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외출
아내가 새벽에 일찍 일어나더니
김밥을 싸면서
오늘부터 진이가 2박 3일로
강원도 횡성으로 학교 수련회를 간다고 말하고서는
퇴근 무렵 회사로 갈 테니 재미있게 해주란다
몸이 냉한 아내에게 내심 한약을 지어주려고
봄엔가 아내에게 사무실로 찾아오라 했었는데
그 위치를 잊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진이가 없으니까
저녁에는 '광해, 왕이 된 남자' 라는 영화를
같이 보고 싶다는 속내로
아들이 만들어준 작은 자유를 만끽해 보려는 것 같았다
돌아보니
아내와 같이 영화를 본지가 언제이었는지
정말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회사에서 발주한 원단이 늦게 도착하여
그 업체 직원과 함께 묵직한 원단을 어깨에 메고
내 책상이 있는 의류 보관창고로 나르고 있었는데
소리도 없이 언제 왔는지
아내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며
그 창고 입구에 서 있었다
그 순간
내 모습 때문에 아내가 속상하지 않아야 할 텐데 하는
일말의 두려움이 스쳤지만 쓸데없는 기우였다
작업복 차림이어서 처음에는 내가 아닌 줄 알았다며
아내는 미안한 듯 해맑게 웃었다
그렇게 청바지를 입고 찾아온 아내는
수은 가로등 불빛 때문인지는 몰라도 참으로 예뻤다
'영화는 나중에 보면 안 될까
이촌동에서 테니스장 하는 형님이 오늘 만나자고 전화 왔는데
당신 오기로 했다니까 형님이 당신이랑 저녁을 같이 하자고 그러시던데'
아내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꼭 잡으며 따라왔다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는 낙원동 뒷골목의 삼겹살집에서
내가 소주잔을 기울이는 동안
형님은 그 특유의 유머를 곁들여 가면서
'그동안 잘 참고 견디며 동생과 살아준 제수씨가 감사합니다'고 말하며
아내를 위로해 주고 있었고
아내는 보고 싶은 영화 대신 김두한 선생 밑에 있었던
처음 만난 그 형님의 인생역정을
때론 소리 내어 웃으면서 재미있게 듣고 있었다
그 이야기 중에 여자문제 때문에 가정사가 원만하지 못했던 형님이
한숨처럼 내뱉은 한마디 말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제수씨,
지금 가만히 생각해 봐도
죄악으로 빠지는 길은
왜 그렇게 아름답고 황홀하게 보이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형님과 술이 많이 취했던 밤
가을이 깊숙이 들어앉은 낙원동 거리를 아내와 걸었다
비 온 뒤끝의 바람이 쌀쌀했으나
술기운으로 불그레해진 아내의 얼굴은
곱게 물든 단풍잎보다도 아름다웠고
아내 손의 촉감은 처음과는 다르게 아주 따뜻했다
이렇게 종로거리를 아내와 함께 걸어보는 것이
과연 몇 년 만인가
연애 시절의 어느 추운 겨울날
두꺼운 종이로 호떡을 싸서 먹으며 걸었던 때가 아마 마지막이었지?
늦은 시간
아내와 찾아 들어간 집 부근의 조그만 찻집은
가을 분위기에 어울리는 조용한 뉴에이지 피아노곡이
흘러나오는 아늑한 곳이었다
'진이는 잘하고 있겠지?'
커피를 나눠 마시며
아들의 미래에 대한 걱정 반, 기대 반의 이야기로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냥 놔두면 어떨까
제 생각 속에서 마음껏 뛰어놀게
때가 되면 진이가 잘 할거라고 우리는 믿고 있잖아
다만, 진이가 나쁜 길이나 위험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우리는 멀리서 진이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면 될 거야'
아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받았다
'당신 술 좀 줄여요
진이도 걱정해요
당신이 밤늦게까지 들어오지 않으면 잠을 못 자는 것 같았어요
내가 들을까 봐 이불 속에서 당신에게 전화하기도 하고
아빠는 늦더라도 들어오시니까 걱정하지 말고 자라고 했더니
진이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그러데요
엄마는 아빠가 안 들어 오셨는데 잠이 와?'
아내의 가슴 설레는 모처럼의 외출은
흔히 말하는 화려한 외출과는 원래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도 기대와는 생뚱맞게 너무 달라 아내는 심히 실망했으리라
상계동에서만 맴돌던 아줌마가 결혼 후 처음으로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후에 재미있는 영화도 보고
불빛 휘황한 명동거리의 깊어가는 가을을 느끼고 싶었는데
남편이라는 사람이 어느 후미진 골목길의 술집에서 술만 마시고 있었으니 말이다
미안한 마음이 앞섰지만
아내의 표정이 그리 싫지 않은 것 같아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그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한지붕 밑에 같이 살면서도
조그마한 행복 하나 선물하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저린 일인가
찻집을 나서자
초롱초롱한 별들이 텅 빈 거리로 유리알처럼 쏟아져 내리고
목덜미를 휘어감는 수락산의 맑은 바람이 서늘하였다
아름다운 가을밤,
아내와 팔짱을 끼고 아파트 사잇길에 들어서니 노래가 절로 나왔다
'어느새 바람 불어와
옷깃을 여미어 봐도
그래도 슬픈 마음은......'
이상원이레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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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붓한 아름다움이 느껴집니다...
감사합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늘 건강하세요
착한 아내 멋진 남편이네요.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가을 되세요
아내을 사랑하는 마음이 진하게 느껴 옵니다.
언제까지나 아내 손 꼭 잡으세요.
모처럼 훈훈한 가을 향기 취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