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탑에서 연구하는 러시아 전문가도, 외교관도 아니었다. 하지만 1980년대 백악관을 20차례정도 찾아가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과의 정상회담을 앞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옛소련 접근법을 가르친 수젠느 매시가 지난달 26일(현지시간) 켄터키주 해로즈버그에서 94세 삶을 마쳤다고 일간 뉴욕 타임스(NYT)가 1일 전했다.
유족은 그녀가 호스피스 돌봄을 받다 눈을 감았다고 확인했다. 고인은 오랜 세월을 살아온 메인주 블루 힐을 떠나 최근 딸의 거처가 가까이 있는 켄터키주 댄빌로 옮겨와 지냈다고 했다.
그녀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아 러시아 문화에 대한 책들을 여럿 펴냈다. 러시아인의 "영혼"이라고 일컬은 것에 대한 낭만적인 견해를 품고 있어 보통 사람들에 관한 일화들을 렌즈로 복잡한 이슈들을 이해하고 소통하고 싶어했던 레이건 대통령과 유대를 맺었다.
첫 만남은 1984년 1월에 이뤄졌다. 대통령은 생기 있으며 러시아식 농담들을 소개하며 오랜 기간 고통받아온 러시아 민중의 영혼을 얘기하는 매시에게 빠져들었다. 역사학자 마이클 R 베슐로스가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초상 시리즈 가운데 하나로 펴낸 '대통령의 용기'(2007, 지식의숲 2009년 번역 출간)에 따르면 대통령은 그녀에게 "그곳 사람들은 도대체 얼마만큼이나 공산주의를 신봉한답니까?”라고 묻기도 했다. 이날 만남은 대통령 집무실 오벌 오피스에서 5분만 예정돼 있었는데 한 시간 가까이로 늘어났다. 그 뒤 레이건은 거듭해 다시, 다시, 다시 와달라고 청했다.
이렇게 그녀는 '레이건이 소련을 보는 창문”이 됐다고 역사학자 제임스 맨은 냉전 시대에 종언을 고한 그의 역할에 대한 연구서 'The Rebellion of Ronald Reagan'(2009)에 적었다, “그녀는 대통령이 이해하고 쓸모를 찾을 수 있도록 그 나라와 러시아 국민들을 묘사했다.”
레이건에게 러시아 속담 '신뢰하되 검증하라'(Doveryai no proveryai)를 일러줘 1986년 10월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만난 고르바초프에게 언급하도록 만든 이도 매시였다. 고르바초프는 종종 이 일 때문에 레이건에게 설복 당했다고 불평하곤 했다.
레이건이 고르바초프와 스위스 제네바에서 첫 정상회담을 갖기 전에 매시가 볼세비키 이전 예술과 문화를 존경의 념으로 돌아본 책 'Land of the Firebird: The Beauty of Old Russia”(1980)을 읽고 있었다. 레이건은 매시에게 보낸 편지에다 “정말 즐기고 있다"면서 “다가오는 만남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적었다.
매시는 1985년 NYT 인터뷰를 통해 레이건 대통령이 늘상 자신에게 얘기하는 소련 전문가들의 "빡빡하고 작은 서클"을 벗어나는 데 관심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이어 "그는 소련에 가본 적도 없었다. 그 사람들에 대해선 도무지 알지 못했다. 그는 조언자들이 많았지만 다른 미국인들과 똑같은 위치였다"고 덧붙였다.
매시는 모스크바를 다녀오기 전이나 후 레이건과 연락하거나 만났으며, 오벌 오피스에서 영부인 낸시 레이건과 어울려 셋이서 점심을 먹을 정도였으나 레이건 행정부의 소련 관계를 아는 관리들의 회고록은 그녀를 미미한 존재로 다뤘다.
그러나 맨은 그녀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훨씬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적었다. 비공식 특사로 일하며, 레이건과 모스크바를 연결하는 메시지를 전달했으며, 한때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묘사했던 레이건의 시각을 교정해 러시아인들을 인간으로 바라보게 해 끝내 고르바초프로 하여금 핵 긴장을 완화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매시는 고르바초르를 크렘린의 강경파들에 맞서 진정한 개혁을 추구하는 인물로 페인트칠했다. 당시 레이건은 고르바초프를 또 하나의 소비에트식 스트롱맨으로만 여기는 정부 안팎 냉전 매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런 견해에 동의하게 됐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매시는 레이건을 더 온건한 그의 노선으로 이끌지 않았다. 하지만 본인의 직감을 따르는 전통적이지 않은 접근법으로 핵미사일 일부를 제한하는 1987년 협약을 거쳐 레이건이 1988년 모스크바에서 냉전 종식을 선언하는 일로 인도했다.
수젠느 리슬롯테 마르게리트 로바크는 1931년 1월 8일 뉴욕 퀸스에서 수젠느 (놉스) 로바크와 스위스 외교관인 모리스 J 로바크의 세 딸 중 맏이로 태어났다. 부친이 스위스 총영사로 일한 필라델피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52년 바사 칼리지를 졸업했으며, 2년 뒤 잡지사 기자였던 로버트 K 매시와 결혼했다. 첫 아들 로버트가 혈우병을 앓아 그를 돌보는 과정을 시린 가슴으로 돌아본 회고록 'Journey'(1975)를 집필했는데 이것이 뜻하지 않게 러시아 문화를 돌아보게 해 오벌 오피스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매시 가족은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차르인 니콜라스 2세와 그의 부인 알렉산드라에게도 혈우병 아들이 있었음을 알게 됐다. 매시가 편집자 겸 연구자로 집필에 참여해 펴낸 책이 베스트셀러 역사서 'Nicholas and Alexandra'(1967)였다, 장애가 있는 자녀를 양육하며 겪는 어려움을 이겨내고자 찾은 것이 러시아 교훈들이었다.
그녀는 나중에 적기를 "내 마음을 똑바로 유지하기 위해, 공황 상태에 빠진 동물처럼 우리 안을 돌아다니지 않기 위해 난 뭔가 어려운 일을, 뭔가 정신적으로 도전하는 일을 해야만 했다"고 했다. 그는 1967년부터 1972년까지 여덟 차례나 러시아를 방문했다. 그는 소련에 관심 있어 하는 미국 상원의원들과 관계를 돈독히 했다. 이렇게 그녀는 망명한 러시아 저작자 알렉산데르 I 솔제니친이 "미국인들 가운데 러시아를 진정으로 이해한" 책이라고 극찬한 'Land of the Firebird'를 집필하게 됐다.
NYT 서평을 쓴 존 레너드는 박한 평가를 내놓았는데 "단순하면서 동시에 불어 버렸다(overcooked)"고 일축하며 “숨 막히는 만화책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녀의 첫 결혼은 1990년 이혼으로 끝났다. 역시 러시아 연구자였으며 저술가였던 첫 남편은 2019년 9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92년 매시는 저명한 컴퓨터 이론가 시모어 페퍼트와 재혼(페퍼트는 네 번째 결혼이었다)했는데 그와는 24년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2016년 사별했다. 유족으로 자매 시몬느 두르, 세 자녀 로버트 K 매시 4세, 수젠느 매시 토머스, 엘리자베스 매시, 일곱 손주와 세 증손주를 남겼다.
그녀는 1985년부터 1997년까지 하버드 러시아연구센터(현재는 러시아와 유라시아 연구를 위한 데이비스 센터)의 펠로우(석좌) 연구원이었으며 'Trust but Verify: Reagan, Russia and Me'(2013)를 비롯한 저작들을 남겼다. 매시가 레이건과 연결해 메시지를 전달한 모스크바 관리는 라도미르 보그다노프가 있는데 현재 러시아 씽크탱크인 미국과 캐나다 연구재단의 부국장이다. 보그다노프는 KGB 요원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매시와 레이건 둘 다 그를 고르바초프의 비공식 외교관으로 믿었다.
매시는 결국 백악관과의 인연을 과신해 선을 넘기도 했다. 레이건 대통령에게 이임하는 러시아 주재 대사의 후임으로 자신을 임명하라고 졸랐던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은 이미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러시아 전문가 잭 F 매트록주니어를 낙점한 상태였다. 이에 백악관 관리들은 매시의 오발 오피스 접근을 막으려 했다. 몇몇은 그녀가 모스크바에서 가져온 메시지들이 정말로 고르바초프에게서 나온 것인지 의심하기도 했다. 신임 NSC 고문인 프랭크 칼루치는 매시와 대통령의 만남에 배석하겠다고 주장했다.
칼루치는 실제로 1987년 2월 25일 만남에 함께 했다. 그는 자리를 파한 뒤 일부 관리들이 의심한 것처럼 그녀가 어떤 꿍꿍이를 감춘 의제(어젠다)도 갖고 있지 않았으며, 대통령을 조종하기 위해 모스크바가 이용하는 계책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됐다. 칼루치는 집필 중이던 2005년 맨에게 “그들은 대단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만남이 끝나자 그녀가 그의 뺨에 입을 맞추더라. 그녀는 전혀 해가 되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한편 고인의 두 번째 남편이었던 페퍼트는 마빈 민스키(1927~2016)와 함께 쓴 저서 ‘퍼셉트론(Perceptron, 1970)’으로 인공지능(AI) 연구의 주춧돌을 놓고, 최초의 어린이용 컴퓨터 코딩 프로그램 ‘로고(Logo, 1968)’를 만들어 보급했으며, 컴퓨터와 교육, 창의에 대한 혁명적 교육철학서 ‘마인드스톰(Mindstorms, 1980)’을 쓴 선지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