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6일 벌어졌던 한일전에서 대한민국은 시종일관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종료 직전 통한의 실점을 허용, 아쉽게 패하고 말았다. 경기 내용 면에서는 우세했었지만 결정적으로 골을 성공시키지 못한 것이 패인이었다. 이뿐만 아니다. 근래에는 베트남, 오만에게 연패를 당하는 사태가 일어나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고 이 소동은 어쩌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다행히 코엘류 감독은 계속 대표팀 지휘봉을 잡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지만 말이다.
이렇듯 국제 무대에서 기대 이하의 결과가 나타나면 언제나 한국 축구의 오랜 과제, 골결정력 문제는 매번 도마 위에 오르곤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축구라는 운동이 그렇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부분이 다른 스포츠 종목에 비해 축구만이 가진 매력인 동시에 많은 인기를 누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축구에서는 아무리 경기 전체를 지배한다 해도 골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런 까닭에 다른 종목에 비해 ‘예상 밖의 결과’가 빈번하게 연출되는 경기가 축구다. 우리 대표팀의 경우에도 일련의 경기들을 통해 결정력 높은 스트라이커가 얼마나 절실하고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스트라이커’라는 존재는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 ‘축구의 꽃’이라 불리우는 지도 모른다.
축구의 ‘스트라이커’라 함은 최전방에 위치하여 가장 중요한 ‘골’을 성공시키는 것이 주어진 임무다. 그런데 ‘스트라이커’라는 말은 ‘strike’, 즉 ‘치다, 타격하다’로부터 파생된 단어이고 바로 이 ‘치다, 타격하다’라는 표현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리기 힘든 스트라이커가 있으니 그가 다름아닌 알런 시어러(Alan Shearer)다.
세계적으로 수준급의 기량을 인정받는 현역 스트라이커들의 수는 상당수에 이른다. 잉글랜드 프리미어쉽 안에서만 고려할 때에도 티에리 앙리, 루드 반 니스텔로이, 마이클 오웬, 에르난 크레스포 등 절정의 시기를 맞고 있는 당대의 스타플레이어들이 여럿 존재한다. 하지만 아마도 이들 가운데, 뛰어난 실력은 물론이요 사생활적으로도 존경받는 선수이자 ‘스트라이커의 표상’과 같은 현역 선수를 뇌리에 떠올린다면 알런 시어러가 가장 먼저 떠오를 공산이 크다. 틀림없이 그는 ‘백넘버 9’의 감동이 가장 진하게 배어나오는 선수이거나, 혹은 적어도 그러한 선수들 중 한명일 것이다. [사진: ‘9번’이 어울리는 사나이, 알런 시어러. (게티이미지/유로포토)]
프리미어쉽 역대 최다골 기록(2003년 11월 29일까지 256골 기록 중), 프리미어쉽 시즌 최다골 기록(94/95 34골. 93/94 시즌의 앤디 콜과 동률), 3시즌 연속 프리미어쉽 30골 이상 기록(93/94 31골, 94/95 34골, 95/96 31골), 3시즌 연속 프리미어쉽 득점왕(94/95, 95/96, 96/97), 프리미어쉽 1경기 개인 최다골 기록(5골. 1999년 대 셰필드 웬스데이), 두 클럽(블랙번, 뉴캐슬)에서 각각 리그 100골 이상 기록, 클럽 커리어 총 300골 돌파(2002년 대 블랙번. 2003년 11월 29일까지 331골 기록 중), 17세의 나이로 리그 해트트릭 기록(1988년 대 아스날) ...
92년 프리미어쉽 창설 이후 골에 관한 거의 모든 기록을 지니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선수가 바로 ‘살아있는 전설’ 알런 시어러다. 1996년 유럽선수권에서도 득점왕에 오르며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호나우두와 더불어 명실상부한 세계적 스트라이커 반열에 올랐던 시어러. 특히 잉글랜드 팬들에게 있어 그의 존재성은 그 누구도 대신하지 못할 만큼 커다란 사랑을 받았으며, 잉글랜드 축구사 전체에서도 몇 손가락에 꼽힐 만한 스트라이커로 기록될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사진: 잉글랜드의 전설적 포워드들 가운데 한 사람 제프 허스트(가운데)와 함께 한 시어러와 마이클 오웬. (게티이미지/유로포토)]
시어러의 트레이드마크는 역시 고감도의 결정력 높은 캐넌 슈팅과 정확한 헤딩 솜씨를 꼽을 수 있다. 정상급 스피드를 지니지는 않았으나 강인한 파워와 효과적인 움직임으로 수비수들을 따돌리며 좋은 위치를 선점, 강력한 슈팅과 정교한 헤딩을 날림으로써 골키퍼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으며, 정상급 발재간을 부리는 인물은 아니지만 동료들의 패스를 부드럽게 받아내는 ‘첫 번째 볼 터치’에 있어서만큼은 훌륭한 기량의 소유자인 까닭에 후속 슈팅이나 패스를 하기에 유리한 상황을 창출해내는 인물이 시어러다.
또한 대포알같은 슈팅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시어러는 슈팅을 남발하는 스타일이 아니며 무엇보다 팀을 위해 희생하는 법을 안다. 따라서 ‘슈팅 대비 골 결정력’이 고도로 높을 뿐 아니라, 팀 플레이 전체적으로도 대들보 역할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성향을 지녔다. 그의 발과 머리를 거치는 노련한 볼 분배 솜씨는 그가 소속된 팀의 공격에 있어 언제나 중차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사진: 스웨덴의 파트릭 안데르손과 대결하는 시어러. (게티이미지/유로포토)]
또한 알런 시어러의 빼놓을 수 없는 탁월한 덕목은 무엇보다도 그의 ‘평정심’--그의 잉글랜드 스트라이커 선배 개리 리네커 또한 그러했듯이--이다. 시어러의 평정심이 잘 드러나는 구체적인 분야는 어쩌면 그의 커리어 전체를 통한 ‘페널티킥 솜씨’일 것이다. 골대 구석 상단을 노려 그대로 강하게 차버리곤 하는 시어러의 페널티킥 스타일은 이론적으로는 가장 성공률 높은 ‘이상적’인 방식이지만, 통상 일반적인 선수들에겐 이러한 방식의 페널티킥은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 업습하는 그 상황에서 시어러는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거의 그러한 부담감을 엿볼 수 없으리만큼 침착성과 대담함을 보여왔다. 비록 연령이 높아진 최근에 이르러서는 과거와 같은 압도적인 성공률이 다소 저하되면서 중요한 실축들도 간간이 나오고는 있으나, 이 페널티킥 장면에서의 평정심과 자신감이야말로 축구 선수 시어러의 전체적 캐릭터를 특징지우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징표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알런 시어러는 1970년 8월 13일 뉴캐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스모키(Smoky)'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가 '스모키 베이컨 크리습스'(smoky bacon crisps; 베이컨 맛이 첨가된 감자칩으로 크리습스는 영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스낵)를 특히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의 가족은 오랫동안 고향팀 뉴캐슬을 응원할 정도로 전형적인 조르디(Geordie; 뉴캐슬 지역 사람들을 지칭) 패밀리였다. 시어러 또한 어릴 적부터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응원하는 팬으로서 축구 선수의 꿈을 키워갔고, 그의 어린 시절 마음 속의 영웅은 당대의 불세출의 선수 케빈 키건이었다. 훗날 96 유럽선수권 이후 세계 이적료 신기록(1500만 파운드)을 작성하며 시어러를 고향 뉴캐슬로 되돌려온 장본인이 바로 키건 감독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둘의 인연은 사실상 오래 전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시어러의 능력은 어린 시절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12살 때 그는 이미 그의 학교 축구 팀의 주장을 맡기 시작했고 그것은 먼 훗날 잉글랜드 대표팀의 주장 완장으로 이어졌다. 당시에 그를 가르쳤던 체육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만약 시어러가 아프면 우리는 경기를 치르지 않기를 원했다.”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시어러는 비록 학교 축구 레벨의 경기이긴 하나 무려 한 경기 13골을 기록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는 뉴캐슬 유나이티드 입단 테스트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시게 된다. 당시 시어러의 능력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뉴캐슬 측은 그로 인해 훗날 세계 이적료 기록인 1500만 파운드라는 엄청난 액수를 지출하면서 그를 되돌려오게 된다.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댓가’를 치른 셈이다. [사진: 시어러의 잉글랜드 시절, 최고의 단짝을 이루었던 ‘꾀많은 포워드’의 전형 테디 셰링엄과 더불어. (게티이미지/유로포토)]
열렬히 응원해온 고향 팀 뉴캐슬 입단이 좌절된 시어러는 결국 조 힉슨(Joe Hixon)이라는 뛰어난 스카우터의 눈에 띄어 15세의 나이에 사우스햄튼에 둥지를 틀게 된다. 당시에 그가 첫해 받았던 주급은 27파운드 50펜스였고 이듬해에도 고작 35 파운드가 전부였지만 마침내 그는 17세에 이르러 1군에 발탁, 전통의 강호 아스날과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른다. 그 경기에서 이 17세 소년은 ‘알런 시어러’라는 이름과 더불어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영원히 기록될 해트트릭을 작성했고 이것은 그의 본격적 골 퍼레이드의 출발점이었다.
그는 사우스햄튼의 유니폼을 입고 리그, 컵 대회 포함 총 43골을 기록했는데 하지만 당시의 시어러는 전형적인 최전방 포워드라기보다 다소간 아이러니컬하게도 오히려 맷 르 티시에(Matt Le Tissier)를 지원하는 역할에 더 충실했다. 시어러는 이미 최연소 해트트릭을 기록했을 만큼 잠재력을 인정받기는 했으나, 아직은 그의 모든 능력을 완벽하게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어러의 꾸준한 자기 관리와 부단한 노력은 이 때부터 시작되었고 바로 이것이 훗날 ‘특급 스트라이커 알런 시어러’를 완성할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된다. 또한 시어러는 사우스햄튼에서 평생의 반려자(Lainya)를 만나 개인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순간을 맞이하는데, 그의 아내는 전혀 축구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시어러의 강한 조르디 지역 사투리를 알아듣지 못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사진: 블랙번에 역사적인 프리미어쉽 우승을 안겨준 위력적인 투톱, 알런 시어러와 크리스 서튼. 서튼은 현재 스코틀랜드 셀틱에서 스트라이커, 최종 수비수, 미드필더를 모두 오가는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활약 중. (게티이미지/유로포토)]
1992년 시어러는 이제 더 이상 무명 선수가 아니었고 여러 클럽들이 그의 영입에 나서고 있었다. 블랙번이 시어러의 영입을 위해 당시에 지출한 360만 파운드는 당시로선 잉글랜드 최고액 이적료 기록이었지만 그의 놀라운 활약상을 감안할 때 블랙번은 그 이적료의 ‘동전 한닢’조차 아깝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시어러는 무려 3시즌 연속 30골 이상을 기록한 최초의 선수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고 또한 94/95 시즌 블랙번에게 무려 81년만의 값진 우승 트로피를 안겨준다. 당시 블랙번의 투톱이었던 시어러와 크리스 서튼은 이른바 ‘SAS 편대’로 불리며 위력적인 공격력을 과시했는데(‘Shearer And Sutton’의 이니셜을 딴 명칭인 동시에 SAS는 영국의 대 테러 공수부대이기도 하다), 블랙번이 우승을 달성한 94/95 시즌 SAS 편대는 무려 49골을 합작했다.
1996년은 알런 시어러에게 있어 최고의 전성기를 보낸 해로 기억될 것이다. 바로 96 유럽선수권에서의 뛰어한 활약으로 비로소 그는 잉글랜드를 넘어 세계적인 스트라이커로서의 명성을 각인시킨다. 이제 시어러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아스날, 리버풀을 비롯, 유벤투스, 바르셀로나, 인터 밀란과 같은 해외의 명문들로부터도 러브콜을 받기에 이른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의 영입에 성공했던 클럽은 1500만 파운드라는 당시로선 엄청난 거액을 쏟아 부은 ‘경제적으로 부활한 도시’ 뉴캐슬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시어러 개인의 커리어에 있어 어린 시절부터 동경해온 고향 클럽에 뼈를 묻도록 만든 실로 행복한 사건이었던 동시에, 결과론적으로는 향후 이렇다할 우승 메달을 걸지 못하게끔 했던 다소간 아쉬운 사건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물론 지금 이 순간까지도 시어러는 당시의 결정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사진: “이거 못놔” 시어러를 수비하는 네덜란드의 윈스톤 보가르데. (게티이미지/유로포토)]
뉴캐슬 지역은 축구에 살고 축구에 죽는 곳이다. 시어러가 고향으로 돌아오던 날, 비바람이 몰아치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파가 시어러를 무등태우기 위해 몰려들었다. 시어러의 어린 시절의 소원은 비로소 이루어 졌고 뉴캐슬이 낳은 세계적인 스트라이커를 고향으로 돌려오고자 했던 뉴캐슬 사람들의 염원도 이루어졌다. 시어러의 어린 시절의 영웅 케빈 키건이 이끄는 뉴캐슬은 이미 화끈한 화력을 과시하며 전 시즌 프리미어쉽 2위에 오른 바 있어 이제 뉴캐슬의 팬들은 바야흐로 왕좌에 대한 야망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전문가들 또한 ‘시어러의 영입’이야말로 뉴캐슬의 그간의 문제점을 해소시키는, 그리고 뉴캐슬을 진정한 챔피언으로 도약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포인트라고 입을 모았다. 뉴캐슬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맞설 수 있을 유일한 적수로서 간주되었던 것이다. [사진: 96 유럽선수권, 오렌지 군단에 맹폭을 가한 시어러와 역시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리버풀의 스티브 맥마나만. (게티이미지/유로포토)]
그러나... 시어러의 잔부상과 키건의 갑작스러운 사임이 이어지면서 조르디 팬들의 희망은 한갓 꿈으로 전락하고 만다. 96/97 시즌 한때 중위권까지 밀려났던 뉴캐슬은 후반기 무서운 뒷심을 발휘하며 리버풀을 따돌리고 결과적으로 다시 한번 2위에 오르기는 했으나, 이미 우승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손아귀에 넘어가 있었다.
97/98 시즌, 시어러는 부상으로 인한 커리어의 첫 번째 중요한 위기를 맞게 된다. 그는 심각한 다리와 발목 부상으로 인해 거의 6개월간 그라운드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이것은 잉글랜드 전체에도 큰 위협으로 다가왔는데 바로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이 다가오고 있었던 까닭이다. 시어러는 글렌 호들의 새로운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주장을 맡고 있었을 뿐 아니라, 앤디 콜과 로비 파울러, 그리고 당시만 해도 아직 국제 무대에서 검증되기 이전인 어린 마이클 오웬으로 구성될 잉글랜드의 득점 라인은 시어러의 공백을 메우기에 역부족일 것처럼 보였다. [사진: 브라질의 에메르손과 대결하는 시어러. (게티이미지/유로포토)]
잉글랜드에겐 다행스럽게도 시어러는 시간에 맞춰 돌아왔다. 장기적인 부상 이후 이전보다 순간속도가 저하되었다는 악평을 듣기도 했지만 그는 그러한 상황을 노련미로써 커버해내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혜성처럼 무대 위로 올라온 ‘마이클 오웬의 기념비적 골’이 98 월드컵 명장면들 가운데 하나로서 영원히 기록될 것이긴 하더라도, 튀니지 전에서 골을 성공시켰고 아르헨티나와의 대결에서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와 페널티킥을 주고받았던 시어러의 존재성은 간과되기 어렵다. 특히 데이빗 베컴의 퇴장으로 수적 열세에 몰린 아르헨티나 전에서 전문 수비수 이상의 거친(?) 수비를 마다하지 않고 아르헨티나 선수들을 당황케하던 주장 시어러의 모습은 진정한 챔피언의 모습 이외의 다름 아니었다.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경기들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듯이, 시어러는 여느 프로 선수들에게서는 쉽사리 찾아보기 어려운 ‘투철한 책임감’과 ‘의지’로써 무장한 사나이였던 것이다.
[사진: “얘들아 잘 봐라. 킥은 이렇게 하는거다”, 폴 개스코인. “파워는 내가 더 셀거 같은데...”, 알런 시어러. “큰 형들 앞이니깐 그냥 가만히 있자...”, 데이빗 베컴. (게티이미지/유로포토)]
월드컵 이후 뉴캐슬은 부진에서 벗어나기 위해 리버풀과 스코틀랜드의 전설 케니 달글리쉬로부터 밀란과 네덜란드의 전설인 루드 굴리트로 감독을 교체했다. ‘굴리트와 시어러’, 당대 스타들의 만남은 팬들에겐 커다란 기대감--특히 키건 류의 ‘화려한 공격축구’의 재현에 대한--를 불러 일으켰던 일대 사건이었으나 유감스럽게도 두 스타의 관계는 삐걱거리기 시작했고 결국 굴리트의 1년 남짓한 뉴캐슬 감독 생활은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마감되었다. 뉴캐슬의 다음 선택은 베테랑 명장 보비 롭슨이었다. 그리고 바로 롭슨 감독의 세인트 제임시스 파크 데뷔전, 시어러는 셰필드 웬스데이를 상대로 다섯 골을 작렬시켰고 뉴캐슬은 8-0의 인상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 어쩌면 이것은 이후 몇 년에 걸쳐 진행될 롭슨 감독의 뉴캐슬 재건의 전주곡이었는지도 모른다.
[사진: 유로 2000 본선 조별리그, 독일을 침몰시켰던 시어러의 다이빙 헤딩. (게티이미지/유로포토)]
2000년 유럽선수권은 시어러에겐 조국을 위한 마지막 봉사의 무대였고 세계의 축구팬들에겐 그의 모습을 메이저 국가대항전에서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숙적 독일과의 경기에서 결승 헤딩골을 작렬시켰던 시어러는 그 승리에도 불구, 잉글랜드의 허망한 8강 진출 실패 직후 대표팀을 떠날 것을 선언한다. 사실상 유럽선수권을 치르는 동안에도 진통제에 의존하고 있었던 시어러는 이제는 고향팀 뉴캐슬의 재도약을 위해서만 자신의 전력을 다할 시기가 되었다고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곧이어 시어러에게 들이닥쳤던 것은 ‘선수 생활 최대의 위기’였다.
2000년 12월, 시어러는 결국 왼쪽 무릎 부상이 치명적으로 악화되며 쓰러졌다. 97/98 시즌에 겪었던 부상들은 이에 비하면 오히려 작은 것이었다. 이제 시어러는 ‘선수 생활의 때이른 종막’이라는 현실에 직면, 두려움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시어러를 버리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수술을 통해 이 전설적 스트라이커의 선수 생명을 구해낸 인물은 미국의 전문의 리처드 스테드먼이었다. 호나우두, 알레싼드로 델 피에로, 제이미 레드납, 루드 반 니스텔로이 등을 선수 생명의 위기로부터 구해낸 인물 스테드먼이 이번에는 시어러를 구해냈다. 시어러는 세인트 제임시스 파크 팬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01/02 시즌 초반 극적으로 그라운드에 돌아왔고 그 시즌이 끝날 때까지 뉴캐슬을 위해 무려 27골을 터뜨렸다. 그의 솜씨는 하나도 녹슬지 않았던 것이다.
[사진: 세인트 제임시스 파크의 ‘영원한 영웅’ 알런 시어러. 그리고 그의 트레이드마크 셀리브레이션. (게티이미지/유로포토)]
시어러의 극적인 재활은 어쩌면 뉴캐슬 클럽에겐 재도약의 신호탄이었다. 시어러의 건재와 맞물려 보비 롭슨 감독의 젊은 재능 영입 드라이브와 구단 수뇌부의 활발한 재정적 지원이 결실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뉴캐슬은 이제 케빈 키건 시절의 전성기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특히 가공할 스피드, 발재간에다 킥력을 겸비한 크레이그 벨라미가 코벤트리로부터 영입되었던 사건은 ‘투톱 파트너’ 시어러에게도 커다란 즐거움을 선사하게 된다. 그러나 어떠한 젊은 재능이 뉴캐슬에 도착하든지 간에, 뉴캐슬의 ‘궁극적 버팀목’이 알런 시어러라는 사실 한가지 만큼은 변화하지 않았다.
물론 뉴캐슬의 열혈 서포터들도 이제 시어러가 더 이상 젊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며 뉴캐슬 구단과 롭슨 감독 또한 서서히 시어러의 적절한 후임자를 찾아나서는 움직임을 시작해온 것이 사실이다. 특히 2003년 들어 파트릭 클라이베르트, 알런 스미스 등과 같은 이름들이 뉴캐슬과 더불어 언론 지상에 회자되는 것은 이미 낯설지 않다. 하지만 뉴캐슬의 서포터들은 그 어떠한 재능있는 스트라이커, 어떠한 세계적인 스트라이커가 뉴캐슬에 영입된다 하더라도 그가 시어러의 존재성을 완벽하게 대체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라 ‘한결같이’ 입을 모은다. 그들은 어쩌면... “시어러 앞에 시어러 없고 시어러 뒤에 시어러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최고다 ... 정상의 골게터로서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믿음, 엄청난 의지력과 헌신이 요구되는 것이다 ... 나는 시어러의 9번 셔츠를 꼭 하나 갖고 싶다 ... -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첫댓글 원빈 포기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원빈포기
아싸 원빈.
이미 원빈.
어? 나돈데,
반 읽었으니 원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한참생각후 웃고있는...ㅎㅎ
역시 시어러. 나는 원빈
난 김태희 포기ㅠㅠㅋ
한가인이라 그랬음 읽었을지도 .........................................
그냥 생긴대로 살래요.-_-^ 닉네임이 강등만4번째이시네.. 5번째로 가실수.. ㅋㅋ
원빈 ㅡ.ㅡ;;
원빈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ㅡ,ㅡ 원빈 포기...
다 못잇겠삼.. 김태희 포기..
원빈포기 ㅋㅋㅋㅋㅋㅋㅋㅋ
난 안읽고 원빈 .
김태희 다오
원빈으로부활하다
와 맥마나만이랑 시어러 개스코인 멋지다 잉글랜드 그런국대도 좋았는데
원빈 포기다;;
까짓 김태희 필요없다
김태희 싫음......... 박주미라 했음 읽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