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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인도인구 10억 돌파
▲인도 서쪽 지역 구자라트주 나트와르
가드의 주민들이 커다란 우물 주변에 동그
랗게 모여 물을 길어 올리고 있다.
사진=로이터/뉴시스
인도의 인구가 11일 낮12시31분(현지
시간)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10억명을
돌파할 예정이다.
유엔인구기금(UNFPA)은 델리의 사프
다랑 병원에서 태어나는 아기를 인도의
10억명째 인구로 지정할 계획이다.
매분 29명의 신생아가 태어나는 인도
에서는 매년 1천5백53만1천명의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 총리는 이날 인구
10억명 돌파를 계기로 지난 수년간 실시
해온 가족계획 및 국민건강 증진계획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새 국가인구위원회의
설립을 발표할 계획이다.
▶2011년 CNN 초대회장
버트 라인하트 별세
▶2011년 ‘마지막 조선총독부 박물관장’ 아리미쓰 별세
마지막 조선총독부 박물관장이었으며 광복 후에도 호우총·은령총 발굴에 참여했던 일본 원로 고고학자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103) 전 교토대 교수가 11일 오후 별세했다.
1907년 태어난 아리미쓰씨는 1931년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한 뒤 1936년 식민지 조선으로 건너가 조선고적조사연구회 조수로 일하며 평양과 경주 지역 고적 조사에 주력했다.
1941~1945년에는 총독부 박물관 주임이라는 직함으로 박물관 관장 역할을 했다. 해방 후 곧바로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그는 1946년 6월까지 경주 호우총과 은령총 발굴을 도왔다. 그가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혼란기를 연결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총독부 박물관 건물을 인수해서 국립박물관을 출범시킨 초대 관장 김재원(1909 ~1990) 박사의 노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으로 돌아간 뒤 1957년 교토대 교수가 됐고, 1980~1984년에는 나라(奈良)현립 가시하라 고고학연구소장을 역임했다.
1989년부터는 교토시에 있는 조선 미술 전문 고려미술관 연구소장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 마제석검의 연구’, ‘조선고고학 75년’ 등이 있다.
▶2009년 오자와 이치로
일본 민주당 대표 사퇴
▶2007년 법원,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에
구속영장 발부
▶2004년 프랑스 첫 영어
상업 라디오방송 등장
자국어를 고수하기로 유명한 프랑스에 영어로 방송하는 상업 라디오방송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11일 첫 전파를 탄 파리 라이브 라디오(PLR)가 그것.
파리 라이브는 뉴스와 음악방송으로 구성되는데, 뉴스는 주로 프랑스 통신사 AFP로부터 제공받는다.
파리 라이브의 렌지 던칸 사장은 “영어로 된 뉴스와 정보를 접하기를 희망하는 사람이 파리 내에도 놀라울 정도로 많다” 면서 “파리 라이브는 파리에 살고 있는 약 74만명의 영어권 인구뿐 아니라, 파리를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도 유익한 채널이 될 것” 이라고 말했다.
파리에 영어 라디오방송을 시작하겠다는 아이디어는 호주의 변호사 출신인 렌지 던칸 사장이 1994년 파리를 방문했을 때 떠올렸다. 던칸 사장은 “파리에 잠깐 머무는 동안, 파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었지만 영어로 방송하는 라디오채널이 하나도 없어 답답했다” 고 말했다.
던칸 사장은 2001년 말부터 본격적인 라디오방송 설립 준비에 들어가 30여명의 인력을 채용했다. 스튜디오는 파리 물랭루즈 카바레 옆에 마련했다. 던칸 사장은 “국제 뉴스뿐 아니라 프랑스와 파리의 일상 뉴스를 집중 내보낼 계획” 이라고 밝혔다.
다만 프랑스 라디오방송은 불어로 된 음악을 40% 이상 틀어야 한다는 법 규정 때문에, 이 영어방송에서도 프랑스 음악을 상당 시간 틀어준다.
▶2001년 동아건설 파산 선고
법정관리 절차 폐지로 파산 초읽기에 들어갔던 동아건설에 대해 결국 법원의 파산선고가 내려졌다. 서울지법 파산4부는 2001년 5월 11일 동아건설의 파산결정을 내리고, 향후 회사 청산절차를 맡게 될 파산관재인에 사법연수원장 출신 권광중 변호사를 선임했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동아건설에 대한 1조원 이상의 금융단 협조융자와 2년 이상의 기업개선작업에도 불구하고, 채무가 자산을 1조5000억원 이상 초과해 청산하는 것이 계속 운영하는 것보다 낫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파산결정의 지연에 따른 공사 착수·재개 결정이 늦어질수록 회사 수익성이 악화돼 수익성 있는 공사마저 포기해야 할 상황이 생길 수 있어 조기에 파산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한편 재판부는 파산결정에도 불구하고 리비아 대수로 공사와 용인 구성 솔레시티 등 수익성이 높은 공사들의 경우는 계속 진행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부 아파트의 1만여 가구가 입주에 차질을 빚었고, 직원 2800명이 해고돼 파장이 컸다. 동아건설은 채권단이 2000년 10월 3일 자금지원과 워크아웃 중단 결의로 사실상 퇴출된 상태였다. 동아건설 주식도 6월 7일 마침내 주식시장에서 퇴출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2000년 인도 인구 10억 돌파
▶1999년 만민중앙교회 신도 200여명,
MBC 난입해 방송중단사태
▶1998년 조지프 에스트라다,
13대 필리핀 대통령에 당선
▶1996년 전 주뉴질랜드 한국대사관
행정관 최승진씨 외무부 문서 변조로 구속
▶1996년 마이애미 공항 부근서 DC-9
여객기 추락 - 109명 몰사
미벨류젯 항공사 소속 DC-9 592편 여객기가 1996년 5월 11일 오후2시25분쯤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국제공항에서 약 30km 떨어진 늪지대 에버글레이즈에 추락, 승객 1백4명과 승무원 5명 등 109명 전원이 사망했다. 미 연방항공국(FAA)은 이날 오후 1시43분 마이애미 국제공항을 이륙해 애틀랜타로 가던 사고 여객기가 마이애미 서쪽 1백60km 상공에서 조종실에서 연기가 나는 등 이상을 발견한 뒤 회항하던 중 늪지대에 추락했다고 말했다.
사고 소식이 알려지자 주변 주민들이 소형 공기부양선을 제공해 수색작업을 도왔지만 기체 일부와 어린이들의 옷가지만 발견했을 뿐 모든 것을 삼켜버린 진흙더미로 인해 1구의 시신도 찾아내지 못했다. 이번 항공기 추락사고는 `정비불량-기체노후화`가 원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 연방항공국(FAA)은 사고기가 1969년에 제작된 노후기로 지난 2년 동안 7번이나 회항한 기록이 있다고 밝혔다.
▶1995년 인도, 24년 만에
지하 핵실험 실시
▶1982년 영국 함대 대 아르헨티나전서
포클랜드 해협 진입
▶1981년 뮤지컬 `캣츠` 런던서 첫 개막
뮤지컬의 시대를 연 `캣츠`가 1981년 5월 11일 런던 뉴런던시어터에서 개막했다. 1982년 대서양을 건너 뉴욕 윈터가든 극장에서 막올린 `캣츠`는 1997년 6월 브로드웨이의 롱런 기록(코러스 라인· 6137회)도 갈아치웠다. 폐허같은 창고를 재현한 스펙터클한 무대, 실제 고양이를 빼닮은 듯한 생생한 안무, 타이틀곡 `메모리`로 빛나는 웨버의 뛰어난 음악…. `캣츠`는 런던을 찾는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거쳐야할 필수코스가 됐다.
2001년 5월 20주년을 맞은 현재 이 극장에서만 8500회를 넘긴 `캣츠`는 지난 1989년 당시까지 최장기 공연 기록을 갖고 있던 웨버의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3357회)를 앞질렀다. 수치로 본 `캣츠`의 활약상은 눈부시다. 뉴런던씨어터 극장에서 `캣츠`를 본 관객만 800만을 넘어섰고, 티켓수입만 1억2500만 파운드(약2300억원)를 기록했다. 함부르크에서 도쿄까지 세계 300개 도시에서 공연됐고, 전세계에서 10억파운드(약1조8490억원)의 공연수입을 올렸다. 할리우드 성공작 `타이타닉`의 흥행성적을 능가하는 대기록이다.
`캣츠`는 앤드류 로이드 웨버와 영국을 대표하는 정통극단 로얄 셰익스피어 컴퍼니가 의기투합해 만든 작품이다. 스물여덟 나이에 RSC 사상 최연소 예술감독을 지낸 트레버 넌은 첫 뮤지컬 `캣츠`를 성공으로 이끈 후, `레 미제라블` `스타라이트 익스프레스` `선셋 불러바드` 등 대작들을 잇따라 연출했다.
영국을 대표하는 시인 T. S. 엘리어트의 시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캣츠`는 뮤지컬 작품 흐름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특별한 줄거리가 없기 때문에 영어나 연극에 대한 이해가 없어도 쉽게 볼 수있는 장점 덕분에 외국인 관광객이 몰렸다.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 같은 호화 대작들도 `캣츠`의 성공에 고무돼 잇따라 등장했다.
젤라클 무도회로의 초대, 캣츠
2006년 1월 9일 [오페라의 유령] 공연장에 난데없이 [캣츠]의 고양이가 등장했다. 이 고양이는 유령 가면을 쓴 배우에게 지휘봉을 건네주고 사라졌다. [캣츠]가 그동안 지켜온 브로드웨이 최장기 공연 타이틀을 [오페라의 유령]에게 넘겨주는 특별한 이벤트였다. [캣츠]는 1982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한 이후 1997년부터 근 10년간 최장기 공연 기록을 이어갔다. 브로드웨이보다 1년 앞서 초연한 런던 프로덕션은 그보다 앞선 1989년부터 웨스트엔드 최장기 기록을 이어갔다. 웨스트엔드 공연은 무려 21년간 8,950회 공연을 올리고 막을 내렸다. [캣츠]의 캐치프레이즈는 ‘Now And Forever’였다. 작품을 본 감동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의미도 담고 있지만 실제로 그만큼 장기공연을 기록한 작품이다. 고양이의 세계를 창조한 무대, 화려한 군무, 아름다운 노래로 [캣츠]는 공연 양대 산맥인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에서 흥행을 이어가며 소위 말하는 ‘뮤지컬 빅4’의 첫 자리를 차지한 작품이다.
순탄치 않은 출발
뮤지컬 [캣츠]의 시작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T.S 엘리엇의 [지혜로운 고양이가 되기 위한 지침서]는 여러 종류의 고양이들을 소개한 우화시집이다. 작품을 관통하는 하나의 이야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사연을 가진 고양이들을 엘리엇의 아름다운 시어로 그려낸 작품이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는 이 우화집을 토대로 뮤지컬을 제작하려고 했다. 그러자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조셉의 테크니칼라 드림코트], [에비타] 등에서 호흡을 맞췄던 작사가 팀 라이스는 참여할 수 없었다. 엘리엇의 시가 이미 뛰어난 가사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에비타]를 함께 작업한 연출가 해롤드 프린스도 동참하지 못했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엘리엇의 우화 시집을 뮤지컬로 만들 것을 제안하자 해롤드 프린스는 관심을 보였지만 웨버하고는 생각이 달랐다. 해롤드 프린스는 엘리엇의 시에 등장하는 다양한 고양이들이 빅토리아 시대의 다양한 계급들의 유형적 인물을 상징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웨버는 이 작품을 사회적인 작품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할(해롤드 프린스의 애칭), 그들은 그저 고양이들일 뿐이야.” 웨버는 결국 그를 설득하지 못하고 다른 파트너를 찾아야 했다.
웨버의 [캣츠]호에 승선하게 된 이는 당시 [올리버], [마이 페어 레이디], [오 클라오마]를 성공시킨 젊은 프로듀서 카메론 메킨토시였다. (메킨토시는 [캣츠]의 성공 이후 [오페라의 유령], [레 미제라블], [미스 사이공] 등 뮤지컬 빅4를 모두 제작하게 된다.) 그는 웨버에게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의 연출가인 트레버 넌을 추천했다. 트레버 넌은 28살에 로얄 셰익스피어 극단의 예술감독에 오른 천재 연출가였다. 그러나 그는 이처럼 대형 상업극을 연출해본 경험이 없었다. 공연 관계자들은 무대에 온통 고양이 의상을 한 배우들이 뛰어 다니고, 상업극 경험이 없는 연출가가 제작하는 대형 뮤지컬이 성공할 리 없다고 여겼다. 게다가 공연장으로 선택한 뉴런던 시어터는 근 10년간 성공작을 올리지 못한 저주받은 공연장이었다. 당시 한창 주목받는 젊은 작곡가와 프로듀서가 제작했지만 공연을 올리기 전까지 투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애를 먹어야 했다. 악재는 계속 이어졌다. 주인공인 그리자벨라로 캐스팅한 대중적인 스타 주디 덴치가 연습 도중 부상을 당해 무대에 서지 못하게 된 것이다. [에비타]의 주연이었던 일레인 페이지를 급하게 섭외했지만 주디 덴치만큼 대중적인 호감을 주지는 못했다. 공연이 올라가고 우려한 대로 평단은 부정적인 비평을 쏟아냈다. 하지만 이변이 벌어졌다. 지난 10년간 외면했던 뉴런던 시어터로 관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완벽한 판타지의 창조
[캣츠]의 성공은 제작자들조차 믿기 힘들었다. 런던 프로덕션은 공연 개막을 앞두고 간신히 투자금을 모을 수 있었지만, 다음해 브로드웨이로 무대를 옮길 때는 사전 예매만 620만 달러를 기록할 정도로 대단한 관심을 받았다.
[캣츠]가 최장기 공연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T.S 엘리엇의 우화집을 판타지로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트레버 넌은 우화집을 관통하는 중심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고양이는 아홉 개의 삶을 산다’는 서양 속담에서 착안해 새로운 삶을 선택받는 젤리클 무도회를 생각해냈다. 웨버는 개성 강한 고양이들의 특성을 음악적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다양한 스타일의 곡을 구사했다. 바람둥이 고양이 럼 텀 터거는 롤링스톤즈의 록 음악 풍으로 표현하고, 악당 고양이 맥캐버티의 노래는 서스펜스가 느껴지는 헨리 맨시니의 ‘핑크팬더’ 풍으로 꾸몄다.
선지자 고양이 올드 듀터로노미의 노래는 오페라 [마술피리]의 ‘자라스트로’의 곡을 떠올리게 하는 멜로디로 개성을 드러냈다. 웨버의 노래는 개성 넘치는 고양이들의 특성을 잘 드러냈지만 트레버 넌은 클라이맥스를 장식할 노래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엘리엇의 ‘Rhapsody On a Windy Night’이란 시를 개사해서 가사를 만들었고 웨버는 이 가사에 푸치니의 아리아를 연상시키는 곡을 붙였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캣츠]의 대표곡인 ‘메모리’이다. ‘메모리’는 [캣츠]를 상징하는 곡으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를 비롯 100여 명이 넘는 가수들이 리메이크하는 등 아름다운 선율과 감동적인 가사는 노래 자체로 아티스트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늙고 외로운 고양이 그리자벨라
[캣츠]는 무대 위에 고양이의 세계를 완벽하게 구현해서 아동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성인들까지도 즐길 수 있는 작품으로 만들어냈다. [캣츠] 배우들은 분장이 끝나면 어떠한 이유에서도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되고 고양이로서 행동하는 것이 철칙이다. 인터미션 시간에 객석을 돌아다닐 때는 물론이고, 공연 도중 객석 출입구에서 등장하기 위해 로비에서 대기할 때도 그들은 한 마리의 고양이로 행동한다. 완벽한 고양이로의 변신을 위해 의상 제작에 1톤이 넘는 야크털을 사용하였으며, 수백통의 아이라이너가 분장 도구로 소모됐다.
고양이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노력은 무대에서부터 비롯됐다.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에서 연출가 트레버 넌과 함께 작업했던 무대디자이너 존 나피어는 무대로 실제 고양이의 눈으로 본 세계를 만들어냈다. 엘리엇의 유명한 시 ‘황무지’에서 착안해 쓰레기장을 무대로 삼은 존 나피어는 고양이의 시각에서 본 세상을 재현했다. 고양이의 시각으로는 실제 사물보다 크게 보이는 것을 착안해 무대소품으로 쓰이는 폐타이어, 구두, 타자기 등을 실제 크기보다 3배에서 10배까지 크게 제작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무대 소품들은 고양이 세계라는 판타지를 충족시켜주었다.
카리스마와 섹시한 몸매로 여자 고양이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럼 텀 터거
고양이의 움직임을 클래식한 발레로 승화시킨 질리안 린의 안무 역시 판타지를 창조하는 데 일조했다. 재즈와 클래식을 접목시킨 질리안 린은 고양이의 움직임을 연상시키면서도 예술적으로 아름다운 춤을 선보였다. ‘젤리클 송’에서는 여러 마리 고양이가 경쾌한 재즈 댄스를 선보이고, 하얀 빅토리아 고양이의 춤은 달빛 아래 나른하게 기지개를 껴는 듯한 동작을, 발레를 응용해 우아하면서도 도도한 고양이의 움직임을 표현했다. 또한 기계체조, 아크로배틱 등 역동적인 동작을 적절히 활용해 활기 넘치는 장면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아티스트의 노력으로 [캣츠]를 보면 고양이들의 세상을 방문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이 작품이 수십 년간 롱런 하면서 지금까지도 사랑받을 수 있는 힘은 동화 속에서 상상했던 판타지를 무대 위에서 직접 확인시켜주기 때문일 것이다.
▶1978년 한국-과테말라, 문화협정 체결
▶1977년 중국 서안사건 주동자 장학량
연금 40년 만에 해제
장학량은 청 말기 동북 군벌 장작림의 아들로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 정부의 동북변방군사령관과 서북비적토벌사령관 등을 지낸 비공산계 인물이다. 1930년대 중반 공산당과의 내전보다는 항일투쟁을 원하는 동북군의 열망을 업고 1936년 12월 서안을 찾은 장개석을 연금, 이듬해 제2차 국공합작을 이끌어 내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로부터 궤멸돼가던 중국 공산당은 재기의 기회를 얻어 국공내전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뒀지만 정작 본인의 운명은 순탄치 못했다. 서안사건후 귀주에 연금됐던 그는 1949년 이후 대만에서 평생을 연금과 감시속에서 살았다. 1977년 5월11일 이날 그는 연금이 해제됐고 이어 하와이로 망명해 남은 생을 조용히 보냈다.
▶1973년 동-서독 기본조약,
서독하원 비준
▶1972년 ‘청산리전투’ 의 영웅,
철기 이범석 장군 서거
조국 광복을 위해 일생을 보낸 초대 국무총리 철기 이범석 장군이 1972년 5월 11일 심근경색증으로 사망했다. 초대총리, 국방장관으로서 그는 건군(建軍)의 기틀을 잡았고 오늘의 국방조직의 사실상 산파역할을 했다. 청산리 혈전의 영웅으로, 광복군 참모장으로 널리 알려진 그이지만, 사실 그는 시(詩)를 좋아하고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1945년 7월, 중국서안 광복군 제2지대장
시절의 이범석 장군.
1900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 장군은 15살 되던 해 한강 백사장에서 여운형씨를 만난 것이 계기가 돼 ‘조국 광복’ 에 눈을 뜨고 중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한다. 1916년 중국 군관학교에 입학, 군사교육을 받은 뒤 기병장교가 되었고, 이어 북간도 항일독립군단인 북로군정서로 옮겨 1920년 10월 김좌진 장군과 함께 1주일 동안 청산리 계곡 일대에서 10여 차례 교전 끝에 일본군을 괴멸시키는 전과를 거뒀다.
그는 광복직후 이승만을 만난 뒤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을 창단해 건국과 창군사업의 일꾼배양에 힘썼다. 그의 족청은 젊은 청년들의 호응이 커 창단 당시 공식 단원수만 2백만명에 이르렀다. 이는 한국광복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지청천이 귀국해 결성한 대동청년단과 함께 당시 청년운동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다. 이러한 그의 지도력을 경계한 이승만 대통령은 족청 해산령을 내렸으나 족청 인맥은 오랫동안 정계와 군 지도층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1967년부터 그는 조국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 ‘증언(證言)’ 을 남기는 것이라며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다. 살아생전 김좌진 장군을 늘 말했고 나폴레옹을 ‘숭배한다’ 고 했던 그였다. 국가보훈처는 선생을 1999년 ‘5월의 독립운동가’ 로 선정했다.
▶1965년 한국-콩고 단교
▶1964년 정일권 내각 명단 발표
▶1960년 거창사건
유족 당시의 면장을 생화장
▶1949년 샴국, 타일랜드로 국호변경
▶1939년 일본군,
노몬한에서 소련군과 충돌
▶1938년 작가 조명희 사망
▶1937년 일제 한국인 노동자 10만여명
만주에 강제이주 결정
▶1927년 한국 신소설 대표작가
이해조 사망
▶1926년 아문젠 비행선으로
북극횡단 성공
▶1924년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휴이시
출생 - 펄서(pulsar)를 발견하여
노벨 물리학상 수상
▶1920년 조선총독부 우측통행 실시 발표
▶1918년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 출생
▶1908년 모더니즘 시이론을 세운 시인
편석촌 김기림 출생
▶1904년 스페인 화가 살바도르 달리 출생
20세기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
1989.1.23 20세기 가장 독창적인 초현실주의 화가 세상을 떠나다
화가 달리는 한 시절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의 독창성과 상상력은 그림을 통해 이 세상을 다시 보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가 1월 23일 여든 다섯 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피카소처럼 살아서 최고의 그림 값을 받았던 그는 세상을 잘 살았다. 생활의 유복함을 따져본다면, 그는 고흐의 반대편에 있었다고 할까?
광기로 가득했던 20세기 대표 화가, 스스로를 천재라고 부르다
그의 시신은 자신의 미술관인 피게라스 극장 미술관에 안치되었다. 달리는 자신이 태아였을 때를 기억한다고 큰소리친다. 풍부한 색감의 언어로 자궁 속의 세상을 묘사한다. 그런데 그런 태도가 역겨운 게 아니라, 달리라서 인지 초현실적인 상상력의 문장으로 읽힌다. 그의 자서전에 나타난 이기적이고 교만한 태도는 그가 천재여서 읽힌다. 그의 그림을 보지 않았더라면, 뭐 이런 미친 인간이 있나, 싶어 책을 내던졌을 것이다. 달리는 자신의 호적 신고를 하던 날에 대해 이렇게 썼다. “모든 교회의 종들을 울릴지어다! 허리를 구부리고 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이여, 지중해의 북풍에 뒤틀린 올리브나무처럼 굽은 허리를 바로 세울지어다! 그리고 경건한 명상의 자세로 못박힌 손바닥에 뺨을 기댈지어다. 보라 살바도르 달리가 태어났도다.” 그리고 이런 글도 있다. “불행하도다. 그대들 모두여!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명심해둘지어다! 내가 죽는 날은 사정이 다를 것이니!” 화가로서 달리는 잘 훈련된 지성과 놀라운 독창성, 기괴하고 파격적인 옷차림 등으로 유명하다. 자서전을 비롯한 책들도 또한 그의 그림처럼 놀라운 작품이었다. 그래 달리여, 당신은 천재이다. 내 인정한다. 잘 가라, 달리여. 부디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다시 돌아간 오늘을 슬프지 않게 하라. 당신의 영혼은 이미 그림 그 자체가 되었으니까.
"저 은행 창구 직원이 내가 준 현금을 먹어 치울 게 분명해"
작업실 안 그의 작품 앞에서(1951년)
“사실 나는 일생 동안 ‘정상성’이라는 것에 익숙해지는 게 몹시 어려웠다. 내가 접하는 인간들,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인간들이 보여주는 정상적인 그 무엇이 내게는 혼란스러웠다. 내 생각에는 생길 수도 있는 일들이 절대로 생기지 않는 것도 의문이었다. 나는 인간이 언제나 가장 엄격한 순응주의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인간 존재가 개인화되지 않는 정도가 너무나 심한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은행에 간 달리는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직원이 수표를 먹어버릴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현금을 가져오기 전에는 창구의 직원에게 수표를 주지 않으려고 한다. 옆에 있던 부인 갈라가 달리를 설득했다. 직원이 수표를 먹지 않을 것이며, 먹는다고 해도 현금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달리는 그제서야 직원에게 수표를 내민다. 그는 그런 일을 나중에 글로 쓰기도 했다.
그는 정상인이 아닌 장애인이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현실 부적응 장애는 예술가로서는 축복받은 일이기도 했다. 고전적인 예인들은 연주와 노래를 위해 일부러 눈과 귀를 멀게도 했다. 하지만 달리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자신의 장애를 자랑했다. 그는 완벽하게 일반인들과는 다른 천재임을 태아적부터 인식했다.
"이 맛있는 걸 먹는 게 금지된 죄라면 얼마나 더 감미로울까!"
달리는 초현실주의 화가이다. 그는 앙드레 부르통과의 불화로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제명당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초현실주의 자체이니까 아무도 나를 쫓아내지 못한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말이다. 그의 초현실주의는 자신이 이미 천재로 태어났다는 자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도무지 현실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누가 뭐래도 초현실적일 수밖에.
달리는 1904년 5월 11일 스페인 카탈루냐 동북부의 소도시 피게라스에서 태어났다. 달리의 이름 살바도르는 죽은 형의 이름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달리는 고집불통에다 안하무인이었다. 그는 금기시된 것들에 대한 도전으로 유년시절을 보낸다. 스탕달은 이탈리아의 한 왕녀가 더운 여름 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이렇게 탄식했다고 그의 일기에 썼다. “이 맛있는 걸 먹는 게 금지된 죄라면 얼마나 더 감미로울까!” 달리는 이 말을 자서전 초반에 유년시절을 이야기하면서 인용해 놓았다. 그의 의도는 분명하다. 그는 감미로운 세상을 위해, 금기를 향해 스페인 투우사처럼 돌진한다. 6살 때의 꿈은 요리사, 7살 때는 나폴레옹이 되기를 꿈꾸었던 달리는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이라는 대 참사 속에서도 달리 방식대로 살아나갔다. 그의 독창성은 그의 유년기 태동된, 트리스탕 라라를 필두로 한 다다이즘 운동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즉 그의 탄생과 함께 자연스럽게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도 같이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17세가 되던 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깊은 상처를 안은 채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인류 역사뿐 아니라 인간의 삶에도 어떤 기운이 한데 모이는 시기가 있다. 위대한 사람이 한 그룹을 이룰 때도 있다. 이 시절에 달리는 다른 천재들을 만나고 사랑하게 된다. 학창시절 둘도 없는 친구로 지낸 시인 로르카와 영화감독 부뉴엘을 만났다. 로르카는 이기주의의 화신인 달리가 천재라고 인정하는 스페인의 시인이었다. 훗날 스페인 내전의 희생양으로 로르카가 어처구니없이 그라나다에서 처형당하자 달리는 그 때의 심경을 일기에 이렇게 썼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과 심지어는 프랑코를 추종하는 파시스트들까지도 로르카의 죽음을 이용하여 수치스러운 선전선동을 일삼았다. 오늘날 로르카를 보라! 어떻게 되었나? 그는 정치적 영웅이 되어 있다. 참으로 놀라운 일! 살바도르 달리, 한 때 그의 절친한 지기였던 나는 이제 신과 역사 앞에서 이렇게 선언하는 바이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그는 백 퍼센트 순수한 시인이었으며 내가 만났던 사람 중 가장 완벽하게 비정치적인 사람이었음을 맹세한다’ 라고 말이다. 그는 단지, 개인적인 타인이 결코 범해서는 안 될 인간의 권리를 박탈당한 시대의 가련한 희생양이었다.”
"저게 성모 마리아 상이라고요? 제 눈에는 저울처럼 보이는데요"
20대 초반 마드리드 왕립미술학교의 학생 시절, 성모 마리아의 고딕 조각을 보고 ‘눈으로 보는’ 그대로 정확하게 그리라는 교수의 과제에 광고지에서 본 저울을 그려낸다.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자기 자신이 세기의 천재라고 확신하고 있는 달리는 고딕 조각의 성모 마리아를 저울로 그렸고, 그 그림을 보고 아연실색하고 있는 교수에게 “선생님께서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그 고딕 성모 상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울을 보았습니다” 라고 말했다. 이것은 매우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달리는 아버지의 돈을 펑펑 쓰면서 세상을 자신의 것으로 보고, 그리고, 조작했다. 그는 미술아카데미에서의 파행적인 행동으로 정학처분, 반정부 활동 혐의로 감옥생활도 하면서 아슬아슬하게 지내다가 결국 퇴학을 당하게 된다. 미술사 과목의 답안 제출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서전에 ‘심사위원보다 내가 더 완벽하게 답안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제출을 거부했다’고 써놓았다.
두통에 시달리다가, 흐늘거리는 두 개의 시계를 난데 없이 보게 되다
달리에게 파리는 고향 다음으로 각별한 장소이다. 20세기 초 파리는 세계 예술가들의 둥지이자, 무덤이기도 했다. 그는 처음 파리에 가서 피카소를 만난다. 스페인 출신 두 거장의 만남이었다. 이미 대가인 피카소와 한참 혈기방장한 달리는 서로를 알아보지만, 서로 다른 세계관으로 평행선을 그으면서 살게 된다. 피카소 외에도 파리에서 만난 유명 인사들과 친숙하게 지냈다. 그 중에는 디자이너 코코 샤넬, 막스 에른스트, 르네 마그리트, 폴 엘뤼아르, 앙드레 부르통 등과 같은 초현실주의 그룹들은 그의 활화산과 같이 타오르는 예술가로서의 삶에 기름을 부어주었다.
우리가 매우 익숙하게 알고 있는 그의 작품 <기억의 연속성>은 흐늘거리는 시계의 이미지로 매우 강력하게 남아 있다. 그 그림은 달리가 두통에 시달려 친구들과 같이 극장에 가기로 한 약속 장소에 갈라만 보내고 집에 혼자 남아 우연히 그린 것이다.
당시 작업 중이던 풍경화에 그려 넣을 오브제가 떠오르지 않아 불을 끄고 작업실을 나가려는 순간, 두 개의 흐늘거리는 시계가 ‘보였다.’ 그 중 하나는 올리브 나무 가지에 척하니 걸쳐져 있었다. 이 작품을 순식간에 완성한 뒤 극장에서 돌아온 갈라에게 공개했다. 눈을 감게 하고 그림 앞에 앉게 한 뒤 하나, 둘, 셋을 세고는 눈을 뜨게 했다. 그림을 본 갈라는 자신이 어떤 공연을 보고 왔는지 완전히 잊을 정도로 감탄했다. 그림이 그녀의 조금 전 기억을 모두 앗아간 것이다. 이 즈음 달리는 파리뿐 아니라 미국과 런던에서도 인정받는 세계적인 화가가 되고 있었다. 그의 재능은 영화, 퍼포먼스, 강연, 저술은 물론 뉴욕의 백화점 매장 전시 등을 통하여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게 나타난다. 그는 자서전을 1941년 7월 30일에 탈고한다. 그의 36년의 인생을 정리한 것이다. 그날 그는 알몸으로 있었다고 쓴다.
달리 인생의 유일한 여인, 갈라를 유아적이고 맹목적으로 사랑하다
달리가 일생동안 사랑한 아내 갈라, 아이와 함께 한 휴가의 한 때(1951년)
그의 화려한 인생에는 그에 걸맞게 화려한 인물들(프로이드, 피카소, 엘뤼아르, 로르카, 천재적인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등장한다. 그의 화폭에는 이러한 인간들의 오브제가 몽땅 녹아 들어가 흐늘거리고 있다. 마치 난로 옆에 놓인 치즈처럼 달리 옆에 가면 흐늘거리면서 오브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 유일한 단 한 명의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는 갈라다. 단테에게 베아트리체가 있었다면, 달리에게는 갈라가 있었다. 멀리서 사랑을 바라보기만 하던 단테와 다르게, 달리는 당장에 갈라와 같이 산다. 갈라는 달리의 열쇠이자, 하늘이자, 땅이었다.
둘이 만났을 때 이미 그녀는 시인 폴 엘뤼아르의 부인이었고, 10년 연상의 여인이었다. 하지만 둘은 바로 사랑에 빠지고 동거에 들어간다(둘은 만난 지 수십 년 후 엘뤼아르가 사망하자, 교회에서 인정하는 부부가 되었다). 갈라는 달리라는 남자를 만나 그야말로 허공에 붕붕 떠다니는 천재를 지상의 천재로 만드는데 온 인생을 바친다. 갈라를 만나기 전의 달리와 그녀를 만난 후의 달리는 달랐다. 달리의 사랑은 유아적이고 맹목적이었다. 갈라가 병원에 입원하자 그녀를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의사의 가운에 매달려 울부짖어 초현실주의 그룹 전체를 놀라게 했다. 갈라가 병상에서 일어나자 달리는 이런 생각을 했다. “결국 내가 당신을 죽일 수도 있겠군!”
"광기 아니면 삶! 광인과 나의 차이는 내가 광인이 아니라는 점"
어느 날, 달리는 독일작가 슈테판 츠바이크, 시인 에드워드 제임스와 함께 자신이 존경하는 프로이드를 방문하러 갔다. 달리는 편집증에 관해 발표한 자신의 글을 노대가에게 봐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프로이드는 무심하게 대했다. 달리가 물고 늘어지자 프로이드가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완벽한 스페인 사람의 원형은 내 처음 봤소. 이 광적인 집요함이라니요!”
그는 초현실주의 화가이지만, 어느 순간 그것마저도 넘어서 버렸다. 초현실을 넘어 다시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그곳에는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가 무너진다. 달리는 말한다. ‘초현실주의자로서 나의 성공은 내가 초현실주의를 현실에 융합시키지 않는 한 아무 가치가 없을 것이다. 나의 상상력은 고전주의로 돌아가야만 했다. 완성해야 할 작품이 하나 남아 있었고, 그 작품을 완성하려면 내 여생을 다 바쳐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이러한 궁금증을 품고 있는 독자를 위해 달리는 이렇게 말했다. “광기 아니면 삶! 나는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 늙어 죽을 때까지 생생히 살아 있을 나와 광인의 차이는 내가 광인이 아니라는 점이라고.”
뉴욕에서 전시 중인 작품 앞에서 코믹한 포즈를 취한 달리(1976년)
달리를 남겨두고 89세를 일기로 갈라가 세상을 떠난다. 달리는 갈라를, 그녀에게 선물한 푸볼 성에 안치시키고 매우 불안한 만년을 보내게 된다. 파킨슨병과 자살 기도, 침실 화재로 인한 수술을 받으면서 힘든 노년을 보낸 그는 결국 폐렴과 심장병 합병증으로 응급실을 오가다 84세에 갈라의 곁으로 돌아갔다. 달리는 죽음의 순간에 지구를 작은 공으로 만들어 발로 뻥 차버리지 않았을까? 먼 우주로 날아가는 작은 공이 된 지구는 달리라는 인간의 광기 어린 눈동자일 수도 있으리라.
▶ 1884년 프랑스-청나라 천진조약 성립 (안남을 프랑스 보호령화)
▶ 1871년 미국의 천문학자 슐레징거 출생
- 사진술을 처음 사용하여 항성위치도의 제작과 별의 시차를 측정
▶ 1868년 프랑스 신문발행의 자유등을 인정한 신문법 시행
▶ 1866년 영국, 금융 공황 발생
▶ 1862년 독립운동가 양진여 선생 출생
▶ 1833년 영국선 레이크호 빙산과 충돌 215명 사망
▶ 1686년 독일의 물리학자 오토 폰 게리케 사망
▶ 1610년 중국에 그리스도교를 전한 마테오 리치 사망
▶ 1398년 명 태조 주원장(홍무제) 사망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홍무제)이 1398년 5월 11일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향년 60세였다. 1368년 국호를 `대명`, 연호를 `홍무`라 짓고 황제에 오른지 30년 만의 일이었다. 1328년 가난한 농가의 6남매중 막내로 태어난 주원장은 어려서 기근과 한발, 돌림병으로 부모와 큰형을 잃고 형제들과 헤어져 살아야 했다.
1352년 원나라에 대항하는 봉기군에 가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1356년에는 남경을 점령할 정도의 큰 세력으로 성장했다. 1367년 강남의 마지막 경쟁자 장사성을 무너뜨리고 패권을 잡은 주원장은 마침내 1368년 몽골(원나라) 제국의 수도 북경을 함락해 황제에 올랐다. 남경과 같은 강남의 도시를 거점으로 전국도시를 이룬 제국은 명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군웅이 할거하는 가운데 지혜와 용기로 원나라를 폐하고 명나라의 창시자가 된 주원장은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관료들을 축출하며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해 강력한 전제체제를 만들어 냈다. 1380년 `호유용(胡惟庸)의 옥(獄)`과 1393년 `남옥(藍玉)의 옥`을 통해 수만명을 처형함으로써 자신의 일족 지배체제를 강화했다.
▶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
비잔티움 제국 건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모형을 들고 있다.
10세기 모자이크.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30년 5월 11일 비잔티움 제국을 건설했다. 음모와 계략이 난무하는 로마를 떠나, 자신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플로 변경한 소도시 비잔티움을 수도로 정했다. 비잔티움은 보스포루스 해협 입구에 자리잡은 삼각형의 반도에 위치해, 흑해와 마르마라 해를 이어주고, 유럽과 아시아를 갈라놓는 경계에 자리한 요충지로, 수도로서의 모든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오늘날의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에 해당하는 지역인 모에시아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니코메디아 궁정에 보내져 그곳에서 자랐다. 페르시아와 이집트에서 복무했고 잉글랜드의 요크에서 환호리에 부황제로 즉위했다. 그후 6년간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 황제의 부황제로서 갈리아와 이탈리아에서 지냈다. 312년에 막센티우스를 물리치고 로마를 장악해 서로마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고, 323년에는 동로마 황제 리키니우스를 쳐부수고 그를 사로잡아 동-서 로마를 통합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의 해체를 막고, 영토와 문화면에서 이질적인 요소들을 새롭게 통합시키는 임무를 떠맡았다. 이 제국을 위해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세속적인 토대와 영적 토대를 모두 마련했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로마의 위대한 정치적 유산과 헬레니즘 세계의 문화적 유산,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폭발적인 역동성을 융합시켰다. 그것은 향후 1123년간이나 지속되었고, 여든 여덟 명이나 되는 지배자의 통치를 받았다.
https://youtu.be/dXBodc1zTdQ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