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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방[6317]古方4자성어61~70
서예명제(61)晴耕雨讀
晴:갤 청 耕:밭갈 경 雨:비 우 讀:읽을 독
화창한 날에는 논밭을 갈고
비가 오는 날에는 집에서 책을 읽음
부지런히 일하며 여가를 헛되이 보내지 않고
공부함을 이르는 말.
논밭에 나가 농사를 짓고, 비 오는 날에는 집에서
책을 읽는다는 뜻이다.
부지런히 일하면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음을 비유한다.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사회재교육에 열심히 참여하는
‘공부하는 직장인’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가 급격히 노령화와 정보화, 고도화, 다변화됨에 따라
사회재교육의 필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하지만 그 요구는 거세지만 사회재교육의 인프라는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세계 10대 원격대학에 이름을 올린
한국방송통신대학교(방송대)가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을 안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공부를
포기할 수도 없으니
청경우독을 하는 수밖에 없다.
서예명제(62)川流不息
川(내 천) 流(흐를 류) 不(아니 불) 息(쉴 식)
쉬지 않고 흐르는 냇물처럼 끊임없이 자신을 닦아라.
川流不息하고 淵澄取映이라.(천류불식하고 연징취영이라.)
냇물은 흘러 쉬지 않고, 못의 물이 맑으면 비추어 볼 수 있다.
淵(못 연) 澄(맑을 징) 取(취할 취) 映(비칠 영)
그러나 군자(君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은 인품과 외모만이 아닙니다.
고대 중국의 지식인들은 군자(君子)가 되기 위해서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품성과 학문을 쉬지 않고 끊임없이 닦는 노력이
필수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쉬지 않고 흐르는 냇물처럼
끊임없이 자신을 닦아, 맑은 연못에 온갖 사물이 비추는 것처럼
세상 모든 일의 아름답고 더럽고 옳고 그른 것을
명명백백하게 밝혀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川流不息(천류불식)' 즉 '냇물은 흘러 쉬지 않는다'는 말과 관련한
공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공자가 흐르는 시냇물을 보며
'逝者如斯夫(서자여사부)이니 不舍晝夜(불사주야)로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가는 세월이 냇물이 흐르는 것과 같구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흐르니.'라는 뜻입니다. 공자는 인생도 시냇물처럼 밤낮을 가리지 않고
흘러가므로, 더욱 부지런히 도(道)와 학문을 쌓아야 한다고
자신을 일깨운 것입니다. 『논어』 「자한」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군자(君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힘쓰고 자신을 경계하여 노력함을
쉬지 않아야 하며, 세상의 여론과 속세의 풍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
높고 밝게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군자는 길이 아니면 가지 않았고,
말이 아니면 듣지 않았으며, 뜻이 맞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출세를 위해 나아가고 물러나지 않았으며, 오직 옳고 밝은 것을
찾아 나아가고, 그르고 어두운 것을 보아 물러났습니다.
'淵澄取映(연징취영)' 즉 '못의 물이 밝으면 비추어 볼 수 있다'는 말은
군자의 이와 같은 면모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료출처-이윤숙 천자문역해에서 일부인용
인터넷 다음카페 (영일서단,해맞이마을)
서예명제(63) 天衣無縫(천의무봉)
天 하늘 천衣 옷 의無 없을 무縫 꿰맬 봉
풀이 : 선녀(仙女)의 옷에는 바느질한 자리가 없다는 뜻으로,
①성격(性格)이나 언동(言動) 등(等)이 매우 자연(自然)스러워
조금도 꾸민 데가 없음
②시나 문장(文章)이 기교(技巧)를 부린 흔적(痕跡ㆍ痕迹)이
없어 극(極)히 자연(自然)스러움을 이르는 말
유래 : 천상의 직녀가 인간계의 청년 곽한(郭翰)을 사랑하여
천제의 허락을 얻어 밤이면 밤마다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칠석(七夕)이 되자 직녀는 오지 않았다.
그러고는 4,5일이 지나서야 찾아왔다.
"어땠습니까? 견우님과의 상봉은 즐거우셨나요?"
곽한의 말에 직녀가 웃으면서 대답(對答)했다.
"천상은 여기와는 다릅니다. 천상에서는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는 것이 정교(情交)이며, 이 세상(世上)의 정교와는
다른 겁니다.
질투는 그만두십시오.""그렇지만 오랫동안 발길을 끊었지 않습니까?""
천상의 하룻밤은 이 세상(世上)의 5일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녀는 그날 밤, 그를 위해 천상의 요리를 가져왔는데,
모두 이 세상(世上)에는 없는 것뿐이었다. 또 그녀의 옷을 보니
어디에도 솔기라곤 눈에 띄지 않았다. 이상히 여겨 물어 보니,
그녀가 말했다. "천상의 옷은 원래 바늘이나 실로 바느질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비롯되어 어떤 작품(作品)이 기교 없이
훌륭하게 만들어졌을 때, 또 아름답고 깨끗하게 행동(行動)하는
사람을 '천의무봉'이라고 한다.
서예명제(64)朝名市利(조명시리)
朝: 아침 조정 조. 名: 이름, 이름날 명. 市: 저자 시. 利: 이로울 리)
명성은 조정에서 다투고 이익은 저자[市場]에서 다투라는 뜻으로,
무슨 일이든 적당한 장소에서 행하라는 말.
[유사] 적시적지(適時適地)
[출전] 戰國策(전국책)〈秦策〉
【내용】 진(秦)나라 혜문왕(惠文王) 때(B.C. 317)의 일이다.
중신 사마조(司馬錯)는 어전에서 '촉(蜀)의 오랑캐를 정벌하면 국토도 넓어지고
백성들의 재물도 쌓일 것이므로, 이야말로 일거양득(一擧兩得)'이라며 촉으로의
출병을 주장했다. 그러나 종횡가(縱橫家) 출신의 재상 장의(張儀)는 그와는 달리
혜문왕에게 이렇게 진언했다.
"진나라는 우선 위(魏) 초(楚) 두 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고, 한(韓)나라의
삼천(三川) 지방으로 출병한 후 천하의 종실인 주(周)나라의 외곽을 위협하면,
주나라는 스스로 구정(九鼎:천자(天子)를 상징하는 보물)을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반드시 그 보물을 내놓을 것이옵니다. 그때 천자를 끼고 천하에 호령하면 누가
감히 복종하지 않겠나이까? 이것이 패업이라는 것이옵니다.
그까짓 변경의 촉을 정벌해 봤자 군사와 백성을 피폐(疲弊)케 할 뿐
무슨 명리(名利)가 있겠나이까?
신(臣)이 듣기로는 '명성은 조정에서 다투고 이익은 저자에서 다툰다[朝名市利]'고
하옵니다. 지금 삼천 지방은 천하의 저자이옵고 주나라 황실(皇室)은 천하의
조정이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이것을 다투려 하지 않고 하찮은 오랑캐의
촉을 다투려 하시옵니다. 혹, 패업을 멀리하시려는 것은 아니옵나이까?"
策03秦一045-02 司馬錯與張儀爭論於秦惠王前. 司馬錯欲伐蜀,
張儀曰: “不如伐韓.” 王曰: “請聞其說.” 對曰: “親魏善楚, 下兵三川, 塞轘轅、
緱氏之口, 當屯留之道, 魏絶南陽, 楚臨南鄭, 秦攻新城、宜陽, 以臨二周之郊,
誅周主之罪, 侵楚、魏之地. 周自知不救, 九鼎寶器必出. 據九鼎, 按圖籍,
挾天子以令天下, 天下莫敢不聽. 此王業也.
策03秦一045-03 今夫蜀、西辟之國, 而戎狄之長也, 弊兵勞衆, 不足以成名;
得其地不足以爲利. 臣聞 ‘爭名者於朝, 爭利者於市.’ 今三川、周室天下之市朝也,
而王不爭焉, 顧爭於戎狄, 去王業遠矣.”
그러나 혜문왕은 사마조의 진언에 따라
촉의 오랑캐를 정벌하고 국토를 넓히는 데 주력했다
서예명제(65)小屈大伸(소굴대신)
(小: 작을 소. 屈: 굽을 굴. 大: 큰 대. 伸: 펼 신)
조금 굽혀 크게 일어난다는 뜻으로, 잠깐의 억울함과 불만을 참으면
나중에 크게 될 수 있음을 이르는 말.
[내용] 이 성어는 삼국지(三國志) 卷42 극정(郤正)전에 보인다.
극정(郤正)은 삼국 시대 촉나라 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촉나라 조정에서 중심을 잡고 일을 하였으나, 촉한이 망한 뒤
유선(劉禪)을 수행하여 낙양(洛陽)으로 가서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
뒷날 진(晉)나라에서 파서태수(巴西太守)를 지냈다.
극정은 이전 시대의 학자들을 본받아 문장을 빌려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는 《석기(釋譏)》를 남겼다. 그 가운데 일부는 다음과 같다.
“......때문에 도리에 통달한 인물(達人)은 도를 연구하여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미세한 진리를 탐구하며, 천체 운행시 나타나는 운명의 징조를 관찰하여 인간 세상의 흥성하고 쇠함을 고찰하며, 변설가(辯者)는 유세하러 달려가고 지혜로운 자(智者)는 시기에 순응하며, 책모가(謀夫)는 계략을 추인하고 용감한 무사(武士)는 위험을 떨치며, 구름이 합치고 안개가 모이고 바람이 거세고 번개가 번쩍이면, 시기를 관찰하여 일의 마땅함을 파악할 수 있고,
처세의 자본을 취하여, 작은 몸을 굽혀 큰 것을 펴고, 공적인 것을 보존하고
사사로운 일을 홀시하며, 1척을 굽혀 8척을 펼 수 있고, 최후에는 빛을 날려
발휘하는 것입니다. ......”
是以達人研道,探頤索微,觀天運之符表,考人事之盛衰,辯者馳說,
智者應機,謀夫演略,武士奮威,雲合霧集,風激電飛,量時揆宜,
用取世資,小屈大申,存公忽私,雖尺枉而尋直,終揚光以發輝也。
三國志/卷42 杜周杜許孟來尹李譙郤傳
[출처]긴하루블로그작성자몽촌
서예명제(66)靑山不老(청산불로)
[靑 푸를 청] [山 뫼 산] [不 아니 불] [老 늙을
푸른산은 늙지 않는다. 세월은 계속 흘러간다
청산불로(靑山不老)의 유래(由來) : 삼국지(三國志)
익주목(益州牧) 유장(劉璋)의 수하에는 법정(法正),
장송(張松), 맹달(孟達)등의 신하들이 있었다.
유장(劉璋)은 유언(劉焉)의 아들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익주목(益州牧)이 되었지만 워낙 무능해 신하들에게 조차
신임을 얻지 못했다
유장(劉璋)은 장송(張松)을 조조(曹操)에게 사신으로 보내어
자신과 자신들의 지역을 잘 돌봐달라고 간청하라고 했다.
장송(張松)은 학식이 뛰어나고 언변이 좋았기 때문에 사신으로
간것이지만 조조(曹操) 앞에서 조롱과 무시만 당하고 돌아왔다.
이에 장송(張松)은 유비(劉備)를 찾아가 자신과 몇몇 사람이
유비(劉備)를 맞이하겠으니 익주(益州)를 차지하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유비(劉備)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청산은 늙지 않고 녹수는 멈추지 않으니 훗날 성사되면
후히 보답하겠습니다
청산불로 녹수장존 타일사성 필당후보
(靑山不老 綠水長存 他曰事成 必當厚報)"
멀지 않은날 유장(劉璋)은 유비(劉備)를 청해 장로(張魯)를 공격하게
하고는 유비(劉備)를 돕지 않자 유비(劉備)가 다음해 돌아가서
익주(益州)를 점령한다.
여기서 유래된 말이 청산불로(靑山不老)다
서예명제(67)先公後私(선공후사)
[자해(字解)] 먼저 선(先)/ 공변될 공(公)/ 뒤 후(後)/ 사사로울 사(私)
[의미(意味)] 공(公)을 위해 사사(私事)로운 일은 뒤로 미룬다는 말.
성종(成宗)때 경차관으로 제주도(濟州道)에 가있던 최부(崔溥)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消息)을 듣고 돌아오다 표류(漂流)하였다.
중국(中國)땅을 거쳐 한양(漢陽)에 돌아온 것은 반년(半年) 후였다.
임금의 하명(下命)을 받들어 표류기(漂流記)를 써 바치고 낙향(落鄕)하여
친상의 복을 입었던 것이다. 선충후효(先忠後孝)의 소신(所信) 있는
선택(選擇)이었지만, 고식적(姑息的)인 선비들은 먼저 낙향(落鄕)해서
상(喪)을 치러야 했었다고 비난(非難)하고 있다.
영조(英祖)가 위독(危篤)하자 평창에 사는 명의(名醫) 나두삼(羅斗三)이
소환(召還)을 받고, 상경(上京)하는데, 아버지가 위독(危篤)하다는
전갈(傳喝)을 받는다.
임금이 죽으면 다시 모시지만, 아버지가 죽으면 다시 모실 수 없다하여
돌아갈 것을 권(勸)했지만, 아버지가 죽으면 한 식구(食口)만이 울지만,
임금이 죽으면 만 백성(百姓)이 운다 하고, 상경(上京) 길을 더듬다
도중(途中)에 아버지의 부음(訃音)을 듣는다.
이 나두삼(羅斗三)의 선충후효(先忠後孝) 역시 도학(道學)을 모르는
중인의 소치라고 후세(後世)의 지탄(指彈)을 받고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 문무(文武) 중신들의 대부분(大部分)이 임금 곁을
떠났는데 그들 나름으로 내세운 명분(名分)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상(喪)이나 제사(祭祀) 핑계였다. 선효후충(先孝後忠)은 이 같이
인간(人間)을 비겁(卑怯)하게 하는
구실로도 악용(惡用)되었던 것이다.
[출처] 전한준의 고사성어
서예명제(68)得失在我(득실재아)
(得: 얻을 득. 失: 잃을 실. 在: 있을 재. 我: 나 아)
얻고 잃음은 내가 하기 나름이라는 뜻으로,
내가 하는 일에 자신을 갖고서 남의 평판에 휩쓸리지 말라는 의미.
[출전]《연암집 제3권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자서(自序)》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자서(自序)에 나오는 말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글이란 뜻을 그려내는 데 그칠 따름이다. 글제를 앞에 놓고 붓을 쥐고서
갑자기 옛말을 생각하거나, 억지로 경서(經書)의 뜻을 찾아내어 일부러
근엄한 척하고 글자마다 정중하게 하는 사람은, 비유하자면 화공(畫工)을
불러서 초상을 그리게 할 적에 용모를 가다듬고 그 앞에 나서는 것과 같다.
시선을 움직이지 않고 옷은 주름살 하나 없이 펴서 평상시의 태도를 잃어버린다면,
아무리 훌륭한 화공이라도 그 참 모습을 그려내기 어려울 것이다.
글을 짓는 사람도 어찌 이와 다를 것이 있겠는가.
말이란 거창할 필요가 없으며, 도(道)는 털끝만한 차이로도 나뉘는 법이니,
말로써 도를 표현할 수 있다면 부서진 기와나 벽돌인들 어찌 버리겠는가.
그러므로 도올(檮杌)은 사악한 짐승이지만 초(楚) 나라의 국사(國史)는
그 이름을 취하였고, 몽둥이로 사람을 때려죽이고 몰래 매장하는 것은
극악한 도적이지만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는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으니, 글을 짓는 사람은 오직 그 참을 그릴 따름이다.
이로써 보자면 글이 잘되고 못되고는 내게 달려 있고 비방과 칭찬은
남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得失在我。毁譽在人), 비유하자면 귀가 울리고
코를 고는 것과 같다.
자기만이 홀로 아는 사람은 남이 몰라줄까 봐 항상 근심하고,
자기가 깨닫지 못한 사람은 남이 먼저 깨닫는 것을 싫어하나니,
그러므로 이 책을 보는 사람이 부서진 기와나 벽돌도 버리지 않는다면,
화공의 선염법(渲染法)으로 극악한 도적의 돌출한 귀밑털을 그려낼 수
있을 것이요, 남의 귀 울리는 소리를 들으려 말고
나의 코 고는 소리를 깨닫는다면 거의 작자의 뜻에 가까울 것이다.
서예명제(69) 點石成金(점석성금)
[요약] (點: 점 점. 石: 돌 석. 成: 이룰 성. 金: 쇠 금)
돌에 손을 대어 술법(術法)으로 금을 만들다 라는 뜻으로,
남의 글을 조금 손질하여 훌륭한 글이 되게 함을 비유한 말.
[동어] 점석성철(點石成鐵)
[출전] 유향(劉向)의 열선전(列仙傳)(1)
【내용】진(晉)나라 초, 남창(南昌)에 허손(許遜)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매우 정직하고 배우기를 좋아했으며,
이름 있는 도사들과 즐겨 내왕하였다.
그는 젊은 시절 재능이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조정에 천거되어 정양(旌陽)의 현령이 되었다.
재직 초기, 그는, 많은 백성들이 세금을 내지 못하다가 수년 동안
그 빚이 불어나서 끝내 낼 수 없게 되는 것을 보았다.
이 점에 대하여 허손은 무척 동정하였다.
그는 자신이 과거 도사들에게 배운 술법을 이용하여
돌을 금으로 바꾸어, 백성들이 내지 못한 세금을 충당하려 하였다
(點石化金, 以足逋賦).
후에 그는 관리들의 이권 다툼에 대하여 염증을 느껴,
관직을 버리고 동쪽으로 유람을 떠나 버렸다고 한다.
고방서예명제(70)一鳴驚人(일명경인)
一: 한 일 鳴: 울 명 驚: 놀랄 경 人: 사람 인
평상시에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다가 갑자기 사람을 놀라게 할 만한
업적을 내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일비충천(一飛沖天·한 번 날면 하늘
높이 난다)과 함께 쓰인다.
“이 새는 날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한 번 날았다 하면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울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한 번 울었다 하면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
(此鳥不飛則已 一飛沖天 不鳴則已 一鳴驚人).”
사기 ‘골계열전(滑稽列傳)’에 나오는 이 말은 익살과 해학의 달인
순우곤(淳于곤)이 제나라의 위왕(威王)과 나눈 대화의 일부다.
위왕은 수수께끼를 좋아하고 음탕하게 놀며 밤새도록 술 마시기를 즐겼다.
그래서 문무백관들은 문란해졌고 제후들이 동시에 침략해 나라의 존망이
아침저녁으로 절박한 지경에 놓였다. 그런데도 주위 신하들 가운데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순우곤이 수수께끼를 좋아하는 왕에게 “나라 안에 큰 새가 있는데,
대궐 뜰에 멈추어 있으면서 3년이 지나도록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있습니다. 왕께서는 이것이 어떤 새인지 아십니까”라고 묻자, 왕이 위와
같이 대답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은연중에 과시한 것이다.
순우곤이 이렇게 위왕을 치켜세워 위왕은 비로소 군대를 정돈하고
민심을 추슬러 잃었던 영토를 되찾고 무려 36년 동안 맹위를 떨쳤다.
위왕과 관련된 이야기는 또 있다. 위왕 8년에 초나라가 쳐들어오자,
왕은 순우곤에게 황금 100근, 사두마차 10대를 예물로 가지고 조나라로
가서 구원병을 청하게 하니 순우곤은 겨우 이런 정도의 예물로는 어림없다고 했다.
그러자 위왕이 다시 황금 1000근, 백벽(白璧) 10쌍, 사두마차
100대로 예물을 늘려 구원병을 청하게 하자, 조나라는 정예병 10만 명과
전차 1000대를 내주었다. 성과에 만족한 위왕이 주연을 베풀어 자축했다.
시국에 어울리지 않는 위왕의 행태에 못마땅했던 순우곤은
“술이 극도에 이르면 어지럽고 즐거움이 극도에 이르면 슬퍼진다
(酒極則亂 樂極則悲)”는 말로 그를 일깨워 주었다.
인용자료-김원중 건양대 교수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