선물할 수 있었다면 이 밤,
진달래 꽃술처럼 길게 매단 내 속눈썹이 외롭지 않으리라
바람 한 점 머물다 가는 간이역 같은 내 집
소나기를 피해 가는 사람과
소나기를 피해 오는 사람
사연의 골짜기를 넘겨다보며
상행선, 하행선 기차역의 간수처럼
화사한 스카프를 깃발처럼 흔들었다
더 이상 내 길에 무모하게 추는 춤은 절대 없을 거라고
서약을 하듯 도장을 꽝 찍었다.
지금 나는 사이버 대학교 사회복지과 3학년으로 편입을 해서 공부를 하고 있다.
삶이란 결코 녹록한게 아니므로 사회 곳곳에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참 많다고 생각한다.
내가 한치 앞이 막막했던 상태를 겪어봐서인지 더욱 절실하게 그분들의 어려움이 맘에 닿는다.
사회복지란 인간 이해, 휴머니즘 정신이란 걸 알기에 사회복지사가 된다면 진정 어려움을 헤아릴 수 있는 가슴으로 그분들의 힘겨움을 위로하고자 한다.
옥련동에 남아 있는 작은 상가에 아픈 분과 요양보호사를 연결시켜 드리는 재가 센터를 마련해 보고자 하는 꿈도 있고
요즘 열심히 배우고 있는 웃음상당사와 레크리에이션, 그리고 노인건강 운동과 스피지 지도사 또한
무형문화재인 경기민요까지 재능기부를 하며 백세시대를 맞아야 겠다는 꿈도 꿔 본다.
분명 가진 것은 없지만 진정한 행복의 가치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 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난다.
한치앞이 막막하던 날을 벗어나 날마다 마음에서 원하는 것들을 할 수 있다는 것, 이보다 큰 행복이 어디 있겠는가...
재물은 잃을 수 있어도 배운 것은 결코 남이 훔쳐갈 수 없는 것이기에 기쁜 마음으로 배우고 싶은 것들을
배워나가는 요즘 날마다 열정이 피어오르는 느낌이다.
평생 자신이 버는 것으로 잘 관리할 수 있다면 잘못될 경우는 없겠지만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알 수 없기에분명 좀 더 잘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실패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듯 늪에 빠졌었다 해도 반드시 헤쳐 나올 수 있는 길은 있고 그 길에서
다시 대로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 닿았더라도 꼭 힘을 내시고
"1프로의 희망이 99프로의 절망을 이겨낸다"는 엄홍길 대장님 말씀처럼
늘 희망을 갖고 살아가면 반드시 길이 열린다는 믿음으로 힘차게 살아가시길 기원해 본다.
첫댓글 어제부터 새로운 직장에서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다녀와서 사회복지 수업을 듣다가 너무 졸려서 잠깐 자고 일어나 낭주님 방송을 봐야겠다
생각했는데 그만 그대로 깊은 잠이 들었네요. ㅋ
문래동 코웨이 접수처에 있다가 신중동 코웨이 고객센터로 직장을 옮겼습니다. 퇴근시간이 안 맞아 퇴근 후 배우는 것 늦게 도착했는데
퇴근 시간도 30분 빠르고 더 가까운 인천이니 아주 잘 되었습니다. ㅎㅎ 삶의 이야기방이기에 제 삶의 이야기 블로그에 올린 글 퍼서 올려 봅니다.
행복한 날 되세요.^^*
이렇게 해서 또 산골 순이님의 인생사를 들어보았네요.
짧지않았을 시간들... 그래도 지나갔네요.
神은 어떠한 시련도 해결 할수 있을만큼만 주신다 했지만,
물론 손놓고 있는 사람에게는 주시지않겠지요.
사업이란 내가 연구하고 내가 경험해서 시작해야지
누가 이런거 하면 잘된다더라..해서 따라가는건
99% 실패하거나 사기라고 보시면 됩니다.
제 친구도 그렇게 동업하다가 거액을 날렸지요.
그래도 남편분께서는 중국껀에서는
세월만 사기를 당한셈이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산골 순이님도 부동산쪽에 관심을 가졌었는데
그게 그리 만만하지않았지요?
지금은 모든게 정상화되고 바라는 삶을 사시니
이제 행복할 일만 남은 것 같읍니다.
구비구비 인생살이가 고비고비가 되는 사람도 있고
태어나길 잘해서 평생 험한 꼴 안보고 안겪고 일생을 마치는 인생도 있지요
하지만 그런 평온한 인생도 죽음이라는 난제는 피할수 없는 불행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렇게 보면 공평하다고 자위하고 삽니다
순이님
참 지혜로우시고
냉철한 판단력과 현실적인 사고를 고루 갖추셨습니다
어떤 삶이든지
헤쳐나오는 모양새는 사람마다 다르지요
좋은 인간 상의 본보기입니다
오늘 글과 시 잘 보고 갑니다
이 모든것은 지나가리라 하듯이
우리의 참 모습은 상처가 지난 후의 모습일겁니다
건강하세요 ..
힘 내세요 화이팅하세요 !! 고난의 역경을 순응하는 삶은 참 값진 삶입니다.
행복역 종착지의 역장
사회복지의 꿈을 이루는
만인의 연인이 되시길요~~~^^
잘읽었습니다.
이젠
웃는 날만 있겠지요.
'절대 후회하지 마라. 좋았던 것은 추억이고 나빴던 것은 경험이다."
가슴에 담고 갑니다.
인생길은 서로가 다 다르지만 부딪치고 개척하며 사는거겠지요..
저도 편안과 고난의 세월의 반복속에 살아왔답니다.
인생 귀감이 되는 글 잘보았습니다^^
그많은 격량을 거치시고는
오늘도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어가시는 산골순이님에게
만세 삼창 을 부르고 싶네요
산골순이님 만세 만세 만세 ㅎㅎ
따뜻하신 마음으로 격려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인사 올립니다. ㅎㅎ
제가 가장 좋아하는 독일 속담이 있습니다.
"쓴맛을 모르는 자는 단맛도 모른다."
쓴맛을 보았기에 지금의 맛이 더욱 달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위안삼으며 하루하루 행복하게 맞고 있습니다. .
늘 건강 잘 돌보시고 좋은 나날 맞으시길 기원합니다. ^^*
이제서야 글을 읽어 보았네요
'절대 후회하지 마라. 좋았던 것은 추억이고 나빴던 것은 경험이다."
과거,현재,미래진행 말년의 자아(自我)입니다^.^
ㅎㅎ 지나간 것에 대해선 그냥 웃지요.
산자락 님 감사합니다. 좋은 날 맞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