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만리. 7월 18일 목요일 여행 20일 차.
''오매?! 옆구리 살 삐져나온거 보소!'' 여행중 개념 없이 하도 잘 먹어댔더니 몸매가 두리뭉실하다. 돌아가 살 뺄 일이 숙제다.
어제 밤은 아예 에어컨 바람 구멍을 피해서 얼굴을 거꾸로하여 발쪽에 두고 잤다. 칼칼했던 목이 한결 낫다. 거울에 비춘 얼굴이 검게 그을렸다. 준비했던 썬블럭도 이제 거의 떨어져서 손가락으로 파내어서 바르는 형편이다.
조금은 무료한 새벽시간. 심심풀이 주역 운수를 짚어본다. 마침 방 열쇠가 눈에 띤다. 객실 번호1808호. 아래에 양수(陽數) 한 개와 위로 음수(陰數)가 셋이다. 진하련(震下連)이니 아래에서 움직이는 괘요. 지뢰복(地雷復)이니 기본으로 돌아오는 괘다. 이제는 여행의 막바지, 심기를 가다듬고 원기 회복하여 움직임에 초심을 지키면서 좋은 마무리가 되길 기대한다. 오늘만 지나고 나면 귀국 길 아니던가. 흉(凶)은 피하고 길(吉)을 취하자.
하늘에 구름이 짙어 시원한 아침이다. 섭씨 31도. 바람까지 일어 어제 체감온도 49도의 더위가 상상이 안된다. 급기야 비까지 내려주어 날리는 먼지가 없어지니 숨쉬기 마저 편안하다. 이어지는 소소한 행운에 행복하다.
비를 피해 라호르박물관을 먼저 가기로 했다. 비록 큰 규모는 아닐지나 붉은 벽돌의 고졸(古拙)한 외관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가장 우선하여 찾아간 '고행하는 부처상'은 여타 전시품들의 빛을 잃게한다. 고뇌의 표정은 물론이려니와 단식으로 인해 드러난 갈비뼈와 핏줄까지, 세상의 모든 짐을 홀로 진 듯한 부처님의 모습에 절로 경배심이 인다. 교과서에서나 보았던 실물 부처님을 친견함은 특별한 경험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간다라양식의 성물들로 채워진 이 곳, 잠깐 스쳐 지나는 나그네에게 너무도 아쉬운 시간이요 공간이다.
파키스탄을 여행하다보니 인도에 비하여 전반적으로 민도가 높다고 여겨진다. 예전에 세차례에 걸쳐 인도의 중부과 남부 그리고 북부를 여행한 적이 있다. 당시 느낌으로는 도농(都農)을 막론하고 혼잡스러운 인도였다. 그에 비해 파키스탄은 비록 역사적 유적지 등 볼거리에서는 좀 밀리지만 이방인을 대하는 태도나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 거리의 질서 등에서 상대적으로 정돈된 느낌을 준다. 특히 운전자들이 함부로 울려대던 크락션 소리를 여기에서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억측일 수도 있겠지만 인도 사회는 다신교인 힌두교가 주를 이루고 있어 지나치게 복잡하고 파키스탄은 유일신 알라를 신앙하는 관계로 상대적으로 정돈된 분위기로 느껴지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박물관을 뒤로하고서 찾은 곳은 '라호르 요새'와 '바드샤히 모스크'. 한 지역에 두 곳이 함께 있어서 찾아가기가 편하다. 비는 이미 그쳤다. 다시 드러난 태양이 대지를 달구는 데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미 우산의 용도는 양산이 되었다. 강력한 섭외력을 발휘한 복만이의 능력에 힘입어 차량이 라호르 요새의 내부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주차장에서 부터 적어도 1km는 넘을 저 길을 걸었다면 땡빛 아래 거의 죽음이었을 것이다.
영어로 듣는 해설사의 말을 내 실력으로는 거의 알아듣기 힘들다. '쳇gpt'에 물으니 당장 알려준다. 참 좋은 세상이다.
이 지역의 랜드마크 격인 '라호르 요새'와 '바히샤드 모스크'는 모두 무굴 제국 시대(16~19세기)의 소산인데 파키스탄의 역사와 건축적 유산을 대표하는 중요한 유적지란다. 하지만 세차례의 인도 여행 시 이미 무굴제국 시대의 유수한 유적을 탐방한 적이 있는 나에게는 다소 초라하게 보인다. 델리의 '레드포트'와 아그라의 '타지마할', 그리고 '아그라 포트' 등등, 규모에서나 미적 완성도에서나 많이 부족해 보였음은 나만의 생각일까?
파키스탄과 인도 국경 사이의 국기 하강식이 참관 인원을 제한한다는 소식이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이벤트다.여기 '와가'와 인도의 '아타리'를 가르는 국경선 검문소에서 매일 오후 6시에 이루어지는 소문난 행사다. 서둘러 가기로 했다. 점심은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로 해결했다. 에어컨이 빵빵하다. 천장이 높아서 좋다. 식사 후 일단 호텔에 들러 조금 쉬었다가 세시 반에 출발하기로한다.
룸메가 탈이 났다. 햄버거 점심에 손도 대지 못한다. 자연에서는 별로 힘을 쓰지 못하다가도 도시에서 만큼은 능력을 120% 발휘하던그였다. 그러다가 그만 오바가 되었던지 탈이 나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행 막바지란 것이다. 내일 밤이면 귀국 길에 오르리니 하루만 더 잘 버텨며 즐기기를 기대할 뿐이다. 자신의 능력에서 8할만 쓰고 2할은 남겨둬야한다는 경구를 다시 새긴다. 숙소에 돌아가거든 마지막 아껴둔 라면을 끓여줘야겠다.
다른 여행 벗님의 지원을 받아 라면 대신 인스탄트 마죽(麻粥) 묽게 끓였다. 적당히 식혀 건낸 음식을 맛나게 먹어주는 룸메가 고맙다. 저녁에 참관하게 될 국기 하강식에 차질 없이 함께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와가국경까지는 24km 한시간 거리. 미리 신청을 하면 차량이 안까지 들어갈 수 있단다. 물론 비용이 든다.
복만이가 응원구호를 연습시킨다. ''파키스탄''ㅡ''진다바드(영원하라).'' . ''지배지배(비바비바)''ㅡ''파키스탄.'' 어느새 파키스탄 편이 되어있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군인들의 태도가 경직되었다. 검색 통과 시 무표정에 인사에도 응하지 않는다. 듣자하니 얼마 전에 이곳 국경에서 테러가 있었단다. 당연하겠다.
너무 서둘렀나 싶다. 도로에 차량이 적어서 막힘 없이 왔다. 행사 시간이 두시간도 더 남았다. 참 덥다. 복만이는 이 정도면 복받은 거라지만 익숙치 않은 나게는 고역이다. 저편 인도측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스피커 소리에 맞추어 소리 높여 응원인데 이쪽은 우리 밖에 없다. 근무 중인 군인들만이 우릴 맞아줄 뿐이다. 왠지 조금 밀리는 느낌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일정한 시간이 되자 들어오기 시작한 파키의 국민들이 좌석을 메우는데는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어 시작된 응원. 외다리를 지팡이에 의지한 리더가 나와 가득 찬 관중들의 호응을 유도해낸다. 터질 듯 한 스피커소리. 규모에 있어서는 인도에 조금 밀리는 듯 하지만 기세만큼은 하늘을 찌를 듯 하다.
국경 수비대 국기 하강식 요원들과 기념 촬영은 멋진 추억이 되겠다. 2m 정도의 키를 가진 젊고 잘생긴 군인들이 기꺼이 모델이 되어준다. 그 인기가 여느 연예인 못지않다. 군복 차림에 모자의 깃털 장식이 인상적이다. 저편 인도 측도 마찬가지. 서로 체구와 인물로 우위를 점하려는 듯 경쟁이 대단하다. 룸메는 기운이 좀 돌아왔는지 이리저리 다니며 촬영에 여념이 없다. 다행이다.
외교부 명의의 발신으로파키스탄 일부지역 여행경보 3단계(출국권고) 발령 경고가 들어온다. 긴요한 용무가 아닌 경우 여행을 취소를 바란단다. 그래봐야 내일이면 집에 간다.
국기 하강식이 시작되었다. 단아한 체구를 가진 두명의 여군이 보무도 당당하게 첫번째 절차를 연다. 여기서 여자를 앞세운 것은 뜻 밖이다. 여행 중 여자들이 전면에 나서서 뭘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이어 벌어지는 각종 퍼포먼스. 정교한 행진과 과장된 발차기 등등 이십 여 분의 절차를 마친 뒤 소리 높은 군가와 함께 자국의 국기를 내린다. 기울어진 태양에 깃대의 그림자가 길다. 모두들 터져라 고함치고 박수치고, 함께 하는 사이에 애국심과 자부심이 고조되는 특별한 경험이 된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 이제까지의 지나온 길이 아련하다. 이렇게 20일 째 여행길이 저물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