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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감사하다
딤전 1:12-20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딤전 1:12-20 / [자비에 대한 감사]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어떻게 다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나를 자기의 심부름꾼으로 선택하셨을뿐 아니라 충실하게 섬길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13) 과거에 나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비방하며 다녔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니며 온갖 방법을 다 써서 그들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주께서는 내게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때는 내가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고 또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는 걸 아셨기 때문입니다. 14) 오, 우리 주님은 얼마나 은혜로운 분이신지요. 주님은 내가 어떻게 주님을 신뢰해야 하며 또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질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15)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은 참말입니다. 누구나 다 이 사실을 진심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죄인 중에서도 큰 죄인이었습니다. 16) 그런 내게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아무리 악한 죄인일지라도 크나큰 관용으로 감싸주신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나 같은 것을 선택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7) 영광과 존귀가 하나님께 영원 무궁토록 함께 하소서! 하나님은 영원한 왕이시며 결코 죽지 않으시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유일한 분입니다. 아멘. 18) 내 아들 디모데여, 그대에게 명령합니다. 주께서 예언자들을 시켜 말씀하신 대로 주님을 위해 훌륭하게 싸우시오. 19)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키시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반드시 행하여 언제나 양심을 맑게 간직하시오. 어떤 사람들은 나쁜 줄 뻔히 알면서도 양심에 가책도 받지 않고 악한 일을 저지릅니다. 이런 자들이 갑자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모른다고 한다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20) 후메내오와 알렉산더 두 사람이야 말로 그런 자들의 표본입니다. 나는 그들이 하나님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그들을 사단의 손에 내주어 벌을 받게 내버려 둘 것입니다.
바울은 과거에 죄인이었던 자신에게 긍휼과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의 복음을 맡겨주신 것에 감격하며 간증합니다. 그리고 디모데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도록 격려합니다.
바울의 간증(12-17) 바울은 자신의 간증을 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충성되게 여기시고 직분을 맡겨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능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12). 바울이 감격하며 감사하는 이유는 자신이 지난날에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심이 아닌 긍휼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과거에는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다고 말합니다(13). 바울은 유대교의 믿음을 외곡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당시 최고의 율법 선생이었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뜻과 복음을 알지 못했던 영적 무지의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은 놀라운 은혜와 자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합니다(15). 바울은 이처럼 예수를 만나기 전의 삶을 기억하고 구원 받기 전 죄인이었던 자신의 과거를 인정했기 때문에 은혜와 감격이 넘치는 간증을 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죄인이었던 자신의 과거에 빠져 낙심하지 않습니다. 죄인이었던 과거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지만, 걸림이 되지 않고 우리로 감사와 은혜 속에 살게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긍휼을 입은 근본적인 이유를 밝힙니다(16).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래 참으심을 이후에 주를 믿는 자들에게 본보기로 보이시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의 격려(18-20) 바울은 지금까지 이야기 한 교훈(3-17)을 가지고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말합니다. 성도는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영적 전쟁을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불어 믿음과 착한 양심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19).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착한 양심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함께 강조합니다. 복음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에 합당한 삶이 따라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지 못할 때 그 믿음은 능력을 잃고 영적인 파멸까지 이르게 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믿음에 관하여 파선하였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부서져 바다에 가라앉아 버리는 것처럼 다시는 진리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도록 완전히 믿음에서 떠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적용: 구원 받기 이전의 죄인이었던 과거가 당신의 믿음에 어떠한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현재의 삶 가운데 벌어지는 상황을 보고 판단합니다. 일이 잘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나 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이 잘 안되면 ‘하나님이 왜 나를 힘들게 하시나’하며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매 순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확증된 사실입니다.
< 설 교 >
영광스러운 복음
딤전 1:11-16 / 피영민 목사
서론
사람에게 신앙이 필요한 이유는 사람은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신의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백번 다시 살아난다 할지라도 신이 될 수 없습니다. 스스로에게 신이라고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답은 ‘아니다.’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사회를 주제로 공부한 사람들은 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야만인이라 할지라도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살인과 도적질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박사 학위 논문을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의 「교회관」에 관하여 썼습니다. 로저 윌리엄스는 미국의 인디언의 사전을 처음으로 편찬했습니다. 그가 미국 인디언의 사회를 공부하면서 쓴 글이 있습니다. ‘미국 인디언들이 영국 사람들보다 더 윤리적이다.’라는 것입니다. 문을 열어 놓고 살아도 남의 집 아내를 탐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 사회는 법이 존재합니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습니다. 이 법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것을 자연법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인 성경은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법을 정할 수 있는 권세는 하나님께 있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야만인이라도 하나님은 그 법을 양심에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이방인이라도 양심을 통해 도적질과 살인, 거짓말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양심은 화인을 맞아 어두워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유대인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법도를 명백한 문장으로 주신 것입니다. 문장으로 하나님의 법을 받은 사람이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가 사십주 사십야 동안 시내산에 머무른 후 하나님의 법도를 받아 내려왔습니다. 하나님은 법도를 두 돌비에 기록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계명이며 율법입니다. 첫 돌비는 피조물인 인간과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일~사계명). 두 번째 돌비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오~십계명). 인간이 이렇게 살아야 마땅하다고 주신 법도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법을 주셨습니까?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이런 법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그곳에서 쫓겨났고 죄인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 법은 하나님이 원하는 거룩한 표준이고 이것을 따라 살 때에 인간은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죄가 무엇인지 알고, 인간이 죄인 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을 지켜 구원받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1장 8절입니다.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 하나님의 법은 선한 법입니다. 그 법을 법 있게 써야 합니다. 그것을 지켜 구원을 받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이런 목적으로 처음부터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바르게 쓰는 것은 그 법을 보고 죄인임을 깨닫는 것입니다(딤전 1:9-10).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법을 들여다보고 자신이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만이 비로소 구원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는 죄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만이 참된 구원자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구원자를 찾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찾게 됩니다. 복음을 찾게 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죄인에게 주시는 좋은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the glorious gospel of the blessed God)”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복음을 무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죽으면 천국 갈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복음과 예수를 무시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떤 심판을 내리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한 가지라도 어긴 사람은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영원히 지옥에 떨어져 고통받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지옥에 빠질 우리를 건져줄 좋은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문제가 없다면 복음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우리는 죄인이고, 지옥에 떨어져야 할 마땅한 존재이므로 복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복음은 복되신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베풀어주신 영광스러운 소식이기 때문에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이 왜 영광스러운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세 가지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Ⅰ.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가르쳐 주기 때문에 영광스럽다
본문 15절입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미쁘다는 진실하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치적인 문제, 경제적인 문제, 빈곤의 문제, 질병의 문제 등을 해결하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말미암아 양심에 괴로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구원은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죄의 결과로부터 구원하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는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책임은 영원히 지옥에서 형벌 받는 것입니다. 지옥에 가면 나오지 못하고, 영원한 형벌을 받습니다.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이 말을 흘려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예수를 구원자로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아무리 죄가 커도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믿는 자들의 죄를 대신 갚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 믿는 사람은 죄 용서를 받고, 양심에 평안을 얻게 되고, 죽어서 천국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내세적인 측면입니다.
둘째,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받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착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는 존재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악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원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후로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사람은 착하게 살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자에게 새 성품을 주시고자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타락한 본성을 고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죄악 된 옛 성품과 하나님이 주신 새 성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갈등을 일으키는데, 타락된 마음이 이기면 예수 믿는 사람이 죄에 빠지고, 신의 성품이 이기면 예수 믿는 사람이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베드로후서 1장 4절입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새 성품을 주셨기 때문에 새 성품을 따라 살다 보면 거룩하고 착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타락하고 부패했던 사람도 예수를 믿으면 신의 성품이 들어와서 새로운 삶,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현세적인 측면입니다.
셋째, 마귀의 지배로부터 구원입니다. 에베소서 2장 2절입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사람은 예수 없이 바르게 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을 지배하는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목은 마귀이며, 졸개들은 귀신(악령)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게 되면 성령을 우리 마음에 보내 주시고, 성령이 들어오시면 악령이 쫓겨나고 새로운 성품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사는 힘을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28살 때에 예수를 믿었는데, 예수를 믿기 전에는 의롭게 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래서 유신 헌법에 대해 데모를 했습니다. 그 당시 데모했던 사람들은 사회의 불의에 대항해 의롭게 살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정치적인 견해를 가지고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윤리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의롭게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악령이 지배하고 있고, 부패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살고 바르게 사는 길은 예수 믿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체험한 것이고, 수많은 사람이 오늘도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악령의 지배에서 구원하여 성령의 지배를 받게 합니다. 예수 믿고 성령이 오시면 악한 습관에서 해방되고, 거룩한 생각을 하게 되고,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게 되고, 올바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지옥에서 해방되어 천국 가는 것이고, 타락된 삶에서 해방되어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고, 악령에서 해방되어 성령의 인도를 받고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고, 수많은 성도가 공통으로 고백하고 있는 체험적인 진리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죄인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목적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구원의 영적인 측면입니다.
Ⅱ.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기 때문에 영광스럽다
사도 바울은 예수 믿기 이전에 사울이었고, 미친 야수처럼 교회를 핍박했습니다(딤전 1:13, 행 8:1-3).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였고 교회를 진멸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이유로 핍박하고, 죽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옳은 일이 아닙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핍박하다가 다메섹에도 교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까지 사람을 죽이러 갑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하늘의 빛이 임하여 사울의 눈이 갑자기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이 답변합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다시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 한마디에 고꾸라져서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과 복음이 영광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바울은 교회를 사랑하고, 위대한 사도가 되어 성경을 14권이나 기록하는 훌륭한 인물로 변화되었습니다. 세상은 소망이 없으면 사람을 버립니다. 악하면 버립니다. 거라사 동네에 귀신 천 마리가 들렸던 광인이 한 명 있었습니다. 사람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짐승도 아닙니다. 무덤 사이에서 돌로 자신의 몸을 상하게 했습니다. 얼마나 소망이 없겠습니까? 예수님이 오시자 광인이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귀신 천 마리를 모두 내쫓아 주십니다. 말씀 한마디로 귀신들이 다 나가고 돼지 떼에 들어가 돼지들이 갈릴리 호수에 뛰어 들어가 모두 죽게 됩니다. 그는 정신이 돌아와 바른 사람으로 변화된 줄 믿습니다. 여자 가운데도 변화된 사람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귀신 일곱 마리가 들렸습니다.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일곱 귀신을 쫓아내고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서 예수님의 고통을 바라보는 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악한 악인이라도 능히 변화시켜서 성자로 바꾸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도끼로 사람을 죽인 고재봉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고재봉 씨가 감옥에서 예수를 믿고 책을 썼습니다. 책 제목은 「고목에 샘물이 흐르고」입니다. 자기의 인생은 고목 같아서 생수가 하나도 없었는데 예수 믿고 난 후 사랑이 생겨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눈물이 있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고, 거룩함을 사모하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고목에 샘물이 흘렀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 같은 사람도 변화시킬까?’ 변화시키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죄도 용서하실까?’ 용서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권세와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Ⅲ. 복음은 하나님이 죄인들에 대해서 오래 참으시는 인내심을 보여주기 때문에 영광스럽다
우리가 죄를 한번 지었다고 하나님이 치셨다면 인간은 모두 죽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죄를 지어도 오래 참아주시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울을 구원해서 바울이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은 오래 참고, 기다려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죄를 많이 지었는데 아직 죽지 않고 내 발로 걸어와서 이 예배당에 앉아 있다면, 예수도 믿지 않는데 이곳에 왔다면 하나님이 그만큼 오래 참아 오셨다는 증거입니다. 구원하실 때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사울처럼 악한 마음을 따라 복음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오래 참지 않으셨다면 이미 멸망해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지, 영원히 참으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인내심도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는 동안에 인간이 해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보고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십계명 중의 하나라도 어겼으면 죄인입니다. 십계명을 봐도 어긴 것이 없다는 사람은 제정신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얼굴에 무언가 묻었는데 거울을 보지 않으면 뭐가 묻었는지 모릅니다. 거울을 봐야 알 수 있습니다. 십계명은 우리의 거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둘째,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영광스러운 복음을 받아야 들여야 합니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은 지옥의 형벌에서 해방되어 천국 가게 됩니다. 천국은 착한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지옥의 형벌에서 해방되어 천국 가게 되고, 이 땅에서 죄에 눌려 살던 사람이 거룩한 인생을 살게 되고, 마귀의 지배에서 벗어나 성령의 인도 가운데 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의 괴수라도 능히 구원하시는 구원자이십니다. 죄 때문에 양심에 고통이 있는 분들은 예수 믿고, 죄 사함 받고, 구원받고, 이 땅에서 거룩하게 사시고, 죽어서도 천국 가는 복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
이사야 40:5-7, 디모데전서 1:11-13 / 이성희 목사
서론
오늘은 종교개혁 498주년 기념주일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에 개혁가들에게는 5가지 중요한 주제가 있었습니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성경,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돌려야 하는데 교황이 영광을 차지하고, 교회가 영광을 가로챘습니다.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실 존재입니다. 영광이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기를 바랍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 집’(Uncle Tom's Cabin)은 미국의 흑인해방과 남북전쟁에 큰 영향을 준 소설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책을 쓴 스토우 부인이 링컨대통령을 만났습니다. 링컨은 “부인을 만나니 참 반갑습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저자가 강대한 힘을 가진 장군으로 짐작했는데 연약한 부인이시군요. 어쩌면 그렇게 훌륭한 작품을 썼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부인은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 칭찬은 제가 받을 칭찬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오히려 각하께서 너무나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각하의 공은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링컨대통령은 겸손한 어조로 “나는 하나님의 종에 불과합니다. 나는 힘이나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이 모든 영광을 오직 주님께 돌릴 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것이 가장 위대한 지식입니다. 가장 큰 지혜입니다. 모든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칼뱅은 자연을 무수히 많은 기적들로 가득 찬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극장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자연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가시적인 형상입니다. 자연계가 너무 분명하게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습니다.
영광이란 빛나는 영예, 초원한 빛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나 완전성을 찬양하며 높이 드러내는 행위를 말합니다. 영광이란 말의 구약 히브리어는 ‘카보드’인데 무거움 혹은 중요함이나 가치를 나타냅니다. 신약 헬라어는 ‘독사’인데 의견 혹은 인정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기사를 누가복음은 아주 소박하게 표현하고 있어서 들의 목자가 예수님의 탄생을 제일 먼저 목격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14에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 시 하늘에는 영광이었습니다. 하늘은 원래 하나님이 계시는 자리로 묘사되었으며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어둠이 없고 찬란한 빛이 있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고린도전서 10:31에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존재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이시니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그의 영광을 위해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도 다 영광을 위해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타락하므로 영광이 사라졌습니다. 그 영광을 회복하는 방법이 예수님을 보내셔서 복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고,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본문에는 “이 복음은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고 합니다. 종교개혁 기념주일에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영광을 상기하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 어떤 것인지 묵상하면서 복음의 영광을 보고, 복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영광의 복음은 복되신 복음입니다.
디모데전서 1:11에는 “이 복음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고 합니다. 복음은 복입니다. 복음은 복된 말씀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은 복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돈으로 살 수 없는 선물입니다.
복음은 처음부터 복된 소식이며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10에는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복음이 전해지고, “복음을 전하노라”고 하셨습니다.
“복 되신 하나님”이란 말은 본 절과 6:15에만 나오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복되신’이란 말의 헬라어는 ‘마카리우’인데 하나님과 교통하는 자들이 받는 특별한 은총들을 말합니다. 즉 ‘죄 용서함 받는 축복’의 의미로 사용된 말입니다. 죄 용서함을 받은 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영광의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오는 영원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의미합니다. 복음의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한 영생이며,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영광의 복음은 구원의 소식입니다.
복은 하나님의 본성에서 오는 은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송에서 “복의 근원 강림하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주신 복을 세어보아라”고 찬송합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복을 가지고 있으면서 안 주는 분이 아닙니다. “주만이 만복을 내리시네”라고 찬송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복을 다 가지고 계시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복에 대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계십니다.
복은 히브리어로 ‘에쉐르’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을 의미합니다. 번영과 행복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의미합니다. 헬라어로는 ‘마카리스모스’인데 행복 혹은 축복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속죄를 힘입어 ‘의롭다’함을 받게 된 사람이 받은 복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서경’(書經)-홍범편(洪範編)에는 인간의 오복(五福)을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라고 했습니다. 오래 사는 것, 부자가 되는 것,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한 것, 덕을 좋아하여 즐겨 선행을 행하려 하는 것, 하늘이 부여한 천명을 살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복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적 복이란 초자연적인 은혜입니다. 오복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복은 현실적, 물질적 복이 아니라 영혼의 복입니다. 영혼을 구원 받은 복입니다.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면 복은 없습니다. 요한삼서 2절에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합니다. 영혼이 잘되는 것이 첫째 복입니다. 범사가 잘되는 것이 둘째 복입니다. 강건한 것이 셋째 복입니다. 영혼구원이 첫째 복이며, 참 복입니다.
복음은 마음의 복, 영혼의 복을 말합니다. 복음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복과는 거리가 멉니다. 복음은 돈이 복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몸이 건강한 것이 복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녀가 많고 잘되는 것이 복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죄 사함을 받고, 영혼이 잘되고, 예수를 잘 믿고, 주일에는 교회에 와서 예배할 줄 알고, 구원받은 것이 복입니다. 이런 복을 받은 것을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저의 집안은 저의 아버지께서 집안에서 처음 예수를 믿고 집안 가족 모두가 예수를 믿었습니다. 예수를 믿어 우리 집안이 잘되었습니다. 저의 아버지의 형제들 가운데 목사인 저의 가정이 제일 잘 된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의 복뿐만 아니라 물질의 복도 함께 주셨습니다. 우리 집안이 부자가 아니어도 부족함이 없게 하셨습니다. 복음은 복입니다. 복음을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미국의 전통에는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며 거기에는 물질적인 복도 포함된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새해가 되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를 합니다. 어느 때는 새해에 “돈 많이 버세요”라고 인사를 합디다. 이렇게 인사한다고 복을 받습니까? 돈을 많이 번다고 복이 있는 것입니까? 이런 인사 대신 “복음 많이 받으세요”, “복음 믿으세요”라고 인사하는 것이 좋은 듯합니다.
시편 144:15에는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고 합니다. 어째서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삼으면 복이 있습니까? 여호와가 복이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으로 복을 받고 복음을 복되게 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영광의 복음은 우리가 따라야 할 복음입니다.
디모데전서 1:11에는 “이 복음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따라야 할 가치가 있습니다. 복음은 따를 때 복이 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따르지 않으면 가치가 없습니다. 따르면 가치가 있게 됩니다.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삼으신 목적을 마가복음 3장에서는 “함께 있게 하시며”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하시려고 제자를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게 하시려고 제자를 삼으셨습니다. 스승을 따르지 않으면 제자가 못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 “와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른 자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혼인잔치의 비유’에는 잔치에 초대를 받았는데 “나는 밭을 샀으니 못 갑니다”,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사서 시험하러 가니 못 갑니다”, “나는 장가들었으니 못 갑니다”라고 한 사람들은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따르지 않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못합니다.
복음을 따르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제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따르는 것입니다. 제자라는 헬라어 ‘마세테스’는 배우는 자라는 뜻인데 우선 따라야 배우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 엘리사를 보세요. 자기 스승 엘리야를 끝까지 따랐습니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처음 만났을 때 엘리사는 소를 버리고, 부모와 입을 맞추고 스승을 따라갔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떠나갈 때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벧엘에 머물러 있으라고 했지만 엘리사는 스승을 따라갑니다. 여리고에 갔을 때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머물러 있으라고 했지만 엘리사는 따라갑니다. 요단에 갈 때까지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지 않고 따라갑니다. 엘리사는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하면서 끝까지 따라가서 스승의 겉옷을 취하고, 하늘로 올라가는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 끝까지 따랐던 엘리사는 스승인 엘리야의 영감을 갑절이나 받았습니다. 따르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은 요한복음의 부록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20장 마지막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이라고 하여 기록한 목적을 다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다시 세워주시는 장면이기에 ‘베드로의 위임식’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베드로가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 대하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그 사람은 상관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영광의 복음을 따르라”는 명령입니다. 주님은 얼마 후 승천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주님을 따르는 것은 복음을 따르는 것입니다.
“영광의 복음 따르라”고 하신 것은 의미 있는 말씀입니다. 영광의 복음을 따르는 것은 자신에게 영광입니다. 영광의 복음을 따른다는 것은 그 자체가 영광입니다. 복음을 따르면 고난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따르다가 만나는 고난은 영광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제가 아주 어릴 때 그 때 한 번은 엄청나게 눈이 많이 왔을 때가 있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쯤이니까 키가 별로 크지 않았겠지만 제 키보다 더 많이 왔습니다. 눈을 치웠는데 터널처럼 눈을 치워 다니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 눈길을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 뒤를 따라갔습니다. 아버지의 발자국을 따라갔습니다. 아버지의 큰 발로 길을 내놓으시니 내 작은 발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안전하고, 편안하게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가장 좋은 것은 재미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릴 때 가장 좋아하던 어린이 찬송이 있습니다. 새 찬송가 560장에는 새로운 가사로 올라와 있는데 저는 옛날 어릴 때 부르던 가사가 좋습니다. “주의 발자취를 따름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닌가 맘에 있는 하늘 맑고도 밝은 해는 비치네 발자취를 따라가세 활발스러웁게 발자취를 따라가세 노래하며 기쁘게.”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간다는 것은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얼마나 큰 즐거움입니까?
유목민의 생존방식은 동물을 기르는 게 아니라 동물들이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유목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동물의 이동 경로를 알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존방식은 하나님의 길을 알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복음의 길을 알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의의 길을 알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발자취를 알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잘 사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지순례를 많이 떠납니다. 저는 성지탐사를 해봤습니다. 가서 한 번 돌아보는 관광이 아니라 배낭을 매고 광야와 산에 오르면서 다녔습니다. 어떤 이가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성지순례는 발로 읽는 성경이다”라는 것입니다. 성지순례는 그 지역을 한 번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복음은 기록한 대로 따라야 할 말씀입니다. 복음을 내 지식과 경험으로 판단하지 말고 말씀대로 따라보세요. 성경이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하지 마세요. 복을 주신다면 주실 줄 믿으세요. 처녀가 아기를 낳았다면 낳은 줄로 알고 믿으세요. 죽은 자가 다시 산다면 다시 살 줄로 믿으세요. 천국이 있다면 있는 줄로 믿고 가도록 노력하세요. 이것이 신앙이며 신앙인의 삶입니다.
유명한 저술가 베르너 티키 퀴스텐마허는 “나는 성공을 ‘부름을 따르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의 반대말이 무엇입니까? 부름을 따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을 실패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성공과 실패는 결국 하나님을 따르는가 아니면 자기를 따르는가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리더십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리더십의 세 가지 요소는 리더, 따르는 사람들 그리고 상황입니다. 요즘에는 리더십도 중요하지만 따르는 자의 ‘팔로워십’도 중요하다고 합니다. 훌륭한 리더는 훌륭한 따르는 자를 가진 사람입니다. 리더가 누구든 상관없이 리더를 따르는 사람들은 세 단계로 나뉩니다. 첫 번째 단계의 따르는 자는 그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따르는 자는 욕구가 있기 때문에 따르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따르는 자는 헌신적인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 단계가 가장 유능한 따르는 자이고, 리더와 대의에 항상 헌신적인 따르는 자입니다.
영광의 복음을 따르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우리의 리더인 그리스도에게 헌신적인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가장 유능한 사람입니다.
디모데후서 4:10-11 상반절에는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합니다. 바울과 함께 동역하던 자들이 떠났지만 누가만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에 ‘우리’라는 말은 누가가 바울과 함께 사역에 동참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누가는 2차 전도여행 때에 바울의 선교팀에 동참하였다가 바울이 로마에 갈 때까지 사도행전의 끝까지 바울을 떠나지 않고 따른 것을 ‘우리’라는 말로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잘 따르는 자가 좋은 제자이고 주님의 사역에 필요한 사람입니다.
결 론
영광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카보드’입니다. 영광이란 말은 빛을 의미하는 ‘쉐키나’라는 말로 대신 합니다. 영광은 밝은 빛입니다. 광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나 사도들이나 성자들을 그릴 때는 후광을 그렸습니다. 영광의 복음은 광채가 나는 복음입니다. 밝게 빛나는 복음입니다.
복음은 찬란합니다. 광야의 성막이나 솔로몬의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찼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는 영광이 가득 찼고, 복음을 믿는 자는 광채가 있고, 복음을 받은 나라는 광채가 있습니다.
영광이란 본체적 영광과 효과적 영광으로 나눕니다. 본체적 영광은 보통영광입니다. 해나 달은 본체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어 있는데 이런 영광이 본체적 영광입니다. 효과적 영광은 고등영광입니다. 자발적 의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값진 영광이고 효과적인 영광입니다. 해가 놀랍고, 위대하고, 세상을 밝히고, 생명을 살린다고 해도 하나님께는 태양보다 내 한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해나 달이 영광을 돌리는 것보다 더 가치 있고 하나님이 더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으로 복을 받는 우리들입니다. 영광의 복음을 따르는 복이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 모두가 영광의 복음을 잘 따름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복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마음과 자세로
딤전 1:12-17 / 김명혁 목사
부족한 사람을 귀한 학교에 불러주시고 귀한 교직원 예배에 참석해서 말씀을 전하게 해 주신 백석대학교 총장님과 교수님과 교직원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백석교단과 백석대학교를 아주 귀중하게 생각하며 존중하는 사람입니다. 순수하고 뜨거운 그리고 너그럽고 포용적인 복음주의 신앙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2011년 5월 18일 오전 8시 40분 백석대학교 교직원 예배에 와서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12가지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는데 그 제목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회개하며,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며, 사랑하며, 화해하며, 섬기며, 수고하며, 기쁘게, 감사하며, 버리며, 떠나며,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부족한 사람이 교직원 예배에 와서 설교를 해 달라는 부탁을 지난 4월 27일 다음과 같은 메일로 받았습니다. “주님 안에서 문안 드립니다. 개혁주의 생명신학을 근간으로 신실한 하나님 나라의 일꾼을 양성하고 있는 본교를 위해 깊은 관심과 기도, 마음의 후원을 보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목사님께서 기독교 대학에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헌신하는 교직원들에게 귀한 말씀을 전해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청중이, 기독교 대학에서 일하는 교수(신학교수 및 일반교수)와 직원들입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어떤 생각과 태도로 학교를 섬겨야 할지에 대하여, 성경을 중심으로 말씀을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설교 시간은 40분 내외이고 작성하시어 5월 4일(수) 까지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이와 같은 정중한 부탁을 받고 설교문을 작성해서 이틀 후인 4월 29일 보내드렸고, 오늘 5월10일 여기 와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부탁을 받은 대로 “어떤 생각과 태도로”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준비 하다가 제목을 조금 수정해서 “어떤 마음과 자세로”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제목으로 설교를 하기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할 때는 보통 한 주간 이상 걸리는데 이번 설교는 이틀 안에 완성했습니다. 제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제목의 설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마음과 자세”를 지니고 일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첫째로, “회개하고 감사하는” “마음과 자세”를 지니고 일을 하여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고,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삼아주시고 그리고 귀중한 학교에 와서 교수로 또는 직원으로 일하게 하신 하나님께 “회개와 감사”를 드리는 “마음과 자세”를 지니고 일을 하면 아주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죄인 중의 괴수라고 “회개”하면서 자기에게 긍휼과 은혜를 베푸셔서 죄를 사하시고 귀중한 직분을 맡겨주신 주님께 대한 “감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딤전 1:12-17).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감사”의 “마음과 자세”를 지니는 것보다 귀중한 “마음과 자세”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윗도 “회개와 감사”의 “마음과 자세”를 지니고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의 고백에는 언제나 “회개와 감사”가 가득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3-5).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 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찌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시 139:14,17,18). 자기가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회개”의 “마음과 자세”를 지니고 사는 것보다 귀중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감사”의 “마음과 자세”를 지니고 사는 것보다 귀중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만과 불평의 “마음과 자세”를 지니고 사는 것보다 위태로운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의 아버지가 되시는 길선주 목사님은 전에는 불교와 선도의 도사였는데 자기와 같은 못된 이교의 죄인을 “길선주야! 길선주야!” 라고 부르신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를 생각하며 평생 통곡하고 울면서 회개하고 또 회개하는 “회개의 마음과 자세”를 지니고 살았고 그리고 자기와 같은 못된 죄인을 주님의 신실한 종으로 삼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또 드리는 “감사의 마음과 자세”를 지니고 평생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의 또 한 분의 아버지가 되시는 이기풍 목사님은 전에는 평양의 깡패 두목이었고 마포 삼열 선교사를 돌로 쳐서 때려눕힌 못된 죄인인데 “이기풍아! 이기풍아!” 라고 부르신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를 생각하며 평생 “나는 죄인중의 괴수외다” 라고 통곡하고 울면서 회개하고 또 회개하는 “회개의 마음과 자세”를 지니고 살았고 그리고 자기와 같은 못된 죄인을 주님의 신실한 종으로 제주도 복음화의 선구자로 삼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또 감사를 드리는 “감사의 마음과 자세”를 지니고 평생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교회와 사회에 필요한 사람들은 “회개와 감사”의 “마음과 자세”를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귀한 학교에 와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교수와 교직원으로 일하시는 여러분들께서 모두 “회개와 감사”의 “마음과 자세”를 지니고 귀하고 아름답게 일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친밀한 교제와 소통”의 “마음과 자세”를 지니고 일을 하여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가정과 교회와 일터와 사회에 아주 필요한 것은 “친밀한 교제와 소통” 이라고 늘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모든 종류의 사람들과 친밀하게 교제하고 소통하시면서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각색 병자들과 각색 죄인들을 만나주시고 친밀하게 교제하고 소통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와 어두움과 절망 가운데서 살아가던 사마리아의 수가성 여인을 일부러 찾아가서 친밀하게 교제와 소통을 하셨습니다. 친밀한 교제와 소통의 모습을 사도 요한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요 4:7-26).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소통으로 사마리아 여인의 운명이 바뀌어졌고 사마리아성의 복음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요 4:28-30).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요 4:39-42). 저는 전도도 목회도 선교도 모두 친밀한 교제와 소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창한 설교도 아니고 심오한 신학강의도 아니고 화려한 전도 프로그램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교회와 사회에 필요한 사람들은 “친밀한 교제와 소통”의 “마음과 자세”를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귀한 학교에 와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교수와 교직원으로 일을 하시는 여러분들께서 모두 “친밀한 교제와 소통”의 “마음과 자세”를 지니고 멋지고 아름답게 일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부족한 죄인이지만 평생 “친밀한 교제와 소통”의 “마음과 자세”를 지니고 목회를 했는데 즐겁고 행복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온유와 겸손과 섬김”의 “마음과 자세”를 지니고 일을 하여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온유와 겸손과 섬김”의 “마음과 자세”를 지니고 살아가는 삶은 너무너무 귀중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삶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인용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하나님께서 귀한 종으로 사용하신 모세는 온유함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보다 승하다고 성경 말씀이 기록했습니다.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 12:3). 온유하지 않은 거친 사람과 겸손하지 않은 교만한 사람은 아무도 좋아하지도 않고 가까이 하려고도 하지 않고 일꾼으로 사용하려고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온유와 겸손을 귀중하게 여기며 예찬했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1-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3-5).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온유와 겸손”을 배우라고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섬김”의 삶을 살라고 가르치시며 분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15).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사도 바울도 “섬김”의 귀중함을 고백하며 “섬김”의 삶을 살라고 권면했습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롬 15:25).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하고 사람들에게 하듯하지 말라”(엡 6:7). 아무리 훌륭하고 유명한 사람이라도 온유와 겸손을 몸에 지니지 못하고 섬김의 삶을 살지 못하고 섬김을 받으려고만 할 때 아무도 그를 좋아하지도 존경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은 “온유와 겸손과 섬김”의 “마음과 자세”를 지니고 사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두 사람을 평생토록 귀한 종들로 사용하셨고 한국교회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귀한 학교에 와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교수와 교직원으로 일을 하시는 여러분들께서 주님을 바라보고 귀중한 신앙의 선배님들을 바라보면서 모두 “온유와 겸손과 섬김”의 “마음과 자세”를 지니고 귀중하고 아름답게 일을 하기를 바랍니다.
넷째로. “기쁨과 즐거움”의 “마음과 자세”를 지니고 일을 하여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오래 전에 “기쁨과 즐거움”의 귀중함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에게 주시는 가장 귀중한 선물 중의 하나가 바로 “기쁨과 즐거움” 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을 지니고 사는 사람은 아름답고 매력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쁨과 즐거움”의 귀중함을 가르치시면서 어떤 형편에서든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12). 그리고 근심과 두려움에 쌓여 있던 제자들에게 평안과 기쁨을 부어주시면서 평안과 기쁨을 지니고 살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요 14:27, 15:11). 결국 예수님의 제자들은 채찍질과 능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41). 사도 바울은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힌 죄수의 몸이 되었지만 주안에서 그리고 성도들 안에서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빌 4:10). 그리고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기뻐하고 또 기뻐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빌립보서는 옥중에서 쓴 사도 바울의 편지인에 4장안에 기쁨이란 말이 17번이나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편지하면서는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 는 유명한 권면의 말씀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환경과 상관없이 범사에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구약에 나타난 믿음의 선배들도 “기쁨과 즐거움”의 귀중함을 고백하고 예찬하며 기도했습니다. 모세의 마지막 기도 중의 하나가 즐거움과 기쁨을 지니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시 90:14). 다윗은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하고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 3,11). 솔로몬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전 3:13). 선지자 하박국은 가난과 궁핍 중에서도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우리들이 “기쁨과 즐거움”을 우리들의 몸과 마음과 얼굴에 지닐 때 우리들도 행복하게 되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도 행복을 느끼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짜증과 불평과 불만을 우리들의 몸과 마음과 얼굴에 지닐 때 우리들도 불행하게 되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도 불행을 느끼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래 전에 “인생은 기쁨” 이란 제목의 글을 썼는데 그 글의 일부를 인용합니다. “나는 한 평생을 비교적 낙관적으로 기쁘고 즐겁게 살아왔다. 힘들고 외롭고 슬픈 과정도 걸어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평생을 비교적 낙관적으로 기쁘고 즐겁게 살아왔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모험적인 나의 기질과 함께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는 나의 단순한 믿음 때문일 것이다. 11살 때 38선을 혼자서 넘었지만 신나게 넘었다. 군대생활도 기쁘고 즐겁게 했다. 논산 훈련소의 생활도 재미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두려워했지만 타잔처럼 줄 타는 것과 총 쏘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모른다. 미국 유학생활 중 여러 종류의 노동을 했지만 모두 즐겁고 재미있게 했다. 구술 땀을 흘린 힘든 일이었지만 페인트 칠로 낡았던 집이 새 집으로 바꾸어지고 정원을 가꿈으로 흐트러졌던 정원이 아름다운 정원으로 바꾸어지는 것을 보면서 만족하며 즐거워했다. 어린 아들 철원이를 잃는 아픔과 슬픔을 경험했지만 그것도 영적인 차원에서는 아름다운 축복의 경험으로 바뀌어졌다. 박정희 정권 때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협박과 심문을 받은 일도 있었지만 그것도 유익하고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운동과 여행은 너무나 즐겁고 재미있는 일들이다. 몇 년 전 홍천에서 스키를 타면서 너무 재미가 있어서 인생은 즐거움이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선교사들을 만나 위로와 사랑을 주고 받는 일, 새 신자들과 어린이들을 만나는 일은 너무나 즐겁고 기쁜 일이다. 설교하는 일도 목회하는 일도 즐겁고 기쁘다. 너무 잘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의 품은 행복이요 기쁨이다. 인생은 기쁨이다. 주님의 품 안에 성도들의 품 안에 자연의 품 안에 있기 때문이다.”
“기쁨과 즐거움”의 “마음과 자세”를 지니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귀중하고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귀한 학교에 와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교수와 교직원으로 일하시는 여러분들께서 주님을 바라보고 귀중한 신앙의 선배님들을 바라보면서 모두 “기쁨과 즐거움”의 “마음과 자세”를 지니고 귀중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게 일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섯째로, “생명을 바치는 충성”의 “마음과 자세”를 지니고 일을 하여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것은 너무 어려운 수준의 마음과 자세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좀 어려운 수준의 마음과 자세를 지니고 일을 하도록 힘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생명을 바친 사람들을 순국열사라고 부르며 존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의 복음을 위해서 생명을 바친 사람들을 순교자들이라고 부르며 존경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삶은 생명을 바치는 삶이었고 스데반 집사와 사도 바울의 삶도 생명을 바치는 삶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5).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59,60).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은 주님께서 주신 귀중한 계시의 말씀을 서머나교회에 써서 보냈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이 제일 귀중하게 여기시던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말씀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신자들이 모두 순교의 제물이 되라는 말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평안과 부유함은 물론 재물과 생명까지 모두 버리고자 하는 희생을 각오하고 신앙생활과 봉사생활을 하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와 같은 버림과 희생의 삶을 산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3.1운동의 선구자 이승훈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승훈 선생님은 몸과 마음과 재물과 생명을 모두 제물로 드린 아주 귀중한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제가 강변교회에서 목회할 때인 2002년 2월 17일 주일부터 2003년 3월 30일 주일까지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 이라는 제목으로 32번 연속 설교를 했는데 2003년 3월 30일 주일 마지막 32번째로 한 설교가 "학교와 하나님과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 이승훈 선생" 이라는 제목의 설교였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해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주일 아침마다 신앙의 선배들의 삶과 죽음을 되돌아 보면서 많은 도전과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학교와 하나님과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 이승훈 선생에 대해서 설교를 하겠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조만식 장로와 함께 오산학교를 일으켜 세운 분이었고, 주기철 한경직 함석헌 목사와 같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을 일으켜 키운 분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3.1운동을 일으킨 애국운동의 주역이었습니다. 그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모험적인 성격을 지닌 행동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남강 이승훈 선생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이승훈 선생은 오산학교를 일으켜 세운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가난과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승훈은 1864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난 지 열 달도 되지 않아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의 품에서 가난과 고난의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도 그가 열 살 때 돌아가시고 곧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나중에는 세 차례나 일본 경찰에 의해서 투옥되어 극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항상 몸의 고통을 당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승훈은 가난과 고난과 불행의 삶 속에서도 그의 삶에 충실했습니다. 가난과 고난과 불행이 도리어 그에게 자극이 되었고 도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어렸을 때는 열심히 공부했고 사환으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마다하지 않고 시키지 전에 알아서 열심히 했습니다. 청년 시절에는 열심히 일을 했으며 장년과 노년 시절에는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청장년 시절에는 평양에 가서 장사를 해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며 1백억 가까운 엄청난 재산을 가진 대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었다고 돈 냄새를 풍기지는 않았습니다. 가난했을 때도 비굴하지 않았고 부자가 되었을 때도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나라 걱정만 하고 나라 살리는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1907년 어느날 일본의 침략의 손길이 깊이 뻗치고 있을 때 그는 답답한 마음으로 평양 거리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우연히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도산 안창호의 연설은 그의 가슴을 사로잡고 말았습니다. 도산은 “일본이 우리 나라를 삼켜 먹으려고 하고 있으니 온 국민은 정신을 차리고 썩어빠진 구습을 벗어버리고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서 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이승훈은 자기보다 14살이 연하인 안창호에게 허리를 굳혀 인사하고 그의 손을 굳게 잡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라를 위해서 같이 행동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리고는 곧 머리를 깎고 술과 담배를 끊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승훈은 곧 사재를 털어 고향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웠습니다. 그가 43세 되던 1907년의 일이었습니다. 나라를 지키고 세우려면 인재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산학교는 처음부터 기독교 신앙으로 세운 학교는 아니었습니다. 나라를 살리기 위한 애국심으로 세운 학교였습니다. 그러나 3년 후에는 기독교 신앙으로 튼튼하게 세워졌습니다. 1910년 8월 한일합방이 되자마자 이승훈 선생은 가슴을 치며 통곡을 했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처절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9월 어느날 평양 거리를 헤매다가 산정현교회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한석진 목사가 “십자가의 고난”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에 이승훈 선생은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희생과 사랑의 정신이 자기를 구원하고 민족을 구원할 수 있다는 진리를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날부터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참으로 화끈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듣고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 살기로 결단을 했고, 한석진 목사의 설교를 듣고 십자가의 예수를 믿기로 결단을 했으니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승훈 선생은 예수를 믿은 지 3개월이 지난 1910년 12월 일본경찰에 붙잡혀 서울 총감부 구치소에 수감되어 극심한 고문을 당했지만 그가 새로 가지게 된 십자가 신앙으로 모든 고문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는 구치소에서 이렇게 기도하곤 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우리 주님께서도 십자가의 큰 고통을 참아 당신의 뜻을 이루었듯이 저도 이 고통을 잘 참아 당신의 높은 뜻을 이루게 하소서.” 그는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오산학교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1913년에 부임한 조만식 선생과 함께 오산학교를 기독교 신앙과 민족 사랑의 요람으로 키워갔습니다.
「1916년부터 1919년까지 오산학교에서 공부한 한경직 목사는 이승훈 선생에 대한 회상을 이렇게 했습니다. “그때 남강 선생이 우리 어린 학생들에게 주는 감화는 무어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정말 큰 것이었어요. 자기 사재를 다 털어서 학교를 세우고… 자기 집은 남촌에 있는데도 매일 학교에 나오시고… 한 60이나 되셨을 겁니다. [사실 그 때 남강은 55세였습니다.] 우리가 4학년인가 되었을 때요. 어느날 저녁에 졸업반 학생을 한 너댓명 불렀어요. 가니깐 선생이 자리에 누웠어요. 우리가 가니깐 겨우 일어나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전에 끌려가서 일본 사람들에게 너무 매를 맞아서 언제나 일년이 되면 그 맞은 자리가 아프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그래요. 그래 아프단 이야기를 하면서 매 맞은 그 푸릇푸릇한 자리를 보여요. 그때 3.1운동 일어나기 전인데 그 선생의 말씀 잊지 못하는 건 이런 말을 해요. ‘지금은 일본 사람들이 모든 세력을 다 가지고 모든 걸 다 주장하니깐 일이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아. 그렇게 되니까 애국 지사라는 사람들의 마음이 점점 변한다’고 탄식하시면서 마지막 말씀은 ‘다만 너희들은 분명히 알라.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지 나 이승훈은 조선 사람으로 살다가 조선 사람으로 죽는다’ (여기서 한경직 목사는 목이 메어 울먹였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그 후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노인이 그 이야기 하시려고 우리를 청했단 말이야, 특별히 그날 저녁에… 그러니깐 이제 그런 이야기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단 말이야요. 그때 오산학교는 기독교 학교라서 채플 시간이면 남강 선생이랑 고당 선생이 보아주셨단 말이야요. 그때 남강이 나이를 잡수셨어도 말씀하실 때는 거저 불을 뿜어요. 그 정신이 살았거든 … 그래서 우리 남강 선생은 내가 잊을 수가 없고.” 남강 이승훈 선생은 사재를 털어 오산학교를 세우고 조만식 선생과 함께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들을 키운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둘째로, 이승훈 선생은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학교만 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1910년 10월에는 정주에 교회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평양에서 한석진 목사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지 한 달밖에 되지 않던 때였습니다. 그는 정말 화끈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를 믿은 지 한 달 만에 교회를 지은 사람입니다. 재목을 사 들이고 돌을 날랐습니다. 두 달 만에 아담한 교회당을 지었습니다. 교회의 이름을 오산교회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정주읍 교회를 시무하던 정기정 목사를 담임 목사로 모셔왔습니다. 그래서 정주에는 교육의 불길에 이어 신앙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승훈 선생은 12월에 일경에 체포되어 2년 동안 갖은 고초와 고난을 당하다가 1912년에야 오산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오산으로 돌아온 이승훈 선생은 정기정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오산학교와 오산교회를 더욱 더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105인 사건으로 또다시 형무소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했습니다. 두번째 투옥된 것이었습니다. 그때 나부열 선교사가 그를 찾아와 위로하며 격려했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1915년 2월 감옥에서 풀려 나왔습니다. 그가 52세가 되던 해였습니다. 그는 오산학교로 달려가 그렇게도 사랑하고 그리워하던 학생을 만나보고 그 길로 평양신학교로 달려갔습니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신앙과 신학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군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1년 동안 신학 공부를 하고 다시 오산으로 돌아와서 장로로 장립을 받아 오산학교와 오산교회를 생명을 바쳐 받들어 섬겼는데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 4년 동안 그의 신앙이 가장 뜨겁게 불타 올랐다고 합니다. 바로 그 4년 동안 한경직 목사가 오산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이승훈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오산학교는 민족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민족의 학교였고 오산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양성하는 영적 도장이었습니다. 이승훈 장로는 1919년 3.1 운동 때 다시 일경에 체포되어 3년 동안 평양 감옥에 투옥되었는데 그의 믿음은 감옥 안에서 더욱 더 두터워지고 굳건해졌습니다. 나라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굳게 다짐하며 자기의 몸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셋째로, 이승훈 선생은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였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그는 3.1 운동의 주역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만약 그의 굳은 결심과 민첩한 활동이 없었다면, 그가 조금이라도 지체하였다면 3월 1일의 거사의 기회는 놓쳐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승훈 선생은 동분서주하면서 길선주 목사, 양전백 목사, 오화영 목사, 정춘수 목사, 김병조, 유여대, 이명룡, 함태영, 이갑성, 박도희 등을 설득해서 결국 기독교 지도자 16명이 33인 중에 포함되도록 했습니다. 하루는 이승훈 선생이 밖에 나갔다가 돌아와보니 좌중의 사람들이 언성을 높여 떠들고 있었습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순서에 대해서 33인 중 누구를 먼저 쓰느냐의 문제를 놓고 언성을 높이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이승훈 선생은 “지금이 어느 때라고 이러시오. 이것은 죽는 순서요. 죽는 순서로 손병희를 먼저 쓰시오” 라고 했습니다. 이 말 한 마디에 분위기는 조용해지고 순서는 쉽게 정해졌습니다. 손병희씨의 이름이 제일 먼저 쓰여지게 되었습니다. 이승훈 선생의 열성과 지혜와 용기 그리고 이해관계를 초월한 의연한 태도가 없었다면 과연 3.1 운동이 질서 정연하게 결행될 수 있었을런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승훈 선생의 전기를 쓴 오병학씨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3.1 운동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은 남강 이승훈이라는 한 사람의 진두 지휘로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기미년 독립 만세운동은 거의 남강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해도 그리 과언은 아니었다. 3.1 운동이 남강의 작품이었다면 그의 일생은 곧 하나님의 작품이었으리라.” 이승훈 선생은 3.1 운동 후 세 번째로 일경에 의해 투옥되어 온갖 고초를 다 당했습니다. 그는 날마다 아침과 저녁 사이에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습니다. 기도 시간이 되면 언제나 단정히 무릎을 꿇고 이렇게 통성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오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항상 이런 어려운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잘못을 깨우쳐 주시고 더욱 크고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연단해 주시는 분이심을 압니다. 오 하나님이시여, 이 고난과 시험을 잘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은혜로 저를 지켜주셔서 제 마음이 약해지지 않게 해 주시고 담대함과 강건함을 주소서.” 그는 옥중에서 구약성경을 20번 신약성경을 40번이나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기도로 모든 고난을 이기고 1922년 7월 감옥에서 풀려났습니다. 오산으로 달려가서 불타버린 오산학교를 다시 재건했습니다. 그는 자나 깨나 이런 기도를 신음처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여, 이 나라를 구하여 주옵소서!” 그는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순수한 애국자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것이 있습니다. 이승훈 선생이 편협한 민족주의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조만식 장로가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였지만 국수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자는 아니었던 것처럼 이승훈 선생도 국수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언젠가 누가 이승훈 선생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을 가리켜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나 역시 한때는 우리 민족만을 생각하면서 살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이 땅에 많은 민족이 살고 있지만 전체 인류는 결국 한 가족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일본을 대항해 싸운 것은 그들의 불의 때문에 그런 것이지 절대로 민족이 서로 다르다는 이유 때문은 아닙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학교와 하나님과 민족을 사랑하는데 한 평생을 다 바치다가 1930년 5월 9일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산학교에서 그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성대하게 거행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4년이 지난 1974년 10월 3일 서울 어린이대공원 남쪽 폭포 옆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그의 나라 사랑과 민족 사랑을 기리기 위해서 였습니다. 동상 건립 위원장은 오산학교 출신인 한경직 목사였습니다. 한 사람의 삶이 한 나라와 민족의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지를 보게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승훈 선생은 학교와 민족과 하나님을 사랑하며 한 평생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는 삶이 가장 값진 삶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우리의 청소년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민족과 교회를 사랑하고 그리고 세계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값진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제가 2003년 3월 30일 주일 "학교와 하나님과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 이승훈 선생" 이라는 제목으로 강변교회에서 한 설교였습니다. 백석대학교가 오산학교와 같이 되면 너무너무 좋겠습니다. 교수님 여러분들과 교직원 여러분들이 이승훈 선생님을 닮으면 너무너무 좋겠습니다. “어떤 마음과 자세로” 교수의 일과 교직원의 일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첫째로, “회개하고 감사하는” “마음과 자세”를 지니고 일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친밀한 교제와 소통”의 “마음과 자세”를 지니고 일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온유와 겸손과 섬김”의 “마음과 자세”를 지니고 일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넷째로. “기쁨과 즐거움”의 “마음과 자세”를 지니고 일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섯째로, “생명을 바치는 충성”의 “마음과 자세”를 지니고 일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시고 도우시는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 백석대학교와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넘치도록 풍성한 우리 주의 은혜
디모데전서 1:12~20 / 이수영 목사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 앞서는 디모데전서의 첫 머리 부분에서 디모데에게 그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상기시켰습니다. 그것은 에베소 교회 안에 거짓 교사들이 침투하여 사도 바울이 가르친 교훈과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딤전1:3-4). 교회의 지도자로서 참된 복음과 바른 교훈으로 신자들을 지키며 양육할 것을 당부하는 말로 편지를 시작한 사도 바울은 잠시 자기 자신이 어떻게 주의 일꾼이 되었는지를 회상하며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직분이 무엇인지를 언급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주님께 감사하는 이유를 말합니다. 본문 12절에서 그는 쓰기를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합니다. 이 글 속에서 우리는 그가 주님께 감사하는 세 가지 이유를 읽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께서 자기를 “충성되이 여기신 것”입니다. 둘째는 주님께서 자기에게 “직분을 맡기신 것”입니다. 셋째는 주님께서 자기를 “능하게 하신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충성되이 여기시고 직분을 맡기셨으며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도 주셨기 때문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감사가 우리 모두의 감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감사가 얼마나 크고 진실한 것인지는 이어지는 그의 글을 통해 더 확실해집니다. 본문 13절입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주님께서 사도 바울을 충성되이 여기시고 그에게 직분을 맡기신 것이 그가 주님께 처음부터 일관되게 충성스러웠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에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비방자였고 박해자였으며 폭행자였는데 도리어 주님께서는 자기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주의 사도로서의 직분과 능력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비방하고 박해하며 폭행했다고 전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교회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리스도의 지체이므로 교회에 대한 비방과 박해와 폭행은 곧 그리스도에 대한 비방과 박해와 폭행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되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도를 따르는 이들을 모두 잡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그에게 나타나셔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9:4) 물으시고 “주여, 누구시니이까?” 하는 사울에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9:5) 말씀하신 것도 그런 뜻에서입니다.
아무튼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비방자였고 박해자였으며 폭행자였던 자기에게 도리어 긍휼을 베푸셔서 주의 사도로서의 직분과 능력을 주신 것을 넘치도록 풍성한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본문 14절입니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쏟아부어주신 은혜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그의 사랑을 깨달아 알게 하신 은혜이며 자기가 갖게 된 믿음과 깨달은 사랑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며 함께 나누는 삶에로 불러주신 은혜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한 우리 주님의 은혜,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달리 표현하면 무엇입니까? 바로 뒤따르는 15절의 말입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라는 것은 사도 바울이 자기가 하려고 하는 말의 참됨과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의 목회서신에서만 사용한 어법입니다. 딤전3:1과 딤후2:11에서는 보다 짧게 “미쁘다, 이 말이여” 하고, 딤전4:9에서는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하며, 딛3:8에서는 “이 말이 미쁘도다.”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먼저 이 말을 하며 강조하고자 한 중요한 사실은 무엇입니까? 짧지만 바로 복음이고 우리의 믿음의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이 참되다는 증거가 바로 사도 바울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즉 죄인 중의 괴수인 자기까지 구원하신 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는 확실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고전15:9에서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한 사도 바울은 여기서는 스스로를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넘치도록 풍성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인하여 감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를 죄인 중의 괴수였던 자기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 속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깨닫습니다. 본문 16절을 봅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자기가 죄인 중의 괴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체 오래 참으신 주님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런 긍휼을 입은 까닭이 무엇인지를 찾습니다. 그것은 자기로 하여금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 속에 담긴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저 영생을 얻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를 믿어 영생을 얻게 되는 모든 사람이 또한 사도 바울을 본받아 살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긍휼을 베푸신 데는 그로 하여금 그 뒤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모든 이들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게 하시려는 뜻임을 사도 바울 자신이 깨달았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모든 신자들이 사도 바울처럼 사는 것이 또한 하나님의 뜻임을 우리로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단지 자기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죄인 중의 괴수였던 자기에게 도리어 긍휼을 베푸시고 풍성한 은혜로 자기를 충성되이 여기시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을 널리 전하고 가르칠 사도로서의 직분을 주시고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까지 주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사도 바울에게서 이제 나올 결론이 무엇이겠습니까? 본문 17절입니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이것이 또한 우리 모두의 기도와 찬양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잠시 자기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넘치는 은혜와 사도로서의 사명을 회상한 후 다시 디모데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는 분명 자기가 가진 감사와 사명감이 그대로 디모데에게서도 공유되고 살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의 경험을 그에게 상기시켰을 것입니다. 본문 18-19절을 봅니다: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18절에서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할 때의 “이 교훈”이란 바로 사도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명감에서부터 얻고 가르친 그 교훈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권하노니” 하는 것이 아니라 “명하노니”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아들 디모데야”라고 쓴 데도 그런 뜻이 있을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듯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18절의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딤전4:14에서 쓰기를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합니다. 아마도 디모데가 안수 받을 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그가 그의 사역을 위해서 받게 될 은사와 능력에 대한 예언들이 주어진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것을 상기시킨 것으로 생각됩니다.
디모데가 안수를 받은 것은 복음의 전도자이며 교회의 목회자가 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선한 싸움입니다. 그가 안수 받을 때의 예언대로 받은 은사를 가지고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하여 사도 바울이 이미 경험하고 깨달아 그에게 전수하는 교훈을 명심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19절에서는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합니다. 선한 싸움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고 싸우는 것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말입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 없이 싸우는 것은 선한 싸움일 수도 없고, 아무리 목적이 선한 싸움이라 해도 믿음과 착한 양심으로 수행하지 않는다면 결코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끝으로 사도 바울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버린 자들에 대해 경고하기를 잊지 않습니다. 19절 중반 이후와 20절을 다시 봅니다: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후메내오”가 어떤 자인지를 우리는 딤후2:16-18에서 조금 알 수 있습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는 것이 무슨 말이겠습니까? 부활은 문자 그대로의 육체적인 부활이 아니라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던 과거의 죄 많은 삶으로부터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 즉 비육체적이며 영적인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이미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믿는 부활 속에는 영적인 부활의 의미도 분명 들어있지만 육적인 부활을 부인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는 고전15:16-19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후메내오가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한 자들 가운데 있다고 한 것은 그런 뜻에서일 것입니다. “알렉산더”는 정확하게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두 사람을 “사탄에게 내주었다”는 말은 그들이 교회 안에서 활동하며 신자들에게 악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출교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씀으로써 출교의 목적이 회개하게 하는 데 있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 교회 안에서 없게 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우리의 죄인 됨을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죄인 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늘 감격하며 감사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 복음전도와 사랑 나눔의 사명을 주신 주님께 충성해야 하겠습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으로 우리가 싸워야 할 선한 싸움을 끝까지 싸워가며 넘치도록 풍성한 우리 주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딤전 1:12-17 / 이기복 목사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은 참으로 위대한 사람입니다. 자기에 대하여 성찰하는 힘이 위대하고 남을 대하고 보는 인간관계가 참으로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 보다 하나님에 대하여 자기의 생명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을 정도로 사랑하고 헌신하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1. 지난 과거를 돌아보면서 감사합시다(12-13절).
본문 12-13절에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라는 고백은 과거의 사도 바울의 모습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철저한 유대 주의자로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는 자(빌 3:5-6)”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와 구세주로 믿지 않았고 철저하게 부인하던 사람입니다. 유대교라는 종교와 교리를 앞세워 사람을 죽이고 핍박하고 옥에 가두고 주님의 교회를 잔멸하던 사람입니다. “잔멸하다, 잔해하다(헬. 폴데오)”라는 말은 아주 강하고 거센 폭력을 동반하는 잔인한 행동을 말합니다.
그러던 그가 다메섹이라는 도시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러 가던 중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극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태양 같은 빛이 비추이면서 바울의 눈이 멀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났으며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자기의 과거를 회개하고 복음 전하는 일을 위해 죽도록 충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헌신한 것입니다. 행 20:24에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할 때 성도들이 말렸을 때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지난날의 나의 죄인 되었던 일들을 생각하면서 감사합시다. 지난날 우리 조국의 어려움을 생각하면서 감사합시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사도 바울처럼 감사합시다.
2. 현재의 삶에 감사합시다(14-15절).
본문 14절을 요약해 보면 “우리 주의 은혜가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는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이나 고백을 들어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충만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1차 2차 3차 전도여행길을 보면 유대인들의 박해와 방해로 위험한 고비가 수없이 많았습니다. 고후 11:23-27에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세 번 태장(笞杖:볼기를 치는 형구)으로 맞고…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는 고백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빌 4:11-13에서 그의 삶에 대해서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백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고난과 핍박과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여기고 범사에 감사하며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롬14:8)”,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노라(고전 10:31)”고 당당하게 고백하고 외쳤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 경제가 어렵고 자연히 사업도 어렵다고 합니다. 취직이 힘들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도 바울을 본받아 감사합시다. 우리도 그 신앙을 본받읍시다.
3. 앞으로의 미래를 보면서 감사하였습니다(17절).
본문 17절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에 사도 바울은 지난 날 뿐만 아니라 지금도, 그리고 영원무궁하도록 모든 존귀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어진 현실에 충실하면서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에서 누릴 축복을 감사하였습니다.
고전 15:57-58에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 말씀하면서 날마다 그리고 장차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수고하고 헌신하는 모든 일들이 결코 헛되지 아니함을 증거하였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분명한 면류관 신앙”을 가졌습니다. 딤후 4:7-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로마서 8:18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딤전 6:14-16절에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요한 사도는 계 3:11-12에 빌라델비아 교회에 이런 축복과 면류관을 약속하였습니다.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우리는 과거에 사로잡혀 살지 말고 과거를 교훈삼아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성도가 됩시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삶과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것을 감사합시다. 그리고 우리에게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와 축복을 바라보면서 감사하는 성도가 됩시다.
내게 은혜 주신 이유
딤전 1:12-19 / 류공석 목사
예루살렘에 살 때였습니다. 대력 2년전으로 기억하는데, 아침에 큰 아이를 학교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저도 학교에 가려고 나갔는데, 집 앞에 있는 조그만 정원에 누군가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누군가 했더니 큰 아이였습니다. 학교에 있을 시간에 정원에서 무언가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급히 학교에 보내고 나서 오전 내내 생각해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 힘들었던 것입니다. 아이가 성격이 좋고 친구들과도 잘 지내기에 잘 적응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힘들었던 것입니다. 학교에 다녀온 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학교 공부가 힘든 것이 아니라 수업 시작 전에 아이들과 함께 노는 시간이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대일로 만날 때는 그런 것을 못 느끼는데, 같이 놀 때는 유대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할 때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힘들어서 노는 시간이 끝나고 수업이 시작되는 시간까지 학교에 들어가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 참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정면 돌파'에 대해 이야기했지요. 피하려하면 문제는 더 커져서 더 어렵게 느끼지고 두려움만 커진다고, 하지만 정면 돌파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고 말입니다. 이 말에 힘을 얻었는지 그 후로는 그런 일 없이 잘 다니고 있습니다.
부모는 누구나 그 자녀들에게 삶의 태도나 인생의 교훈을 가르칩니다. 비록 자녀들에게는 그것이 잔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 자녀들이 바른 삶의 태도를 갖고, 바른 길, 옳은 길로 가기를 원하는 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특히 인생을 올곧게 살아온 부모일수록 더더욱 그 자녀들에게 교훈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주는 교훈을 만나게 됩니다. 비록 육신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아니었지만, 영적으로 아버지된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된 제자 디모데에게 주는 교훈이 바로 디모데전후서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사역에 관한 교훈입니다. 디모데에게 어떠한 자세로 사역을 감당할 것인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12-17절은 어떤 면에서는 사도 바울의 간증과도 같은 부분입니다. 간증을 통해 사역의 동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내가 전에는...”, 이 말은 내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구원받기 전, 거듭나기 전에는 이라는 뜻입니다. 그 때 바울은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이 실제로 그러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사도행전 8:1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이 그가 죽임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사울(שאול)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사도 바울의 히브리식 이름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을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 당하는 스데반의 모습을 보며 그 죽음을 마땅히 여겼던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너, 예수 믿는 놈! 너는 죽어도 마땅해!”하며 스데반의 죽음을 통쾌하게 즐기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9:1을 보면,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 다메섹으로 향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 대해서, 그리고 주의 제자들에게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것입니다. 이 죄인됨의 고백은 15절 하반절에서 다시 한번 확인됩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괴수란 우두머리를 뜻하면서 또한 첫째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나는 죄인들 중에 가장 큰 죄인이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대 사도 바울, 어느 누구라도 위대한 주의 종이요 조금이라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성자 같은 사도라고 인정받는 이가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쉽지 않은 고백입니다. 언 듯 부끄러운 고백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부끄러운 고백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의 평생의 신앙 간증이며 참된 승리의 고백입니다.
죄책감과 죄의식은 분명히 다릅니다. 죄책감은 사람을 병들게 합니다. 하지만 죄의식은 은혜를 더해 줍니다. 자유를 주고, 해방감을 줍니다.
여러분, 죄의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죄인이었던가를 깨닫는 것 아닙니까? 내가 감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죄인 중에 죄인이었다는 것,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며,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죄인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죄의식입니다.
칼빈이 말한 것처럼 철저하게 부패되고 타락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 앞에 불순종과 죄악으로 일관되었던 무지와 불신을 깊게 인식하며 가슴 아파하는 것이 바로 죄의식입니다.
그런데, 이 죄의식은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 깊어집니다. 처음에는 그저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정도입니다. 그래서 나의 의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깨닫는 것은 나는 무익하다는 것이요, 나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상하지요?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그렇게 고백하면 고백할수록 더 은혜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 중의 괴수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벌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고, 사랑과 긍휼을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기에 참된 죄의식은 결국 겸손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내가 하나님의 일꾼이 된 것, 내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은 것, 그 무엇도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의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은혜로 인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뿐입니까? 참된 죄의식은 감사와 헌신으로 이어집니다. 나같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자, 무익한 자, 죄만을 일삼고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훼방함을 자랑으로 삼았던 나 같은 자를 용서해주시고 구원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사명을 주시고 직분을 주셨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헌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값비싼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부은 막달라 마리아의 헌신이 무엇으로 가능했습니까? 죄용서입니다. 주님의 사랑입니다. 씻을 수 없는 죄를 씻어주시고, 사랑 받을 수 없는 자를 사랑해주신 주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그와 같은 헌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처럼 위대한 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죄의식과 참회의 고백이 언제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죄의식이 있었기에 그의 헌신이 가능했고, 끝까지 겸손히 주어진 사명을 충성되이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뿐만 아니라 다른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공통된 특징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이나 루터나 칼빈 등의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은 예외 없이 깊은 죄의식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현대 교회의 위기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러한 죄의식의 결핍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이러한 죄의식이 있습니까? 혹시 입으로는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깊은 죄의식 없이, 한편으로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함에 있어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성전 안에서 자기의 의를 드러내며 기도하던 바리새인보다,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며 감히 고개를 못들던 세리의 기도를 기뻐하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13절에서 긍휼이란 단어와 14절에서 은혜라는 단어를 보게 됩니다. 긍휼이 무엇입니까? 긍휼이란 저주를 받아 마땅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 그 저주를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죄인에게 합당한 것은 저주입니다. 그러나 그 죄인을 불쌍히 여겨 저주를 멈추는 것, 그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일방적인 호의를 말합니다. 우리는 저주를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이 저주를 거두시고, 대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구원을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베푸셨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데도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간증에서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의 죄인됨과 죄인을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역의 동기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게 이러한 은혜를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충성되이 여겨”, 이 말을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하면 “주님이 나를 믿어 주셔서”라는 의미입니다. 즉, 주님께서 바울을 본래 믿을 만한 자임을 꿰뚫어 보시고 그를 충성되이 여겼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본래는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본래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는데, 그러한 자신을 주님이 믿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대적하고 주님을 비방하고 복음을 방해했던 바울을 주님이 믿어 주셔서 사도라는 직분을 맡기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굉장한 감격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본래부터 믿을만한 사람들이었습니까? 충성된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래서 직분을 맡고 사명을 맡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본래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실은 믿지 못할 사람들이요, 충성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감히 주의 일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우리를 믿어주시고, 충성되지 않은 우리를 충성되다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이것 역시 은혜가 아닙니까?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자신이 무엇을 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결코 “내가 한 일을 보아라!”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무엇을 맡기셨는지, 무엇을 할 수 있게 하셨는지 보아라”라고 말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8-10)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나를 충성되이 여기신 것”, “주님께서 나를 믿어주신 것”은 주님께서 내게 무엇인가 기대하는 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기대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내게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믿어주시고, 나를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맡기시면서 내게 기대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맡겨진 사명, 맡겨진 직분 충성되이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믿어 사명을 주고 직분을 준 것처럼, 네가 그 사명, 그 직분을 믿음직하게 충성되이 감당할 것으로 믿으시며 기대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사명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은혜가 곧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택함 받은 은혜, 나의 죄를 씻기시고 용서하신 은혜, 구원하신 은혜, 나를 믿어주시고 내게 직분을 주신 은혜, 내가 받은 은혜, 내가 받은 축복이 바로 사명입니다. 그 받은 은혜를 가지고 주를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주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몸된 교회를 섬기며 이웃을 섬기는 사명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받은 은혜가 무엇입니까? 받은 축복이 무엇입니까? 영적 은혜입니까? 기도의 은혜입니까? 말씀의 은혜입니까? 재능입니까? 직분입니까? 건강입니까? 물질입니까? 그것으로 주님을 섬기시고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십시오.
오늘 본문은 직분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 적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가 사명자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신 것은 사명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내게 은혜를 주시고, 나를 믿어주신 것은 내게 맡겨주신 사명을 충성되이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일전에 짧게 소개를 한 것 같은데, 캐시 버넬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1999년 4월 20일 미국 콜로라도 덴버의 리틀턴에서 총기 난사로 인해서 13명의 학생과 교사가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총기난사를 벌인 두 남학생은 학생들을 캠퍼스의 한 군데로 모아놓고 한 사람씩 총구를 갖다대고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너는 하나님을 믿느냐?” 이 질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살기 위해서 “믿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대답을 하면 이들은 음흉한 미소를 띠며 그들을 살려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공포 분위기 가운데서도 확실한 신앙고백을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캐시 버낼이라는 여학생이었습니다.
캐시 버낼은 총구 앞에서도 담대하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렇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다. 그리고 너희들도 역시 하나님의 길을 따라야 한다” 결국 두 남학생은 분노 가운데서, “네가 믿는 하나님 곁으로 가라”고 외치며 총을 난사했습니다. 순교를 한 것이지요.
그런데, 캐시 버넬이 처음부터 이런 믿음의 아이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 총기난사를 벌인 학생들처럼 불량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마약과 술과 사탄을 숭배하는 신비주의에 빠져 있었고, 부모가 자신을 억압하고 자유를 빼앗는다고 생각하며 부모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겠다고 부모에게 협박까지 했던 그런 아이였습니다.
그러던 캐시 버넬이 이러한 순교자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부모의 헌신적인 사랑도 있었지만, 그의 신앙적인 체험을 통해서였습니다. 1997년 봄, 부모가 억지로 다니게 한 교회의 수련회의 저녁집회 때 캐시 버넬은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지나온 삶이 얼마나 죄악된 생활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고, 자신의 그러한 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사랑하시고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어찌할 줄을 몰라 눈물을 흘리며 회개와 용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캐시는 변화되었습니다. 그 찌들리고 미움과 분노가 가득찬 얼굴이 해맑은 소녀의 미소로 바뀌었고, 그의 삶도 완전히 변화되어 마약과 술, 사탄적인 신비주의에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캐시가 순교하기 몇 달 전에 학교의 친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제 나는 하나님께 내 삶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순교하기 일년 전인 1998년에 캐시의 노트에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나는 나의 하나님을 위해 죽고 싶다. 나는 나의 믿음을 위해 죽을 것이다. 그것은 나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이다.”
그리고 캐시가 죽기 일주일 전에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엄마, 나는 죽는 게 두렵지 않아. 왜냐면 나는 하늘 나라로 갈 거니까”
그리고는 1999년 4월 20일 “너는 하나님을 믿느냐?”하는 질문에 담대하게 “Yes!”라고 말하고는 순교하였습니다.
무엇이 캐시 버넬을 비행청소년에서 거룩한 순교자로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사도 바울을 주님을 위해 죽기까지 헌신하는 사도로, 순교자로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해주고, 용서해주시고,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신 그 은혜, 그 사랑이 그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캐시는 받은 은혜를 가지고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아니 주님을 위해 죽겠다고 다짐을 하였습니다. 받은 은혜를 사명으로 알았던 것이지요. 비록 캐시 버넬은 순교당했지만, 그 결과, 캐시의 죽음으로 미국의 십대 사이에는 커다란 영적 부흥이 일어났고, 잠자고 있던 믿음들이 깨어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받는 것에 익숙합니다. 은혜 받고 축복 받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은혜는 주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축복은 나누어 주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사명을 감당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주를 위해 살라고 주신 것입니다. 받은 은혜에 합당한 사명을 감당하는 충성된 종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 필요한 자세 중에 하나가 순종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순종을 선한 싸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18-19절을 보겠습니다.
“아들 디모데야 내게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왜 순종이 선한 싸움입니까?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은 순종한다는 것인데, 말씀에 순종하는 것 자체가 힘든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평생 싸워야 할 싸움은 다른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과의 싸움일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을 따라 싸우는 싸움입니다.
왜 전도합니까? 주께서 “가서 모든 족속에게 말씀을 전파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에 가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하셨기 때문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명령하시니까 그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하셨기에 내게 성처주고 해를 끼치는 사람 용서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사랑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질 않습니다. 말씀 보다 나의 판단, 나의 의지, 나의 감정, 나의 자존심, 나의 경험, 나의 능력이 앞설 때가 많고, 환경이 앞서고, 유혹과 우리의 연약함이 앞서고, 순종 자체보다는 어떤 결과에 더 집착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주님의 도구라는 것입니다. 도구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관심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평생의 싸움은 결국 이 순종의 싸움입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 앞에 어떻게 순종하고 있는가? 나의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 내게 은혜 주시고 나를 믿어주시어 내게 직분을 맡기시고 사명을 주신 주님 앞에 어떻게 순종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순종하십시오. 순종하는 자에게 주님께서는 능력을 주십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감사함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단순합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 “내가 너에게 능력을 주리라”하십니다.
우리의 책임은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주님께서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주실 때 능력도 함께 주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문제는 능력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능력이 없어서 사명을 감당 못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지 않으니까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순종할 때 능력이 주어집니다. 사명을 감당할 때 능력이 주어집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빌4:13)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내게 은혜를 주신 것은 내게 사명을 주심이며, 그 사명 충성되이 감당하기를 기대하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을 기억하는 가운데,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 직분, 선한 싸움을 감당하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주의 거룩한 종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게 맡기신 직분
딤전 1:12-17 / 길승민 목사
서론
서른 둘의 나이에 은행의 행장이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무척이나 그 자리에 앉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너무 이른 진급이었습니다. 그래서 은행 업계에서 가장 존경받는다는 한 어른을 찾아가 자신의 고민을 말했습니다. “행장 직분을 수행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 어른의 대답은 세 가지였습니다. ‘바른 판단을 하라.’ 어떻게 해야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습니까? 다시 질문을 하니 ‘경험을 많이 하라.’ 나이가 어려 경험이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경험을 많이 합니까? 그랬더니 하는 말이 ‘틀린 결정을 하라.’였다고 합니다.
좋은 판단력은 틀린 판단을 많이 해 볼수록 갖추게 된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주어진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미리 완벽하게 준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닥쳐서 해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다르게 말하면 실수와 고통의 과정을 통해 배우게 된다는 겁니다. 수학자 유클리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하학에는 왕도가 없다.’(There is no royal road to learning Geometry.) 우리에게는 ‘배움(학문)에는 왕도가 없다’는 말로 알려져 있는 말입니다. 이 말은 당시 유클리드에게 기하학을 배우던 왕이 기하학이 너무 어려워서 ‘기하학을 쉽게 배울 방법은 없는가’ 질문한 것에 대한 유클리드의 대답이었습니다.
공항을 출입국할 때 왕족만 지나가는 특별한 문이 있고, 왕족만 치료받는 특별한 병원이 있고, 왕족만 즐기는 특별한 식문화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배움의 과정, 성장의 과정은 왕도(王道), Royal road가 없습니다. 그냥 부딪히고 깨지고 경험해야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장을 기대하고, 주어진 직분을 잘 감당하기 원한다면 성실하게 그 과정을 거쳐야합니다. 뛰어넘을 생각 말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차근차근 가야합니다. 32살에 행장이 된 청년의 이야기가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남이 이룬 결과물을 부러워한 나머지 나에게 주어진 현실을 뛰어넘고 그들이 이루어놓은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레시피가 나오기까지의 피땀흘린 과정은 관심이 없고, 레시피를 도둑질 해서라도 써먹을 생각만 하는 치기어린 젊은 창업자와 비슷합니다.
원하기는 2019년 한 해가 여러분이 오롯이 잘 성장할 수 있는 과정이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께 묻고 맡기고 신뢰하며 하루를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선하게 이끌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또 다른 문제 하나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격입니다. ‘자격 자체가 없는 사람은 어떡하는가?’입니다. 12-1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나를 충성되이 여겼다는 것은 실상은 내가 충성된 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전혀 해당사항이 없는 사람을 귀하게 여겨주시고, 직분까지 맡겨주어서 너무나도 감사하다는 표현을 한 겁니다. 사실 바울은 자격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스로 말했듯이 바울은 복음을 방해하였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비방자, 박해자, 폭행자였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에게 은혜의 직분을 주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직분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직분은 분명한 뜻이 있습니다. 두 가지를 함께 나누겠습니다.
본 론
① 말씀이 우리의 직분입니다.
바울은 말씀을 비방하고, 말씀을 박해하고, 말씀을 폭행했습니다. 말씀을 통해 사람이 살아나는 일을 가로막았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러니 바울은 스스로 죄인 중의 괴수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바울에게 어떤 직분을 주십니까? 자기가 그렇게 방해했던 바로 그 말씀을 전하는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이게 바로 신앙의 역설입니다. 가장 박해하던 사람을 사명자로 세우고, 가장 악한 사람을 선한 자리에 세우는 것 말입니다.
미국의 전설적인 사기꾼 프랭크 애버그네일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수표와 현금을 위변조하기도 하고 팬 아메리카 항공 부기장, 외과 전문의, 변호사 등을 사칭하여 수백만 불이 넘는 돈을 갈취했습니다. 결국 체포되었고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런데 교도소에서 형을 마치고 나온 뒤에 이 사람에게 함께 일하자고 손을 내민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FBI였습니다. 위변조 기술이 탁월한 프랭크를 범죄를 소탕하는 일에 쓴 겁니다. 프랭크가 고안한 수표 위조방지 시스템은 금융계에 혁명을 일으켰고 그 후에 로열티 수입으로만 연간 수백만 달러를 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희대의 사기꾼을 모델로 한 영화가 바로 ‘캐치 미 이프유 캔’입니다. 실제로 보안업체나 국가 안보기관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 해커 출신들이 종종 있다고 합니다.
말씀을 비방하고 박해하려면 말씀에 대해 잘 알아야합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고 공격할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바울은 복음을 대항할 유대교의 대표자가 될만했습니다. 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고, 베냐민 지파고 태어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을 정도로 정통 유대교 신봉자였고, 바리새인이자 율법학자였고, 당대 최고의 랍비였던 가말리엘의 수제자였습니다. 사실 이런 태생적인 스펙과 지능과 자질은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신 축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재능을 하나님 대적하는데 썼으니 그런 은혜를 모르는 원수는 하나님 입장에서 당장 죽여버려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의 대적자인 바울을 오히려 말씀의 직분자로 세웠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동일한 은혜를 주십니다. 사실 우리는 말씀을 방치하였고 내 입맛에 맞게 적용했습니다. 매번 말씀 앞에 헌신하겠다고 다짐하지만 늘 실패했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거둬가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다시 말씀의 직분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자세가 있습니다. 바로 감사입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12절) 감사하면 자세가 달라지고, 말씀 앞에 엎드리는 매 순간이 가장 행복하고 귀한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명자로 말씀을 맡은 직분자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에게 이런 직분을 주시는걸까요? 두 번째입니다.
② 본이 되는 것이 직분의 본질입니다.
직분은 기본적으로 기능입니다. 사장으로서의 기능, 부하직원으로서의 기능, 목회자로서의 기능, 성도로서의 기능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설교를 잘 하고, 성경을 잘 가르치고, 기도를 잘 하고, 헌금을 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직분의 목적은 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사람이 계속해서 나올 것인데 그들에게 본이 되게 하시려고 지금 나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내용을 전하는 정도가 아니라 복음적인 삶을 살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전수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 가르치는 기능을 넘어 성경을 대하는 태도,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노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에 설명한 적이 있는 구약시대의 서기관에 대해 한 번 더 말씀드립니다. 서기관은 하나님의 말씀을 필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은 대부분 양가죽에 기록되었느데 시간이 지나면 바스라졌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양가죽에 옮겨 적어야했습니다. 선대 서기관이 기록한 말씀 그대로 새로운 양가죽에 옮겨 적는 것이 서기관의 임무였습니다. 토시 하나 틀리지 않게 신경써서 기록하는 것이 좀 고달프긴 하지만 서기관이라는 기능만 보자면 그래도 할만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서기관은 옮겨 적는 기능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를 전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룩하고 진실하게 대했습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몸을 정결하게 하고 매번 하루를 시작했고, 양가죽의 상태와 붓의 청결도를 매번 점검했습니다. 옮겨 쓸 원본도 여러 번 읽었습니다. 잘못 옮겨 쓰면 안되니 꼼꼼하게 일점일획을 눈 여겨 보았습니다. 그렇게 써내려가다 ‘아도나이 אדני’ 하나님이라는 말이 등장하면 쓰던 것을 멈추고 다시 정결예식을 하고 돌아와서 새 붓으로 하나님이라는 글자를 썼습니다. 그리고 몇 줄 아래 또 ‘아도나이’ 하나님이 등장하면 또 다시 정결예식을 행하고 돌아와 또 다른 새 붓으로 썼습니다. 매번 하나님의 임재를 구했고, 두려움과 거룩한 갈망 속에서 글을 썼습니다. 서기관은 단순한 모사꾼이 아니었습니다. 혼과 정신을 유지하고 불어넣기 위해 말씀을 향한 태도와의 전투를 날마다 결단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 서기관들이 옮겨 적는 기능적인 일만 했다면 성경은 이 땅에서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을 것입니다. 기능하는 따분한 일로 전락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이 그토록 오랫동안 전해지고 오늘 우리의 손에까지 전달된 이유는 태도와 자세의 본을 믿음의 유산으로 남겼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말씀의 직분을 받았다는 것은 말씀의 내용뿐 아니라 그 말씀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 성실성과 진실함을 우리의 삶 가운데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우리의 그 진실된 모습을 보고 나도 저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하는 것, 그것이 직분입니다.
중직자와 연탄의 공통점이라는 짧은 글을 보았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불을 전달하는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연탄보일러로 난방을 했습니다. 연탄은 반드시 아래위로 두 장을 겹쳐서 불을 붙였습니다. 밑의 연탄이 윗 연탄에 불을 전달하고 꺼지면 윗 연탄을 아래로 보내고 위에 새로운 연탄번은 자다가 일어나 바꿔줘야했습니다. 깜빡 잊어버리면 그날 밤 혹은 새벽에는 냉골에서 자야했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번개탄으로 불씨를 살리느라 온집안이 매캐한 연기로 고생을 하곤 했습니다. 집에 온기를 유지하는 비결은 딴데 있지 않았습니다. 연탄불을 잘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직분자는 자기만 열심히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도 열심히 하도록 불을 전달해야합니다. 그러면 말씀은 살아나고 공동체의 온기가 돌고 사람이 살아나는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결 론
여러분이 최고 결정권자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에게 직분을 주고 싶을까요? 충성된 사람 아니겠습니까? 기질, 성격은 그 다름을 인정하겠지만 충성스럽지 않은 사람에게 책임을 맡기기는 어렵습니다. 조직 문화가 발달한 회사나 군대에서는 충성도를 가장 중요한 자질로 평가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직분을 받은 우리는 그다지 충성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직분을 받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오늘 나에게 주신 직분이 있습니다. 감사하시고, 기뻐하시고, 헌신하시고, 믿음의 본으로 아름다운 발자취를 남기시는 믿음의 사람들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