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두 시에 나는 김훈의 ‘칼의 노래’의 마지막 쪽을 덮었다.
-지금 싸움이 한창이다. 너는 내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
이순신 장군은 군관 송희립에게 말하고 독전의 북소리는 계속 울리면서 우리 군사들은 왜군의 멱을 딴다.
우리는 마지막 싸움터에서 이순신 장군과의 이별을 안다.
백의종군과 거북선과 승전고 소리를 기억한다.
2001년 11월 토요일 오후 3시, 광화문 교보 문고에서 김훈은 저자 사인회를 했었다.
나는 그가 꼭 보고 싶었다. 나는 그의 에세이 '자전거 여행' 전에는 알지 못하고서 '자전거 여행'을 보았다. 나는 그가 내 또래이고, 같은 시대의 호흡을 했다는 것이 반가웠다. 고교 시절에 글 잘 쓰는 친구들이 가졌던 어떤 남다른 것이 부러웠던 때처럼. 신문광고에서 '칼의 노래' 저자의 사인회를 한다고 했을 때 저자의 서명을 받고 싶은 내 마음의 소년은 가슴이 설렜다.
시간은 3시였다. 나는 교보문고에 가서 문구점에 먼저 둘렀다.
나는 그에게 그의 책을 내밀며 서명만 받기에는 공연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가 남다르게 연필로 글을 쓴다는 일을 기억했다.
그는 연필을 늘 가지고 있을 것이며 원고지와 고무지우개를 책상위에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는 몽당연필도 있어서 그에게 영감을 준 그 몽당연필의 마지막 자투리까지 쓰려는 마음이 있으리라.
나는 잠자리표 연필 한 타스를 사려다 다른 제품을 보고 눈이 번쩍했다.
연필깎이가 캡에 숨어있는데다가 연필 한 자루를 낄 수 있고 연필을 보관 시 연필심이 부러지지도 않고 캡에 집게가 있어서 포켓에 넣고 다닐 수 있는 Faber-Castell의 ufo Perfect 연필이었다.
연필 한 타스 값으로는 어림없었다. 그러나 욕심이 난다. 그의 책 몇 권을 더 살 만만치 않은 값이었다. 그가 남은 일생을 쓸 연필이 아니던가.
3시 전에 나는 저자가 서명하는 장소에 갔다.
내가 두 번째 이었다. 내 앞에는 육순의 남자가 있었다.
칼의 노래를 알고 김훈을 아는 이였다. 그는 ‘칼의 노래’ 두 권을 들고 있었다. 나는 자전거 여행과 칼의 노래 두 권과 그에게 줄 선물을 들고 있다. 내 뒤에는 젊은 여자 둘이 칼의 노래 한 권을 들고 있었다. 이렇게 말했다.
" 한 권을 보고 좋으면 보려고요."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리기도 했다.
3시가 될 때를 기다리며 김훈은 자기가 앉을 자리를 좀 떨어진 거리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 기분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시간 전에 무료히 행인의 시선에 머물기는 쑥스로운 일이다.
시간이 되었다.
김훈은 사인펜으로 첫 번째 남자에게 서명을 해주면서
"감사합니다. "
그의 진정일 것이다. 아직 김훈은 소설가로 유명한 사람은 아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그의 책 세 권을 그에게 내놓았다. 그는 사인펜으로 서명을 하려고 했다. 나는 내 몽블랑 149 만년필을 그에게 권했다. 내 만년필에 그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그는 기꺼이 내 만년필을 잡고 빈 종이에 한 번 촉을 궁굴렸다. 나는 이미 잉크를 가득 채워놓았었고 한 번 써보며 확인까지 했었다.
나는 그가 내 이름과 그의 이름을 쓰기 전에 그에게 주려했던 물건들이 들어있던 봉지를 열었다. 김훈은 나를 보고 김훈의 옆에 있던 출판사의 여직원인 듯 한 여인이 나를 보았다.
내가 말했다.
나는 조금 들떠 있었다.
" 이것은 김 선생님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 이 책 (어머니, 제가 당신을 죽였습니다 )은 제가 쓴 책이고 지금 교보 매장에 진열되어 있습니다. 같은 시대, 비슷한 연배의 우리로서 서로 길이 다른 모습을 보여드립니다. 여기다 몽당연필을 넣어서 쓸 수 있습니다. 여기 연필을 세 자루 준비했습니다. 물론 다른 종류의 연필을 쓸 수도 있습니다. 이것에다 심이 있는 날카로운 부분을 숨길 수 있고 머리꼭지 부분을 빼면. 자 보십시오. 연필의 나무가 깎이면서 촉이 날카로워집니다. 여기 원고지가 있습니다. 다음 글을 기다리는 독자의 마음입니다. 여기 지우개가 있습니다. 때로는 글을 고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독자로서 간절한 마음을 드립니다."
나는 이 연필이 김훈 선생의 펜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칼의 노래와 같은 때 교보에 놓였던 내 책은 이제 사라졌다.
김훈은 고맙다며 내 선물을 기꺼이 받아 주었다.
이후 김훈의 책은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고 내 수필집은 서가에서 사라지고 다시 나오지 않은 책이 된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가 내게 말하는 "감사합니다." 하는 말은 그의 책을 품고 가는 독자에 대해서였지만 내가 말하는 ‘감사합니다 는 그가 글을 쓰는 생활을 했다고는 했지만 단 한 편의 소설로 동인 문학상을 받았다는 늦깎이 작가가 '벼락처럼 쏟아준 작품'을 우리에게 주어서 진정으로 고마워서였다. 그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내가 들고 간 디지털 카메라로 판매 사원에게 부탁을 했다. 김훈은 밝게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이 고마웠다.
그와 헤어져서 다시 서점 안을 한 바퀴 돌아서 다시 김훈의 자리에 갔을 때 사람들은 끊이지 않고 작가의 노고가 담긴 책에 작가의 서명을 받고 있었다. 나는 김훈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기쁨을 함께 느꼈다.
나는 김훈이 자신의 책을 세상이 알아주어 느끼는 순수한 기쁨을 바라보며 나 또한 행복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시간에 서점의 진열대에 올라가있던 내 책의 운명을 알면서도 행복했다.
칼의 노래를 닫으면서 나는 무서워졌다.
이 책은 이순신 장군이 쓴 현실의 난중일기였다. 죽기 위해 싸우는 장군의 허무가 내가 옮겨왔다. 짐승의 목처럼 적에게 잘리고 아군에게 잘리는 우리 백성의 운명이 내 운명이었다. 꽃잎처럼 수없이 적의 젊은이들이 허무의 싸움 속에서 떨어지고 장군은 진중에서 안았던 여진이 적선에 죽고 그 여인의 마른 젖꼭지가 우리들 할머니들의 허무였다.
정말로 무서웠다.
나는 다시 칼의 노래를 펼칠 수가 없었다.
다시 이런 운명의 장군이 될 수 없었지만 아직도 이런 현실이고 지금은 이순신 장군이 없는 현실이 허무했다.
하루가 갔다.
하루면 책의 약발이 사라져야 했다. 허지만 나는 칼의 노래에서 벗어날 수 없이 피곤하고 지쳤다. 무서운 책이었다. 가까이 하지만 다시 다가갈 수 없는 운명 같은 책이었다.
나는 내가 준 연필로 언제쯤 김훈이 여력이 남아서 또 다른 '칼의 노래'를 쓸까 무서워졌다.
그 후 김훈은 연필로 남한산성을 쓴다.
나는 내가 준 연필로 남한산성을 썼기를 바라는 소년이다.
연필은 과연 무엇인가.
연필에 쓴 연필은 납으로 만든 필이란 뜻이나 아주 잘못된 이름이다.
연필에 납이 들어간 것은 나무케이스에 칠한 안료에 약간 섞였을 뿐이다.
연필심은 흑연과 진흙의 혼합물이지 납이 전혀 있지 않다.
흑연이 많이 섞이면 더 연하고 검은 색이 더 짙어진다. 그러나 연鉛 이라는 말에는 역사적인 근거는 있다.
고대 로마인들은 파리루스 두루마리 위에 납으로 된 원반으로 괘선을 넣고 그 위에 펜실루스pencillus라는 작은 붓으로 글을 썼다.
대부분의 문헌은 연필이 1564년 영국의 보로데일에 있는 거목 하나가 폭우로 뿌리가 뽑히면서 탄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거목이 뽑힌 자리에서 그 고장 사람들은 많은 양의 순수한 흑연을 발견했는데 그것을 납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듬해인 1565년 독일계 스위스 박물학자인 콘라드 폰 게스너는 자신이 흑연 조각을 나무에 끼워서 필기 및 스케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그것이 세계 최초의 연필인지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최초에 나온 연필 중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다.
게스너 이래 수백억 자루의 연필이 생산되었다. 미국에서만도 해마다 20억 자루가 넘는 연필이 생산된다. 이것은 미국 사람 한 사람 앞에서 거의 10자루씩 돌아가는 수자이다. 19세기에 최초에 실용적인 타이트라이터가 발명되면서 연필이 공 없어지리라고 예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이후에도 새로운 의사소통 수단이나 계산 장치가 등장할 때마다 연필소멸론이 다시 고개를 들곤 했다. 그러나 그 모든 예언은 빗나가고 말았다. 전 세계의 연필 제조업자들은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번열을 누리고 있다.
오늘날 보통 연필에는 56km의 줄을 긋고 4만 5천 단어를 쓸 수 있는 흑연이 있다. 종이공급만 충분하고 영감만 떠오른다면 두 자루의 연필로 작가는 한 편의 장편 소설을 쓸 수 있고, 화가는 화랑 하나를 가득 채울 스케치를 그려낼 수 있다.
연필을 열심히 만들어내는 파버카스텔 [Faber-Castell]의 연필은 사랑 받을 만하다.
다양한 시대의 예술가와 재능이 있는 작가들이 파버카스텔 [Faber-Castell]제품을 사랑했다. 예를 들면,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Odin den’ Ivana Denisovicha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리아 솔제니친, 양철북의 쿤테 그라스 서양에서 활약하는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후Vladimir Vladimirovich Nabokov, 나아가 샤넬과 펜디를 시작한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칼 라가훼루도 Karl Lagerfeld등, 그들이 남긴 기술, 파버카스텔 [Faber-Castell]연필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 전해진다. 또한 누구나 알고있는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밴 고흐도 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파버카스텔 [Faber-Castell] 연필에 대한 생각을 아주 설득력 있게 극상의 칭찬을 했다.
파버카스텔 [Faber-Castell]
연필, 색연필, 파스텔, 만년필, 지우개 등의 브랜드. 1761년 카르파르 파버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한 때는 몽블랑과 펠리칸과 같은 맵시의 만년필을 만들기도 했다.
현재까지 8대에 걸쳐 파버카스텔 가문에 의해 운영되고 있으며 본사는 독일의 뉘른베르크(Neremberg)에 있다.
1761년 독일의 스타인(Stein)에서 캐비닛 제조업자였던 카스파르 파버(Kaspar Faber)가 작은 공장을 세우고 연필을 제조하여 뉘른베르크에 팔기 시작한 것이 회사의 시초다. 회사 이름은 카스파르의 아들인 안톤 빌헬름 파버(Anton Wilhelm Faber)의 이름을 따서 'A.W.Faber'로 정했다. 4대 회장인 로타르 폰 파버(Lothar von Faber)는 세계시장으로의 진출에 총력을 기울여 1843년에 미국 판매를 시작했으며 1849년에 뉴욕에 첫 번째 해외 지사를 설립했다. 1856년에는 연필심의 원료가 되는 흑연의 확보를 위해 시베리아의 흑연 광산을 인수했다.
1898년에 파버 가문의 오틸리에 폰 파버(Ottilie von Faber)와 독일의 유서깊은 귀족가문 출신인 알렉산더 카스텔 뤼덴하우젠(Alexander Castell-Rudenhausen) 백작이 결혼했다. 이때부터 두 가문의 이름을 따서 파버 가문의 성과 회사 이름을 '파버카스텔(Faber-Castell)'로 바뀐다.
1905년에 친환경적 수성페인트로 도장된 초록색 연필 '카스텔9000'이 출시되었는데 이것은 현재까지도 널리 사용되는 육각연필의 시초이자 경도의 표준을 마련한 파버카스텔의 대표상품이다. 1931년에는 뉘른베르크에 있는 '요한파버'공장과 브라질에 있는 '라피스 요한파버' 지사를 인수했다. 1967년에는 브라질의 상카를로스(Sao Carlos)에 있는 색연필 공장을 인수했는데 이것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큰 색연필 공장이다. 1980년에는 말레이시아에 세계에서 가장 큰 지우개 공장을 설립했다. 1992년에는 친환경적 수성안료 제작기술을 개발했다.
제품으로는 만년필, 파스텔, 색연필, 애니메이션용 색연필, 볼펜, 목탄, 드로잉 펜슬 등이 있으며, 1978년부터는 아이라이너, 립스틱 등 메이크업용 펜슬도 생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