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지 않은 연탄불
젊은 날부터 인연이 닿은 교직 동료로 아주 절친한 사이가 있다. 내가 초등 재직 중 야간강좌 대학을 다시 다닐 적 대구 근교 도시에서 만났다. 늦은 밤 수업이 끝나면 밀양으로 복귀하는 교통편이 끝나 대학 앞에서 방을 정해 토막잠을 자고 새벽 열차로 밀양으로 돌아가는 생활이었다. 그 무렵 군복무를 마치고 영문과 4학년으로 취업을 준비하던 이로 고향이 밀양이기도 했다.
당시 우리가 다닌 대학은 사립이지만 전국에서 명성이 나 인지도가 높았다. 그곳 출신으로 고급관료나 기업 임직원이 수두룩했다. 장차관이나 국회의원들도 다수였다. 친구는 언론고시라는 방송국이나 신문사에 도전 입사 문턱에서 좌잘했다. 부친이 세상을 일찍 떠 가족 생계를 책임져야 할 형편이라 취업준비 기간을 길게 잡을 수 없어 마산 사학재단 영어교사로 사회인이 되었다.
나는 초등에서 중등으로 전직하여 잠시 고성 바닷가로 나갔다가 다시 밀양으로 복귀했다. 친구의 순수함은 비리와 부패를 참지 못해 교육민주화운동에 발을 디디게 했다. 이후 교직원노동조합 활동까지 이어졌다. 친구가 몸담은 사학 재단에선 전교조 가입 교사는 눈엣가시였다. 조합원 탈퇴를 강요하는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자 끝내 교단에서 내쫓긴 아픔을 맞게 되었다.
그때가 신혼 초 아기가 있었고 초등 교사인 친구 아내는 시집 식구들에게 남편 해직 사실조차 숨기고 지냈다. 그럼에도 어른 생활비는 매달 꼬박꼬박 보내드려야 했다. 친구는 전교조 조합 사무실로 나가거나 현장 방문을 통해 거리 투사가 되었다. 서울에서 해직교사 복직 투쟁이 있으면 먼 길도 마다 않고 달려가 선봉에서 함성을 지르다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기 일쑤였다고 했다.
우여 곡절 끝에 5년 세월이 흘러 복직이 되긴 되었다. 사학 소속에서 공립학교 특채 형식이었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밀양의 인근 중학교였다. 이후 친구는 모교 고등학교로 옮겨 진학지도에 최선을 다했다. 나도 창원으로 전입해 여고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친구는 마산으로 옮겨와 고3 학년부장을 역임하면서 대입 지도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열정을 다해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친구는 학구열도 있어 그 사이 일반대학원 석사를 거쳐 박사과정을 수료해 놓기도 했다. 방학 중 계절학기로 진로상담 전문교사 자격도 취득했다. 남들은 승진을 위해 분주히 뛸 때 자기 계발과 몸담은 학교 고3들의 대학 진학에만 몰입했다. 늦은 밤은 물론 주말도 잊고 근무지 학교에 살다시피 했다. 당시 서적상이 관행적으로 뿌려대던 부교재 채택료에 그을린 수모를 겪기도 했다.
출중한 풍채와 언변임에도 승진 대열에도 끼지 못하고 평생 평교사로 머문 친구다. 가는 곳마다 고3 학년부장을 맡아 임무를 다하고 역량을 발휘 교장 교감이나 학부모들로부터 신임이 두텁다. 학생들을 무섭게 몰아쳐 공부시켰다. 친구는 워낙 솔선수범이라 늦은 밤 학교에서 퇴근할 때면 여러 교실과 복도에 열린 창문까지 손수 다 닫고 퇴근해 어디서나 전설 같은 선생으로 남았다.
친구는 마산과 진해를 거쳐 작년까지 창원 시내 고3 학년부장을 맡아 교단의 불꽃을 태웠다. 친구는 진로지도와 진학정보 수집과 지도전략에도 탁월했다. 대학교육협의회에서 현장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도교육청 진학전문위원단을 이끌기도 했다. 방학이면 교원대학으로 올라가 교사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왔다. 일선학교에서도 학생이나 학부모 대상 강의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이제 정년을 1년 반 남겨둔 친구다. 올봄엔 학년부장에서 비켜 있게 되었단다. 그럼에도 어제 진학에 대한 열정을 식지 않아 나를 끌다시피 대동해 진주로 갔다. 남강변 ㄷ호텔에서 경상대학이 주최한 중등교육기관 연계 대입정책 세미나에 참석했다. 서울에서 내려온 입시 관련 권위자들이 발제자였다. 나는 친구와 함께 3층 대연회장을 가득 메운 한 청중이 되어 진지하게 경청했다. 19.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