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단' (處斷)이란 단어의 뜻을 되뇌이는 요즈음이다.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의 포고령 1호에 등장한 서슬 퍼런 낱말이다. 국어사전을 펼치면 '죄과가 있음을 결정하여 처치하거나 처분함. 또는 그러한 처치나 처분'이라고 풀이돼 있다.
유튜브를 헤매다 간혹 공짜로 큰 물고기를 낚는 경우가 있다. 2018년에 제작돼 이듬해 국내 개봉해 417명이 관람한 아일랜드와 룩셈부르크 합작 영화 '블랙 47'이 그런 경우다. 나중에 보니 OTT 왓차에 있더라.
417명이 관람하고 말 영화가 아닌데 너무도 소홀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과 같은 시국에, 누군가를 처단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밀어 오를 때 곱씹을 만한 영화란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은 1845년에 시작돼 1852년에 이어진 아일랜드 대기근을 아주 직접적으로 다룬다. 아일랜드 기근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누는데 1740~41년, 1845~52년, 그리고 1879년이다. 이 중 가장 극심하고 비극적인 것이 가운데 시기여서 대기근이라 한다. 기근 전에 800만명을 웃돌던 아일랜드 인구는 100만명이 굶어 죽고, 100만명이 미국 등으로 이민을 떠나 인구의 25%가 없어졌다. 이 숫자는 200년이 지난 21세기에도 여전히 회복되지 않아 아일랜드 섬 주민 수는 670만정도에 불과하다.
한나(휴고 위빙)는 영국군 베테랑 병사 출신으로 왕립 아일랜드 경찰(IRC) 수사관으로 일한다. 아일랜드 독립운동가를 취조하다 술김에 목을 졸라 살해하고 만다. 체포돼 교수형을 선고받고 복역한다.
마틴 핀니(제임스 프레체빌)는 전직 키노트(옛 왕국)의 레인저로 아프가니스탄과 인도에서 영국군으로 복무하다 1847년 아일랜드 서부 코네마리로 귀환한다. 마침 그 해 아일랜드는 대기근의 재앙에 기신거리고 있었다. 핀니는 어머니는 굶어 죽고, 형은 가족을 퇴거시키는 집행관을 흉기로 찔러 교수형을 당한 사실을 알게 된다. 핀니는 다 쓰러져 가는 집에 세 자녀와 함께 핍진한 삶을 꾸려가는 형수 엘리(세라 그린)에게 함께 미국으로 가서 살자고 제안한다.
떠날 채비를 하는데 영국에서 건너온 집주인과 RIC 요원들이 들이닥쳐 퇴거 조치를 강행한다. 핀니는 대들다 체포되고 맏조카가 살해되는 것을 눈 뜨고 지켜보게 된다. 핀니가 곡절 끝에 탈출해 형수 집을 살펴보려 갔는데 형수와 두 조카가 얼어 죽어 있었다.
당국은 간수 여섯을 무참하게 살해하고 떠난 핀니를 두고 볼 수 만은 없다고 판단한다. 핀니는 콜카타에서 총을 버리고 탈영한 것으로 확인됐다. 오만방자한 영국군의 포프 대위(프레디 폭스)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핀니와 함께 싸운 한나에게 피니를 체포하면 사면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포프 대위는 한나 말고도 철딱서니 없는 영국군 병사 홉슨(베리 케오간)과 현지 사정에 정통하고 통역도 할 수 있는 코닐리(스티븐 레아)까지 네 명이 팀을 이뤄 핀니가 복수를 벼르는 사람들을 차례로 찾아 다닌다.
이 때 핀니는 형에게 교수형을 언도한 판사, 형수 집 철거에 나선 이와 토지 중개인, 세금 징수원 등을 차례로 응징했다. 이제 집주인 킬마이클 경을 노린다고 판단한 포프 일행은 킬마이클 경에게 경고하는데 그는 아랑곳 않고 수탈한 곡물들을 영국으로 실어나를 궁리에 여념이 없다. 성문 밖에는 굶주린 이들이 마차에서 떨어지는 곡물 찌꺼기라도 주우려고 줄을 서는데 한 톨도 건네지 않고 본국으로 이송하는 데 격분한 홉슨이 총을 들었다가 살해된다.
상당한 혼란의 와중에 핀니는 눈을 감으면서 한나에게 미국으로 건너가 자신대신 새로운 삶을 찾으라고 애원한다. 포프에게 복수하려고 한나는 포프의 뒤를 쫓는데 길에서 미국으로 떠나려는 아일랜드인 무리를 만난다. 포프는 의식을 잃은 채로 말이 이끄는 대로 더블린으로 향하는데, 아일랜드인 무리는 다른 방향으로 튼다. 마차 뒤에 앉아 인형을 만지는 소녀는 핀니의 남은 조카다. 영화는 한나가 어느 길을 선택하는지 보여주지 않고 어두워진다.
부끄러운 얘기를 털어놓을 수 밖에 없겠다. 영국이 아일랜드를 식민지로 다스린 기간이 무려 800년이다. 일제 36년과는 비교 불가다. 이 영화를 보면 영어와 아일랜드어가 완전히 다른 언어란 사실을 우리가 얼마나 애써 외면해 왔는지 깨닫게 된다. 영화 중간에 영어와 아일랜드어가 동시 통역하듯 번갈아 나온다. 아일랜드인들이 얼마나 철두철미 영국인들을 미워할 수 밖에 없는지 잘 설명한다.
배경을 특수효과로 처리한 듯 보이는 것이 살짝 아쉽긴 하지만, 아일랜드의 습하고 음침한 자연환경을 잘 그려내고 있다. 액션 장면은 투박한 듯 보이면서도 동선과 카메라 촬영 각도를 고려해 잘 짜여졌다. 총기를 마구 쏴대는 요즘 액션 영화 주류와 달리 당시 라이플은 한 발 장전해 쏘고 다시 장전해 쏘는 식이어서 장전하는 동안 칼을 쓰거나 몸싸움을 하곤 했다. 해서 부지런히 총구 쪽을 소제하면서 다음 적을 압도할 공격을 채비하는 등이 숨막히는 긴장미를 선사한다.
낯익은 아일랜드 배우들이 심심찮게 얼굴을 내민다. 리암 니슨 주연의 영화 '원 맨'에 나왔던 세라 그린을 비롯해 베리 케오간, 스티븐 레아 등이 반갑다. 물론 두 주연 프레체빌과 어빙은 말할 나위 없다.
다시 '처단'의 통렬함으로 돌아가자. 오만한 포프는 성경 갈라디아서 6장 7절 '사람이 무엇을 심든 그대로 거두리라'를 인용하며 "아일랜드인의 술과 게으름이 대기근의 원인"이라고 아는 척을 한다. 그런데 끝 장면을 보면 포프는 자업자득으로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
킬마이클 경(짐 브로드벤트)이 아일랜드인 코닐리와 나누는 대화도 인상적이다. 킬마이클이 "자네 농부들은 다 똑같아. 풍경의 아름다움에 감사할 줄 몰라"라고 역시 잘난 척을 하자 코닐리가 "아름다움이란 게 먹을 수 있다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겠죠"라고 비아냥대듯 대꾸한다.
핀니의 넋두리도 있다. "내가 누굴 죽이면 살인이라 부르고, 저들이 죽이면 전쟁이라 부른다. 아니면 신의 섭리나 정의라고 한다."
이 작품은 2008년에 PJ 딜런의 10분짜리 단편 영화 'An Ranger'를 바탕으로 삼은 것이었다. 유튜브에도 있다. 딜런은 아일랜드 감독인 랜스 데일리가 메가폰을 쥔 장편 '블랙 47'에 각본과 기획으로 참여했다. 데일리 감독은 '키세스'(2008), '굿닥터'(2011), '인생의 미풍'(2013)을 연출했다.
아일랜드의 고통스러운 역사와 영국과의 긴장을 녹여낸 영화로는 '마이클 콜린스'(1996), '블러디 선데이'(2002),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 등이 있어서 비교하며 감상할 만하다. 이렇게 훌륭하고 의미있는 '블랙 47'을 상영관 가서 본 국내 관객이 417명 뿐이란다. 어이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