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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굴리스탄 지역. 후기 모굴 칸국은 북쪽의 모굴 지역을 상실하고, 남쪽의 카쉬가리아의 도시지역에 국한된다>
다시 옛날 이야기를 해보자면, 모굴 칸국은 유누스 칸의 정주화 정책에 반발을 가진 유목세력이 그의 아들 아흐마드 칸과 함께 동부 위구리스탄 지역으로 이주해버리고, 남쪽 카쉬가리아 지역은 두글라트 부족의 아바 바크르가 장악하고 있었으며, 텐산 산맥 이북은 키르기즈인들과 카자흐인들의 천국이 되어 있었서 모굴의 칸에게 남은 것은 서부의 타쉬켄트 근처 지역밖에 없었다.
동부의 아흐마드는 알라차(Alacha)-도륙마. 미디블 1을 해보신 분은 익숙하실 것이다.-란 칭호를 얻을 정도로 전투에 능했으며 용맹했다. 아바 바크르로부터 양기히사르와 카쉬가르를 빼앗고, 하미의 토착왕국과 싸우면서 사실상 명나라와의 대리전을 펼쳤다.
그러나 서부의 마흐무드는 좀 시원치 않았던것 같다. 카자흐족이 칼무크인(오이라트인)들에게 개박살이 나고 갈곳 없어진 샤이바니를 받아주고 힘을 키우게 해준 사람이 바로 마흐무드였다. 얼마 후 샤이바니의 군대가 침공해오자 마흐무드는 쌈박질에 능한 동생 아흐마드에게 SOS를 타전하고(중앙아시아에서는 드물게 형제간의 우애가 좋았던 모양이다. 아니면 아흐마드가 다른 꿍꿍이가 있었든지) 둘의 연합군은 아흐시에서 샤이바니와 격돌, 가뿐히 패배당한다.(1502)
샤이바니는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은 남아서인지 타쉬켄트를 점령하는 대신 마흐무드를 풀어준다. 그러나 익히 아시다시피 모굴 칸국은 칸의 권위가 강한 나라가 아니었다. 약한 칸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는 전투의 승리로 휘하 부족장들의 신망을 사는게 중요했으나, 포로로 잡혀났다 풀려난 칸에게 그런게 있을리 만무했다. 게다가 가장 강력한 부족인 두글라트 부족은 아예 반쯤 독립했다시피한 상황에서, 게다가 믿을 만한 그의 형제 아흐마드도 병으로 죽어버린(1503) 상황에서 그는 또 쫓겨나가고 만다.
동부에는 아흐마드의 아들 만수르(Mansur)가 명목상 칸의 자리에 올랐으나 역시 힘이 없는 상황이었고, 갈곳 없어진 마흐무드는 호랑이 아가리로 뛰어든다. 즉 우즈벡의 샤이바니에게 몸을 맡긴것. 그러나 이 동네에는 삼세판이라는 말이 없는 모양인지, 샤이바니는 '바보짓은 한번으로 충분하다!' 라고 일갈하고 마흐무드를 죽여버렸다.(1508)
중간결론 : 망명할 때는 상대를 봐가면서 하자.
이렇게 해서 차가타이 가문의 후손은 사실상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에서는 사실상 손을 놓게 되었다. 이들의 세력은 동투르키스탄으로 한정되기에 이르며, 이마저도 호자 세력 및 준가르인들에 의해 오래가지 않는다.
조치의 후예들은 러시아에서 200여년동안 타타르의 멍에라 불리는 러시아인의 신속을 이뤄내고, 훌라구 가문은 페르시아에서 100여년간 맘루크 세력과 자웅을 겨뤘고, 쿠빌라이와 그 후손들은 중국에서 강력한 국가를 이뤄냈지만 차가타이의 자손들은 강력한 국가는 고사하고 항상 주위 세력들에게 처맞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는 중앙아시아의 고질적인 문제인 내분이 타 국가에 비해 더 심각했기에 이뤄진 결과였다. 즉 다른 국가들은 칸의 자리만 놓고 싸운 반면에, 모굴 칸국은 칸의 자리뿐만 아니라 주요 부족장 자리까지 놓고 싸웠고, 이 부족장들이 칸의 재위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혼란이 가중된것이다. 주위에 티무르, 샤이바니같은 쟁쟁한 인물이 튀어나와 온 중앙아시아를 휩쓰는 상황에서 국력을 모아 맞싸워도 시원찮을 판국에 이런 혼란까지 겹치니 제 아무리 차가타이의 후손이 아니라 테무진이 와도 곤란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결국 이러한 상황이 계속됨에 따라 모굴 칸국은 제대로된 원정도 한번 없이 별볼일 없는 국가로 남게 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마흐무드 사후 서부 모굴 지역은 두글라트 부족, 카자흐인들, 키르기즈인들의 세상이었다. 이때 만수르의 형제인 사이드(Sa'id)가 힘을 키워 아바 바크르에 도전하고, 결국 카쉬가리아 지역을 되찾기에 이른다.(1514)
이때 사이드를 도운 사람이 미르자 하이다르(Mirza Haydar)로, 그 역시 두글라트 부족의 세력자였으나 아바 바크르에게 한끗발 밀린 사람이었다. 결국 모굴 칸국의 정치는 두글라트 부족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반역자도 두글라트인, 조력자도 두글라트인, 심지어 역사가도 두글라트인이었다.
동부의 만수르, 텐산산맥 이남의 사이드로 굳어진 모굴 칸국은 이제 우즈벡 세력이 장악한 중앙아시아 대신 동쪽의 중국과 티베트로 시야를 돌린다. 만수르는 하미의 불교왕국에 대한 공격을 계속해나갔고 명나라와의 통상 문제로 항상 투닥거렸으며, 사이드는 미르자 하이다르를 보내 티베트를 공격한다.
원정 도중 사이드가 사망했다.(1533) 미르자 하이다르는 그냥 자기 일을 진행해나가려고 했으나 본국에서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들려오고 만다.
사이드의 아들 압둘 라시드(Abdul Rashid)는 그의 아버지 장례식에 찾아온 두글라트 부족의 요인들을 잡아다 모조리 처형해버리고 두글라트 부족에 대한 대대적 탄압에 나선다. 저 요인에는 미르자 하이다르의 친척들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이름도 있었기에, 괜사리 돌아갔다가는 피를 볼게 분명한지라 재빨리 내빼버렸다. 그 후 그는 여생을 중앙아시아의 역사서 집필에 바치는데, 이 역사서의 이름이 바로 라시드사(Tarikh-i-Rashid)였다.
이걸 보고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다. '아, 이 속좁은 투르크 노인네가 자기 신세 망쳐놓은 라시드보고 엿먹으라고 이렇게 제목을 지었구나'
이 생각은 두가지가 틀렸다.
첫째로, 미르자 하이다르가 내뺐을 당시는 아직 한창 나이였기에 투르크 노인네가 아니었다. 게다가 이 양반은 죽기도 빨리 죽었다. 그것도 암살.
둘째로, 라시드를 엿먹일 생각은 약 30% 정도밖에 없었던것 같다. 책 제목은 저리하지만 '라시드는 그럴 마음이 없었는데 우리아들친구 바를라스 부족의 왠 찌질이 천민 하나가 라시드를 선동해서 그런 미친짓을 하게 만들었다'란 내용이 보인다고 한다. 부족간의 위계나 계급이 있는 전형적인 유목귀족의 사고관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건 우리아들친구 바를라스 부족의 왠 찌질이 천민 하나가 선동했다기보단, 압둘 라시드 스스로의 판단이었다. 그는 기존의 칸의 권위가 약했던것(역사공부를 많이 한 모양이다. 다 배워두면 쓸모가 있다니깐)은 두글라트 부족등의 강력한 권한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일시에 날을 잡아 싹쓸이를 해버렸던것.
종교적인 면에서도 그는 기존의 낙쉬반디 교단 대신 우와이스 교단-기억하실 분도 있겠지만, 어느 특정 교단에 속하지 않은 수피 성자들-의 일원인 무함마드 샤리프라는 수피 성자를 존경하기 시작한다. 페르시아 문화를 많이 접한 교양인인 압둘 라쉬드가 교리도 서투른 시골의 촌스런 수피 성자에게 끌릴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토착민에게 강력한 권위를 가진 성자를 끌어들임으로써 칸의 권위를 높이고, 기존의 종교적, 부족적 특권계층을 까겠다는 판단이었다.
또한 유목민에게 적합한 초원인 텐산산맥 이북을 빼앗기고, 카쉬가리아의 오아시스 도시에 머무르게 됨에 따라 유목민들이 정주화되었고, 이들의 힘이 약화되었다. 압둘 라쉬드는 이런 시점이야말로 기회라고 여겼다.
그러나 압둘 라쉬드의 이러한 조치는 별 효과를 내지 못했다. 칸도 아니고, 유목민도 아니고, 부족도 아닌 새로운 세력이 모굴 칸국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아흐마드 카사니(Ahmed Kasani) 또는 마흐두미 아잠(Mahdum-i-Azam)-위대한 스승-(1462~1542)라고 불리는 낙쉬반디 교단의 성자는 샤이바니 왕조 시기 큰 명성을 누렸다. 왕가의 많은 요인들이 그를 스승으로 인정했고, 그와 함께 낙쉬반디 교단의 세력도 강력해지고 그 영향력도 널리 뻗어가기에 이르렀다.
마흐두미 아잠의 아들 호자 이스하크(Kwaja Ishaq)는 압둘 라쉬드 사후(압둘 라쉬드 치세때 갔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압둘 라쉬드가 무함마드 라티프를 스승으로 인정하고, 낙쉬반디 교단보다는 우와이스파를 더 지지했다는걸 생각해볼때 압둘 라쉬드 사후에 본격적으로 선교를 시작한것 같다) 카쉬가리아로 들어와 선교를 시작했다. 그는 당시 칸인 압둘 카림의 동생 무함마드를 개종시키는데 성공하고, 이스하키야, 또는 흑산당(Qara Taghliq)이라 불리는 수피 교단을 이뤄낸다. 칸인 무함마드가 이미 이 흑산당의 수피의 일원으로 되버렸고, 이후의 칸의 계승에도 흑산당이 막강한 영향력을 보인다.
호자 이스하크의 아들 호자 아흐야의 사촌동생인 무함마드 유수프의 아들 호자 아파크(Kwaja Apak)-길기도 하다..-는 호자 이스하크의 계통을 이은 아흐야와 반목하고 그 나름의 계파를 여는데, 이게 바로 아파키야, 또는 백산당(Aq Taghliq)이다. 그러나 이미 칸을 꽉 쥐어잡은 흑산당과의 싸움에는 당해내지 못했다.
이 두 계파의 싸움에서 또 죽어나는 세력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이 기존 토착교단 즉 우와이스 교단이었다. 이들은 이 양 교단의 맹공에 맞서 예언자 무함마드(무함마드가 하도 많아서 이렇게 구분을 해줘야 한다)의 가문으로 자신들의 선조를 편입시키는가 하면(즉 족보를 조작했다) 기존 토착민에게 자신들이 가진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광고하고 다녔다.(가령 자기네들의 성자 하나가 지팡이로 땅을 쳤는데 거기서 물이 나와 도시가 건설되었다 식의 전설)
그러나 곰과 호랑이가 마늘과 쑥을 먹고 어쩌구저쩌구하는 정말 말도 안되보이는 신화에서도 의미를 찾아내듯이, 이런 전설도 나름 의미가 있게 마련이다. 이들 토착 수피들은 지역 거주민과 지배계층 사이를 연결해주었으며, 유목민과 정주민을 하나로 묶어주는 구심점이었다. 또한 물이 풍족하지 않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수리시설의 관리를 담당한 토착 수피들의 영향력은 컸다. 후에 청조 정복시 지역 행정을 맡은 벡 계층 대부분은 이 토착 수피 출신들이다.
그러나 가운데서 우와이스 교단이 찌질대든지 말든지, 흑산당과 백산당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1677년경, 아파키야의 수장(대체 뭐라고 부르는게 좋을까. 수장? 장로? 우두머리?)인 하즈라티 아팍(Hazrat-i-Apak)은 흑산당의 통제를 받는 칸 이스마일에 쫓겨 중국으로 달아난다. 그는 여기서 도움을 청할 강력한 세력을 발견하기에 된다.
중간 문제. 여러분이 카쉬가리아의 이슬람 신비주의 교단의 수장이고, 가까운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면 누구에게 하겠는가?
1. 우즈벡의 이슬람 군주들.
2. 텐산산맥 북쪽의 키르기즈 유목민들.
3. 카자흐 평원의 카자흐인들.
4. 달라이 라마.
<이게 왠 떡?>
놀랍게도 하즈라티 아팍은 달라이 라마에게 구원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달라이 라마는 라마 불교의 열광적인 신도이자 달라이 라마를 위해서라면 청조하고도 능히 맞짱뜰 배짱이 있던 준가르의 갈단 칸에게 카쉬가리아를 침공할것을 명령한다. 갈단 칸은 기쁘게 그 명령을 수행, 1678년 카쉬가리아를 침공하고 이스마일을 포로로 잡은 뒤 허수아비 칸을 세우기에 이른다. 이제 칸을 세우는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건 흑산당이 아니라 백산당이 되었다.
문명3를 하다보면 자기 대륙에서는 자기가 그야말로 킹왕짱이고 최첨단을 달려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다른 대륙을 찾아가보니 그 동네 문명들은 자기정도는 명함도 못내밀정도로 무시무시하게 발전해있는 경우가 심심치않게 있다. 넷상에서도 자기가 그 분야 본좌인줄 알고 함부로 갑을 떨다가 숨은 굇수들에게 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정도로 처참히 깨지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갈단 칸도 비슷했다. 카쉬가리아에서는 그가 본좌였지만, 바로 아랫동네에는 청조의 강희제가 버티고 있었다.
<청나라 4대 황제 강희제. 1661∼1722. 전투 정치 양면에서 막강 포스를 뿜어낸 청조 최고의 먼치킨 황제>
1696년, 갈단이 강희제에게 패배해버린다. 이후 백산당은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활보하고 심지어 칸의 자리에도 백산당 계열을 세우기에 이른다.(비록 피는 이어받았지만) 그러나 갈단의 뒤를 이어받은 체왕 랍탄은 백산당계 칸인 아흐마드를 잡아가버림에 따라 카쉬가리아는 다시 흑산당의 손으로 들어온다.
체왕 랍탄 사후 준가르부가 혼란에 빠지자, 흑산당이 다스리던 카쉬가리아는 다시 준독립상태를 맞이한다. 청나라의 건륭제는 준가르를 토벌하는 김에 이미 준가르의 영향력에 들어가있던 카쉬가리아도 점령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렇다고 직접 가서 싸움하기에는 좀 귀찮기도 하고 그러니 흑산당을 상대할 세력을 말그대로 풀어놓는데, 그게 백산당이다.
백산당의 부르한 웃 딘과 호자 자한은 청조에 의해 풀려나 카쉬가리아로 가 흑산당을 쫓아내고(이 흑산당이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겠다;) 카쉬가리아를 재정복한다. 그러나 신실한 무슬림이자 예언자의 후손(족보조작은 우와이스 교단만 한게 아니라서...)인 자기네들이 이교도인 청조에 굴복하는건 꼴사나운 짓이라고 생각했는지 이들은 청에 대해서도 반기를 든다.
준가르 처부수고 한창 기세 오른 청조에게 이정도 반발은 우습지도 않았다. 청은 1758년 카쉬가리아로 진격, 1759년에 점령하게 되고, 청나라의 영토로 편입되게 된다. 이게 바로 신강(新疆), 즉 새로운 영역-의 시작이다.
청조는 이곳에 일리 장군이라는 장군을 파견하고, 신강 전체를 남로(카쉬가리아) 북로(텐산 이북) 동로(우루무치 및 위구리스탄 지역)로 나눠 주요 몇몇 도시에만 군대를 파견, 나머지 지역은 현지 유력계층에게 맡겨 다스리게 했다. 중국에서 이주한 한인들과 만주인들이 주요 병력을 구성했으며, 현지민 군대는 신용을 얻지 못했다.(믿으면 그게 바보다) 대신 청조는 몽골인들-차하르 부족, 호쇼트 부족, 토르구트 부족-등을 동로에 이주시켜 지역을 방비하게 했다.
백산당 계열은 청조의 끊임없는 골칫거리였는데, 신강에서 쫓겨가 코칸드 칸국으로 도망간 이들은 기회만 되면 청조를 습격했으며, 코칸드 칸국도 이들의 습격을 묵인했다. 백산당계 호자들의 존재, 코칸드 칸국의 개입 등등은 후에 터져나올 1864년 무슬림 반란의 원인이 된다.
첫댓글 durtnlsorhddl m,.m
ㅇㅈㄴ 이것도 너무 복잡하지 말입니다
강희제와 건륭제가 원정을 강행하지 않았다면, 지금 중국의 영토는 절반으로 줄어들어 있었을지도...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