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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
딤전 2:1-7
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3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7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딤전 2:1-7 / [기도에 대한 교훈] 이제 나는 그대에게 당부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함께 하도록 열심히 기도하고 간구해 주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는 것을 믿고 감사를 드리시오. 2) 왕과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시오. 그래야 우리가 주님을 깊이 생각하며 경건하고 평화롭게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3)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일이며 우리 구세주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4)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5-6) 하나님은 저편에 계시고 사람들은 모두 이편에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 중간에 서서 온 인류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내주심으로써 양편을 연결시켜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적절한 시기에 이 세상에 나타내신 진리입니다. 7) 나는 이 진리를 이방인에게 가르치고 또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역자요, 선교자로서 선택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거짓 없는 진실입니다.
바울은 위정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중보 기도를 명령하고 그 이유를 밝힙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복음의 진리를 깨달아 구원에 이르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증거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1-2a) 바울은 에베소교회가 당면해 있던 교회의 분열과 무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첫 번째 권면으로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높은 지위를 가진 위정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위해서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말한 네 단어는 유사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 강조점이 다릅니다. 간구는 간절히 필요로 하는 것의 성취를 위한 탄원입니다. 기도는 일반적인 모든 종류의 기도를 말하며 모든 형태의 경건한 아룀을 뜻합니다. 도고는 ‘간구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기도를 의미합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지난 은혜에 대한 감사기도를 말합니다. 이 모든 기도들을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하라고 명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있는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을 위하여 차별 없이 기도할 것을 권면합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의 동기(2b-7) 바울은 기도의 이유를 밝힙니다. 먼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입니다(2).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에 외면적, 내면적으로 근심이 없는 평안한 신앙생활의 환경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기도를 선하게 여기시고 기쁘게 받으시기 때문입니다(3).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4). 그래서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를 기쁘게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인종과 계층, 신분의 차별 없이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모두를 위해 중보기도해야 합니다. 이어서 바울은 구원의 복음, 진리를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유일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대속물로 주신 것입니다(5). 바울은 이것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밝히며, 인종과 빈부와 남녀의 차별 없는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에 복음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것을 증거하는 사역에 동참하기 위해 사도로 세움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확신 속에 자신의 사명을 이야기합니다(7).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것을 신뢰하며 바울처럼 우리의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적용: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의 계획을 세워 봅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 나름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기도하고 하나님께 다가간다고 루터가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기도하지 않고 타인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도의 대상으로 인정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실 능력자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 설 교 >
신앙과 애국
디모데전서 2:1 / 이원근 목사
기독교 신앙을 호국 신앙이라고 비약해서 표현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신앙과 애국은 마치 톱니의 두 바퀴가 맞물려 있는 것과도 같다 하겠습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이와 같은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데 구약 성경 가운데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신약 성경에서도 우리는 나라 사랑에 관련된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성도의 기본적인 의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애국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나라를 팔아먹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1.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애국하는 신앙의 첫 번째 요소는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일입니다. 기도란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팔을 움직이는 것이며,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 낼 수 있는 강력한 힘이기 때문에 기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사무엘은 한 민족의 영적 지도자로서 나라를 위해 기도하기를 쉬는 것은 죄에 해당한다고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이 죄를 범치 않으려고 부지런히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인식이 필요합니다. 무슨 물건이든지 용도에 맞게 써야만 진가를 발휘하는 법이듯이 기도도 마찬가지인데, 우리가 나라를 위해서 끈질기게 기도할 때 참으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1. 국가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2: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위한 기도의 대상에 반드시 지도자들을 포함시켜야 합니다. 비록 그들이 불의한 방법으로 권좌에 올랐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불경건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국민의 한 사람뿐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도록 특명을 받은 하나님의 일꾼들이기 때문에 분노라든지 미움 대신에 기도의 분량을 증가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역사를 만들고 이끌어 가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도자들을 위해 힘써 기도하면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그들을 통해 성취됨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을 원수로 여기는 것은 성도가 취할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2. 제도적 개혁을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제도적으로 잘못된 부분들이 반드시 있게 마련인데, 후진국일수록 이러한 현상들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때문에 이를 개혁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이 시도되게 마련인데, 우리 성도들이 가장 먼저 힘써야 하는 것은 기도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스코틀랜드의 개혁자 “낙스”의 기도가 독재자에게 가장 큰 부담을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지혜나 방법은 기도의 위력을 따르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라와 민복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되 국가의 지도자들을 위해서 제도의 개혁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 나라를 복음화 시키는 신앙이 꼭 있어야 합니다.
애국하는 신앙의 두 번째 요소는 나라를 복음화하는 일입니다. 나라가 제아무리 든든한 정치적 기반 위에 세워져 있고 이상적인 목표를 향해 달음질한다 해도 그리스도가 기초와 중심이 되시지 않는다면 미래가 없고 소망이 없기 때문에 정치 발전이나 경제 발전, 문화 창달보다도 더욱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나라의 복음화라 하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 28:18-21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나라의 복음화는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에 대한 인식이 바탕이 되어야만 강력하게 추진될 수 있습니다. 어떤 일에 대한 요구는 그 필요성과 함께 근원 자가 중시되는 법인데, 복음 전도가 주님의 명령이 아니라 단지 국민적 정서의 함양을 위한 하나님의 정책으로 인식된다면 성도들이 헌신적으로 이 일에 앞장선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사명의 인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세계의 누구로부터도 이 사역을 위임받은 일이 없습니다. 다만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이 일을 명하셨으므로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강력하게 복음 전도 사역을 추진해야만 합니다.
2. 효과적인 전도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사도행전 16: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고 했습니다.
같은 일도 계획이나 방법에 따라서 진행속도라든지 결과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듯이, 전도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무조건 성경을 들고 돌아다니면서 외친다고 영혼들을 얻게 되고 나라의 복음화를 앞당기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효과적인 계획이 세워져야 합니다. 같은 시간, 같은 노력을 들여서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주께 구해야 하며, 이와 같은 복음 전도의 계획이 수립될 때 비로소 나라의 복음화가 가능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라 사랑의 최선의 길은 복음을 전해서 나라와 민족이 복음화 하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3, 나라를 바르게 인도하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애국하는 신앙의 마지막 한 가지 요소는 나라를 바르게 이끄는 것입니다. 아무리 나라가 융성하고 국민들이 윤택한 생활을 하더라도 바로 가고 있지 않다면 문제가 매우 심각하기 때문에 바르게 이끄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런 노력이 따라야 전쟁의 억제라든지 경제의 균형 분배 등이 가능하게 됩니다.
1. 구조적 모순의 지적해야 합니다.
마 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고 했습니다.
술이 취해 낭떠러지인 줄 모르고 계속 걸어가는 사람을 발견하고서도 입을 다물고 지켜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나라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의 경우도 이와 같아서 눈이 밝아 이를 볼 수 있는 성도들이 지적해 줘야만 합니다. 침묵하면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설사 이로 인해 불이익이 생긴다 할지라도 지적하는 것은 성도에게 주어진 의무요 책임입니다.
2. 올바른 대안의 제시해야 합니다.
모순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습니다. 대안이 제시되어야 적어도 우리는 이 일을 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성경 속에는 모순을 해결하는 정답이 들어 있어서 이것을 활용하는 사람들은 결코 실패하는 일이 없게 됩니다. 대안의 제시가 없는 질타는 알력과 반목만 부추기게 될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라를 바르게 세우는 것은 나부터 변화되어 바르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조적으로 잘못된 것은 지적하고 고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르게 대안을 제시하고 바른 길을 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결 론
성도에게는 나라 사랑의 의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에 쓰신 사람들 가운데 자기 민족을 버리거나 나라를 배반한 사람을 우리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애국 애족하는 사람들이었는데, 그것은 잘못된 제도에 대한 타협이나 협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바탕을 둔 차원 높은 사랑이었으며, 우리도 이러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딤전 2:1-7 / 오세원 목사
고린도전서6:19-20절 말씀, “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전서10:31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삶의 목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아는 것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모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영광 돌리는 삶을 산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를 통해서 반드시 이루시고자하는 큰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많은 일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4절 말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즉 많은 생명이 주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사실은 이를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도 바로 이를 위해 오셨습니다. 요한복음3:16-17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면 오늘 말씀에 보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라고 했는데 그 ‘모든 사람’ 속에는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포함합니다.
왜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독생자까지 주시면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셨는가?
왜 하나님은 예수님을 대속물로 주시기까지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가?
첫째, 인간에게 주신 영혼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귀중하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5:23절 말씀,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몸은 흙으로 만드셨지만 영은 하나님 속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중요합니다. 몸은 어차피 망가집니다. 소멸됩니다. 그러나 영은 소멸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영이 성결한 모습으로 보전되기를 원하십니다. 이유는 영혼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4:12절 말씀,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결국 하나님은 말씀을 주신 것도 우리의 육신을 살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기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이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16-18절 말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조지 휘필드는 “주여 나에게 영혼을 주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내 영혼을 가져가시옵소서”
육신은 썩어지는 것입니다.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영은 그대로 존재합니다. 다만 거룩한 영은 하나님께로 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영은 지옥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까지 주셨던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4절 말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래서 얘수님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른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간다고 했습니다. 한 영혼을 그만큼 소중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영혼을 찾으면 잔치를 연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도 한 영혼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영혼을 건져내어야 합니다.
넷째, 왜 하나님은 우리들까지도 전도하기를 원하시는가? 영혼구원이 가장 시급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4:35절 말씀, “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세상 끝날이 가까이 다가오기 때문이진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개인적 종말은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28:18-20절 말씀,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다섯째, 잃어버릴 영혼이 받을 위험 때문입니다.
마태복음10:28절 말씀, “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를 겁낼 것 없습니다. 육신보다도 영혼이 더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래도 전도하지 않으시렵니까? 그래도 복음을 전하지 않으시렵니까? 직무유기입니다. 결단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전도는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영혼을 구원해야 합니다.
어떻게 건져낼까? 전도할 때, 복음을 전할 때 어떤 자세로 해야 하는가?
우선은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바울은 불신자라 할지라도 계층에 상관하지 말고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고 기도하며 도고까지 하라고 했습니다. 아니 감사의 기도도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바울은 여러 사람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기도의 종류를 네 가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비슷한 내용인데 강조하기 위해서 나열한 것인지, 아니면 분명히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진 내용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간구한다’는 것은 긴박한 상황에서 어떤 특별한 성취를 위한 탄원을 의미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모든 경건한 아룀을 뜻하며,
‘도고’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간구하는 ‘중보기도’를 의미합니다.
‘감사를 하라’는 것은 과거의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드리라는 의미입니다.
앞에서 여러 사람에 대해 기도할 것을 부탁한 내용을 생각하면 여러 사람들의 삶의 유형이 다 다릅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공통적인 기도제목도 있겠지만 상황에 따라 간구의 기도가 필요한 사람, 일반적으로 아뢰어야 할 사람, 중보기도를 해야 할 사람, 이미 받은 은혜를 감사해야 할 사람들이 있을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여러 가지 유형의 기도를 드려야 하는가? 우리가 먼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요, 조용하고 평안한 생활을 위해서입니다. 그렇지요. 정부가 안정되어야 신앙생활도 평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나라가 불안하면 신앙생활도 평안히 하기 어렵습니다. 가정이 불안정하면 신앙생활도 힘듭니다. 그래서 바울은 정치 지도자들을 비롯하여 정부가 안정되도록 기도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라는 궁극적인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7절 시작이 “이를 위하여”인데 이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면 앞의 5,6절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예수님이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 사이의 중보자로 오셔서 대속물로 주셨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로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순교할 때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생명을 걸었던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자라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증인의 사명’입니다. 증인은 경험한 자, 목격한 자가 본 그대로를 전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힘이 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로 확실한 증언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까? 죽어도 다시 살아날 부활을 확실하게 믿습니까? 그렇다면 증인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누가복음19:10절에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1순위가 영혼을 구원하는 일임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도 바울처럼 증언자로서의 삶, 복음전하는 자로서의 삶, 즉 영혼을 구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혼을 구원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는 날마다 기적을 일으키는 주인공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에게는 날마다 일어나는 세 가지 기적이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 기적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말씀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
두 번째 기적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전도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
세 번째 기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현실입니다. 이는 전도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한 얘기는 밤을 새워서까지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에 관해서 만큼은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걸까요? 어떻게 그 놀랍고도 감격적인 복음을 혼자만 알고 있을 수 있을까요? 자랑하고 강권하여 데려오는 역사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생명을 구원하는 것이 최우선이어야 합니다.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도 인정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 중에 새생명보다 귀한 것이 있겠습니까?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하러 오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모든 곳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그 은혜로운 사실을 알리는 것이 우리의 최대 임무입니다.
중국인 기독교 지도자인 “리”가 미국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나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중국에는 이미 유교가 있는데 기독교를 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었입니까?”라고 묻는 학생에게 그는 기억할 만한 답변을 했습니다. “거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공자는 선생이었으나 그리스도는 구세주였다는 것입니다. 중국은 선생을 필요로 하기보다는 구세주를 필요로 합니다.
둘째로는, 공자는 죽었으나 그리스도는 사셨다는 것입니다. 중국은 부활하신 구세주를 필요로 합니다. 셋째로, 공자는 어느 날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그리스도를 심판자로 만나기 전에 구세주로 만나야 합니다."
리가 잘 요약한 이 내용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광범위한 목적을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전 세계의 죄인을 찾으십니다.
그러면 이렇게 중요한 복음을 언제 전할 것인가?
오늘이 중요합니다. 내일이면 늦습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며, 기회는 달아나기 쉽고 실험은 정확하지 못하고 판단은 곤란하다”고 히포크라테스가 말했습니다.
‘태양이 비취고 있는 동안에 건초를 만들어라’고 세르반데스 돈키호테가 말했습니다.
‘기회는 모든 자들에게 찾아오지만 그것을 잘 활용하는 자는 소수다’라고 리톤이 말했습니다.
‘고기 보고 기뻐하지만 말고 가서 그물을 던져라’고 하는 한국 속담은 기회를 활용하라는 뜻입니다.
‘소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은 기회를 놓치고 난 후에 헛수고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2). 히브리3:13절에 보면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라” 오늘을 소중하게 여길 것을 권면한 말씀입니다.
영국의 R.A.토리 목사가 영국의 브라이톤이라는 곳에서 전도집회를 가졌을 때의 일입니다. 집회를 돕던 일군 한 사람이 식당에서 저녁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음식을 주문받고 봉사해 주는 웨이터를 대할 때에 어쩐지 그 사람에게 전도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 같은게 무얼..." 하는 생각과 장소 환경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그냥 마음에 미루어 둔 채로 식사를 다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오다가 생각하니 그래도 한마디 전도를 해야 되지 않겠는가고 느껴져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식당 주인이 나와서 “혹시 무슨 일로 이처럼 기다립니까?” 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써-브해 준 웨이터를 기다린다고 하자 침통한 표정을 한 주인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손님, 이미 늦었습니다. 그 웨이터는 손님에게 봉사를 한 후에 이층으로 올라가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때늦은 전도는 전도일 수가 없습니다. 때늦은 전도란 말은 사실상 무의미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받은 모든 것을 총동원해서 감당해야 할 사명은 복음전파입니다. 예수님이 그 일 위해서 오셨고 그 일위해 죽으셨고 그 일위해 살아나셨고 승천하셨고 다시 재림하십니다. 예수님의 뒤를 이어 제자가 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바로 그 일입니다. 일할 수 없는 밤이 오기 전에 일할 수 있는 낮일 때, 때가 늦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합니다. 후회 없는 믿음의 삶이 되려면 말입니다.
지금도 복음의 소식을 듣기를 소망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전하지 못함으로 듣지 못하여 믿지 않는다면 이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책임입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회사를 경영하는 사장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었습니다. 꼭 자기는 주일날이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인데 전도는 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고 예수를 믿으란 말을 한마디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회사에 같이 일하는 사람이 많이 있어도 다른 이야기는 늘 하지만 한 번도 교회에 가자고 전도를 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은 설교를 듣고 나서 전도를 못한 자기의 잘못을 깨달아서 꼭 전도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자기 회사 사무실에 나가서 사장 자리에 앉았습니다. 조금 후 문을 열고 제일 먼저 들어온 사람은 자기 비서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 비서에게 한 번도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비서가 교회에 다니고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비서가 놀란 표정으로 왜 그런 것을 묻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지 하면서 사장은 다시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비서는 "제가 사장님을 15년 동안 모셨는데 저한테는 한 번도 전도를 안 하셔서 제 생각에 저 같은 존재는 예수를 믿을 수 없나보다 생각 했습니다. 오늘 이렇게 저한테 전도를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도 다음 주일부터는 교회에 다니겠습니다."라고 말하더랍니다.
성도 여러분들도 초청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몇 번에 걸쳐서 초청을 했는데도 거절을 당한 사람 때문에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을 향하여 욕하지 마십시오. 평소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분들에게 전하십시오. 오히려 그분이 오실지도 모릅니다. 앞의 사장 비서처럼 말입니다. 준비된 자는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전할 용기가 없습니까? 자신이 없습니까?
여러분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전도는 말재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고린도전서 2:4-5절 말씀,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데살로니가전서1:5절 말씀,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그러므로 성령님이 동행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전도자는 성령받지 않고는 필드로 나가면 안됩니다. 나가봐야 전도를 할 수 없거니와 전도를 해도 열매를 맺기 어렵습니다. 반드시 성령님을 의지하고 성령님을 앞세우고 나아가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4절 말씀,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하나님은 영혼을 구원하기를 원하셔서 성령을 주십니다.
사도행전1:8절 말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래서 베드로가 마가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은 후에 나가서 설교했을 때 하루에 3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이 내 안에 오신 이유는 나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기 전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지 않고는 증인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성령을 받은 후에는 모두가 복음의 증인으로서 사명을 감당하는데 순교까지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아 하는 전도는 세상의 어떤 지혜도 당해 내지를 못합니다. 당당하게 자신있게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6:10절 말씀, “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사실 내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그것을 믿게 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도 성령님이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2: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하기 때문에 간절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반드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영혼을 위해, 전도를 위해 간절한 기도를 하는 것만이 주님에게 쓰임 받는 비밀이며 능력과 담대함을 얻는 비결입니다. 사도행전 4:31절 말씀, “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그래서 우리는 전도잔치를 앞두고 릴레이 기도를 시작한 것입니다. 전도할 때 까지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혼 구원을 위해 헌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이여 나를 도와 주십시오”
“내가 전하는 말에 능력이 나타나게 하옵소서”
“나에게도 한 영혼을 붙여 주옵소서”
“나도 바울처럼 증언자가 되겠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디모데전서 2:1-7 / 배 혁 목사
제가 샌안토니오에 와서 우리교회의 담임목사로 사역한지도 다음 주일이면 만으로 9년이 됩니다. 샌안토니오에 온지 얼마 안되어 교회협의회에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그 때에 이 지역에서 먼저 오셔서 목회하시는 목사님과 은퇴하신 목사님을 만나뵙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한 은퇴 목사님이 저에게 오셔서 환영의 인사와 함께, 권고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배 목사님, 기도 열심히 하세요.” 그 은퇴 목사님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 모르는 바가 아닌데, 특별히 그 은퇴 목사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마음에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힘쓰고 있습니다. 새벽기도회 때에 일부러 일찍 나와서 기도의 분량을 채우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요즘 저에게 기분이 좋은 일은, 우리 교회에 기도하고자 하시는 분이 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새벽기도회에 좀더 많은 분이 모이셔서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수요일에 중보기도회 시간도 고정적으로 기도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기도는 신앙인에게 있어서 영적인 젖줄과도 같습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은혜와 능력을 공급받는 통로인 것입니다.
저는 저를 비롯해서 여기계신 모든 분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는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더욱 밀접한 영적인 관계를 가지시고,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사도바울도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하면서 첫번째로 권면하는 것이 기도에 관한 것입니다.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할 것이 참 많았을 텐데, 첫째로 기도를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있어서 아주 특별한 존재입니다. 바울이 제2차 선교를 떠나서 루스드라에 도착했을 때에 디모데를 만납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바울을 따라 함께 복음 전도자가 됩니다. 그리고 바울은 에베소에서 목회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써서, 디모데와 교회의 신앙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권면하기를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간구와 기도, 도고, 감사 등이 말할 때에 그것은 기도와 관련된 것입니다. 간구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데에세이스’로 ‘긴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하는 탄원’을 말하고, 기도는 ‘프로슈카스’로 일반적으로 말하는 하나님을 향해서 아뢰는 것’, 도고는 ‘엔튜크세이스’라고 해서 ‘타인의 유익을 위한 간구’를 말하고, 감사는 ‘유카리스티아스’라고 해서 하나님 은총에 대한 감사기도를 말합니다.
바울이 기도를 구체적으로 4가지로 구별해서 말하고 있지만, 한 마디로 말하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특권입니다. 요한복음 16:23절에, 예수님은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무엇이나 하나님께 구하면 그것을 주시리라고 했으니,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이 가지는 커다란 특권이고 능력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기도의 능력을 주시면서, 이 기도를 통하여서 어떠한 일들을 하기를 원하셨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1. 먼저, 기도는 모든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뜻에 근거해서 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기도할 때에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고 말합니다. 기도는 개인적인 소원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기도에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관심과 사랑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을 위하여 라는 말씀이 이곳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반복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하신 일이 나와 있습니다.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소원을 가지고 있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고, 진리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품어야 할 모든 사람을 위한 관심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보실 때에 안타까우셨던 것은, 사람들이 구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서 사망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리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주는 거짓에 속아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사람들을 향한 마음이 하나님께만 있던 것이 아닙니다. 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하신일이 나옵미다.
6절에 보면,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속물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구원하기 위해서 그 값을 치르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서도 죄를 지은 사람들이 그 죄에 해당하는 값을 치른 후에 그 죄로 부터 놓임을 받습니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보석금으로 풀려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회봉사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것도 안되는 사람들은 감옥에서 그 형량만큼 살다가 나오면 그 죄로부터 놓임을 받습니다.
그런데 죄의 값은 돈이나 선한 일들로 치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직접 죄값을 치르심으로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워하시는 마음을 아시고, 자신도 모든 사람을 위하여서 대속물로 죽으셔서, 모든 사람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몫을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위한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 예수님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자신의 사역이 모든 사람들을 위한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7절에,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전도자와 사도로 세움받은 것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게 하시고자, 자신을 전도자와 사도로 세우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사역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바울의 선교 사역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 사역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있는 회당에 들어가서도 복음을 전하고, 우상이 들끓는 이방 도시에 들어가서도 그곳의 사람들을 품고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2. 그리고 이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도 권면하기를, 기도를 하는데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그 기도는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마음은 하나님께서 품으신 마음이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품으신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품었던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도바울은 디모데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고 진리에 이르기를 위해서 기도로 사역을 감당하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 기도가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기도가 아니라, 나의 개인적인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위한 기도로 편협해지기 쉽습니다. 나 개인이 잘되고, 내 가족이 잘되고, 내가 속한 공동체가 잘 살고 잘 되어지기를 원하는 것에 그치기 쉽습니다.
하지만 기도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진리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도가 기초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도하는 성도들은 늘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C.S.Lewis 라는 기독교인이 1941년에 출판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The Screwtape Letters)’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스크루테이프는 책속에 나오는 악마(The devil)입니다. 그리고 책속에 나오는 편지는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자신의 조카인 신참 악마, 웜우드 (Wormwood)가 편지입니다. 그 편지에서 스크류테이프는 어떻게 사람들을 타락하게 해서 예수님께서 멀어지게 할 것인가에 대한 노하우를 조카 웜우드에게 들려줍니다.
스크류테이프의 편지중에 4번째 편지에는 기도에 관한 것입니다. 악마 스크루테이프는 조카 악마 웜우드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대적자(예수)에게로 갈 때마다 우리는 피배하는 것이지만, 그 패배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단다. 간단한 것은 그들의 시선을 그에게로부터 (예수에게로부터) 자기들 자신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그들이(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에 지속적으로 관심하게 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들에서 이루어졌다는 감정을 가지게 해라’
기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을 두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악마는 기도하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초점하게 해서 바른 기도를 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하나님의 믿는 이들은 믿음생활을 하면서 그 마음이 더 넓어져서 모든 사람들을 품도록 해야 합니다. 내 생각과 마음이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고 편협하게 되는 것에 대해서 경계해야 합니다.
3. 또한 기도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경건과 단정함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면서, 그 예로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고 권면합니다.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기도하라고 하면서, 특별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때에 아시아, 유럽 등의 지역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황제는 각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서, 각 지역마다 왕을 세워서 황제의 명령대로 다스리도록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러한 왕들과 고관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특별히 지시하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평안하게 살기 위해 권력자들에게 아부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당시에 로마제국은 각 나라의 종교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로마황제를 그들의 왕으로 인정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로마제국에 요주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황제가 자신들의 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의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로마제국은 박해를 하곤했습니다. 그러기 교회에서 왕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이 편지를 쓰기 전에 사도 바울도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감옥에 갇혔던 적이 있습니다. 빌립보감옥에도 갇혔고, 로마 감옥에도 갇혀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의 왕들은 기독교를 방해하는 세력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은 그들이 기도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교회에 호의적이지 않은 왕과 높은 권세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기독교인이 나라의 왕과 권세자들에게 대적하고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기독교인들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경건과 단정의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경건은 헬라어로 ‘유세베이아’로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통해서 드러나는 존경받을 만한 삶, 단정은 ‘셈노테티’라고 해서 고상함 품성과 행동을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서 기도하는 성도들이 경건과 단정의 모습을 유지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불의하고 폭력적으로 행한다고 해서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다가 경건과 단정함을 잃어 버리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닙니다. 도리어 경건과 단정을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샌안토니오에 왔을 때에, 은퇴 목사님께서 해 주신 “배목사님, 기도 열심히 하세요”라는 권고의 말씀이 진부하지 않고, 저에게 도전이 되었던 것은 그 말씀을 하시는 목사님의 모습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시는 경건함과 단정함이 그분에게 있어서 였던 것 같습니다.
기도한다고 하면서 그 사람의 삶이 경건하지 못하고 세속적이고, 단정하지 못하고 불량하다면 바른 기도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늘 우리의 삶을 통해 경건과 단정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 힘쓰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셔서 십자가에서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도 또한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고자, 이방인의 사도가 되고 전파자가 되어서 복음을 전파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디모데에게 권고합니다.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과 같이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도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도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성도들의 사역 중에서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듯이, 사도바울이 전파자로 세상에 복음을 전했듯이, 우리 성도들에게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사역이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제대로 기도하지 못하도록,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과 내 유익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유혹하지만, 이럴 때 일수록 모든 사람들을 더욱 품으면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또한 우리를 통하여서 모든 사람들, 심지어 나를 박해하는 자들을 향해서 경건과 단정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간절히 원합니다. 오늘도 모든 사람을 위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지속적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라며, 예수님과 같이,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드리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신자들의 기도
디모데전서 2:1~7 / 이수영 목사
사도 바울은 그가 떠난 후 에베소 교회에 거짓교사들이 들어와 그가 가르친 교훈과 다른 교훈을 가르침으로써 교회를 혼란스럽게 할 것을 염려하여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게 하였습니다(딤전1:3).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고 선한 싸움을 싸울 것을 명했습니다(딤전1:18-19). 바울은 디모데에게 책무를 맡길 뿐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감당하며 완수할 것인지에 대한 권면도 주었습니다. 그 첫 권면은 바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디모데 혼자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고 온 교회가 함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본문 1-2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1절에서 사도 바울은 기도할 것을 권하며 곧바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 합니다. 에베소의 거짓교사들은 기독교를 엘리뜨 그룹을 위한 종교라고 치켜 올리는 경향을 보였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엘리뜨 그룹에만 관심을 기울였을 것임에 반해 바울은 그런 사고를 배격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사람을 위한 죽음이었다면 그리스도인들의 기도 또한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도할 것을 권하며 기도와 관련된 네 가지 단어를 사용합니다.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입니다. 간구와 감사는 기도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도고는 특별히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를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되 어린 아이가 아버지에 대하여 갖는 것 같은 신뢰로 매달리며 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2절에서는 특별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합니다. 여기서 “임금들”은 로마의 황제들을 포함해서 모든 왕들을 가리킵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란 황제의 신하들을 비롯한 모든 통치자들, 고위관리들, 정치지도자들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 글을 쓸 당시 로마의 황제가 역사상 가장 포악한 기독교박해자 네로였다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네로 황제같은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라는 것은 다소 놀라운 일일지 모르지만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경건”은 올바른 믿음에 근거한 삶을 종합적으로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사랑과 형제이웃사랑으로 요약되고 대변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 구원의 소식을 아무 장애 없이 전하기 위해 유리한 전제를 말합니다. 우리 또한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누구를 구원하실 지는 하나님의 주권과 뜻에 맡기더라도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과 전도사역이 원만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라도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며 간섭하여주시기를 비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권고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본문 3-4절을 봅니다: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진리를 아는” 것은 구원소식의 신빙성을 통찰하는 것이며 그것을 몸소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말은 참된 진리의 인식은 오직 소수의 사람에게만 있다고 하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명백히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말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구원의 문은 유대인에게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자유인이게만 아니라 노예에게도, 남자들에게만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열려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구원의 진리인 복음을 알고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않는 사람까지 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25:31-33) 하셨습니다. 그리고 왼편에 있는 자들은 영벌에, 오른편에 있는 자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5:46).
모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은 이들만 구원을 받는 것이지만 누가 참으로 구원에로 택하심을 받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인지는 하나님 외에 아무도 모릅니다. 그 때문에도 누가 구원을 얻을지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자유인이나 노예나,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인종과 국적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믿기만 하면, 그의 구원의 진리를 알고 복음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또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왜 그런 것인지, 그가 누구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답합니다. 본문 5-6절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는 본성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 가장 좋은 이해입니다. 그런데 그의 사명과 사역의 관점에서 말하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시라는 것이 그에 대한 핵심적인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보자란 무엇입니까? 소통이 끊어졌거나 서로 멀어졌거나 서로 남남같이 되었거나 아니면 서로 전쟁 중에 있는 양쪽을 연결시켜 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중보자는 양쪽 모두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으며 선한 의지로 양쪽에 대해 상대방의 대변인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십니다. 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필요합니까?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소통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원수관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사람이 하나님께 죄를 짓고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끊어진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위해서 중보자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양쪽을 대변할 중보자이어야 합니다. 그런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동시에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이가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런 중보자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연결역할만 하신 중보자가 아니십니다. 그는 그보다 더 크고 깊은 의미의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에게 순종하면 영원히 복된 삶을 누리게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첫 언약인데 죄를 짓고 그 언약을 어긴 사람은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영원히 복된 삶을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끝내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죄 지은 사람들이지만 살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납할 수 없는 당신의 의도 또한 살리셔야 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며 동시의 하나님의 의를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선택이 당신의 아들을 사람으로 세상에 내려 보내시고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그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한 그의 대속의 죽음을 믿기만 하면 구원과 영생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 언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것입니다. 그것을 히9:15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굳이 명시한 이유는 거짓교사들이 예수님께서 참 사람이심을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참 사람이시라는 것은 그가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시는 데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저 사람이기만 하다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되려면 또한 참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사람이십니다. 그래서 그만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하신 중보자가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며 존재하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십니다. 다른 신은 없으며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지 않은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의 구원은 오직 그의 주권 아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과의 화해를 위하여 세우신 유일한 중보자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른 중보자는 없습니다. 다른 화해와 구원의 길도 없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가 누구를 부르시고 믿음을 주셔서 구원하시든 그것은 오직 은혜일 뿐입니다. 그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누리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은혜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라고, 특히 이방인들에게 나아가 전하라고 부르심과 세우심을 받은 사도입니다. 거짓교사들이 뭐라 해도 그것은 사실이라고 사도 바울은 힘주어 말하기를 잊지 않습니다. 본문 7절입니다: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사도 바울이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한 것을 교만하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딤후1:11에서 쓰기를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한 것처럼 그는 단지 하나님께서 자기를 그렇게 세우셨다고 고백한 것뿐입니다. 이것은 에베소 교회의 거짓교사들이 사도 바울의 소명과 사명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것에 대비해 그곳 신자들이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참된 복음과 바른 신앙의 교훈을 지킬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도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고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힘써야 할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하되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또 믿든 믿지 않든 이 세상 통치자들이나 관리들을 위해서도 특별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사회의 평화와 안정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신앙과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복음의 전파와 확산이 방해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더 많은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증오와 잔인한 학살과 보복행위의 반복이 그치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신자들의 기도는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전 세계 모든 국가, 모든 민족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뜻을 그 누구에게서든지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도록 날마다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중보자 예수 Mediator Jesus
딤전 2:1-7 / 최정인 목사
도입 Introduction: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But seek first his kingdom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given to you as well” (마태복음 Matthew 6:33).
우리 주님은 갈릴리의 민중 가운데서 제자를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무엇을 가르치셨을까요? 우리 주님은 바로 하나님의 왕국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야기는 큰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는 바로 하나님의 왕국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왕국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 백성이 되었기에 하나님의 이야기는 우리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우리 이야기는 작은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우리 이야기가 하나님의 이야기의 한 작은 부분이 되었기에 우리 이야기는 작은 이야기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2000년 전에 갈릴리 민중 가운데서 택하신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왕국을 가르치셨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일까요? 그들은 매일의 음식과 의복을 걱정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 그들이 걱정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걱정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들에게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가리켜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먹이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마태복음 6:31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그들만의 이야기에 함몰된 제자들에게 우리 주님은 그런 염려는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께 맡기라 하십니다. 대신 그들이 먼저 하나님께 구할 것을 3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라는 큰 이야기로 초청하셨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하나님의 큰 이야기에 참여할 때, 우리의 일상의 염려는 필요 이상의 염려가 되지 않을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는 본문에는 하나님의 큰 이야기에 참여한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자신만 하나님의 이야기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디모데를 포함하여 이 서신을 읽는 모든 이에게 그 이야기에 참여하라고 촉구합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우리 구주 하나님과 중보자 예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드라마를 진행하심에 있어서 여러 배역의 배우를 초청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의 드라마에 초청을 받아 그 이야기의 흐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디모데전서 2:1-7 말씀으로 “중보자 예수”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눕니다.
1.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 “Requests, prayers, intercession and thanksgiving” (1-2).
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1 I urge, then, first of all, that requests, prayers, intercession and thanksgiving be made for everyone -
1절을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큰 이야기에 참여하는 첫 번째 방법은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로 올려드릴 대상은 “모든 사람”입니다. 우리의 기도로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에 포함되는 사람의 범위가 곧 우리의 범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우리와 가까운 사람이 먼저 포함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에 포함되는 사람이 오직 가까운 사람으로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간구, 기도, 도고, 감사는 기도의 여러 가지 종류입니다. 기도는 한 번으로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로 성도의 삶은 기도의 연속입니다. 간구가 기도로, 기도가 도고로, 도고가 감사로 이어집니다. 간구는 요청하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말씀드리는 기도입니다. 도고는 어느 사람을 위하여 대신 드리는 기도입니다. 감사는 간구와 기도와 도고에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다시 그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기도입니다.
이처럼 한 성도의 삶은 기도의 연속으로 이루어집니다. 기도하는 삶은 오늘을 삽니다. 과거에 매이지 않습니다. 미래에 머물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왕국을 위하여 나에게 맡겨진 일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하십니까? 얼마나 자주 하십니까? 우리의 기도에는 누가 포함됩니까? 아브라함이 그의 조카 롯과 그 가족을 위하여 도고의 기도를 드렸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우리도 이렇게 우리의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먼 사람까지 우리의 기도로 그 사람을 하나님께 올려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2 for kings and all those in authority, that we may live peaceful and quiet lives in all godliness and holiness.
이제 2절을 봅시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큰 이야기에 참여하는 두 번째 방법으로 권력을 가진 이들을 위한 기도를 제시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실제로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권한을 가집니다. 그들이 전쟁을 결정하면, 보통 사람은 자신이나 자신의 자녀를 전장에 보내야 합니다. 권력을 가진 이들이 어떠한 정책과 결정을 내리는가가 실제로 우리의 일상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칩니다. 그들이 잘 하고 못 하는 것이 우리에게 그대로 영향을 끼칩니다. 지금 전 세계의 유행병 사태로 사망자만 469만 명이 넘었고, 미국에서는 69만 명이 넘었습니다. 이러한 사태가 모든 사람의 책임이겠지만,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의 책임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그 정당이나 그 특정 대상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우리의 기도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좋아하고 싫어하고를 떠나서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네 가지로 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경건한 삶, 단정한 삶, 고요한 삶, 평안한 삶에 그들이 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나라 안팎의 정치에 관심을 쓰고, 참여하고,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큰 이야기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건하고, 단정하고, 고요하고, 평안하게 살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큰 이야기에 참여하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전염병, 기후 변화, 국제 정세, 경제, 여러 가지 법률의 제정 등, 우리와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는 수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열정을 기울여야 하는 하나님의 큰 이야기가 아니라, 소모적인 일에 우리의 삶이 휘둘리지 않도록, 우리는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이들을 위하여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2. “우리 구주 하나님” “God our Savior” (3-4).
3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만한 것이니
이제 3절을 봅시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우리가 이처럼 모든 사람과 권력을 가진 이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 기도, 도고, 감사하는 것이 선하고 받으실만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하나님이 “우리 구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디모데전서 1:1에서 이미 하나님을 “우리 구주”로 불렀습니다. 우리는 “구주”라는 칭호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성자 하나님의 칭호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같은 구주라는 칭호를 성부와 성자께 함께 사용하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바로 한 사람을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왕국을 이루시는 것임을 우리는 이 칭호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모든 사람, 특히 권력을 가진 이들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큰 이야기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제 4절을 봅시다. 사도 바울은 우리 구주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를 명확하게 서술합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또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소원, 하나님의 사명,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우리가 동참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드라마에 우리가 배역으로 부름을 받아, 우리에게 맡겨진 임무를 다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가 구원을 받아, 진리를 아는 것에 자라가는 것이 순서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의 두 번째 편지 마지막인 베드로후서 3:18에서 이렇게 그의 독자에게 호소합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은혜 없는 구원 없습니다. 은혜를 받아 구원을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날마다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성장은 매일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3:12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이처럼 우리의 구원도 이미 이루어졌으며, 지금 이루어지고 있으며, 앞으로 완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작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왕국 이야기, 하나님의 큰 이야기와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왕국도 이미 이루어졌고, 지금 이루어지고 있으며, 앞으로 완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큰 이야기와 우리의 작은 이야기는 그 규모 면에서는 무한히 다르지만, 그 성격 면에서는 같아야 합니다. 우리의 작은 이야기들이 무수히 모여서 하나님의 큰 이야기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달려가는 모습이 우리에게 보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100여 년이라는 장거리 경주를 오늘 하루, 이번 한 주를 달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 “The man Christ Jesus” (5-7).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이제 5절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구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외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죄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로 오신 하나님이 바로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시기에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십니다. 어떤 존재가 만일 50% 하나님 50% 사람이라면 반신반인입니다. 우리 주님은 100%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100% 사람이십니다. 만일 중보자 예수께서 하나님은 아니시고, 사람이기만 했다면 그분이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으로 국한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기만 하신 예수가 구원한 사람은 살인강도 바라바 한 사람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이시기에 무한하시고, 그리하여 그분이 주시는 은혜는 무한하며, 그분에게 믿음을 두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이제 6절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시 중보자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지 명확하게 선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그분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로 주신 것입니다. 아담 이후로 모든 사람은 죄인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 어떠한 사람도 자신의 생명과 삶을 다 드려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표준에 이르지 못합니다. 스스로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이 곧 교만인 것이 하나님 앞에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요한복음 16:8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절입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성령께서 오셔서 세상이 보던 죄를 하나님이 보시는 죄로 바꾸어 깨닫게 하시면,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10절입니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성령께서 우리의 선이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의이심을 깨닫게 하실 때, 우리는 우리의 의를 붙들지 않고,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11절입니다.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성령께서 우리에게 사탄이 심판받아 무저갱에 갇힌 것을 보여주시면 우리는 사탄을 따라가다가는 우리도 무저갱과 불 못에 빠질 것을 깨달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성령께서 죄, 의, 심판에 대하여 깨닫게 하심으로 세상 왕국 백성에서 하나님 왕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만의 이야기에 함몰되어 살다가 하나님의 큰 이야기에 초청을 받아 하나님의 드라마를 써나가는 배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를 나라로 만드시며 그들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씨를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민족은 히브리 왕국을 이루었고, 다윗은 메시아의 모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 다윗의 자손으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여인의 태중에 잉태하여 태어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증언,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큰 이야기를 저와 여러분 같은 거의 모든 이방인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7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위하여 그 큰 이야기를 전하도록 택하신 이가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파자, 사도, 스승으로 그 자신의 정체를 이해합니다. 바울은 이미 1:13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큰 이야기를 몰랐을 때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여 힘써 하나님을 거역하였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비방자, 박해자, 폭행자로 고백했습니다. 비방자, 박해자, 폭행자를 우리 주님은 부르셔서 전파자, 사도, 스승으로 만드셨습니다. 바울을 하나님의 큰 이야기에 작은 이야기로 참여하는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1:16에서 다시 이렇게 담대하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처럼 비방자, 박해자, 폭행자도 우리 주님은 오래 참으셔서 부르셨고, 오히려 그를 전파자, 사도, 스승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주어진 한 본입니다.
노년의 사도 바울은 지나간 삶을 돌아보며 자신이 전파자, 사도, 스승이 된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그가 전파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구원받은 사람들과 교회가 바로 그의 복음이 거짓말이 아니고 참말임을 입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진리 안에서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큰 이야기에 부름을 받아 자신의 작은 이야기를 써나갔습니다. 우리도 같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우리의 작은 이야기가 하나님의 큰 이야기의 하나가 되는 나날의 삶을 삽니다.
결론 Conclusion: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Even as I try to please everybody in every way. For I am not seeking my own good but the good of many, so that they may be saved” (고린도전서 1 Corinthians 10:33).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에서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은 지극히 단순한 문제에 대한 논란에 대한 답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먹고 마시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자칫하면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문제에 함몰되어 하루하루를 허비할 수 있습니다. 갈릴리의 민중 가운데서 제자를 택하여 하나님의 왕국과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신 우리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큰 이야기의 한 부분이 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제가 주보에 써드린 대로 내가 영향력을 끼치는 모든 사람과의 모든 일에서 모든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섬김입니다. 서비스업은 바로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나의 유익은 목적이 아니라 결과일 뿐입니다. 내가 유익을 얻어야 하는 이유는 그 서비스가 지속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결과적으로 의미 있는 만남을 이룰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길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보다 앞선 사람의 향기로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큰 이야기에 부름을 받았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로 드러나 그들이 구원을 받도록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반주해 주시는 동안, 이 한주도 이렇게 우리 주변의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여 하나님의 큰 이야기로 그들을 초청하는 우리의 작은 이야기를 써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합시다
딤전 2:1-2 / 강성찬 목사
나라를 위한 기도는 성도들의 가장 큰 애국이라 말들 합니다. "기도하는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존 낙스는 "기도하는 한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한 민족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나라도, 빈사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모세는 르비딤 들에서 아멜렉 군대를 만났을 때 젊은 군사들은 싸움터로 내 보내고 높은 산에 올라가 전쟁터를 내려다보며 손을 드니 이스라엘 군에게 아멜렉군이 패해 쫓겨갔습니다. 손이 아파 손을 내리니 반대로 아멜렉군에게 이스라엘 군이 쫓겼습니다. 이 모습을 본 아론과 훌은 돌을 취해 모세를 앉게 하고 좌우에서 손을 부축하여 해가 지도록 모세의 손이 내려 오지 않으니 이스라엘군이 대승리를 했습니다. 이는 전쟁의 승패는 군사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에게 있으며 기도하는 백성에게 있음을 보여주신 말씀입니다.
자유당 시절에 국무총리 서리를 지낸 이윤영 목사님이 계시는데 이런 말을 한 일이 있다 합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 땅 모양이 호랑이를 닮았다고도 하고 토끼를 닮았다고도 하고 버선, 새우, 심지어는 춤추는 기생을 닮았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모습은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제주도는 벗어 놓은 신발이요, 본도는 무릎 꿇고 두손을 높이 모으고 기도하는 사무엘의 모습입니다. 우리 민족은 기도해야 하는 민족이고 기도로 세계를 지배해야 할 사명을 타고난 민족입니다. 우리 민족은 무력으로 세계를 지배할 민족이 아니라 기도로 세계를 지배할 민족입니다."
오늘의 가장 큰 나라 사랑은 애국 애족의 기도입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딤전2:1)라고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간구’는 특별한 경우를 위한 애원입니다. ‘기도’는 일반적인 모든 기도이고, ‘도고’는 남을 위한 대신 기도이고, ‘감사’는 기도의 심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작정된 누구든지,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어떠한 사람이든지, 즉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지혜로운 자나 무식한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농부나 어부나 주인이나 종이나 차별이 없는 모두를 가리킵니다.
이렇게 교회가 받은 기도의 범위와 대상은 전 우주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예배 중에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큰 이유는 교회가 평안 중에 신앙생활을 하기 위함이며, 또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고, 더욱이 하나님의 구원운동에 필수적인 교회의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교회의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나라가 평온하지를 못하면 교회가 받은 영적 즐거움이나 선교사명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애국이라든가 애족, 애민, 애국사상, 애국정신 등의 말은 사실상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는 기독교의 산물입니다.
우리는 일제 식민 36년 동안 교회가 평온하지 못했던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박해와 시련 속에서 순교자를 내고, 신자 수가 프로테스탄트의 경우 70만에서 그 반으로 줄어들고 말았습니다. 또한 6.25사변으로 말미암아 동족상잔의 비극을 맞이하였을 때, 교회가 평온할 수 없었음을 경험하였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교회는 알게 모르게 압제를 받아 평온하지를 못했습니다.
주일마다 모여서 드리는 교회의 공기도가 있습니다. 삼일기도회, 금요기도회, 새벽기도회 그리고 여러 종류의 특별기도, 가정기도, 개인기도가 끊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백성이 있는 나라는 망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특별히 위정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 나라는 결국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이 주어지는 줄 믿습니다.
6.25를 맞으며 나라 위해 기도합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 하며 은혜를 사모 하고자 합니다.
정치가 바로 서도록 기도합시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란 사실상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모든 위정자 급에 있는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저들이 백성을 위하여 받은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13장 1절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고 하였습니다(딛 3:1).
베드로전서 2장 17절 하반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이 세상에서 악을 제지하고 선을 포장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세운 방백들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 2:14-15).
그래서 초대교회는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한 사실을 여러 기록들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저들은 여러 위정자들이 기독교를 박해할 때, 그 압제 아래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위정자를 위하여 기도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터툴리안(Tutrullianus)은 ‘그리스도교가 황제를 위하여 그의 장수와, 안정된 통치와, 안정된 가정과, 충신한 신하와, 의로운 백성과, 평화스러운 세계’를 위하여 기도했다고 하였습니다.
키프리안(Cyprian)은 통치자 데메트리아누스(Demetrianus)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우리 교회는 당신의 평안과 안전을 위해서 낮이나 밤이나 하나님께 제사(기도)를 드리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주후 311년에 황제 갈레리우스(Galerius)는 기독교도들에게 기도를 요구하고, 나라를 위해 기도한다면 은혜와 특권을 부여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타티아누스(Tatianus)는 ‘황제가 우리에게 공물을 바치라고 하는가? 그렇다면 기꺼이 바치자. 지배자는 우리에게 봉사할 것과 예속할 것을 요구하는가? 그렇다면 봉사와 예속을 인정하자. 그러나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경을 받아야만 되고, 참으로 인간이 숭상할 대상은 하나님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죄가 되지 않는한 이 세상 왕국에 속한 시민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된다고 한 사실입니다.
안디옥의 데오필루스(Theophilus)는‘내가 황제에게 주는 영광은 보다 큰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를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참다운 하나님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예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황제도 하나님께로부터 임명받은 자라는 것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황제에게 호의를 가지고 그를 따르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자는 황제에게 참다운 영광을 돌려야 한다.’라고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그의 황제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황제께 돌리는 참된 영광이라고 한 내용입니다.
순교자 저스틴(Justine)은 ‘우리들은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하고 있는데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무엇이든지 당신에게 봉사하겠소. 임금들과 지배자들을 승인하고 그들의 왕의 권력과 더불어 순수한 예지를 갖고 있는 자라는 것이 실증되도록 기도하리라고 하였다합니다.
교회는, 이 세상 왕국을 통치하는 권위를 가진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언제든지 교회가 맡은 중대한 의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심지어 교회는 교회를 박해하는 자들까지라도 위하여 기도함으로, 저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사랑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 정치는 혼돈의 상태입니다.
성경 유머 퀴즈 가운데 이런 퀴즈가 있습니다. 세상의 직업 가운 데 가장 오래된 직업이 무엇인가? 한 의사 선생님이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아무래도 의료업이 가장 오래된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까 아담이 잠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갈비뼈 하나를 꺼내서 하와를 만들었는데 그것 이 최초의 외과 수술이 아니겠느냐? 의료업이 제일 오래된 직업이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옆에 있던 건축업자가 나 는 건축업이 더 오래 되었다고 생각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창조의 행위 자체가 일종의 건축 행위가 아니겠느냐? 합니다. 옆에 있던 설계업자가 말하기를 그보다 설계사가 더 오래된 직업이라고 생 각하는데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기 전에 설계를 가지고 계셨으니까 설계사가 제일 오래되지 않았느냐? 합니다. 그러니까 그 옆에있는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답니다. 나는 정치가 가장 오래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창세기 1장 2절에 보면 땅이 혼돈하며 그랬는데 그 혼돈이 정치때문이라고 했답니다.
정치는 혼돈한 면을 풍자한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혼돈한 정치가 바른 질서를 잡아 가도록 기도 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의로운 나라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잠 14:34)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고 합니다.
아무리 자원이 풍성하고 기술이 발전하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울지라도 윤리나 도덕적으로 타락하면 피폐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제국이 기원 476 도덕적인 타락으로 황실이 무너지고 역사의 종말을 고했습니다. 제정 러시아가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 때문에 레닝의 공산주의 혁명으로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소아시아 7교회 중 "서머나교회"만 남아 있고, 다른 교회들은 모두가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 중에 주춧돌과 돌기둥만 남아있는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 계시록 2:18에 두아디라 교회에 대하여 책망한 것이 있는데 "이세벨"을 용납한 것과 "내 종들을 꾀여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한다"고 했습니다. 두아디라는 산업도시로서 계가 발달하였는데 계원들 간에 성소 안에서 혼음을 했다고 합니다. 두아디라는 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라가 망하는 길은 의가 없는 도덕적인 타락입니다.
딤후 3:1에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쾌락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한다."고 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도 윤리나 도덕적으로 말이 아닙니다. 효도가 사라지고 성윤리가 타락하고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신의도 도의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도덕적으로 건전한 사회와 국가가 장래가 있습니다. 애국은 돈 많이 버는 것만이 애국이 아닙니다. 도의적으로 건전하게 사는 국민이 애국하는 국민입니다.
■ 중국 춘추시대에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노(魯)나라의 한 마을에 가난한 여자가 하나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웃 제(齊)나라에서 노나라를 정복하려고 이 마을에도 쳐들어왔습니다. 그녀는 한 아기를 안고 한 아기는 손목을 잡은 채 이끌고 난리를 피하여 필사적으로 도망쳤습니다. 적은 점점 가까이 쫓아옵니다. 그러나 여자는 두 아이를 데리고 가느라 도저히 빨리 뛸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잡혔구나 싶었을 때, 여자는 부득불 한 아기를 버리기로 작정했습니다. 품에 안고 있던 아기를 얼른 내려놓고, 손목을 잡고 있던 아기만 데리고 뛰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차라리 손목잡고 있던 아기를 버리고 안고 있던 아기를 데리고 가야 빨리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적의 장군에게 붙들리고 말았습니다. 조금전에 아기를 버리는 그녀를 보았던 장군은 이상하다는듯이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품에 안고 있던 아기는 내려놓고 손목 잡고 있던 아기를 데리고 도망을 쳤느냐?" 여자는 조용히 설명했습니다. "내가 품에 안고 가던 아기는 내 아이요, 손목을 잡고 가던 아기는 내 형님의 아이입니다. 난 내 아이를 누구보다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내 아이를 돌보는 것은 사적인 사랑이고, 형님의 아이를 돌보는 것은 공적인 의입니다. 의를 버리고 사적인 사랑을 택하여 형님의 아이를 버리고 내 자식을 구원한다면 나는 좋겠지요. 허나 그렇게 한다면 우리 집안꼴은 어떻게 될 것이며 나아가 우리 나라 꼴은 또 무엇이 되겠습니까?" 제나라 장군은 크게 감동하여 "의를 아는 여자가 있는 도성은 쳐들어갈 수 없다. 의가 있는 나라는 공격하지 못하는 법이다"라며 철수를 했다고 합니다.(인터넷정보클럽)
의로운 나라가 되기 위하여 기도 합시다.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기를 기도 합시다
옵 1:21 구원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고 합니다.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는 말씀은 아주 짧지만 더할 수 없이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말입니다. 나라가 여호와께 속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나라를 다스리신다는 뜻입니다. 우주의 통치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나라들이 하나님의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모든 나라들 위에 하나님이 군림한다는 뜻입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오리토리오 메시아의 44번 '할렐루야'는 '찬송 중의 찬송' 또는 '하늘나라의 음악'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말합니다. '할렐루야'는 요한계시록의 말씀들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요한계시록 11장 15절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19장 6절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19장 16절의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이 세 말씀을 바탕으로 작곡되었습니다. 이 세 말씀들은 모두 오바댜서의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와 같은 맥락의 말씀들입니다.
헨델은 이 할렐루야를 작곡하고서 "내 앞에 천국이 나타난 것을 나는 보았다. 그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을 나는 보았다. 오, 주여! 주여!"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할렐루야'는 바로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주님이 모든 나라를 다스리신다, 이 사실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그 가사는 '할렐루야'가 29번 반복되고 '전능의 주가 다스리신다' '이 세상 나라들 우리 주 그리스도의 나라 되고 또 그가 다스리시리' '영원히 그가 다스리시리' '또 그가 길이 다스리시리'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할렐루야가 연주될 때는 청중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관례이고 예의로 알려 지기도 합니다. 1743년 3월, 런던에서 영국 황제 조지 2세가 임석한 가운데 '메시아'가 연주되었는데 '할렐루야' 이 코러스가 퍼질 때 너무나 장엄하여 조지 2세가 자기도 모르게 일어선 것 때문에 이런 관례가 생겼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나라들을 다스린다는 사실이 웅장한 멜로디와 함께 선포 될 때 우리는 정말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그저 일어나는 정도가 아니라 부동자세로 경의를 표해도 부족합니다.
조지 2세는 자기가 황제인데, 자기가 영국을 다스리는 사람인데 자기 앞에서 다른 존재가 이 세상 나라들을 다스린다고 할 때 화를 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영국을 다스리는 것은 나인데 이게 무슨 이야기야? 연주 당장 중지시켜!'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전 일제시대에 강연회를 할 때는 경찰관이 입회해 있다가 강연내용이 일본에 불리한 것이면 '중지!' 했다고 합니다. 일본의 천황에 불리하거나 모욕적인 내용이 나오면 어김없이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에수님 탄생시 헤롯 왕도 왕이 태어난다는 말을 듣고 2세 이하의 아이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 했습니다. 그러나 조지 2세는 감동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헨델의 '할렐루야' 가사 가운데 '할렐루야'라는 말이 전체 가사의 1/3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가 무슨 뜻입니까? 교회에 잘 알려진 유모어가 하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새 신자로부터 '교회에서는 할렐루야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할렐루야가 무슨 뜻입니까?' 하는 질문을 받았는데 그 뜻을 몰랐습니다. 얼른 둘러대기를 '아, 남원에는 광한루가 있고 진주에는 남강 촉석루가 있고 평양 대동강변에는 부벽루가 있지 않습니까? 할렐루는 천국의 생명수 강가에 있는 좋은 누각인데 거기에 야를 붙인 것입니다'라고 했다는 우스운 이야기 입니다.
할렐루야는 '여호와를 찬송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경배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할렐루야 소리가 넘치도록 해야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넘치도록 해야합니다. 인사할 때, 환영할 때, 설교를 들을 때, 마음속에 기쁨이 솟아날 때 '할렐루야!'하기도 합니다.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라고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자고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자고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자고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인하여 기뻐하자고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여호와께 속한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여호와께 속한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 가며 기도하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나라를 위하여 기도 합시다. 정치가 바로 서고 의로운 나라가 되고 여호와께 속하기 위하여 기도합시다.
나라를 위한 교회의 기도
딤전 2:1-4 / 석원태 목사
영감의 사도 바울은 그의 믿음의 아들된 디모데에게 교회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에 대한 여러 가지 목회교훈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중에 2장 초반부분은 교회가 공중예배시 행할 기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Ⅰ. 교회는 모든 사람, 곧 일반인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2장 1절에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간구’는 특별한 경우를 위한 애원입니다. ‘기도’는 일반적인 모든 기도이고, ‘도고’는 남을 위한 대신 기도이고, ‘감사’는 기도의 심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 합치면 공중예배시 교회가 하나님께 올릴 기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기도의 범위가 ‘모든 사람’이라고 한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을 보면 ‘모든 사람’이라는 말이 네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딤전 2:1, 2, 4, 6).
이 말은 사실상 우리 선교의 대헌장이고, 우리 기도의 전 범위와 내용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딤전 2:4). 중보자이신 예수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딤전 2:6).
그렇다면 여기 ‘모든 사람’이 만인구원설을 가리키는가? 아닙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의 주권적 언약 아래 예정되고 선택된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모든 시대’, ‘모든 지역’ 안에 구원받기로 작정된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한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에 예수에게 주어진 ‘모든 권세’는 19절의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자에게 해당됩니다. 누가복음 2장 10절에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에서 ‘온 백성’은 마태복음 1장 21절의 ‘자기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 예수의 ‘자기 백성’은 시간적으로 ‘모든 시대’에 해당되고, 지역적으로 ‘모든 지역’ 곧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입니다. 그리고 인종적으로 ‘모든 사람’ 곧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입니다(갈 3:28).
바로 예수께서 올린 그의 대제사장적 마지막 기도에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라고 한 사실입니다(요 17:9). 주님의 기도에는 ‘아버지의 것’이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것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것들을 위하여 기도한다고 하였습니다(요 17:6-11). 이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다시 예수께서는 온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7:20). 저들은 모두 아버지의 것이었습니다(선택). 그 아버지의 것을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는 다 예수에게로 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 사람들을 예수께서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 6:37-39).
그러므로 저 시온산에 이르는 상징적인 수인 14만 4천인 된 구원인을 가리켜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라고 하였습니다(계 7:9, 7:4, 14:1).
그렇다면 본문의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작정된 누구든지,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어떠한 사람이든지, 즉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지혜로운 자나 무식한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농부나 어부나 주인이나 종이나 차별이 없는 모두를 가리킵니다. 이렇게 교회가 받은 기도의 범위와 대상은 전 우주적이라는 사실입니다.
Ⅱ. 그 ‘모든자’ 중에 특별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분문 2장 2절에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란 사실상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모든 위정자 급에 있는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저들이 백성을 위하여 받은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13장 1절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고 하였습니다(딛 3:1). 베드로전서 2장 17절 하반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이 세상에서 악을 제지하고 선을 포장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세운 방백들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 2:14-15).
그래서 초대교회는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한 사실을 여러 기록들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저들은 여러 위정자들이 기독교를 박해할 때, 그 압제 아래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위정자를 위하여 기도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터툴리안(Tutrullianus)은 ‘그리스도교가 황제를 위하여 그의 장수와, 안정된 통치와, 안정된 가정과, 충신(忠信)한 신하와, 의로운 백성과, 평화스러운 세계’를 위하여 기도했다고 하였습니다. 키프리안(Cyprian)은 통치자 데메트리아누스(Demetrianus)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우리 교회는 당신의 평안과 안전을 위해서 낮이나 밤이나 하나님께 제사(기도)를 드리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주후 311년에 황제 갈레리우스(Galerius)는 기독교도들에게 기도를 요구하고, 나라를 위해 기도한다면 은혜와 특권을 부여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타티아누스(Tatianus)는 ‘황제가 우리에게 공물을 바치라고 하는가? 그렇다면 기꺼이 바치자. 지배자는 우리에게 봉사할 것과 예속할 것을 요구하는가? 그렇다면 봉사와 예속을 인정하자. 그러나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경을 받아야만 되고, 참으로 인간이 숭상할 대상은 하나님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회는 죄가 되지 않는한 이 세상 왕국에 속한 시민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된다고 한 것입니다.
안디옥의 데오필루스(Theophilus)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황제에게 주는 영광은 보다 큰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를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참다운 하나님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예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황제도 하나님께로부터 임명받은 자라는 것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황제에게 호의를 가지고 그를 따르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자는 황제에게 참다운 영광을 돌려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그의 황제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황제께 돌리는 참된 영광이라고 한 것입니다.
순교자 저스틴(Justine)은 ‘우리들은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하고 있는데,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무엇이든지 당신에게 봉사하겠소. 임금들과 지배자들을 승인하고, 그들의 왕의 권력과 더불어 순수한 예지를 갖고 있는 자라는 것이 실증되도록 기도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황제를 위한 기도 가운데 가장 뛰어난 기록을, 로마의 클레멘트가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 편지 가운데서 볼 수 있습니다. 그때는 주후 90년경으로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황제의 핍박이 사람들의 마음에 그대로 살아 있을 때였습니다.
‘주님이시여, 당신께서는 우리들의 지배자나 위정자들에게 통치권을 주셨습니다. 당신께서 저들에게 주신 통치권이기 때문에 저들을 따르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의 뜻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하오니 주님이시여, 건강함과 평안함과 조화 그리고 안정을 그들에게 내려주소서. 그것은 당신께서 주신 나라 일을 그들이 실수없이 수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주님이시여, 모든 시대를 다스리시는 우리의 임금이시여, 당신께서는 인간의 자손들에게 이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영광과 권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시여, 그들의 생각을 인도하시어 당신 보시기에 선하고 만족스러운 것으로 하여 주소서.
저들(위정자)이 당신께서 내려주신 힘(통치권)을 평화와 관용 속에서 사용하게 하시어 당신 보시기에 선하고 만족스럽게 함으로, 그로 말미암아 저들이 당신의 총애를 받게 하소서.
오 주님이시여, 당신만이 이러한 일을 하실 수가 있습니다. 당신은 이것보다 더한 것도 하실 수가 있습니다. 저희들은 대제사장이시며, 우리 영혼의 수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금이나 모든 시대에도 영원토록 영광과 주권이 당신에게 있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세상 왕국을 통치하는 권위를 가진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언제든지 교회가 맡은 중대한 의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심지어 교회는 교회를 박해하는 자들까지라도 위하여 기도함으로, 저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사랑하도록 해야 합니다.
Ⅲ. 그렇게 기도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1. 교회가 신앙과 생활에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2장 2절 하반절에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경건’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말합니다. ‘단정’은 사람들을 관계하는 생활태도를 말합니다. 말하자면 신앙생활과 전도(선교)생활을 잘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나라의 평안은 교회의 영적 성장에 유익이 된다는 말입니다. 나라가 평안할 때 각종 예배 생활이나 봉사나 사랑의 즐거움을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외적으로 전도와 종교생활을 할 수 있어 교회가 부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2장 3절에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특별히 위정자들과 나라를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나누어주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이기적이고 정욕적인 곳으로 좇아가는 기도에서 자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택자 구원운동의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기도, 특별히 모든 사람과 나라를 위한 기도는 복음전도 운동과 세계종교운동에 필수적인 수단이 됩니다. 전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운동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울은 지금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교회의 공적 기도를 말씀하고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교회는 예배 중에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큰 이유는 교회가 평안 중에 신앙생활을 하기 위함이며, 또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고, 더욱이 하나님의 구원운동에 필수적인 교회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교회의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나라가 평온하지를 못하면 교회가 받은 영적 즐거움이나 선교사명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애국이라든가 애족, 애민, 애국사상, 애국정신 등의 말은 사실상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는 기독교의 산물입니다.
우리는 일제 식민 36년 동안 교회가 평온하지 못했던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박해와 시련 속에서 순교자를 내고, 신자 수가 프로테스탄트의 경우 70만에서 그 반으로 줄어들고 말았습니다. 또한 6.25사변으로 말미암아 동족상잔의 비극을 맞이하였을 때, 교회가 평온할 수 없었음을 경험하였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의 군부공포정치 어간에 교회는 알게 모르게 압제를 받아 평온하지를 못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2000년을 받으면서 우리 생에서 최고의 복된 표징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남북한이 평화로 가보자고 합의한 6.15선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는 경제구조 조정의 개혁이나 여러 가지 정치적 불안 때문에 진통을 앓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우리가 만난 이 진통의 진상을 낙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큰 이유는, 우리 민족은 이보다 더한 온갖 죽음의 시련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극적인 구원과 섭리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 백성들에게는 온갖 죽음의 시련을 극복하는 인내와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구속사의 경륜 가운데서 21세기 세계선교를 주도할 축복을 한국과 한국 교회에 주셨다는 확실한 이유 때문입니다. 적어도 이 땅에는 1000만이 넘는 기독 신자들이 나라와 백성과 교회를 위하여 올리는 기도가 있는 나라입니다. 지상에 존재하는 잠정적인 세상 나라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선교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주일마다 모여서 드리는 교회의 공기도가 있습니다. 삼일기도회, 금요기도회, 새벽기도회 그리고 여러 종류의 특별기도, 가정기도, 개인기도가 끊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백성이 있는 나라는 망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특별히 위정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 나라는 결국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이 주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중보기도의 유익
딤전 2:1~5 / 방인철 목사
중보기도 사역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말씀과 기도와 전도라는 3대 영양소가 골고루 섭취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를 한데 아우르는 것이 예배입니다.
먼저 예배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은 백성답게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또 결단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배의 초점은 하나님 앞에 나를 어떻게 드릴 것인가 하는 '헌신'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말씀과 기도와 전도입니다.
우리는 '말씀' 하면 대개 설교를 떠올리게 됩니다. 대개의 경우 말씀을 대할 수 있는 채널이 설교밖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따로 시간을 내서 성경을 읽는 것도 아니니, '말씀' 하면 설교밖에 떠오르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설교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소위 임팩트가 너무 약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과 같이 영적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일날 한번 예배시간에 들은 설교를 가지고 버텨나간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소그룹입니다. 그것이 속회든, 제자훈련 모임이든, 기도 모임이든 간에, 하나 이상의 건전한 소그룹에 속해서 말씀을 함께 나누고, 또 그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정기적으로 점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우리 교회에서는 속회를 강조하고, 또 소그룹 모임을 많이 갖는 것입니다.
'전도' 역시 새로운 시대에 맞게 업데이트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여러 차례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평소에 아무 교류가 없던 사람에게 전도지를 한 장 건네주는 것으로 전도인의 역할을 하는 시대는 지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나와 아주 가까운 관계에 있는 가족이나 친구, 직장동료나 이웃에게 삶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서는 쉽게 전도가 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지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소위 '관계중심의 전도' 라고 하고,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매년 대각성 전도집회를 열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기도' 입니다. 저는 기도에 있어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 습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기도가 말로만이 아니라, 거룩한 습관으로 자리 잡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새벽기도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새벽기도를 생활화하십시오. 이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삶의 무게중심이 밤에서부터 새벽으로 전환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지금가지 익숙하던 것들, TV 드라마나 중요하지 않은 모임 등과 결별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리고 또 진통도 따르겠지만, 그러나 만일 이것을 생활화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의 삶의 차원이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도대체 기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를 TV에 비유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국방송국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은 매일 우리를 향해 방송을 띄우십니다. 우리는 TV, 즉 그 방송을 시청할 수 있는 수신기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수신기라 할지라도, 코드를 꼽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기도란 천국방송을 시청하기 위해서 코드를 꼽는 것과 갖습니다. 어떤 분은 눈을 뜨자마자 신문부터 찾습니다. 어떤 분은 TV부터 켭니다. 어떤 분은 새벽기도회에 참석합니다. 그것은 그분의 영적인 수준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아침에 처음 눈을 떠서 무엇부터 하느냐를 보면 그분의 영적인 수준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새벽기도의 생활화라는 거룩한 습관을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도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작 나 자신이나 내 가족의 평안이나 축복 정도의 범위를 넘지 못한다면, 물론 안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신앙성장에 큰 진전이 없습니다.
기도는 반드시 나 자신이나 내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이웃을 위한 중보기도까지 가야 합니다. 왜 우리가 기도를 시작해서 3분만 지나면 밑천이 다 떨어지고 맙니까? 우리의 관심의 영역이 거기까지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하루에 한 시간 이상씩 기도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기도의 폭이 넓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꼭 중보기도를 해야 합니까? 더 솔직히 말해서 중보기도를 통해서 내가 얻을 수 있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천국과 지옥의 비유를 가지고 이해하면 가장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갔더니 천국이나 지옥이나 환경이 똑같더라는 것입니다. 천국의 식당이나 지옥의 식당이나 똑같이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젓가락이 너무 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옥의 사람들은 그 긴 젓가락을 가지고 어떻게 해서든지 음식을 자기 입에 넣어보려고 하는데, 하나도 들어가지가 않아서 삐쩍 말랐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사람들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까? 서로 서로 음식을 먹여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젓가락이 긴 것이 문제가 아니라, 더 유용하더라는 것이지요. 물론 누군가 만들어낸 이야기이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가 기도를 해도 나만 잘되고 복 받겠다는 자세로 하니까 풍성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중보기도는 서로 서로 기도해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1절에 '도고' 라는 조금 생소한 단어가 나옵니다. 도고라는 말로 번역된 '엔튜크시스' 라는 헬라어는 본래 '만나다', '함께 오다' 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기도하는 '중보기도' 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표준 새번역 성경에 보면, 중보기도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5절 말씀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하나님과 죄인 된 우리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 오신 중보자이십니다. 그리고 결국 십자가를 지심으로 중보의 역할을 감당하시고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그러면 하늘나라로 가신 주님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로마서 8:34에 보면,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분은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예수님은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를 드리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24에서 우리의 할일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렇습니다. 나를 구원해주신 주님께 감사하면서, 이제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의 몸으로서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은 하늘 보좌 우편에서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하시고, 그분의 몸 된 우리는 이 땅에서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함께 동역해 나가는 것입니다.
어느새 우리 교회에서 중보기도 사역이 시작된 지 1년 4개월이 지났습니다. 주보에 광고 드린 대로 지난 15~16일 양일간에 걸쳐서 중보기도 사역자 세미나가 있었고, 이 세미나에 참석하여 헌신한 분들이 내일(1월 21일)부터 5월 20일까지 4개월 동안 제 5기 중보 기도를 이어갈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처음 시작할 때에 30명 남짓한 인원으로 시작했었는데, 지금은 교역자들까지 약 60명이 중보기도 사역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다음 번 6기 때에는 더 많은 분들이 헌신할 수 있기를 바라며, 여러분들은 이분들이 자기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에는 중보기도 사역에 참여하고 있는 분 중에서 방미나 집사님을 잠시 이 자리에 모시고자 합니다. 방미나 집사님은 1999년 3월에 세검정으로 이사를 오게 되어서 우리 교회에 등록을 했습니다. 그 이후에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집사님의 간증을 함께 나누면서 여러분에게 귀한 도전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방미나 집사님의 간증
너무도 부족한 제가 오직 순종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어 세검정 공동체에 속해있는 세 분의 목사님과 전도사님, 그리고 저를 위해 아니 저희 가정을 위해 기도해 주셨던 모든 분들께 가슴속 깊은 감사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진정 감사드립니다.
이번 간증을 준비하면서 지나간 많은 일들이 상기되었고, 가슴 뭉클한 감동들이 다시 한번 저에게 강한 다짐들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한편으론, 중보 기도를 통해 역사를 이루신 주님을, 제가 만났던 주님을 그대로 전해 드리면 되는데 그것을 정리하는 일이 이렇게 어렵고 힘들 줄 몰랐습니다.
저는 세검정으로 99년 3월 30일 이사를 왔습니다. 이사 올 당시 저희 가정은 참으로 힘든 때였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IMF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실감하지 못할 무렵, 남편이 다니던 컴퓨터 회사가 부도가 났고 그래서 저희는 이것이 우리가 사업을 차릴 기회다 싶어 확실한 비전도 없이 용산 전자 상가에 상가를 전세 얻고 시어머님의 도움과 모든 것을 투자해서 컴퓨터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몇 달 후에 실감나는 IMF를 맞게 되어, 투자했던 상가 전세금과 물건 값 하나도 못 챙기고 갚아야할 돈 때문에 집을 줄여서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된 것입니다.
당시 남편은 실직 상태였고, 저는 사람들조차 만나기 싫어 세검정 교회에 등록은 해놓고 잘 나오지도 않았고, 저는 주님에게서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의 속장을 맡은 정창숙 권사님 마음을 많이 상하게 해 드렸었죠. 희망도, 기대도, 조금의 기쁨도 없었습니다.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죽고 싶다", "죽었으면 좋겠다.", "지겨워." 라는 말 뿐이었습니다.
더 이상은 진짜 살아가는 것조차 저주스러운, 그런 날들을 암흑 속에서 씨름을 하듯이 지내고 있었고, 그 어느 것도 저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어려움과 고통 속에 있는 저의 가정에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제 딸 민정이가 감히 상상 할 수조차 없는, 어린애가 걸릴 수 없을 것 같은 큰 병에 걸린 것입니다.
이천년 봄날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난소암이라는 병명을 알기 얼마 전부터 제 아이가 자꾸 배가 아프다고 하길래, "화장실 가!" 라는 말만 하고 오히려 짜증을 낼만큼 저에게 마음의 여유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계속 아프다는 아이에게 "아직 생리를 안 하니까, 이제 생리를 하려나 보다. 원래 그때는 그렇게 아플 수도 있어." 라고 했는데, 민정이는 밥도 먹지 않고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엄마! 나 배가 너무 많이 아파. 이상해." 하면서 힘없이 눕는 아이 배를 보고는 너무 놀랐습니다. 배가 정말 5∼6개월 쯤 되는 임산부 배 만큼 불러 있었고, 만져보니 손가락이 들어가지 않을 만큼 딱딱해져 있었습니다. 저는 급히 아이를 데리고는 병원으로 향했고, 진단 결과는 '악성 난소암' 이었습니다. 망연자실 이라고 표현해야 하나요? 그때를 어떻게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애가 이 지경이 되도록 엄마가 뭐했습니까?" 의사가 저에게 호통을 치더군요. 저는 그때 입으로는 "하나님" 이라고 불렀지만, 제 몸은 벼랑 끝에서 떨어져 깊이를 알 수 없는 땅 속으로, 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민정이는 6개월 정도 밀려있는 환자들을 뒤로하고 4월 10일 입원을 하게 되었고, 입원시킨 첫날 저는 그 밤이 어떻게 갔는지 모릅니다. 아니 새벽이 오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날 밤 병원 앞에 있는 교회 십자가를, 병원 복도 난간에 나와 바라보면서, 한없이 눈물을 삼키며 가슴을 쥐어뜯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이건 아니에요. 이건 정말 아니에요. 안돼요, 지금은 안돼요, 민정이 살려 주셔야 해요. 살려주세요. 아무것도 제 딸에게 해준 것이 없어요, 하나님이 아시잖아요, 왜 하필이면 저 어린 민정이가 고난을 받아요." 얼마나 십자가를 보며 울었는지... 한참을 그러다가 울지 않은 척하고 병실로 들어오니, 민정이가 제게 그러더군요. "엄마! 내일 목사님 오셔서 기도해 달라고 연락 좀 해봐." 저는 그럴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어쨌든 다음날 목사님께 연락이 되었습니다. 모든 일을 뒤로 하시고 목사님과 여러분들이 오셔서 예배를 드려 주셨습니다. 그날 저는 너무 너무 감사했습니다. 제가 결코 혼자가 아니더라구요. 정말 힘이 생겼습니다. 3일 동안의 검사를 힘겹게 마치고, 4월 18일로 수술날짜를 잡고 일단 퇴원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날이 마침 금요일이어서 심야기도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십자가 앞에서는, 마음껏 울 수 있을 것 같아 저는 너무 너무 다급한 마음으로 주님께 매달리고 싶었습니다. 솔직히 그날, 앞에 몇 가지 중보 기도의 제목들이 있었는데 하나도 못 들었습니다. 그리고 천 목사님께서 우리교회 초등학교 6학년 권민정 어린이가 큰 병에 걸려 수술을 해야 한다며 기도가 시작 되었는데, 저는 너무 놀라게 되었습니다. 기도하시는 분들이 진정 마음을 다해서 민정이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 주시는 광경을, 막상 저는 눈을 뜨고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깜깜한 밤 집으로 걸어오며 "결국 하나님께서는 민정이를 통해서, 참 교회의 역할을 경험하게 하시는 구나! 만약, 내게 세검정 교회 형제들이 없었더라면..." 진정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그분들의 기도의 힘이 느껴지고 큰 힘이 되니 꼭 승리해야지." 다짐에 다짐을 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웠습니다. 4월 18일 민정이는 오후 2시 20분에 수술실에 들어갔고, 민정이를 괴롭혔던 그 끔찍하고 나쁜 것을 3시에 볼 수 있었는데, 어른 머리 크기만 한 둥그런 것을 차마, 볼 수 없더군요. 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되었고, 다른 장기로 전이 되었을까 걱정 했던 조직 검사 결과도 좋아 주치의도 놀랐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다른 암 환자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전 또 두려운 마음에 낙심도 되고 실망도 했지만, 거의 매일 방문해서 위로해 주시고, 기도해 주셨던 많은 분들이 제게 너무 너무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절 행사로 민정이를 위한 예쁜 계란을 만들어 판매하시고 수익금을 전달 받았을 때는 "이런 사랑을 우리가 받아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너무 송구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참 기쁨과 감사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그 계란을 속은 빼고 껍질만, 예쁜 포장 그대로 보관하고 있습니다. 지친 저희에게 주일예배 후에는 저희 있는 곳으로 일부러 오셔서 "기도하고 있으니 힘내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사랑과 중보기도로 항암치료의 그 고통을 견딜 수 있었음을 고백 합니다. 다른 환자들에 비해 정말 대견스럽게 쓴 물을 토해내고 입술을 악물지언정 참고 견딜 수 있었던 민정이의 힘은 많은 분들의 중보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주신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그 독한 항암 주사로 머리카락이 빠질 때마다 머리카락뿐이 아닌 예전의 건강도 회복시켜 주실 거라는 확실하고 강한 믿음이 솟구쳤습니다. 그리고는 오히려 죽는 것이 낫지 항암 치료는 안 받는다는 그 지독한 고통을 6개월 동안 여섯 차례의 치료를 무사히 받을 수 있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희 가정의 이런 큰일은 결코 저희들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었을 것이고, 분명 공동체 속에서 협력하여 선한 역사를 이루어 나가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과 계획과 섭리였음을 고백합니다. 사실 저도 그동안 많이 들었었습니다. 기도하면 이루신다는 것, 중보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사역인가에 대해서도요. 그렇지만 저의 가정을 통해서 저는 중보 기도의 힘을 확실히 목격하고, 실감하고 체험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민정이가 지난 일년 동안은 한달에 한번, 지금은 2개월에 한번씩,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정기 검진을 받아야 하지만, 저는 걱정 없습니다. 제게는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세검정교회 중보 기도실의 힘이 있으니까요. 한번은 C.T 촬영과 수치 검사 결과, 암 수치가 올라가고 다른 곳에 이상소견도 보여서 놀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그러시더군요 "걱정하지 말자고 더 열심히 기도 하자고" 그리고는 며칠 후 다시 한 검사는 거짓말 같이 정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참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우리교회 중보기도 모임이 그렇게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민정이가 완쾌되고 나서 하나님의 역사와 그리고 주님의 피로 한 형제 자매가 된 모든 분들에게 너무 고맙고 감사해서, 제 작은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가하며 기도하는 중에 저에게 감동을 주시길,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정을 위해서 중보함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었으니 이젠 내가 받은 사랑과 역사를 나누고 실천해야겠다. 그래,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중보기도를 하자." 라고 감히 서원하며 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주일 중보기도 3기 모집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 일에 헌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감히 말씀드리는 것은 이렇듯 중보기도는 생명까지도 살릴 수 있는 무한한 힘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개개인은 약할 것 같지만, 그 힘이 합해 진다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음을 믿습니다.
여러분의 숭고한 사역을 통해 한 생명과 가정이 회복되는 하나님의 역사의 도구로 쓰이는 귀하고 소중한 헌신 사역에,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중보기도 사역을 하면서 또 많은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분들의 기도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많은 역사는 또한 저에게서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회복의 역사 말입니다.
남의 아픔을 진정 내 아픔으로 여기고 미어지는 가슴이 터져라 땀을 흘리며 혼신을 다해 부르짖은 그 기도제목들이 어떠한 모양으로든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며, 세상의 그 어떤 기쁨도 견줄 수 없는 내 안의 영혼 깊은 곳의 참된 기쁨과 참된 소망이 넘침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립니다.
너무 미련하고 우둔해서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이제 그 모든 고난을 감사함으로 깨닫게 하시니 더욱 감사를 드립니다. 제 평생에 잊지 않고 세검정교회에 감사하고, 아직도 너무너무 많이 부족하지만 저의 가정이 받은 많은 사랑을 이제 조금씩 조금씩 조심스럽게 나누어가며 항상 내가 보기에 옳다고 생각되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겸손한 모습이 되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많은 일들을 간추려 전하느라 두서없는 말이었지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 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는 예레미야 33장 3절 말씀이 하나님의 약속임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맺는 말
방미나 집사님도 1999년 이전까지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가던 평범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2~3년 동안에 이런 엄청난 경험을 한 것입니다. 지나고 나니 다 감사하지만, 그때 당시에는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시험밖에는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는 또한 피할 길을 내사 우리로 하여금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험이 끝나고 나면 반드시 큰 유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너무 큰 시험이 닥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큰 시험이 닥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결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문제를 가지고 간절히 기도해 줄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혹시 지금 문제를 안고 계신 분은 안 계십니까? 오늘 여러분에게 중보기도 카드를 나누어드렸습니다. 여기에 여러분의 기도제목을 적어내주시면, 중보기도 사역자들이 여러분의 문제를 끌어안고 자신의 문제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중보기도 사역자들이 여러분의 기도를 대신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중보기도 사역자들의 역할은 여러분의 기도를 도울 뿐입니다. 대신한다는 말은 나는 기도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내가 기도하지 않는 한 아무리 다른 중보자들이 많이 기도해도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성령님의 이끄심 속에서 우리 각자의 기도와 중보자들의 기도가 하나가 되어 위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세검정 믿음의 공동체가 온전히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 서로 걱정해 주고, 서로 기도해 주고, 또 서로 기뻐해 줄 수 있는 진정한 믿음의 한 식구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
딤전 2:1-7 / 성홍모 목사
오늘 우리 시대는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한 사람, 뜨거운 기도의 사람을 찾아보기에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무엇을 하든지 기도로 시작하였고 기도로 진행하면서 기도의 힘으로 살았는데 지금은 내 지식이나 경험이나 의지로 살아갈 때가 많은 것을 봅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기도하기 힘든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요, 우리의 믿음이 허약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국에 유명한 '라인홀드 니버'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이 분이 쓴 책 가운데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이 있습니다. 아무리 성실한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선하게 살고, 양심적으로 살고, 도덕적으로 살려고 하여도, 그가 사는 사회 자체가 타락하고 죄악이 관영하기 때문에 그 한 사람이 결코 선하게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회 구조를 바꾸어야 선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선하고 바르게 살아가기가 힘드는 것을 봅니다.
가수 하덕규집사님이 우리 교회에 창립기념 행사시에 오셔서 귀한 복음성가를 불러주셨습니다. 그의 목소리와 노랫말에 반하여 여러 번 히트곡 "가시나무"를 들어보았습니다. 가시나무라는 노래의 가사는 우리의 마음과 영적인 상태를 그대로 표현해주고 있다고 봅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에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에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슬픈 노래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이 쉴 곳 없네" 이 노래 가사는 우리의 마음 상태에 가시나무와 같은 나, 헛된 욕망으로 가득한 나, 내 속에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의 세력이 차지하며, 내가 나를 이길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어 우리 주님에게 쉴 자리를 드리지 못하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사도바울과 같은 고백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19, 24)고 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탄식만 하고 있을 사도 바울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7:25)라고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기도의 사람이었기에 그런 역전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고 봅니다. 우리도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기도란 무엇입니까? 우리를 얽어매고 무겁게 하고 속박하는 것이 기도입니까? 부담스럽고 억지와 같고 마지못하여 눈을 감는 것입니까? 주님과 만나는 시간이요, 주님과 대화하는 시간이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라는 채널을 통하여 주님을 만나고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내 안에 우리 주님이 자리잡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상주하고 있으며 영주하고 있으며, 내주하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주님이시며, 나의 주인으로 나를 통하여 당신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사랑하는 주님" 이 한마디만 고백하여도 충분한 기도가 됩니다. "내가 사랑하는 주님, 주님만을 사랑합니다. 나는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이런 감격스러운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기도는 어떤 문제에 봉착하게 될 때에 사용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서의 기도가 아닙니다. 물론 기도는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며 확실한 방법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그런 문제나 해결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아닙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한 인간이 되는 경험이라고 말씀드립니다. 기도하면서 무엇을 해야 한다, 하라, 하지 말라는 그런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한 인간이 되는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라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순간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나의 연약함을 고백하게 됩니다. 나의 진실한 자아를 발견하고 회복하고 바로 알 수 있는 것은 진실하게 엎드려 기도하는 순간입니다. 진실한 한 인간이 되는 경험이 바로 기도라는 것을 기억하고 기도하면서 나를 되찾고, 되돌아올 수 있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보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새 사람이 되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나의 죄악을 아파할 수 있었고, 연약함을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무엇을 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무엇이 되느냐 하는 진솔한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라고 하셨습니다. 첫째라는 말은 '우선하여', '무엇보다도 먼저'라는 뜻입니다. "첫째로"라는 말은 시간적인 우선보다는 중요성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말입니다. 기도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먼저 할 것은 기도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제자들을 선택하시거나 중요한 사역을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기도하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러 가지의 기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기도들이 분명한 차이를 가진 다른 기도를 가리키느냐, 아니면 비슷한 말을 동의어를 사용하여 기도를 강조하는 것이냐를 놓고 의견이 대립되고 있습니다. 이들 기도의 종류는 분명한 차이를 가지는 기도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기도하다보면 이런 모든 기도의 종류가 다 포함되고 혼합되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비슷한 말을 동의어로 사용하여 기도의 여러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말의 뜻을 잘 이해하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간구라는 기도입니다. 이 간구는 간청하는 기도요, 탄원의 기도요, 부족하기에 애원하는 기도입니다. 이 단어는 특별히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요청할 때만 사용되는 단어였습니다. 매우 긴박한 상황에서 다급한 소원을 아뢰고 탄원할 때의 기도가 간구입니다.
기도가 있습니다. 이 기도는 일반적인 기도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도 하나님께 소원을 아뢰는 기도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일반적인 의미로 하나님을 향한 모든 경건한 아룀을 기도라고 합니다.
도고라는 기도가 있습니다. 도고는 대담, 면접, 청원, 중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 성경에서는 중보기도라고 했습니다.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입니다.
감사의 기도가 있습니다. 감사라는 것도 하나의 기도입니다. 감사는 말 그대로 좋은 은혜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는 기도입니다. 감사의 기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2절입니다. 우리의 기도 속에는 모든 사람을 위한 도고의 기도, 중보의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지금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를 감옥에서 기록하였다고 보는데, 바울은 로마라는 거대한 나라, 하나님을 모르고 교인들을 핍박하는 나라, 기독교를 무참하게 짓밟는 무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에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라는 말이 네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라는 말 속에 들어가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세상에 높은 사람, 낮은 사람, 잘 사는 사람, 못 사는 사람, 가리지 않고 우리의 기도에 포함되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이요, 안 믿는 사람도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인종이나 국적이나 사회적인 지위를 구별하지 않는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임금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의 있어서는 세계 모든 나라의 왕과 대통령, 수상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각 나라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시의 로마 제국은 네로 황제라는 지독한 사람이 있어 기독교회가 엄청난 박해를 받고 있는 현실이었습니다.
로마서 13:1에는 "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여러 해석이 있어야 한다고 하시겠지만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내 마음에 조금 들지 않아도, 지금은 잘 이해할 수 없어도, 장기적인 차원에서 보면 모든 것을 합력하여서 선을 이루시려고 하는 하나님이 섭리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나라의 안녕과 사회의 질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국가가 무너지고 전쟁이 일어나고 혼란에 빠지면 교회도 나갈 수 없고, 신앙을 유지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예례미야 선지자도 적국인 바벨론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루 속히 이 나라가 망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렘29:7)고 했습니다. 우리는 좀더 넓은 마음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큰 마음의 기도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기도한다고 할 때마다 나의, 내 문제, 내 가족, 내 나라, 내 민족, 언제나 나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를 초월해야 함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3절의 말씀을 봅니다.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권세자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받으실만한 것"이란 말씀에 유의하셔야 합니다. 이 말은 기쁘게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상달되며, 하나님이 흔쾌히 받으실 기도라는 것입니다. 여기 "이것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당장에 내게 유익 되는 일이 아니라도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 특별히 권세 잡은 자를 위한 기도는 우리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이며, 기쁘게 받으실만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4절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때문에 17세기 칼빈주의자들과 감리교회의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다투게 되었습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이 본문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보편 구원설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지만 주님을 영접하고 받아들인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드리는 사람이 되려고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이 소원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바라시고 소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먼저는 기도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십니다.
5-7절의 말씀을 읽어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리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중보자시며, 우리 죄를 대속하셨다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기도를 상고하면서 파이프 라인을 연상하였습니다. 우리는 이곳에 있으면서 수돗물을 마시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수돗물을 마실 수 있는 것은 수도관이 수원지에서부터 이곳까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무한한 힘과 능력, 은총이 모두다 파리프 라인인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공급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저는 아버지 앞에서 당당히 기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 버릇없고, 잘못한 것도 많고, 책망들을 일도 많지만, 내가 못난 자식이라고 하여도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자녀라면 아버지 앞에 당당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들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모세와 같이 기드온과 같이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고 나를 인도하신다는 흔적을 보여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너를 인도하는 흔적이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지만 믿고 나아갈 때 이루어진 것을 보면 모두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해놓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조금만 지나놓고 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 하는 사건들이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오직 은혜로만 살게 하십니다.
여러분, 새벽 기도회에 나가십시오. 멀리 사시는 분들은 가까운 교회의 새벽기도회에 나가서 기도해야 합니다. 새벽에 일어나는 열심히 없이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저녁 시간에는 기도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이라도 새벽같이 일어나서 돌아가는 열성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시5:3에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는데 무슨 응답이 있을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고 주님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응답하시는 귀한 음성을 듣고, 하나님으로 말씀하시게 해야 합니다. 나만 외치지 말고, 외쳐 기도하였으면 주님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원하시는 뜻을 파악하려고 자문자답하면서 기도를 정리해야 합니다.
여러분, 기도해야만 믿음의 용량이 커져갑니다. 기도하지 않으니 무슨 말을 해도 부드럽지가 않습니다. 기도 생활에 게을리 하는 이들을 보면 그는 짜증스러운 말을 하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인품이 달라집니다. 좋은 인격의 사람이 됩니다. 기도의 깊이가 믿음의 깊이를 말해줍니다. 기도의 용량이 인격을 말해줍니다.
전 세계를 콜라로서 정복한 코카콜라 창업자인 '아사 G. 켄들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큰 값어치를 가진 브랜드가 코카콜라 상표입니다. 그는 원래 알코올 중독자였다고 합니다. 켄들러씨는 술을 끊어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보았지만 쉽게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취해 귀가하던 중 켄들러씨는 마음속에 벼락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자신의 본능적 요구를 거절하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는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바로 그 시간에 남편의 금주를 위하여 무릎을 끊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켄들러씨는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고 알코올의 유혹에서 해방되었으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세계적인 기업가로 성공한 것이라고 합니다.
정리합니다. 나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 모든 사람이 고요하고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구속을 증거하려고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를 등록하시고 이제 막 신앙 생활하시려는 새 신자들에게 특별히 당부 드립니다.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하나님의 사랑도 깨닫고, 말씀도 이해가 되고,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 모든 사람은 가정을 사모하고 부모님의 가슴에 안기려고 하며,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습니까? 고향을 다녀오고, 부모님을 만나 뵈므로 큰 힘을 얻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저는 기도가 그렇다고 생각해봅니다. 기도는 정말 하나님의 품안에 안기는 순간입니다. 주님이 저의 손을 붙들어주시는 순간입니다. 주님 앞에 기도하는 순간 우리의 시들었던 심령은 새 힘을 얻고 지쳐버린 영혼이 활력을 되찾게 됩니다. 기도하기 위하여 엎드린 순간 하나님은 여러분을 안아주시고 업어주시고, 무등을 태워주십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관계를 초월하고, 이해 타산도 초월하고 믿는 성도와 믿지 않는 불신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간 공간을 뛰어넘어 전혀 알지 못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의 용량을 키워야 합니다. 기도의 깊이가 믿음의 깊이입니다.
기도하실 때마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은혜, 나를 변화시키는 능력을 체험하게 합니다. 이것은 안으로 향하는 기도요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위로 향하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많은 영혼을 구원하게 하는 밖으로 나아가는 역사를 체험하게 하십니다. 기도는 이렇게 밖으로 나가서 열매 맺게 합니다. 이 가을에 기도의 열매가 풍성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무엇을 소원하고 있습니까?
딤전 2:4 / 조상호 목사
시중에 이런 유머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동갑내기 노부부가 결혼 30주년 기념일을 자축하고 있는데, 한 요정이 나타나 말했습니다. “그동안 두 사람의 금슬이 좋았으니, 소원 한 가지씩을 들어주겠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먼저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워낙 가난해서 세상 구경을 못했어요. 세계일주 여행을 한번 해봤으면 좋겠네요.” 요정이 지팡이를 흔들자 세계일주 항공권이 나왔습니다. 다음은 할아버지 차례입니다. 60세인 할아버지가 뜻밖의 소원을 말했습니다. “난 나보다 서른 살 젊은 여자와 살았으면 좋겠군.” 요정이 지팡이를 흔들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60세 할아버지가 갑자기 죽기 직전의 90세 할아버지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에게는 크든지 작든지 나름대로의 소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을 합니다. 여러분들은 무슨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까? 은행에서 빌린 비싼 모기지를 갚는 일입니까? 아니면 자녀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는 일입니까? 아니면 세계일주입니까? 아니면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9888’(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 고생하다가 죽는다는 의미)입니까? 1,000만 불 짜리 로또에 당첨되는 것이 소원입니까? 여러분들은 무엇을 소원하고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께도 소원이 있으십니다.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창조한 세상을 다스리시며,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도 소원이 있으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원과 다른 소원을 가지고 계십니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학 2:8)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해서 소원하시는 것이 있을까 싶지만, 실제로 하나님께도 간절히 소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소원인 줄 아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그에 대한 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여기에서 중요한 말씀은 ‘모든 사람’이라는 부분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의 보편성(universality of the Gospel)’의미하며,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별, 피부색, 연령, 인종, 신분 등과 상관없이 만민이 구원을 받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민이 구원받기를 소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소원은 다른데 있지 않고 영혼구원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wish)이며, 하나님의 뜻(will)인 줄로 믿습니다. 한 번 따라서 하시겠습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에스겔 33장 11절에 보면, “주 야훼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맹세하시면서 까지 악한 짓을 일삼는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 악한 길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또 베드로후서 3장 9절에서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범죄한 모든 인간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구약에 보면,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나중에는 독생자 예수님까지 보내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아무런 목적도 없이 오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집을 방문할 때도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든지, 계돈을 받아내기 위해서든지, 밥 한 끼 얻어먹기 위해서든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방문을 합니다.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도 친척을 만나기 위해서든지, 영어연수를 위해서든지, 관광을 위해서든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방문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있습니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무슨 목적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영혼구원을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님
예수님은 2,000년 전 영혼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열두 해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을 고쳐주시고,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하던 문둥병자를 고쳐주시고, 눈이 멀어 아무 소망이 없이 살아가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시고,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를 가지고 2만 명 이상을 먹이시는 등 수많은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일은 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기적을 일으키시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신 일도 결국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로마제국으로부터의 해방과 독립이라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일을 이루어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오해했습니다.
어느 시골 늙은 아버지 집에 오랜만에 아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깨끗하지 못한 물을 마시는 아버지가 안쓰러워서 비싼 돈을 들여 정수기를 설치해주고 갔습니다. 하루는 정수기 회사직원이 정수기를 정기 점검하기 위해 찾아 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수기 보러 왔습니다.” 귀가 어두우신 할아버지는 그 직원에게 “정숙이? 당신이 뭔데 정숙이를 찾는겨”하며 직원 앞을 막아섰습니다. 당황한 직원이 “저 그게 아니라, 정수기 필터 교환하러 왔는데요.”라며 더듬거리자 더욱 화가 난 할아버지가 이렇게 야단을 쳤습니다. “아 글쎄 우리 정숙이는 집에 없은께, 얼른 집에서 나가랑께” 하고는 직원을 쫒아 버렸습니다. 정수기 회사 직원이 나중에 알고 보니 정숙이는 할아버지의 시집간 둘째 딸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물을 깨끗하게 걸러주는 정수기를 시집간 자기 딸의 이름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제자들도 이 할아버지처럼 오해를 했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민족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오신 분으로 착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1장에 보면,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각종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주신다는 소문이 갈릴리 지방에 넓게 퍼졌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알았는지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이른 새벽 날이 밝기도 전에 예수님인 혼자 기도하시는데, 제자들이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찾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막 1:38)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칭찬해도 크게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올라갔음에도 그것에 신경 쓰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칭찬이나 인기를 얻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세상에 오셨다고 합니까? 전도하기 위해서 오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영혼구원을 위해 2,000년 전 세상에 오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큰 관심은 영혼 구원인 줄로 믿습니다.
누가복음 5장 27절 이하를 보면, 레위라고 불리 우는 마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의 직업은 세리 즉 세무공무원으로서,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창녀와 죄인들과 같이 가장 천대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이 업무를 보기 위해 세관에 앉아 있는 그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자,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단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벌입니다. 예수님이 그와 함께 잔치에 참석하신 것을 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제자들을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그 때 예수님께서는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1~32) 예수님이 누구를 부르러 오셨다고 합니까?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하나도 짓지 않은 의인을 만나기 위해 오시지 않고, 죄 짓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사람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영혼구원을 가장 기뻐하신다
그래서 잃었던 영혼이 구원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크게 시뻐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잃은 양 이야기, 잃은 드라크마 이야기, 탕자 이야기 등 세 가지 비유를 가지고 당신이 오신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 잃은 양 이야기를 보면,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셈에 밝지 못하고 계산을 못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1마리보다 99마리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목자는 우리 안에 들어있는 99마리의 양은 놓아둔 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으러 나섰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부모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서 정신지체아들을 잃어버린 한 어머니의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글에서 모성애를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약간 길지만, 소개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마산시에 살고 있는 박인숙입니다. 2001년 1월 29일(월) 오후 2시경 경북 경주시 보문단지 내 한국콘도에서 사랑하는 저의아들 김도연(정신지체 1급)이 없어졌습니다. 도연이는 경남 마산시 소재 경남혜림학교 중학부 3학년에 재학중 이었으며 겨울방학동안 어느 정신지체 봉사단체에서 주관하는 사회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여왔습니다. 그러던 중 봉사교사의 제의에 따라 1박 2일 일정으로 경주 보문단지로 수련 활동차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1월 29일 경주보문단지내 한국콘도에 도착하였으나 선생님의 실수로 인해 저의 아들 도연이 잃어버렸습니다.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와 찾아 헤매었으나 실종 20여일 이 지난 현재까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조차 알 수가 없습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중증이다 보니 더욱 마음이 찢어집니다. 너무나 불쌍한 우리 도연이를 좀 찾아주십시오. 그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도연이는 정신지체 1급으로 배가 고파도 구걸 할 줄도 모르며 훔쳐 먹지도 못합니다. 음식 옆에서 그냥서서 입에 넣어주기만 기다리는 아이입니다. 의미 없는 시선과 그저 힘이 있으면 계속 앞만 보고 가는 습관이 있으며 추운 것도 느끼지 못하고 지칠 때까지 걷습니다. '돈'이라는 것은 전혀 모르고 스스로 차(버스나 기타)를 탈 줄도 모르며 '어~~' 소리 정도만 낼 수 있고 싱긋 웃기도 합니다. 이 추운 엄동설한에 어디에 가 있는지 안타깝고 애통할 뿐입니다....... 성하지 못한 신체와 정신으로 어디에 버려져 있는지 정말 기가 막히고 답답하기 형용할 수 없습니다. 부모 마음이야 다 같겠지요? 저의 아들 도연이는 지금 얼마나 엄마와 가족을 기다리고 있을까를 생각하면 단 몇 분의 시간도 너무 안타깝고 고통스러워 이렇게 용기를 내어 여러 선생님들께 간곡히 도움을 청합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수많은 프로그램 중 어느 프로든지 자막방송이라도 내보내 주신다면 그 은혜 정말 평생 간직하겠습니다. 아직까지 생사조차 알 수 없어 너무나 막막하고 답답합니다. 저희 가족의 이런 마음을 헤아려 주시고 하루빨리 도연이를 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부탁합니다. 비록 제 아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정신지체 1급의 중증장애자이지만, 우리 가족에겐 너무나 소중하고도 귀한 아이입니다. 고맙습니다. 2001년 2월 20일. 경남 마산시 구암동. 김도연 어머니 박인숙 올림.“ 그리고 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 어머니는 여전히 잃어버린 아들을 생각하고 이렇게 글을 썼습니다. ”..... 세월이 약이라는 위로로 살아 왔지만 7,8년의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지금은 무엇에 의지할까?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변하는 것일까? .... 씁쓸한 마음을 어떻게 할까, 보고 싶은 도연이는 온대간대 없는데.... 그래도 죽기 전에 한번 볼 것 같은 마음으로 살고 싶다. 2008년 2월5일“
주위에 보면 자식이 실종된 후 자식을 찾기 위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거나 사업을 그만 두고, 만나는 사람마다 잃어버린 아이의 사진을 보여주고 전단지를 돌리며 실종된 자녀를 찾아다니는 부모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자녀가 하나가 아닌 둘이나 셋 이상이 되는데도, 집안에 있는 자녀보다 실종된 자녀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미아보호시설을 찾아다니는 부모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로 이 모습이 우리 안에 있는 99마리의 양은 놓아둔 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으러 나서는 목자의 모습입니다. 물론 목자가 우리 안에 있는 99마리의 양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99마리의 양도 무척이나 사랑합니다. 하지만 길을 잃고 헤매는 그 ‘한 마리’의 양에 대한 애뜻한 마음 때문에 그 ‘한 마리’를 위해 산과 들로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추측컨대 그 실종된 양은 자꾸만 문제를 일으키는, 무던히도 목자의 속을 썩이는 양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목자는 그 양을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은 후에는 동네 사람들을 불러다가 큰 잔치를 벌인다는 것입니다.
오늘 새벽(2010년도 6월27일), 2010 월드컵축구 16강전에서 우리 한국팀이 우루과이에게 2대1로 아깝게 패하였지만, 온 국민이 텔레비전 앞에 모인 것은 물론이고 수백만 명의 군중들이 도시 곳곳마다 모여서 열광적인 응원을 했습니다. 어이없게 전반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루과이 선수에게 골을 허용하자, 많은 사람들이 우리 선수들이 골 넣기를 학수고대했습니다. 그러다가 후반전에 이청용선수가 골을 넣자, 온 국민이 함성을 지르며 기뻐했을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천국에서도 이와 비슷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은 양의 비유를 소개하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무슨 말입니까? 이 땅에서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천국에서는 기쁨의 잔치가 벌어질 줄로 믿습니다. 이 땅에서 한 영혼이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영혼구원은 큰 상을 받게 한다
이처럼 영혼구원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하늘의 상도 큽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자기 교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부담되는 설교는 무엇인가?”라고 물었더니, 1위가 전도설교였다고 합니다. 전도설교를 들을 때, 가장 부담을 느끼고 짜증이 난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도 가장 부담되는 설교가 전도설교가 아닙니까? 그런데도 강단에서 전도설교가 선포되어져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도를 괴롭히며 스트레스를 주기 위해서 일까요? 아닙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복을 받는 지름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전도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 부담스럽고 짜증을 내는 성도도 있는데, 그 이유는 전도를 단순히 의무와 사명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도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특권입니다. 그리고 전도를 할 때 주어지는 복과 영광은 대단합니다. 다니엘 12장 3절에 보면,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영혼을 구원한 사람은 하늘에서 별과 같이 빛나게 되는 복을 받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돈 많이 벌어 부자 되는 것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내가 돈을 버는 것에는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돈에 관심을 쏟기보다, 먼저 영혼구원에 관심을 쏟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복에 초점을 맞추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드리는데 초점을 맞추시기 바랍니다.
지난주 주일 오후 <샘지기 & 팀지기 연합모임>에서 8월8일 우리 교회 창립17주년 감사예배 때,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했습니다. 우리교회 창립 기념주일이기 때문에 생일파티를 열어 즐겁게 보낼 수도 있지만,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이나, 믿었다가 잠시 신앙생활을 쉬고 있거나, 하나님을 떠난 분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초청하자는 의미에서 홈커밍데이로 정했습니다. 이 홈커밍데이는 교회를 자랑하기 위한 자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각 부서가 참여하여 장기자랑을 하는 자리도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2010년도 홈커밍데이를 개최하려고 합니다. 그 동안 제가 12년 전 우리 교회에 부임한 이래 초창기에는 1년에 두 차례를, 아마 2000년부터는 1년에 한 차례씩 홈커밍데이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홈커밍데이에 초청되어 복음을 듣고 결신을 했습니다. 결신한 분들이 다 우리교회에 등록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만만치 않은 숫자가 계속해서 우리교회에서 신앙생활하고 계십니다. 지난주 회의에서 제가 “OOO집사님, OOO집사님, 등이 홈커밍데이에 초청되어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음생활을 잘하고 계십니다”라고 말했더니, 회의에 참석한 분 가운데 두 분이나 본인들도 몇 년 전 홈커밍데이에 초청되어 복음을 듣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그 동안 하나님께서 홈커밍데이를 통해 크게 역사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부터 구체적으로 <2010년도 홈커밍데이>를 위해 기도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기도하시다가 초청하고 싶은 분이나 복음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시는 분들의 이름이나 주님의 사랑이 필요한 분들이 떠오르면 주보와 함께 나누어드린 <태신자작정카드>에 기입하셔서 제출해주시면 위해서 기도해드리겠습니다. 다음 주일에 제출하셔도 좋고, 그 다음 주일에 제출하셔도 좋고, 제출하신대로 새벽기도회 때, 금요집회 때, 주일예배 때 등 시간 나는 대로 제출한 분들의 초청과 구원을 위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 나누어 드릴 초청장을 활용하여 초청하시기 바랍니다. 초청을 많이 하신 분들과 초청을 많이 한 샘에게 소정의 전도상을 드리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교회에서 드리는 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상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 구원하는 이 일에 동참하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가까이에 있는 분들 가운데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분들을 구원에 이르게 함으로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드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전에 소개한 적이 있는 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느 집에 딸이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딸이 시집가는 날 아침, 신부 어머니는 잠시 미장원에 들렸습니다. 원래 간단하게 머리를 다듬기 위해 미장원에 갔는데, 미용사가 “사모님, 퍼머를 하는 것이 어떠세요? 퍼머 하시면 정말 잘 어울릴 텐데“라는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 아주머니는 머리에 퍼머약을 바른 채, 각종 여성잡지를 이리 저리 뒤적이며 무려 3시간 동안이나 미장원에서 보냈습니다. 딸의 결혼식장에서는 신부 어머니가 나타나지 않아서 여기저기 수소문하느라, 딸의 결혼식은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3시간 만에 퍼머가 이쁘게 나왔다고 좋아하던 이 아주머니는 ”아참, 내 정신 좀 봐. 오늘이 딸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지.“라고 외치며, 뒤늦게 딸의 결혼식장으로 부리나케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이미 딸의 결혼식은 끝나고 말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런 아줌마를 뭐라고 부르는 줄 아십니까? ‘정신 나간 아줌마’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삶의 목적을 잊어버리면 이 ‘정신 나간 아줌마’와 같은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2,000년 전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당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사단이 제안한 한 물질과 인기와 권력, 이 세 가지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영혼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소원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소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바라기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드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
딤전 2:4-7 / 오세원 목사
성도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무엇을 주기를 원하십니까? 아마 해주고 싶고 싶은 것이 많을 것입니다. 훌륭한 사람으로 키워주고 싶고, 재물도 많이 물려주고 싶을 것입니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게 해 주고 싶을 것입니다. 같이 살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지만 부모는 무엇이든지 다 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은 어떠하실까요? 우리 하나님은 이미 죄인된 인간을 위하여 독생자까지 주셨습니다. 이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 때도 항상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은혜를 베푸시길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긍휼을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자비를 베푸시길 원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복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이 모든 것 보다 더 간절히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4절 말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이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고 믿기를 원하십니다. 사실은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 바로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영혼구원을 간절히 원하십니다. 촌각을 다투고 영혼을 건져내기를 원하십니다. 단순히 우리가 건축해 놓은 예배당을 채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에 영혼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한생명이라도 더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전도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간절함은 어느 정도일까?
요한복음4:35절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제자들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되겠다고 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이미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넉달이 지나야 추수하겠다는 제자들의 생각은 곡식을 추수할 시기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서 ‘밭을 보라’고 하신 것은 세상을 보라는 것이요, 이미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다는 것은 구원할 영혼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왜 서둘러 전도를 해야만 하는가? 왜 우리는 서둘러 영혼을 구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순위가 무엇입니까? 신앙을 가진 자라면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전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시급하다고 일러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영상을 보도록 합시다)
영상은 실화를 소재로 만든 영화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먼저 건져야 합니까? 가재도구입니까? 떠내려가는 가축입니까? 사람입니다. 인간의 생명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쓰나미와 같은 세속의 문화 속에서 성경에서는 절대로 금하는 동성애를 비롯한 퇴폐적인 것들이 기독교 국가라고 하는 나라에서 법으로 허용하는 일들이 자행되고 있는 이런 현실, 거대한 세속의 쓰나미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영혼들을 우리가 그냥 구경만 하고 있어 되겠습니까? 반드시 건져내어야 합니다. 엄마는 아이를 구하기 위하여 쓰나미에 떠내려가면서도, 혈투를 벌이면서도 찾았고, 아들이 발견되었을 때 손을 뻗어 아들의 손을 잡으려고 하는 그 모습을 기억하십니까? 왜 엄마는 아들의 손을 잡으려고 했습니까?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왜? 무엇 때문에 영혼구원을 원하시는가요?
첫째, 영혼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귀중하기 때문입니다.
영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마가복음8:36-37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왜 인간의 생명이 이렇게도 귀한가? 하나님의 영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영혼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영혼이 죄로 말미암아 지옥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독생자까지도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영혼을 귀하게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안에 자리잡고 있는 영혼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전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할수만 있으면 모든 영혼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본문 4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둘째,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이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6절 말씀,“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요한복음3:16절 말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조지 휘필드는 “주여 나에게 영혼을 주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내 영혼을 가져가시옵소서”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나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면 그로 인해 내가 구원받은 은혜를 가진 사람은 반드시 그 사실을, 그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4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누가복음15장에 보면 잃은 양과 잃은 드라크마 비유를 하면서 잃은 아들, 즉 탕자비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를 하시면서 잃은 양도 찾으면 주인이 기뻐서 이웃을 초청하여 한턱내고 하는데, 하물며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더 기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열 드라크마 중 한 드라크마를 잃어도 등불을 켜고 찾아다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찾으면 이웃과 함께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탕자의 비유에서는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가지고 해외에 가서 다 탕진하고 돌아와도 아버지는 아들이 집에 돌아온 것만으로도 기뻐하며 새옷을 입히고 아들의 권세를 주면서 심지어 살진 송아지를 잡아 이웃을 불러 잔치를 하였는데 하물며 영적으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을 위해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천국에서도 잔치를 베푸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정도로 기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쁨조로 살아가는 저희들은 당연히 전도를 해야 합니다.
넷째, 영혼구원이 가장 시급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5절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디모데후서4:2절 상반절 말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어느 정도로 급한지 아십니까? 누가복음14장에 보면,
예수님이 비유로 하신 말씀이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습니다. 잔치를 시작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오라고 했을 때 대부분 핑계를 대면서 오지 않습니다. 모두가 사양을 합니다. 사양한 이유는 다양하지만 다 사양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밭을 샀어 그것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또 한 사람은 소 다섯 겨리를 샀는데 시험해 봐야 하기 때문에, 또 한 사람은 이제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종이 돌아와 있는 그대로 보고하니 주인이 화를 내면서 다시 부탁을 합니다.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종은 주인이 시키는대로 순종하였지만 아직도 준비된 자리가 남았습니다.
그때 다시 주인이 종에게 명령합니다.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이내용을 보면 전도대상은 구분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해당됩니다. 건강한 사람, 돈많은 사람, 권력자 만이 아닙니다. 병든자, 장애인, 할 일없이 노는 사람들도 괜찮습니다. 연세많은 노인도 괜찮습니다. 골목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한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영혼구원이 시급합니다.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언제 어느 때에 생명이 끊어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잃어버릴 영혼이 받을 위험 때문입니다.
마태복음10:28절 말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요한계시록20:13-15절 말씀, “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끝으로 전도는 주님의 지상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28:18-20절 말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님의 명령은 우리 모두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1999년부터 현재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서 매년 랭킹 안에 드는 자가 오프라 윈프리입니다. 지난해에는 2위로 있다가 금년에 다시 제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오프라 윈프리는 엄청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유가 뭘까요? 자신의 일을 사명으로 알고 감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자서전 ‘이것이 사명이다’에 보면 사명인 것을 알 수 있는 네 가지 방법에 대해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첫째, 남들보다 더 가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다.
둘째, 남들보다 더 아픈 상처가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
셋째, 남들보다 더 설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착각이 아니라 사명이다.
넷째, 남들보다 더 부담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강요가 아니라 사명이다.
2002년부터 8년동안 서울 성북구청장을 역임했던 서찬교 장로님은 2001년부터 하루도 빼먹지 않고 새벽기도를 드려왔습니다. 서 장로님은 임기 기간 중에 금연 금주 공개 개방 투명운동과 같은 운동을 펼쳐 지역 주민들의 많은 신뢰와 호응을 얻었고, 특히 소외지역 주민들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행정을 펼쳐왔습니다. 서장로님은 전도에도 매우 열심이어서 구청장 재임기간 중에 자신의 수행 비서였던 김대섭씨를 전도하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김씨는 서 장로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기는 했지만 복음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2009년 불의의 사고를 당해 전신마비가 되는 끔찍한 일이 김씨에게 일어났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남은 생의 모든 것을 체념한 김씨였지만 서 장로님은 매일같이 김씨를 찾아가 안부를 묻고 격려했습니다. 수행비서 자리를 비워놓을 테니 반드시 재활에 성공해 돌아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편의를 찾는 것보다 김씨의 영혼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서장로님은 생각했습니다. 결국 장로님의 믿음과 열심을 본 김씨는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고통스런 재활치료를 이겨냄으로 간단한 생활은 스스로 해낼 수 있을 정도로 건강도 회복되었습니다. 믿음의 동역자로 다시 태어난 서 장로님과 김비서는 앞으로 살아갈 제2의 인생이 매우 기대된다고 말했습니다. 한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노력하십시오. 영혼을 추수하는 기쁨을 경험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당신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각자가 다를 수 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성도의 공통된 사명이 있으니 그것은 곧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주님은 나 혼자 구원받고 천국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명,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리는 사명을 위하여 우리 모두 분발하여 일어나 목표를 향하여 달려갑시다. 1020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