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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 50년 동안 국내에선 숱한 사건-사고가 발생했다. '6·25', '4·19', '5·16', '10·26', '12·12'…. 한반도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 무슨 뜻인지 짐작하기조차 힘든 암호 같은 이
숫자들을 많은 이들이 건국 50년의 대사건으로 꼽고 있다. 원로 언 론인들은 이 사건들이 우리 사회 전 부문에 걸쳐 엄청난 파장을 끼친 점을 인정하면서도, 시대별로 몇몇 사건을 당시 사회상을 대변하는 사
례로 꼽았다.
◆ 50년대 =전쟁중인 53년 1월9일 오후10시 여수항을 출발해 부산
으로 향하던 여객선 창경호가 다대포앞 거북섬 앞에서 침몰했다. 승객 2백36명 가운데 7명만 구조되고 2백29명이 광란하는 파도 속에 묻혔다. 당시 교통부장관은 "순전히 풍랑에 의한 불가항력 사고"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조사 결과 화물선을 불법으로 여객선으로 개조하고, 1백명 이상 정원 초과를 한 것이 결정적 사고원인으로 드러났다. 뒤늦게 정부는 특별법을 만드는 등, 무책임 행정과 뒷북 행정의 전형을 보여줬다.
창경호 사건 불과 20여일만인 1월30일 오후 7시40분쯤, 부산 국제시
장에서 일어난 불은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전쟁통에 생활 필수품
거래의 중심지에서 일어난 불은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2천억환이란
재 산피해와 1만8천여명이 넘는 이재민을 냈다. 그러나 불은 어이없게도 국제시장 안에 있는 요리집 춘향원에서, 접대부와 손님이 어울려 댄스 를 추다가 석유 등잔을 팔로 치는 바람에 일어난 것으로 밝혀졌다.
55년의 화두는 단연 '법은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한다'였다. 1m80이
넘는 키에 해군 헌병장교 출신인 박인수가 여대생 70여명을 농락한
혐 의로 기소됐다. 옛 애인의 변심에 복수하기 위해 많은 여자를 농락했 다는 그는 법정에서 "70여명의 여성중 단 1명만이 처녀였다"고 주장해 또다른 파문을 일으켰다. 5천여명의 방청객이 몰린 소란을 피해
몰래 진행된 재판에서 권순영 판사는 박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가짜가 진짜의 뺨을 치는 세상을 보여준 57년 8월의 '가짜 이강석)' 사건은 아부가 출세의 지름길인 당시 세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한
젊은이(강성병)가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인 이강석을 사칭해 사흘 동
안 경찰서장과 군 사단장 등의 굽신거리는 환대를 받고 여비까지 챙겼 다가 들통났다. 당시 최대 유행어는 '귀하신 몸'이 됐다.
59년 추석인 9월17일 내습한 태풍 사라호는 단 이틀 동안에 남부지
방을 초토화하면서 우리나라 태풍의 대명사가 됐다. 16일 오전 중앙
관상대는 추석날 보름달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으나, 엄청난 폭우 를 동반한 태풍으로 순식간에 사망자 8백32명, 실종자 3백4명, 이재민 39만 여명이란 엄청난 피해를 냈다.
◆ 60년대 =동경올림픽이 열린 64년 도쿄에선 한반도 남북분단의 아픔을 일깨워주는 사건이 있었다. 남북으로 갈린 지 14년만에 남한의
신문준씨는 북한 선수로 올림픽에 출전한 딸 금단을 도쿄에서 만났다. 단 7분간의 재회에 불과했지만, 이산의 아픔을 느끼기엔 충분한
시간이 었다.
65년 이른바 '무즙 파동'은 '일류병'에 빠진 사회모습을 드러냈다. 중학입시 과학시험 '엿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묻는 답안에서, 출제자
가 제시한 정답 '디아스타아제'외에 '무즙'도 답이 될 수 있다는 주장
이 제기됐다. 결국 소송까지 벌여 '무즙'을 정답으로 썼다가 불합격된
학생들이 구제됐다. 그러나 승소한 학생들이 경기 경복 등 일류고로
전-입학 하는 사이, 일부 상류층 자제가 슬쩍 끼여들어 뒷구멍 입학을
한것이 들통나면서 고관들이 줄줄이 옷을 벗었다.
그런 가운데 전국을 마약공포에 몰아넣은 '메사돈 파동'(65년 5월) 이
벌어졌다. 합성마약을 진통제로 만들어 시중에 유통시킨 것이다. 심
지어는 어린아이까지 배가 아파도 한대, 머리가 아파도 한대…. 습관적 으로 진통제를 애용하다 마약중독자가 됐다. 당시 당국은 마약중독자를 1만5천명으로 밝혔지만, 비공식 통계론 30만명의 마약중독자가 있었다 고 보고하고 있0다.
68년 1월21일 서울의 심장부가 북한 무장공비 31명에게 뚫렸다. 북
한 124군부대 소속 무장공비들은 '박정희 모가지를 따러' 잠입, 시내버 스에 수류탄을 던지는 등 서울시내는 공포의 도가니에 빠졌다.
◆ 70년대 =70년 3월17일 밤. 한강변 도로에선 초록색 원피스를 입은
미모의 20대 여인이 코로나 승용차안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 이른 바
정인숙사건. 오빠는 남자관계가 복잡한 여동생을 '문중의 명예'를 위해 죽였다는 진술이었지만, 그녀의 빨간색 슈트케이스에서 나온 사회
저명인사 26명의 명단과 전화번호는 온갖 소문을 만들어냈다. 보름여
뒤인 4월 8일 새벽에 일어난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는 아직까지 부실공사 의 표본으로 거론되고 있다.
71년 8월10일 서울에서 밀려난 철거민들이 살고 있던 경기도 광주에
선 5만여명이 분양지 불하가격 인하를 요구하며 파출소 방화 등 난동을 벌였다.
불과 2주 뒤인 23일, 인천 앞바다 실미도에 수용중이던 공군 특수부
대원 24명이 섬을 탈출, 민간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들이닥치면서 곳곳 에서 교전을 벌이다 영등포에서 자폭, 15명이 숨졌다. 그러나 71년
최 대 악몽은 후에 할리우드 영화 타워링의 소재가 된 대연각호텔 화재였 다.성탄절날 호텔에서 발생한 화재는 외국인을 포함, 1백57명이
숨졌다.
75년 '살인마 김대두 사건'은 국민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두달 동안
무안, 송탄, 수원, 서울 등 전국을 누비며 9곳에서 17명을 살해하고 그
가 강탈한 것은 현금 2만6천여원, 고추 30근, 쌀 1말, 청바지 1개, 시계 1개였다.
77년 11월11일 전북 이리역에서는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폭발이 있
었다. 다이너마이트 24t이 일시에 터지는 소리였다. 이 폭발로 59명이
사망하고 1천여명이 부상했다. 역 주변엔 거대한 분화구가 패였다. 그
러나 사고원인은 단순했다. 호송원이 술을 마시고 화약 열차 안에서
촛불을 켜놓고 자다 불을 낸 것이다.
◆ 80년대 이후 =이윤상군 살해(81년), 우순경 의령 총기난동 (82년),
미결수 집단탈주(88년), 시체 소각로까지 설치하고 강도행각을 벌인
지존파(94년) 등 강력사건이 꼬리를 물었다. 서울올림픽 직후 서울을
9일 동안 공포속에 몰아넣었던 미결수 지강헌 일당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주장했다. 90년대 성수대교(94), 삼풍백화점(95) 붕괴 등은
초고속성장만을 추구해온 한국 사회의 부실이 곳곳에서 참사로 확인된 사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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