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군 지명에 대한 유래를 찾고 있습니다. 전통적이고 토속적인 지명과 잘 알려지지 않은 자기 고향의 동명 및 지명 그리고 장수에서만 사용되는 특이한 사투리에 대해 리플 달아주시면 연구 정리하고자 하오니 정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참고로 첨부파일을 읽어보시고 잘못된 점이 있으면 연락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장수군(長水郡) 행정구역 및 지명유래
< 참고 - 용어풀이 >
뜸 (담, 땀, 대비, 대미) : 큰 마을 가까이에 있는 몇 집씩 이루어진 작은 동네.
촌(村) :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고장, 마을
동(洞) : 골, 마을 (행정구역)시읍구의 아래
실 : 작은 마을
통(統) : 조선시대 민호편제(民戶編制) 다섯 집을 1통, 5통을 1리(里)
현제-시, 동, 통(班)
골(올) : 고을, 골짜기의 준말
수멍 : 논밭에 물을 대기 위해 뚫어놓은 구멍
거리 : 길거리의 준말
본정 : (本店)이 변한 말, 지점
몬닥 (문덕, 몬당, 몬탁) :작은 덩어리로 뚝 끊어지거나 잘라지는 모양
소 (쏘, 듬벙, 둠벙) : 땅바닥이 둘러빠지고 물이 깊게 된 곳, 자연적으로 생긴 웅덩이
점(店) : 옹기나 토기를 만들던 곳
강변 : 갱변
장수읍(長氺邑)
장수리 |
교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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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수멍거리, 본동,아건너,영단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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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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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건너,구시장다리,본정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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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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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계통,취락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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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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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정통,본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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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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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동네,만쟁이,웃동,다릿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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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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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통,본동,본정통하,본정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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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리 |
노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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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대비,아랫대비,봉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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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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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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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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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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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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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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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창리 |
음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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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대미,아랫대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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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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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대미,아랫대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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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곡리 |
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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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담,아랫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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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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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동,다리건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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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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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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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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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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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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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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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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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동,밤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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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촌리 |
동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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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뜸,웃뜸,건너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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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리 |
덕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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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덕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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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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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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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리 |
두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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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본동,서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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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리 |
농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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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동,양지뜸,상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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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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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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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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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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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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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하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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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분리 |
수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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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뜸, 음지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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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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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담,건너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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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천리 |
송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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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담,웃담담,건너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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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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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담,웃담 진다리(진흙다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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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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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뜸,웃뜸,건너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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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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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담,아랫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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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계리 |
용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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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뜸,양지뜸,농원및 샛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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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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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대미,웃대미,건너담,점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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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리 |
대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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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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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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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금평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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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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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흑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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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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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필덕,하필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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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천리 |
식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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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북사,샛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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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수(長氺)
[교촌] : 상수멍거리, 본동, 아건너, 영단거리
[중동] ; 아건너, 구시장다리, 본정통
[준비] : 핑계통, 취락마을
[하비] : 본정통, 본동
[남동] : 아랫동네, 만쟁이, 웃동, 다릿거리
[북동] : 시장통, 본동, 본정통하, 본정통상
2. 노하(路下) : 길 아랫마을
[노하] : 웃대비, 아랫대비,
[봉강] : 봉강 - 봉황이 내린 마을
[신기] : 새터
[왕대] : 왕대들- 왕대뜰, 왕대틀
[판둔] : 너듬이
3. 선창(先昌) 船昌 - 先昌- 선챙이
[음선마을] 음지선창 - 음지선챙이 : 웃대미,아랫대미
선창리 전체 마을 형국이 배를 선창가에 달아 놓은 것 같아 당초에는 선창이라 불렀으며, 한편으로는 늙은 어부가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는 형국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 옛 장수현 시대에는 마을 입구에 동헌(현청)이 있었으며, 방촌 황희 정승이 잉태 출생했다 하여 창계서원이 있다. 또한 이조 말엽에 裵씨.崔씨.金씨의 3성이 당초『숲안』이라는 터에서 살았는데 그 터 지형이 배(선)같아서 부두 없는 선창이라 하였으며, 주거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수적인 식수 해결을 위해 우물을 파니 배 바닥에 구멍을 낸 격으로 배가 가라앉은 형이 되어 화(火)를 당하여 3씨중 최씨는 음지쪽인 지금의 음선마을에 터를 잡아 살고 있으며 배씨.김씨는 양지쪽인 양선에 터를 잡고 살았다고 전한다.
이후 시대의 변천에 따라 선창에서 앞서가고자 하는 뜻에서 선창으로 불려진 듯하다. '96년도 말에 주거환경 개선사업으로 23동의 주택개량사업과 경지정리사업을 완료하였다. 또 마을 뒷산(싸리재쪽)에 장군 혈(血)이 있다고 한다. 일제(日帝)가 장군혈의 기(氣)를 끊기 위해 이곳에 쇠 말뚝을 박아서 주민들이 이를 제거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장군 혈을 감싸는 숲이 마을에서 싸리재 오르는 골짝 오솔길 옆에 있다.
[양선마을] 양지선창 -양지선챙이 : 웃대미,아랫대미 양지쪽에 있다하여 마을 이름이 양선이라 붙여졌으며, 이조 말년부터 배씨.김씨 가 살면서 부두없는 선창이 되다보니 2성씨중 김씨 가문은 손이 번창치 못하고 배씨의 자손만 번창하여 한창 마을이 번창할 때는 배씨 일색이 되기도 했다. 배(船)가 있으면 선창이 있어야 한다는 원리로 배씨의 손이 번창하면서 양지쪽 터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양선으로 불려졌다는 설도 있으나 왜 船』자가 『先』자로『 변형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96년도말 경지정리사업을 실시하여 영농 기반시설이 매우 편리하게 되었다. <자료출처 : 장수군지>
4. 노곡(蘆谷) - (蘆 갈대노, 호리병 노) -갈(대)실 - 갈실 -개실
장수읍 노곡리를 개실이라 부르며, 다섯개의 땀(마을)을 통틀어서 부르는 이름이다. 개실의 제일 아랫마을을 섬말(섬마을)이라 부르며 마을 옆에 있는 들을 섬들, 건너편 번덕을 갈밭양지라고 부른다. 옛날 어느 명사가 이곳을 지나다 주변의 지형을 살펴보니 날아가는 기러기는 갈대를 물고 있는 형국의 명당(비안함노)이 있다고 말한 뒤부터 마을 이름을 개실(갈대실)이라 부르게 되었다. 노곡에서 장안산으로 넘어가는 재를 노령이라 부르는데 이곳이 장안산 일대로서 노령(蘆嶺)산맥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며, 1972년 1월 1일 행정조직 개편에 따라 6개 마을로 지명을 분리 명명하고 있다.
[신리마을] 당초 수원백씨가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로써 새로 생긴 새로운 마을이라하여 부르는 발음에 따라 섬몰이라 하였으나, 1972년 1월1일 행정조직 개편에 따라 한자로 풀이하여 신리라 하였다. 인근에 밭이 많아 잠업 전성기 때는 40여세대가 거주하였으나 현재는 20여세대가 거주하고 있으며 지금도 밭이 많아 전작물을 많이 생산하고 있다.
[대리마을] 원래는 큰몰이었다. 큰몰이라 함은 노곡리 전체 6개 마을중 제일 큰 마을이라 하여 그뜻을 따라 대리로 불러졌다. 금령김씨의 최초 정착과 강릉유씨 등으로 마을이 번창하였스며, 인근에 밭이 많아 농산물생산이 풍부했다. 옛날에는 마을뒤 가재재(노치)를 넘어 계남면 장안리로 통래하였으며, 과거 양잠산업이 번창할 때는 누에고치 생산의 주산지이기도 하였다.
[상중마을] 노곡리 마을중 중앙에 위치해 있다 하여 중리라 하였으며, 마을 한 가운데를 경계로 하여 웃뜸과 아랫뜸으로 나누어 불러졌다. 그후 웃뜸은 상중이 되었으며, 1972년 1월1일 주민행정조직 개편에 따라 불러져온 유래대로 상중 마을로 분리되었다. 노곡리 중심권이라 하여 군에서 주민생활 체육향상을 위하여 92년도에 마을 川 건너에 6,600㎡에 동네 체육시설을 조성하여 노곡 전체6개 마을에서 이용하고 있으며, 매년 추석절에 노곡리 出鄕人士 단합 체육대회를 실시하고 있다.
[하중마을] 노곡중리의 아래뜸마을로 하중이라 하였으며 72년 1월1일 주민 행정조직 개편에 하중으로 분리되었다. 마을에는 디딜방아가 있어, 경종농업초기에 농산물 가공에 이용했으며 현재도 유일하게 보존하고 있다. 또 인근 농경지가 많은탓에 1980년 소규모 단무지 가공 저장고(소규모공장)가 있어 단무지를 가공 생산하여 대도시 소비처에 납품하고 있다. 노곡리에서는 최초로 하중마을에 교회(기독교 장노회)가 설립되어 복음을 전도하고 있다.
[신촌마을] 신촌은 당초에는 묘동이라고 지명되었다. 묘동이라 함은 주민이 성인이 되어 사망하면 전 주변에 초빈하였다가 육탈되면 이장을 하였다. 이러한 관계로 묘가 많아 무듬 배미라는 지명이 불러지기도 하였다. 1972년 1월 1일 행정조직 개편에 따라 중리(하중)동네에서 분리되면서 새로운 마을이라는 뜻으로 신촌이라는 마을명이 붙여졌다.
[하리마을] 원래는 섬말마을이였다. 당시에 마을 앞 냇물이 흘러 섬아을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말양박씨의 당초 정착으로 섬말 가운데 오리3마리가 앉은 돗대를 세우고 제사를 지내왔으며 터를 다스렸다. 옛날 지방 행정구획시 현 체제였을 때는 섬마을에 곡물창고를 두고 곡물을 수납하기 위해 현감이 숙박을 하고 다녔다 하며, 그 건물이 1107번지에 남아 있다. 일제시대이후 장수 시장의 곡물 주종이 노곡리산이라고 할 정도로 주요곡창지대였으며 지금도 13개 법정리중 밭 면적이 제일 많다. 87년부터 밤실(터번덕)마을 주변의 사과재배가 성행하여 90년대 들어서 사과재배가 본격화되어 7농가가 참여하고 있으며 맛좋은 장수사과를 생산하여 명성을 얻고 있다. 96년도에는 주거환경 개선사업을 실시하여 대대적인 주택개량사업으로 마을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다. 하중마을과 같이 소규모 단무지 공장이 있다. <자료출처 : 장수군지>
5. 동촌(東村) : 장수읍 동쪽에 있는 마을
[동촌] : 아랫뜸, 웃뜸, 건너뜸
6. 덕산(德山) : 장수읍 동쪽 용소가 있는 마을
[덕산] : 원덕산
[범연] : 범연
7. 두산(斗山) - 말뫼 - 말무
두산리는 마봉산 기슭에 자리 잡은 아담한 마을이다. 마을 뒤 마봉산에는 말이 달리는 형국이라는 말봉, 투구봉, 장군바위가 있어, 이 마을을 말산으로 불렀다는 것. 그 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말(馬)과 말(斗)은 음이 같기 때문에 두산으로 와전됐다는 설과 「斗」는「泰」와 같은 크다는 뜻인데 마을 뒷산이 큰 산이기 때문에 두산으로 불렀다는 설도 있다. 지금도 어른들은 이 마을을「말무」(말뫼)로 부르고 있다.
8. 개정(開亭)
[농원] : 본동, 양지뜸, 상평
[와동] : 번덕(番德) : 불모의 넓은 원야(原野) 버딩, 버든, 뻐든, 빼덩 펀덩의 표 준말이 있다
[개정] : 개정
[하평] : 용두, 하평
9. 수분(水分)
[수분] : 양지뜸, 음지뜸
[송계] : 안담,건너담
장수읍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8㎞정도 19번 국도를 따라가면 소백산맥에서 노령산맥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있다. 이 줄기를 수분재 라고 하며, 재 옆의 마을을 수분마을이라고 한다. 그런데 재의 몬당(문덕, 몬탁)에 남쪽을 바라본 외딴집 한 채가 있다.
비가 오면 이집 몸채의 용마루을 경계로 남쪽으로 떨어지는 지붕 물은 섬진강으로 흐르고, 북쪽으로 떨어지는 지붕 물은 금강으로 흐른다. 그리고 수분마을의 가운데를 흐르는 실개천이 수분들로 흐르다가 한 줄기는 금강으로, 한 줄기는 섬진강으로 흐르기 때문에 이 마을을 흐르는 실개천이 금강과 섬진강의 최상수원이 되는 것이다. <자료출처 : 장수군지>
10. 송천(松川)
[송천] : 아랫담, 웃담, 건너담
[이교] : 아랫담,웃담 진다리(진흙다리)
[구락] : 아랫뜸,웃뜸,건너뜸
[용추] : 용추동 - 웃담, 아랫담
[구락리(鳩落)] - 구랑니
송천리 구락마을은 비둘기가 떨어진 곳이라 해서 구락으로 불렀다. 산서(오산)가 고향인 국헌 임옥산이란 분이 근세 조선초엽 성종조에 장수현감으로 있었는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어찌나 지극한지 산서에 계시는 부모에게 매일 같이 외출할 때는 「어데어데 다녀오겠습니다」출필고하고,
다녀와서는 「저차저차한 일을 보고, 잘 다녀왔습니다」반필면하며, 저녁이면 이부자리를 깔아 드리고, 새벽이면 밤새 별고가 없었는지 살펴보는 일을 (혼정이성신) 거르지 않고 행했다.
어느날 갑자기 노친께서 환우가 위중해서 좋다는 약은 다 써도 효험이 없었다. 효심이 지극한 임옥산인지라 태산 같은 걱정을 하고 있는데 시주차 들른 스님이 산비둘기를 구해 다려먹이면 효험이 있을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임옥산이 하루는 정사를 끝내고 노친의 병환이 걱정이 되어 행차를 서두르며 전에 스님에게 들은 산비둘기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 생각하면서 구락리(당시는 마을이 없었음) 앞을 지나가는데 난데 없이 산비둘기 한 마리가 원님(임옥산)의 도포자락으로 날아들어 와서 그 비둘기를 달여드리니 노친의 병이 나았다하여, 비둘기를 얻은 곳에 마을이 생겨서 구락이란 이름을 붙였는데 왜정이 들어서면서 전래의 아름다운 뜻을 망가뜨리기 위해서 구락으로 부르게 했다는 것이다.<자료출처 : 장수군지>
[이교(泥橋)] - 진다리 : 진흙다리, 진창이 되는 다리
11 용계(龍溪)
[용계] : 음지뜸, 양지뜸, 농원 및 샛터
용계마을은 고려말경에 왜장 아지발도가 졸개들을 이끌고 노략질을 하기 위해 함양을 거쳐서, 남원땅을 침노한다는 장계가 조정에 당도하자 이성계 장군은 왜군을 쳐부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남으로 진군도중, 어느날 남원으로 가는 길목인 용계마을에 이르렀다.
이성계는 왜장 아지발도가 함양에서 남원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그날 밤 닭이 울기전에 황산 좁은목에 당도해야 아지발도를 사로 잡을 수 있다는 정보를 들었으므로 서둘러서 이곳 용계까지 단숨에 왔던 것이다.
그러나 용계마을에 다달았을때는 땅거미가 지는 밤이 되어 어쩔 수 없이 저녁밥을 그곳에서 먹을 수 밖에 없었다. 장군일행이 저녁을 먹은뒤 피로가 겹쳐 잠시 잠이 들었을때 동네 닭들이 홰를 치며「꼬끼오 꼬」하고 울어댔다.
이장군은 깜짝놀라 잠을 깨었다. 그러나 정신을 가다듬고 황산벌 좁은목을 향해서 달려갔다. 그곳에 도착해서 장병을 매복시키는 등 만반의 작전태세를 갖추고 있는데 그때서야 저멀리 인근동에서 어둠사이로 첫닭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이장군은 한숨을 돌리고 한 시간쯤 있으니까 먼동이 트이는 사이로 왜병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적이다! 라고 외치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장군의 철궁에서 당겨 놓은 화살의 첫번째 살이 아지발도의 투구를 맞혀 입이 벌어지자 두번째 살이 아지발도의 목구멍을 뚫었으며, 순식간에 적진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황산대첩을 거둔 이장군은 귀향길에 용계마을에 들러 용의 화신인 닭이 울어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고 기뻐하며 마을 이름을「龍鷄」로 부르게 했다는데 왜정때 우리의 전통문화를 말살하기 위해「鷄」를 「溪」로 고쳐 부르게 했다고 한다.<자료출처 : 장수군지>
[안양] : 아랫대미, 웃대미, 건너담, 점촌
용계리 안양마을은 옛날에는 안양마을이라 불렀다. 풍수설에 의하면 버들꽃이 땅에 떨어진 형국의 명당(양화락지)이 있는 동네라고 해서 마을 이름을「버들억덕」이라고 불렀는데 역시 양화락지의 명당인데다 팔공산의 명기가 이 마을로 떨어졌는지, 동네 생긴이래 험악한 일이 생기지 않고, 동민이 평안하게 살아가는 마을이며, 또한 그렇게 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중도에 「안양」이라고 바꿨다고 한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120여호에 700여 동민이 6.25사변을 겪는 와중에서도, 비참하게 살상 당한 일 없이 평온하게 지나갔다고 한다. <자료출처 : 장수군지>
13. 식천(食川)
[식천]-남사, 북사, 샛터
식천리를 밥내 또는 밤내로 부른다.「밥내」와「밤내」는 같은 음으로 들리기 때문에 율천으로도 부른 것 같다. 원래는 이곳에 솥이 걸려있는 형국(복부혈)의 명당이 있다는 풍수지리설에서 유래된 듯 하다.
솥은 밥을 짓는 그 식천분교 뒤에 있는 산등선을「솥택거리」라 부르고 동네 옆으로 뻗은 조그만한 줄기를 주거날(주걱날)이라 한다. 그리고 서북쪽 언덕 넘어로 50여명이 놀 수 있는 반반한 바위를 화전바위라 부른다.
또한 남쪽으로 높이 솟은 봉을 개봉산이라고 하며, 그 보이는 데 있기 때문에 개형국의 동산이라는 뜻이라며, 방죽골은 방적골「저드랭이」는 「諸將來」의 와전이라 하는데 이는 팔공산의 바로 밑봉이 장군대좌의 형국이기 때문에 모든 장수가 와서 적을 막아주는 여대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자료출처 : 장수군지>
12 대성(大成)
[대성] : 대성 : 팔공산이 있음
[대덕] : 대덕,금평뜸
[구평] : 구암, 흑평
[필덕] : 상필덕, 하필덕
계남면(溪南面)
침곡리 |
침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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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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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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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뜸,가운데뜸,아랫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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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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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뜸,아랫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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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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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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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리 |
난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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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뜸,아랫뜸,유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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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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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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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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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뜸,웃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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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리 |
양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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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뜸,웃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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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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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뜸,웃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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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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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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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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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곡,율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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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덕리 |
갈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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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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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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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억,동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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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호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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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뜸,웃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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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음리 |
기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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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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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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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수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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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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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뜸,가운데뜸,웃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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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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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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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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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뜸,토심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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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리 |
곡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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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리,죽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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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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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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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양리 |
양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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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뜸,웃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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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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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편담,서편담,신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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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리 |
희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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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평,밤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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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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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편담,서편담,지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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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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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목 |
계남면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역으로 백해군의 관할 구역에 있었으며, 통일신라 이후, 757년(경덕왕 16년)에 군, 현의 명칭을 고침에 따라 백해군을 벽계군으로 개칭했으며, 계남면은 벽계군의 관할 구역에 속했다. 그 뒤에 벽계군이 벽계현(고려 태조 23년)으로 바뀌고, 벽계현이 장계현(고려 성종 14년)으로 개칭됐으며, 장계현이 장수현(근세 조선 태종 14년)에 병합되고, 장수현이 장수군(고종 32년)으로 명칭이 바뀌기도 했지만 계남면은 현재 까지 그 관할 구역에 있다.
근세 조선말엽 이전에는 부ㆍ군ㆍ현내에 방을 두었으나 편의상 구역을 획정하는데 불과했다. 이 시기에 계남면은 임남방으로 부른 듯 하며, 근세조선 1895년(고종 32년) 전국에 23부 331군을 두는 지방 관제 개정에 따라 방을 면으로 고치면서 임남면이라 했고, 1917년 면제 공포로 계남면으로 개칭하면서 말단행정 기구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17년 이전에는 장계천 이남 즉, 동평들과 남산마을은 임남면(계남면)에 속했는데 이때에 위의 두 곳이 장계면에 편입됐다. 일설에 의하면 계남면에는 반상을 찾는 완고한 유교사상을 가진 어른들이 많았기 때문에 구시대적 사고로는 양반은 저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관념으로 인하여 동평일대(시장)를 장계면에 양보했다는 설도 전한다. 그로 말미암아 면세가 아주 약해졌다.
계남면의 지형은 닭이 알을 품은 것과 같은 금계포란의 형국을 하고 있다. 노령산맥의 종산이라고 부르는 장안산이 모계로 비유한다면 법화산과 백화산은 양쪽 날개로 비유된다. 그 속에 면민 1000여 가구가 안겨 놓은 달걀처럼 포근하게 행복한 생을 누리고 있다.
장안산과 싸리재에서 발원한 유천은 계남들의 복판을 흐르면서 젖줄 역할을 하고 있다. 19번 국도는 계남면 남북(장수와 장계)으로 관통하면서 동맥 역할을 한다. 계남면은 군내에서는 유일하게 타군ㆍ도와 접하지 않은 내륙면이다. 동쪽은 장안산 넘어로 번암면과 장계면 일부에 인접해 있고, 남쪽은 싸리재와 경계를 이루어 장수읍과 인접했으며, 서쪽은 법화산이 경계가 되어 천천면과 인접했고, 북쪽은 동평들을 흐르는 실개천이 장계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계남면에 분포되어 있는 성씨는 60성에 129본이며, 남원양씨가 120호로, 제일 많고, 김해김씨 82호, 전주 최씨 47호, 밀양박씨 40호 순으로 거주하고 있다.
다음은 재 이름이다. (1) 오리고개 (침령 ~ 사곡) (2) 성재(침령 ~ 천천<봉골>) (3) 검바우재 (사곡 ~ 고기) (4) 봉골재 (고기 ~ 천천<봉골>) (5) 솔무재 (요전 ~ 난평) (6) 오애재 (명동 ~ 난평) (7) 광대고개 (명동 ~ 중방) (8) 봉황재 (중방 ~ 천천<반월>) (9) 절두고개 (양신 ~ 천천<반월>) (10) 재공재 (음산 ~ 곡리) (11) 비암재 (덕곡 ~ 음신) (12) 허기재 (갈평 ~ 장계<남산>) (13) 아리랑고개(갈평 ~ 구억) (14) 성황고개 (원호덕 ~ 구억) (15) 새올고개 (고정 ~ 조곡) (16) 조리고개 (조곡 ~ 화산) (17) 피나무재 (화산 ~ 장계<주촌>) (18) 산막골재 (화산 ~ 양지) (19) 풍주재 (곡리 ~ 은신) (20) 가재재(평지 ~ 장수<노곡>) (21) 새마기재 (평지 ~ 장수 <덕산>) (22) 고배기재 (희평 ~ 장계<궐촌>) (23) 무룡궁(무릉궁)재 (괴목 ~ 번암<지지>) (24) 싸리재(계남 ~ 장수)이다.
계남면의 표고는 해발 380m이고 면적은 50.28㎢이며 인구는 2003년 6월 현재 1,012가구에 3,145명(남 1,494명, 여 1,651명)이다. 행정구역은 법정리수 8, 분리(마을) 26, 자연마을 35, 관할구역 48반이다.
1. 침곡(砧谷)
[침령] : 침령
[사곡] : 웃뜸, 가운데뜸, 아랫뜸
[고기] : 웃뜸, 아랫뜸
[요전] : 요전
계남면 침곡리 요전마을은 아주 순하고 평평한 산으로 둘러 싸여있고, 주변의 논과 밭이 비옥한데다가 평온하고 평화스럽기만 하게 느껴지는 마을이다. 우리가 흔히 평화와 이상의 세상을 요순시대라고 부르는데 강암 박종빈이 이곳에 터를 잡아 후손에게 전할 때 주위의 산세나 지형을 살펴보니 이상향으로서 손색이 없고 가히 요의 땅이 될만하다고 해서 요전이라 했다 한다.
2. 화양(華陽)
[난평] 웃뜸, 아랫뜸, 유촌
화양리 난평마을은 계남면에서 서쪽으로 보이는 경주왕릉과 같은 난봉 바로 밑에 위치하고 있다. 지관의 말에 따르면 난평마을은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자리가 있다고 해서 난평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지금 알봉이 있는 곳이 옛날에는 평전이었는데 근처의 어느 여자가 새벽밥을 지으려 일어나보니 그곳에 산이 솟아오르고 있어서 엉겁결에 「산이 큰다」고 고함을 지르니 그뒤부터 모양이 알같이 생긴채 더 크지 않고 현존하고 있다고 한다.
속설에 의하면 그 여자가 고함을 지르지 않았던들 알봉은 더 커지고 그 고을에서 아주 훌륭한 인물이 태어났을 것이라는 말도 있다. 촌로들은 마을 바로 아래에 계남중학교를 설립하여 수천명의 병아리들이 깨어나서 나라를 위해 일할 재목으로 자라나고 있으니 이 자리가 금계포란혈이 분명하다고 전한다.
[명동] 명동
[중방]-중뱅이-아랫뜸,웃뜸
계남면 화양리 중방마을은 원래는 골말골이라 해서 지금의 중방마을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었다. 밀양박씨들이 제일 먼저 터를 잡아 살았다. 그들은 부유하게 살았다. 남들이 말하기를 박씨의 선산의 묘를 갈마음수혈에 썼기 때문이란 것이다. 어쨌던 갑자기 거부가 되니 교만해지고 인색하기 이를데가 없었다. 거지에게 동냥 한 푼 주는 일 없고, 중이 시주하러 오면 동냥은 고사하고 중을 잡아 머리에 대테를 메우는 일이 일쑤였다. 이런 소문을 들은 어느 도승이 악한 짓만 하는 박씨를 망하게 하려고 박씨집을 찾았다.
박씨는 그중이라고 해서 반갑게 대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중은 정중하게 「소스이 이곳을 지나다 보니 저건너 묘가 있는데, 그 묘가 갈마음수혈의 대명산인지라 뉘집 묘소인가 물었더니 박씨댁 묘소라고 해서 찾아 왔습니다. 갈마음수혈은 묘 쓴지가 오래되면 그 앞 방죽에다 놋쇠를 많이 넣어서 메워야 다시 발복을 하는 것이기에 일러 드리러 왔습니다.」하고는 사라졌다. 박씨는 도사가 시킨대로 하다보니 유기구하는데 살림이 자꾸 줄어들어 그 길로 비전박토 하나없이 망했고 동네도 괴변이 생겨 이곳을 버리고 그 옆에다 새터를 잡고 살았다 한다.
진재마을
화양리 진재마을은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길이 없고 다만 그 옆에 계남중학교가 몇 년전에 들어섰다. 옛날 진재마을에는 문화 유씨와 남원 양씨가 살았다. 두 씨족들은 아주 부유하게 잘 살았는데 항시 걱정이 있었다. 마을 옆을 흐르는 냇물이 평시에는 아무일 없으나 비가 많이 오면 마을로 범람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동민들은 잠을 못 자고 수방을 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이에 진저리를 낸 동민들은 내의 방향을 돌리기로 결의하고 많은 재산과 노력을 들여 내를 다른 곳으로 흐르게 했다. 결돌린 뒤부터는 그렇게도 잘 살던 양 씨족들이 망하고 동네마저 폐촌이 되었다. 냇물의 방향이 달라지므로 동네 운이 나가버렸기 때문이었다고 전해 오고 있다. 옛부터 냇물은 꼭 제자리를 찾는다는 말이 있는데 몇 년 전 옛 진재마을 자리에 중하교를 지으면서 냇물을 옛날 흐르던 위치로 돌렸다. 이것을 본 주변 노인들은 풍수설이라는 것은 묘한 것이며 이제 중학교는 날로 번성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자료출처 : 장수군지>
3. 신전(薪田)
[양신] : 아랫뜸,웃뜸
[음신] : 아랫뜸,웃뜸
[농원] : 농원
[덕곡] : 덕곡, 율평
밤정이 율정
현재의 밤정이에서 남쪽으로 300여m 떨어진 곳에는 100여호가 넘는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이 윗밤정이었다. 밤정들을 대는 봇도랑물이 원래윗쪽 마을 아랫쪽을 감돌아서 흐르고 있었는데 마을 주민들은 봇도랑을 마을 산밑으로 옮겼다. 그후부터 마을이 퇴락하기 시작하여 폐촌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밤정이 자리에 한집 두집 취락을 형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전답이 된 윗밤정자리에서는 방돌, 기와 등이 지금도 간혹 나오고 있다.
4. 호덕(好德)
[갈평] : 갈평
[구억] : 구억, 동편
[원호덕] : 아랫뜸, 웃뜸
장안산이 북서쪽으로 뻗어 옥녀가 베를 짜는 형국을 한 작살봉 산록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마을이 덕곡이다. 마을주변을 살펴보면 산과 이로정으로 뻗어나간 날이 베틀의 다리이며, 뒷산의 수등봉이 불을 밝혀주는 형국이요, 그 옆에 낙사봉이 북(베를 짤 때 실꾸리를 담는 기구)의 형국이며, 도한 물투가리의 형국이라 하여 옥녀직금의 형국과 일치된다는 것이다. 옥여가 고은 비단을 짜듯이 이 마을은 인심좋고 덕이 있는 마을이라 하며 덕곡이라 부른다.
5. 화음(華陰)
[기산] : 기산
화음리 기산마을을 키 같이 생긴 산으로 둘러싸여 마을이 형성됐다고 해서 기산(箕山)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중년에 붙여진 이름이고, 옛날에는 기산(杞山)으로 불렀다고 한다. 여러 도의 감사를 지낸 파은 박수기공은 연산군의 폭정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선정하기를 여러번 간 했으나 듣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지금의 기산땅에 낙향하여 지내다 보니 산세가 좋고 땅이 비옥하여 이곳에 터를 잡고 기산이라 불렀다.
중국의 고사에 요임금은 기산령수에서 주경야독 자연을 벗삼고 사는 소부와 허유에게 벼슬할 것을 권했으나 소부는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며 영수에 가서 귀를 씻었고, 허유는 귀 씻은 더러운 물을 소에게 먹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박공은 자기의 처지가 그와 같다고 생각, 그곳을 기산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고정] : 고정, 수열
고정리 수열마을의 유래는 이 마을에 사는 해주오씨부인이 만고의 열을 심었다는 데서 비롯됐다. 이웃마을에서 이곳으로 시집온 오씨부인은 양사순과 단란하게 살고 있던 중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게 되었다. 이때 왜적들은 남원성을 침공한 후 이곳에 당도, 오씨부인을 능욕하고 유방을 만지며 온갖 희롱을 했다. 이에 오씨부인은 악마와 같은 더러운 왜적들이 만진 유방을 칼로 도려내고 자진했다고 한다. 그후 마을 사람들은 오부인이 만고의 열을 심였다하여 마을 이름을 수열이라 하고 마을앞 들을 수열평이라 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거] : 아랫뜸, 가운데뜸, 웃뜸
[조곡] : 조곡 (새울마을)
소백산맥에서 줄기 하나가 힘차게 뻗어 내려와 백화산 봉우리가 맺혀지고 그 여세가 남서쪽으로 조용히 휘감아 내려온 따뜻한 양지쪽에 화음리 새올마을이 있다. 이 마을의 안산에 황새봉이란 봉우리가 있고 마을 아래에는 새알이란 조그마한 알봉이 있다. 옛날 전라감사 이서구씨가 이곳 계남땅을 지나 가면서 하는 말이 「백화산에서 뻗어내린 산세가 마치 황새가 먹이를 찾아 날으는 형국」이라 하여 이 봉을 황새봉이라 하였고 마을 아래에 있는 조그마한 봉우리는 새알봉이라 명명하여 지금도 불리워지고 있다. 그뒤로 이 마을을 새올이라부르게 되었으며 속설에 의하면 알봉에서 알이 깨어나면 훌륭한 인물이 이 마을에서 태어날 것이란 전설이 있으며 현재는 조곡마을이라고 불리운다.
[화산] : 아랫뜸, 토심어
6. 가곡(佳谷)
[곡리] : 곡리,죽전
[평지] : 평지
7. 궁양(弓陽)
[양지] : 아랫뜸, 웃뜸
[궁평] : 동편담, 서편담, 신기
8. 장안(長安)
[희평] : 희평, 밤실
[원장안] : 동편담, 서편담, 지소
[괴목] : 괴목
계북면(溪北面)
월현리 |
월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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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월전,산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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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계리 |
매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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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정지중담,장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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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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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곡,신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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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소리 |
농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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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담,가운데담,신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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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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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담,웃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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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전리 |
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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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담,아랫담,회관담,회관웃담,가운데담,웃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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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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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담,갈벌,웃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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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평리 |
내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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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음지,매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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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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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담,아랫담.산촌, 상백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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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촌리 |
과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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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동,하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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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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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점,양지담,상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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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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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담,원촌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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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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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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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악리 |
양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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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중담,용소담,구석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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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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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담,웃담,길담 |
계북면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역으로 백해군(백이군)의 관할 구역에 있었으며, 통일신라 이후 757년(경덕왕 16년)에 군,현의 명칭을 고침에 따라 백해군을 벽계군으로 개칭한 뒤에도 계북면은 벽계군의 관할 구역에 속했던 것 같으나 솔개재(현재는 송치(솔고개재)로 잘못 부르고 있음) 이북, 군 지금의 원양지구 (원촌, 양악)와 안성면(무주군) 일부지역(주고, 마암)에는 양촌소(양악소)를 양악마을에 설치해서 벽계군이 관할했던 것 같다. 지금도 양악마을에는 동헌터, 악터, 저자터 였었다는 곳이 구전되어 온다. 또한 일설에는 삼한 78 부족국의 고을로 추측되는 양촌골이 양악마을에 있었다는 전설도 있다.
아무튼 양촌소는 벽계군이 벽계현으로 바뀌고 다시 장계현으로 명칭이 바뀐 뒤에 장수현에 병합 될 때까지 (근세 조선 태종 13년) 지속됐던 것 같으며, 뒤에 소가 없어지면서 원양지역은 계북면에 편입된 것 같다. 이렇듯 오랜 세월에 걸쳐 벽계군, 벽계현, 장계현, 장수현 , 장수군으로 고을의 명칭이 바뀌고 병합되기도 했지만 계북면은 위에 적은 군현의 관할하에 있었다. 근세 조선말엽 이전에는 부군현내에 방을 두었으나 편의상 구역을 획정하는데 불과했다. 이 시기에 계북면은 임북방으로 부른 듯 하며 근세 조선 1895년(고종 32년) 전국에 23 부 331군을 두는 지방 관제 개정에 따라 방을 면으로 고치면서 임북면이라 했고, 1917년 면제 공포로 계북면으로 개칭했다. 이때부터 면은 말단행정기구의 중요 역할을 했다.
계북면의 지형은 태백정간(소백산맥)이 남쪽으로 힘차게 뻗다가 남덕유산이 우뚝 솟았는데 이 산의 서쪽 언저리에 자리 잡은 오목한 분지로 되어 있다. 서의 남쪽으로는 덕유산의 맏아들이라는 말글살, 악호봉, 추락봉 등이 동에서 서쪽으로 큰 줄기를 펼쳤으며, 깁재는 그 줄기이고, 그 줄기 넘어로 장계면과 인접했다. 동쪽은 덕유산 넘어로 경남 거창군 북상면과 인접했으며, 북쪽은 양악과 원호마을이 경계가 되어 무주군 안성면과 인접했다.
또한 덕유산에서 서북쪽으로 솔개<연> 모양을 한 산줄기가 면의 중앙을 가로 질렀는 데 그 재를 솔개재(송치가 아님)라 하며 북쪽을 원양지역, 남쪽을 어매지역이라 한다. 덕유산에서 발원한 세가닥 물줄기중 한 줄기는 경관이 빼어난 토옥동계곡을 거쳐 양악 큰 들의 젖줄 노릇을 하는 양악천이며, 또 한 줄기는 구멍보(천복)를 거쳐 갈벌들과 어전들의 젖줄 역할을 하는 어전천이고 마지막 한줄기는 농소천으로, 농소들을 적셔주고 매계 앞에서 어전천과 합류하여 매계천을 이룬 다음 매계들과 월현들을 관개하고 금강 상류가 되어 천천으로 흐른다. 또한 계북면의 중심부를 남(장계) 북(무주)으로 관통하는 19번 국도는 면의 동맥역할을 한다.
다음은 재 이름이다. (1) 장구멍재(매계 ~ 장현) (2) 중재 (장현~월전) (3) 지마재(어전 ~ 백암) (4) 솔개재(어전 ~ 원촌) 송치 (솔고개재가 아님) (5) 깁재 (계북<압곡) ~ 장계<범덕골>)이다. 계북면에 분포돼 있는 성씨는 17성에 24본으로서 (완전 조사된 것이 아님), 밀양( 박씨 75호로 제일 많고 김해김씨 59호, 금계한씨 36호, 경주김씨 47호 순으로 거주하고 있다. 면소재지의 표고는 해발 460m이다. 면적은 55.97㎢이고 행정구역은 법정리수 7, 분리(마을) 수 14, 자연마을수 23마을 관할구역 42반이다. 1996년 현재 인구는 783가구에 2,552명(남 1,267명, 여 1,285명)이다.
1. 월현(月峴)
[월현] : 장현, 월전, 산촌
2. 매계(梅溪)-매골
[매계] : 솔정지 중담, 장동
매골(매계)마을은 매화꽃이 떨어지는 형국의 매화낙지 명당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1914년 지방관할개정시 매계로 바뀌었다. 이 마을은 300여년전에 밀양변씨와 인동장씨가 정착하면서 취락을 형성했다고 하며 근세 조선말기에 함창김씨, 경주김씨 등이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다.
[압곡] : 압곡,
계북면 압곡마을이 형성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50년전에 합천이씨가 처음으로 이 동네에 와서 살게 되면서부터라 한다. 이 동네에는 지네날이라는 작은 산맥이 있으며 오리형의 혈이 있어서 오리압자(鴨)를 쓰게되어 鴨谷으로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총 가구수는 25여호에 인구는 53여명이 살고 있다.
신기
매계리 신기마을을 삵다리라 부른다. 한자로 狸脚(이각)이라 쓰는데 옛날 이곳을 지나던 도사가 주변의 산세를 보고 마을 이름을 삵다리로 불렀다고 한다. 삵다리란 살괭이(狸)의 다리(脚)란 뜻으로 마을 앞에 있는 동산이 살쾡이의 다리 형상을 하고 있다는 거이다. 이 마을의 서북쪽에 위치한 산은 장수팔경의 하나인 매산송대인데 산모양이 닭벼슬 같이 생겼다고 해서 일명 닭벼슬날이라고도 한다.
한편 이 마을의 동남방에서 서북쪽으로 뻗은 날이 있는데 지네같이 생겼다고 해서 지네날이라 부른다. 삵다리 마을은 달과 지네가 서로 응시하는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삵봉이라 부르는 안산에서 팔뚝처럼 뻗은 산줄기는 동네 바로 앞에 동산을 이루면서 달과 지네의 싸움을 말리는 형국을 하고 있다. 그래서 마을 부귀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고, 팔뚝처럼 뻗은 동산이 삵쾡이의 다리에 해당된다고 해서 동네 이름을 삵다리로 부른다고 한다. 행정상의 동명은 신기라고 하는데 왜정시에 붙여진 이름이다
3. 농소(農所)
[농소] : 아랫담, 가운데담, 신기
계북면 농소마을은 조선 태조 3년에 박, 송, 김 3성이 이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고 한다. 현재는 70여가구에 253여명이 살고 있다. 비교적 농토가 많고 농사짓기에 편리한 동네라는 뜻으로 農所라고 했다는 데 그럴듯한 지세로 보인다. 동네 사람들은 타동네에 비하여 부지런하며 농사를 잘 짓는다고 한다. 또 문태서, 박춘실 의병장 등의 항일 격전지이기도 하다.
[연동] : 아랫담, 웃담
계북면 연동마을이 형성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년전에 이씨가 처음으로 정착하여 살게 되면서 부터이다. 현재 64여호의 총 가구에 총 인구 201여명이 살고 있다. 이 마을에는 계북면 내에서는 가장 많은 천주교 신도들이 살고 있으며 단결심이 강하여 새마을 사업 등 마을의 공동사업이 잘 추진됐다고 한다.
4. 어전(於田)
[어전] : 길담, 아랫담, 회관담, 회관웃담, 가운데담, 웃담
[문성] : 아랫담, 갈벌, 웃담
계북면 문성마을은 약 4백여년 전에 금계한씨가 계남으로부터 이주, 음지담에서 정착하면서부터 형성되었다 한다. 그 뒤 금녕 김씨가 들어와 살면서 차츰 마을이 커지기 시작하자 양지담까지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76가구 190여명의 사람이 살고 있다.
5. 임평(林坪)
[내림] : 양지, 음지, 매자
내림마을
계북면 내림마을은 약 200년전에 진양강씨가 처음으로 살게 되면서 형성된 후 지금은 총 36여 가구에 118여명이 살고 있다. 姜, 金, 李씨가 각각 6~7호씩이고, 기타 성씨는 몇집씩 살고 있다. 외림과 같이 솔개고개의 솔개라는 새가 안숲으로 날아드는 형체의 뜻으로 내림이라고 했다고 한다.
[백암] : 웃담, 아랫담. 산촌, 상백암
계북면 백암마을은 이곳에 흰돌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하여 1964년 행정구역 개편때 붙여진 이름이다. 지리적으로 조그마한 시내를 사이에 두고 군계를 이루어 장수 흰바위 진안 흰 바위로 부르는데 행정구역상에 불과하고 모든 생활권은 사실상 장수 흰바위의 한 동네에 속한다. 총 가구수는 45호 정도이며 폐교된 백암초등학교가 있고 대유광업소에서 규석(흰돌)을 많이 캐내고 있다. 박춘실 의병장의 성장지이며 항일 격전지이기도 하고 또 그의 묘가 두류봉에 있다가 지금은 대전 국립묘지에 모셔져 있다. 지금은 규석 채광도 중지하고 있다.
6. 원촌(院村)
왕이 이곳을 지나 다리를 건너갔다고 해서 왕경다리라는 동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 말은 이해하기 어렵고 분명한 것은 구한말에 역촌이었다는 사실이다. 역촌이란 대로상의 적당한 위치에 설치하는 공식 비공식 여인숙소가 있는 곳이다. 원촌은 대략 백리 상거한 위치에 설치한다. 우리 군내에는 번암면에 원촌이 있고 이곳에 원촌이 있는데 거리가 백리정도 된다. 원촌이란 이름은 원님이 묵어가는 역촌이란 말이라고 한다.
원촌리 파곡마을은 180여년전 밀양박씨가 처음으로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이곳의 지형이 흡사 학이 보금자리에서 먹이를 파고 있는 형국과 같다하여 파파실로 불렀다는 말도 있고 일설에는 마을 앞에 파초의 열매와 같은 봉우리가 있어서, 파곡이란 행정상의 동명으로 붙였다는 말도 있다.
[과목] : 상동,하동
[외림] : 옹기점, 양지담, 상담
계북면 외림마을은 지금부터 약 250여년전에 함안조씨인 조백과 조추의 형제가 무주로부터 이주하여 살게 되면서 형성되었다. 그 뒤 약 50여년이 지난후 광산김씨가 들어오고 또 그 후 50년이 지나서 창원황씨가 무주에서 이사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솔고개는 솔개고개라고 부르는 말이 맞다. 연유를 말하면 솔개라는 새가 숲속을 찾아드는 지형으로 안의 숲이 지금의 內林이라 하고 밖의 숲이 外林이란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된다. 이 마을은 총 가구수 59호에 총 인구수는 163명으로 20년전에 103호까지 번창했었으나 이농현상으로 도시로 이사가는 바람에 많이 줄어들었다.
[원촌] : 시장담,원촌담
[을곡] : 을곡
7. 양악(陽岳)
[양악] : 상담, 중담, 용소담, 구석담
양악마을은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옛날 양촌고을의 고을터였다는 전설이 있는 마을이다. 그래서인지 이 마을에는 동헌터, 옥터, 향고터였다는 자리가 있다. 아무튼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경계지역이어서 격전지였던 흔적이 있다. 백제시대에는 마을 위쪽에 심방사 큰절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도 5층 석탑이 지방문화재로 남아있다. 속설에 의하면 양학이라고 해서 도사가 학을 기르며 살았다는 곳이기도 하다. 앞산을 학산이라 부르고 이웃마을로 가는 고개를 학고개로 부르는 말들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이 마을은 한글학자 정인승박사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또한 이 마을에는 양악뜸, 농소막뜸, 구석뜸, 독가촌뜸 등 여러 뜸이 모여서 취락을 형성하고 있다.
[당저] : 아랫담, 웃담, 길담
고려 충선왕때 문하시중을 역임하고 장천부원군에 봉해졌던 이림간의 출생지로 알려져 있고 계북면 당저 마을은 언양진씨가 전남 곡성에서 처음 이주하여, 집을 짓고 살게 되면서 형성됐다고 한다. 약 200여년 전이라고 한다. 그 뒤를 이어 남평문씨가 들어와 살게 되면서 동네가 커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동네의 위쪽에 당산이 있는데 이 당산에는 노송과 바위 그리고 느티나무가 잘 어울려 경치가 좋다. 그리고 이 당산에 큰 절이 있었는데 6·25때 불타 버리고 지금은 흔적이 없다. 그래서 당산의 밑이라는 뜻으로 당밑이 속말로 댕밑이 되었다고 하는데 한자로 堂底라고 쓴다.
번암면(磻岩面)
교동리 |
상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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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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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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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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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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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촌,골몰,쇠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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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포리 |
도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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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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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북 |
|
원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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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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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북,하북,먹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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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리 |
원죽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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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편,서편,회관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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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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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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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암리 |
사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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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편,서편,방화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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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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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임신,상임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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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리 |
삼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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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거,독가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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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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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광대동편,어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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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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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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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리 |
상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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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뜸,회관뜸,갈전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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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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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지뜸,미골뜸,속곰이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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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리 |
죽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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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뜸,안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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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단리 |
원노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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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뜸,도로변뜸,외관뜸아랫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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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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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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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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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뜸,바깥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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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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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뜸,가운데뜸,견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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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동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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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동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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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곡리 |
성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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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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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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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암,회관뜸,큰뜸,농원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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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론리 |
신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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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터,신평,원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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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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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음지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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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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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뜸,아랫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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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리 |
유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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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항,남양,구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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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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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뜸,바깥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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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면은 구 한말 이전에는 상번암방, 중번암방, 하번암방으로 부르면서 남원부의 관할 구역에 속했는 데 이때의 방은 편의상 구역을 획정하는 데 불과했다. 그래서 구역명을 부를 때 방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았던 것 같다.
예(상번암, 중번암, 하번암 등) 그후 1906년에 지방관제 개정으로 상·중· 하번암은 남원시에서 장수군으로 편입했으며 고종 32년(1895) 지방 관제 개정으로 방이 면으로 개칭됨에 따라 장수군 상번암면 (교동, 국포, 죽산, 사암) , 중번암면(죽림, 노단, 동화, 지지), 하번암면(논곡, 대론,유정)으로 부르게 되었다.
1917년 면제 공포로 상·중·하번음면이 번암면으로 통폐합되었다. 이때부터 면은 말단행정기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뒤 반이 번으로 음이 와전됐으며 반(磻)자도 번(番, 서릴반)으로 바귀었다. 그러나 磻 자를 써도 된다. 번암면은 태백정간(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의 두메산 어느골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남북으로 길게 펼쳐져 있다.
주변에 백운산, 장안산, 팔공산, 대성산, 고남산이 동서남북으로 병풍처럼 둘러 있다. 이렇듯 큰 산들이 첩첩으로 둘러 있어 수분계곡, 국포계곡, 사암계곡, 지지계곡, 유정계곡 등이 수십리의 골짜기를 이루고, 자연경관이 빼어나서 가히 무릉선경을 연상케 한다.
계곡마다 흐르는 요천 맑은 물은 노단에서 합류하여 번암들의 젖줄 역할을 하며, 유유히 남원으로 흐른다. 번암면의 지형은 동으로는 백운산과 경계를 이루어 경남 함양군 백전면과, 남원시 아영면, 운봉읍과 접해있고, 남으로는 대론들을 가로질러 흐르는 실개천으로 경계를 이루어 남원시 산동면과 접해있고, 북으로는 수분치와 경계를 이루고 장수읍과 장안산과 경계를 이루고, 계남면, 장계면과 도 무룡궁재와 경계를 이루어 양면과 인접해 있다.
(1) 수분재(번암, 상교~장수, 수분) (2) 말치재(번암, 도장~산서, 마평) (3) 산배재(번암, 도장~보절면) (4) 북치재 (번암, 도장~남원, 산동) (5) 바구리봉재(번암, 사암~장수, 송계) (6) 남중치재(번암, 삼거~경남, 백전) (7)퍼밭재(번암, 상동~장수, 덕산) (8) 봉화재 (번암, 하동~남원, 아영) (9) 아홉새들이고개(번암, 하동~남원, 아영) (10) 짓재(번암, 신기~남원, 아영) (11) 꼬부랑재(번암, 두견~남원, 아영) (12) 뒷재(번암, 성암~남원, 아영) (13) 당산고개(번암, 수척~남원, 산동) (14)매요재(번암, 사치~남원, 운봉) (15) 밤재(사암~상하평) (16) 불바래기재(상평~임신)임 (17) 짓재(하평~죽산) (18) 동산벌고개(하노단, 신월) (19) 복성이재(신기~성암) (20) 꼬부랑재(논곡~성암) (21) 등치재(신원~대론) (22) 모래재(유정~사치) 등이다.
번암면에 분포되어 있는 성씨는 51성에 118본이며, 김해김씨가 85호로 둘째고, 흥성장씨가 171호로 제일 많이 거주하고 있다. 셋째는 밀양박씨로 67호다. 번암면의 면적은 126.09㎡이며, 위치는 동경 127도38분2초 ~ 127도26분9초와 북위 35도26분9초~35도38분3초다. 1996년 현재 번암면의 인구는 3,871명(남 1,960명, 여 1,911명)에 1,259가구가 살고 있다. 행정구역은 법정리수 11, 분리(마을)수 28, 자연마을수(관할구역) 50, 반수 61반이다.
<자료출처 : 장수군지>
1. 교동(橋洞) -다리골
[상교] : 상교 - 위다리골
[하교] : 하교- 아랫다리골
[금천] : 동촌, 골몰, 쇠골
2. 국포(菊圃)
[도장] : 도장골
[원북] : 원북
[국포] : 상북, 하북, 먹방
3. 죽산(竹山)
[원죽산] : 동편, 서편, 회관뜸
[대성방] : 대성방
4. 사암(紗岩)
[사암] : 동편, 서편, 방화동
[임신] : 하임신, 상임신
5. 지지(知止)
[삼거] : 삼거, 독가촌
[광대] : 광대, 광대동편, 어채
[지지] : 원지지
원촌마을 원(院)은 근세 조선시대의 교통의 오로에 세운 국립여관(國立旅館)이다. 전국의 각 도로를 대중소로 나누어 각 요로에 세운, 원과 인가가 드물어 행인의 통행이 불편한 곳에 세운 원 등 두가지로 나룰 수 있다. 그런데 순천에서 구례, 곡성을 통하여 남원, 장수, 무주를 거쳐 충북 영동으로 가는 현 19번 국도는 옛날에도 2등급의 국도였다. 우리 장수의 여러 마을중 원촌이란 이름을 가진 곳은 계북면 원촌마을과 번암면 원촌마을의 두 곳 뿐이다.
모두 국도변에 있는 마을이며 우리나라 리수로 백리를 상서한 거리에 있다. 지금은 원촌마을의 입구에는 옛날 남원부사가 묵어갔다는 순시비가 섰으며, 마을뒤의 논에는 옛날의 원사가 있었다는 표식으로 기, 토사편이 이따금 출토되기도 한다.이 원의 주변에 하나 둘의 인가를 취락을 형성한 것이 오늘의 원촌마을이다.
6. 동화(洞花)
[상동] : 아랫뜸, 회관뜸, 갈전뜸
[하동] : 평지뜸, 미골뜸, 속곰이뜸
7. 죽림(竹林) - 드랭이
[죽림] : 강변뜸, 안뜸
우리나라 8대종산인 장안산과 백두대간인 백운산 두 줄기사이에 자리잡고 있던 이 마을은 1750년경에 형성되었으며 상평과 하평 두 자연마을을 합쳐 상하평이라 불리웠다.
벽계승람에는 상하평응(上下坪應)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인근 주민들은 이마을을 드렝이라 즐겨 불렀는바 그 유래를 보면 옜날 어떤선비가 성적산(聲笛山) 에 올라 피리를 불었는데 피리소리의 높고 낮은 아름다운 음율이 번암면 여러마을에 퍼졌는데 이소리를 “들리느냐, 들어라, 들린다, 들었다”에서 피리소리에 응대하는 의미를 부여하여 그때부터 이 마을을 드렝이라 불리워 왔다고 한다.
마을지세를 보면 마을 뒷편 산 능선을 중심으로 이 마을이 있는 동쪽은 경사가 비교적 완만하여 온화한 느낌을 주는 반면 반대편 사암리 쪽은 경사가 심하고 힘있게 솟아오른 세봉우리가 있어 삼봉산이라 부른다.
한때 50가구 300여명의 주민이 다정하게 살아왔던 이 마을은 1987년부터 시작된 동화댐 건설로 인해 마을이 없어저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실향민이 되어 전국각지에서 흩어저 살고있다.
사진은 이 마을 언덕에다 세운 “망향의 동산” 으로서 여기에는 망향각과 망향비, 망향의글과 마을지명, 이곳에 살았던 분들의 이름이 새겨진 마을비가 세워져 있으며 , 매년 5월초 실향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망향제를 올리며 정담을 나누고 있다
8. 노단(魯檀)
[원노단] : 웃뜸, 도로변뜸, 외관뜸 아랫뜸
[하노단] : 하노단
[신기] : 안뜸, 바깥뜸
[두견] : 큰뜸, 가운데뜸, 견천
[시동강] : 시장, 동강
남노령의 주봉을 이룬 대성산 동쪽 언저리에 포근하게 자리잡은 삼백여 대촌의 명당마을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마을이 번암면 소재지인 노단마을이다. 이 마을은 근세 조선초 중엽에 형성된 흥성장씨 취락이다. 어느날 이곳을 지나던 도사가 명명했다 하는데, 이 마을의 주룡을 이루는 산이 성현이 명기를 띠었다해서 대성산이라 이름하였다 하며, 이 마을의 형국이 노나라에서 태어난 대성인 공자님의 집터와 같다고 하여 노단이란 이름을 붙혔다는 것이다. 이렇듯 명당이라 그런지 시골답지 않게 날로 번성해 가고 있다.
9. 논곡(論谷)
[성암] : 복성
복성마을은 번암면 논곡리와 남원시 아영면 성리사이에 있는 조그마한 산골마을로 행정구역은 번암면 논곡리에 속한다. 이 마을 뒤로는 소백산맥(태백정간)의 능선이 크고 작은 봉우리를 이루며 유유히 남북으로 뻗어가고 있다. 이 마을은 첩첩산중이어서 농로가 제대로 뚫리지 못하고 있다. 복성마을은 아래와 같은 연유로 취락이 이룩되었다고 한다. 옛날에 변도탄이란 기인이 있었다. 변도탄은 나라의 군량미를 관리하는 양관으로 있었다.
그가 어느날 천기를 보고, 삼년내에 국가에 큰 전란이 있을 것을 알았다. 앞으로 닥쳐 올 전란에 대비,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상소했으나 평화시에 혹세무민한다는 이유로 삭탈관직을 당했다. 변도사 보아하니 북두칠성의 복성이 갑짜기 밝은 빛을 남쪽으로 비추므로 별빛을 따라 지리산쪽으로 가다가 별빛이 멎은 곳에서 쉬었다. 이곳이 오늘날 복성부락에서 약간 떨어진 복성이라는 곳이다. 변도사는 이곳에 움막을 짓고 피난때 가지고 왔던 많은 양곡을 가루로 만들어서 벽과 천장을 발랐다.
이삼년 뒤에 마침내 나라에 큰 전란이 일어났다. 외적의 침입으로 임금께서는 몽진길에 오르고 왕족과 중신들은 이리저리 흩어졌다. 어느날 구름처럼 몰려드는 피난민 틈에 허기가 지고 노독으로 기진맥진한 왕족일행을 발견하고 벽을 떼어서 죽을 수어 먹게 하여 목숨을 구하였다. 또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군을 위하여 움막에 발랐던 쌀가루를 군량미로 사용하였다.
몇 년 동안 계속되었던 전란은 끝이 나고 한 사람 두 사람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 복성마을이 형성됐다고 한다. 변도탄이 피난올 때 군량미를 가지고 온 죄는 크지만 국가 위급시 국가를 구하는 군량미로 긴요하게 사용했기 때문에 임금께서 죄를 사하고 오히려 상을 내렸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남원시 송동면의 변씨들이 변도탄의 후예라는 설도 있다.
[논곡] : 주암, 회관뜸, 큰뜸, 농원뜸
10. 대론(大)
[신원] : 샛터, 신평, 원촌
[대론] : 양지, 음지뜸
[수척] : 웃뜸, 아랫뜸
11. 유정(柳亭)
[유정] : 만항, 남양, 구선
[사치] : 안뜸, 바깥뜸
산서면(山西面)
오성리 |
방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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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담,아랫담,등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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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 |
|
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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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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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개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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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리 |
양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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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촌,신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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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평 |
|
마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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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리 |
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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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왕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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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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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촌,반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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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서리 |
봉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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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담,아랫담,척동,신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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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사상리 |
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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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담,아랫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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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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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동,가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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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하월리 |
창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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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동 |
|
신등 |
|
신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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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룡리 |
이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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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뜸,가운데뜸,아랫뜸,약촌,용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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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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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리 |
대창 |
|
동편담,서편담,소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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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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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편담,서편담 |
|
용암 |
|
용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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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리 |
하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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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뜸,아랫뜸,암가 |
|
월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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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동,강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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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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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장,정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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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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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지리 |
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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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뜸,아랫뜸,삽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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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전 |
|
진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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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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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리 |
원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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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편담,서편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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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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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뜸,아랫뜸,도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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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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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리 |
신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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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웃뜸,아랫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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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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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흥,창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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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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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선리 |
용전 |
|
용전 |
|
압곡 |
|
압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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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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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담,아랫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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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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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동교,하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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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동화리 |
시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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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동,교동,면동,시장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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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곡 |
|
능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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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촌 |
|
동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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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석 |
|
웃등석,아랫등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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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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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괴정 |
근세 조선의 고종조 이전에는 노령산맥의 웅봉인 팔공산(성적산)으 서쪽 언저리에 있는 오성, 쌍계, 백운, 학산(동부)마을 등을 신서방이라 하여 장수현의 관할 구역에 속했으며 고종 32년(서기 1895년)에 전국에 23부 331군을 지방관계 개정으로 방을 면으로 고치면서 신서면이 수사면으로 개칭했다.
1906년 남원시의 관활 구역이었던 내진전, 외진전방이 장수군으로 편입되면서 수서면에 병합되었다. 그후 1917년 면제 공포로 수서면을 산서면으로 개칭하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면은 말단행정 기구로서 중요한 역활을 하게 됐다.
산서면은 태백정간(소백산맥)의 일맥이 무룡궁재를 디딤돌로 하여 장안령봉을 병풍처럼 펼쳐 놓았고, 다시 서쪽으로 뻗어 금강과 섬짐강의 분수령인 수분치를 이룬 뒤에 줄곧 서쪽으로 달려가서 팔공명산(성적산)을 솟구쳐 놓았는데, 여기서 잠시 서남쪽을 굽어보며 팔공산(노령산맥)에서 남북으로 뻗은 양줄기가 마치 암닭이 양날개로 알을 품듯 오묵한 넓은 분지가 바둑판처럼 펼쳐져 있다.
이렇듯 지세가 평탄해서 전답이 비옥하고 많은 야산을 개간할 수 있어서 군내에서는 곡창 지대로 손꼽힌다. 산서면의 지형을 살펴보면 동복은 팔공산 넘어로 장수읍과 접해있고, 동남은 남노령과 천왕봉이 경계가 되어 번암면과 남원시 보절면과 접해있고, 서쪽은 신창리들을 가로지르는 실개천이 경계가 되어 임실군 지사면과 접해있고, 북쪽은 영대산 넘어로 진안군 백운면과 인접해 있다. 또한 산서면은 팔공산 서쪽으로 야산이 병풍처럼 둘러있는 분지가 되어 수원이 좋지 않기 때문에 저수지 시설이 잘 돼있다.
백운산 계곡과 마치재에서 흐르는 산서천(오수천 상류)은 산서들의 젖줄 역할을 하며, 산서면을 십자로 관통하는 국도13호(장수읍 ~ 오수)와 721번 지방도(남원시 보절면 ~ 임실군 성수면)는 산서면의 동맥 역할을 한다.
또한 이웃 마을과 면.군.도를 사이에 두고 정보를 교환하고 정을 나누고, 상행위를 하기 위해 서로 왕래하면서 쉬어가던, 전설과 애환이 서린 재(고개)를 적으면 다음과 같다.
(1)방거재(하월 ~ 봉서) (2)원고재(봉서<고산>) (3)원줄이 고개(대창 ~ 하오<암가> (4)지름쟁이 고개(용암 ~ 사창) (5)백제고개(시장 ~ 하오) (6)달랑고개(구창 ~ 원흥) (7)조치재(산서<초장> ~ 임실<성수면>) (8)움풍골재(산서<신월> ~ 장수<대성>) (9)고듬치재(산서<구창> ~ 장수<필덕>) (10)성재발재(산서<구창> ~ 진안<백운면>) (11)박달재(산서<구창> ~ 임실<성수면>) (12)구수재(산서<동고> ~ 임실<성수면>) (13)넙덕굴재(산서<능곡> ~ 임실<성수면>) (14)아침재(산서<오산> ~ 임실<성수면>) (15)비행기재(산서<원흥> ~ 장수<대성>) (16)영무재(산서<동고> ~ 임실<성수면>) (17)방랑재(산서<오산> ~ 임실<성수면>) (18)뒷재(산서<압곡> ~ 임실<성수면>) (19)수분이재(산서<오산> ~ 임실<성수면>) (20)감나무재(산서<신월> ~ 임실<성수면>) (21)성남이재(산서<봉서> ~ 남원<보절면>) 이다.
산서면에 분포되어 있는 성씨는 61성에 102본이며 전주이씨가 147호로 제일 많고, 김해김씨가 106호, 전주최씨 54호, 창원정씨 53호, 안동권씨 63호 순으로 살고 있다. 면적은 47.79㎢이며 표고는 해발 155m이다. 위치는 동경 127도 30분, 북위 35도36분이고 인구는 2003년 6월 현재 1,242가구에 3,878명(남 1,833명, 여 2,045명)이다. 행정구역은 법정리수 14, 분리수(마을수) 34, 자연마을(관할구역) 52, 반수 72로 분류되어 있다.<자료출처 : 장수군지>
1. 오성(五聖)
[방화] : 웃담,아랫담,등동
[성재] : 성재
[강치] : 강정,개치
오성리는 등등, 방화, 개치, 성재, 강정 등 다섯개 마을을 합해서 오성리라 부른다. 성재동에는 근세 조선 태종조에 좌찬성을 지낸 천곡 안성 선생에게 태종이 친히 글을 써서 선생을 칭찬한 어서를 모신 어서각이 있어 선재동 이라 했다가 후에 성재동으로 불렀으며, 개치마을에는 숭록대부, 판돈영부사, 여량군, 단종국구 증보국숭록대부, 영돈영부사, 여량부원군, 시정민, 여산인, 죽헌, 송현수(승록대부),판돈영부사,영돈영부사,여량부원군(시정민),여산인, 죽헌,송현수를 모신 부조묘가 있는 곳이다.
방화마을에는 근세 조선 세종조에 삼군도절 제사를 지낸 홍열정, 최윤덕 장군을 모신 부조묘가 있다. 이렇듯 한 마을에 홍살문이 세개나 있어 하인을 막론하고 그 앞을 지나갈 때는 말을 내려야 하는 존엄한 곳은 다른데서는 찾아 볼 수 없다. 또한 강정마을은 주변에 물이 없어 가정이라 이름을 붙였으며 오성에서 장수읍 대성리로 넘어가는 지금의 비행기재를 옛날에는 강치재라 하다가 뒤에 배치재라 불렀다 한다. 이 배치재는 남원에서 장수를 거쳐 충청도로 가는 삼남대로였다고 하며 오성리는 다섯마을의 오자라 성스러운 유적인 있어서 오성리로 불렀다 한다.
2. 쌍계(雙溪)
[양신] : 양촌, 신평
[마평] : 마평
쌍계리 매암수 마을은 원래는 마음수라고 불렀다. 목마른 말이 물은 마시는 형국의 명당(갈마음수)이 이 근처에 있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이다. 매암수 윗마을을 마평이라하며, 산서에서 번암으로 넘어가는 재를 말치재라 부른다. 또한 매암수의 주변에「사실정」「구수골」「채들」등 말과 관계되는 이름들이 지명으로 붙어있다, 함양에서 번암을 거쳐 말치재를 넘어서 매암수 앞을 지나 동고지로 가는 길은 영남에서 서울로 가는 삼남대로였다고 한다. 그러기때문에 옛날 마을이 번창할 때는 동네앞에 주막이 72곳이나 있었다고 하며 수십마리의 말이 쉬면서 물과 여물을 먹었단다. 마음수라는 이름이 이런 연유로 붙여졌는지도 모른다고 촌로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은다. 3. 사계(社桂)
[서원] : 서원, 왕촌
[왕곡] : 왕촌, 반곡
4. 봉서(鳳棲)
[봉서] : 웃담, 아랫담, 척동, 신기
5. 사상(社上)
[사상] : 웃담, 아랫담
[당가] : 당동, 가동
6. 하월(下月)
[창촌] : 창동
[신등] : 신등
7. 이룡(二龍)
[이룡] : 웃뜸, 가운데뜸, 아랫뜸, 약촌, 용평
8. 신창(新昌)
[대창] : 동편담,서편담,소창
[신덕] : 동편담,서편담
[용암] : 용암
9. 오산(五山)
[하오] : 웃뜸,아랫뜸,암가
[초장] : 초장,정착
[월강] : 월동,강촌
10. 건지(乾芝)
[월호] : 웃뜸,아랫뜸,삽곡
[진전] : 진전
11. 마하(馬下)
[원흥] : 동편담,서편담
[평촌] : 웃뜸,아랫뜸,도평
마하리는 원흥마을과 평촌마을을 통틀어 부르는 행정구역의 리이다. 지금은 장수읍 대성리에서 산서로 넘어가는 도로(재)를 비행기재라고 하지만 옛날에는 말하치재라고 불렀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팔공산 원수봉에서 원흥앞 건지산 일대에 달리는 말이 도적을 쫓는 형국(약마부적)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건지산을 말형, 원흥에서 오성으로 가는 고개를 덮개(말안장)고개로 부르는데 한자로는 덕현이라 해서 음으로만 표현했다. 원흥사 북쪽 고개를 「달랑고개」라 함은 말방울이 달랑거린다는 뜻이다. 이렇듯 약마부적의 명당이 이 일대에 있다는 풍수설로 인해서 지금의 비행기재를 마하치라 했으며, 원흥, 평촌마을은 마하치의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마하리란 동명이 붙혀졌다고 한다. <자료출처 : 장수군지>
12. 백운(白雲)
[신원] : 신흥,웃뜸,아랫뜸
[구창] : 구흥,창가
13. 학선(鶴仙)
[용전] : 용전
소재지에서 백운리 가는 농어촌도로를 따라 동북쪽으로 500m쯤 가면 학산리 용전마을에 이르는데, 이 마을이 이룩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마을앞에 연못이 있었는데 밤마다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하고 놀다가곤 했으며 부근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숲이 울창했다.
세월이 흐른 어느날 갑짜기 연못의 물이 솟구치며 용트림을 하더니 청룡 한쌍이 승천하였는데 그 뒤부터 밤마다 내려오던 선녀는 오지 않고 연못가에 섰던 노송나무에 간간이 학이 날아와서 울다가 가곤했다. 그럴즈음 홍악백발의 도사 한 분이 이곳을 지나치다가 연못가 노송에서 학이 끼르르 끼르르 우는 것을 보고 혼자말로 지껄이 듯,
이곳에 동네를 이룩하면 성현군자와 백만장자가 나올텐데, 하고는 사라졌다. 옆에서 일하던 촌노가 마을에 가서 도사의 마을 퍼뜨리자, 인근동에서 한 사람, 두 사람 모여 취락을 형성했는데 날이 갈수록 마을이 융성하고 훌륭한 인물과 부자가 많이 배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용이 올라간 곳에 취락을 이룩했다고 해서 용전이란 마을 이름을 불혔다고 전한다.
[압곡] : 압곡
[구암] : 웃담,아랫담
[동교] : 상동교,하동교
14. 동화(洞花)
[시장] : 본동,교동,면동,시장통
[능곡] : 능곡
[동촌] : 동촌
[등석] : 웃등석, 아랫등석
[봉정] : 봉정,괴정 동화리 능곡마을은 팔공산이 서쪽으로 힘차게 뻗어 우뚝 솟은 영대산 아래 아늑히 자리잡은 조그마한 마을이다. 옛부터 늙은 중이 예불을 올리는 형국의 명당(노승예불)이 마을 근처에 있다고 해서 동네이름도「바리대실」이라 지었고, 재들, 구승평, 명금절 등의 이름이 흡사 노승예불을 실감케 한다. 면소재지에서 장수로 가는 국도13호선 도로를 따라 500여m를 가다보면 도로옆에 울창한 숲이 있고 그안에 아담한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을「괴로울」또는「괴롤」이라 하며, 행정구역으로는 동화리 괴정마을이다. 현재 마을 입구에는 독립운동을하다 옥고를 치르신 열다섯분 선열들의 3·1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3·1절이면 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기념식 행사를 갖고 있다.
지금부터 약 1천5백여년전 이 마을 앞에는(지금 정자나무가 무성한 곳) 주인을 알 수 없는 커다란 무덤이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흉년이 들고 괴질이 만연하여 인심이 흉흉해지고 살기가 어려워지자 무지한 백성들은 불길한 모든것이 마을앞에 묵어있는 무덤탓으로 돌리고, 모두 나서서 무덤을 파헤쳐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어이할꼬, 이 일을! 풍년이 들고 질병이 없어지기를 갈구하고 무덤을 파헤쳤건만, 농민들은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저녁부터 사방에서 귀신들의 우는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대낮에도 귀신이 나타나 동민들은 문밖을 나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는 중에 하루는 시주하러 왔던 어떤 스님 한 분이 이르기를 "이 마을 앞을 지나다보니 귀신의 요기가 사방에 휩싸여 있기에 들렸소이다. 앞으로 귀신의 공포에서 벗어나려면 내가 지정하는 곳에 정자나무를 여러주 심으십시오." 하고는 파헤쳤던 묵뫼자리를 가리키지 않은가? 동민들은 너도나도 나서서 그자리에 정자나무를 심고 귀신을 달래기 위해 제사를 지냈다.
그 뒤부터 귀신은 자취를 감추고 괴질도 없어졌으며, 풍년이 들고 살기좋은 마을이 되었는가 하면 그때에 심은 정자나무가 하늘을 치솟았으나 지금으로부터 100여년전에 벼락을 맞아 등치는 죽고 뿌리에서 돋아난 새순이 자라서 다시 아름드리 나무로 자라 또다시 울창한 숲을 이루었다. 마을앞에 있는 숲이 무성하면 마을이 번창하기 때문에 동민들은 숲을 생명처럼 보호한다고 촌노는 전한다.
장계면(長溪面)
장계리 |
동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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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촌,아랫담,가운데뜸,웃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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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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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담,장계하숙골목,방천뚝,거창여관골목,사거리,회관골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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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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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통,아랫장터,쌀점통,방앗간골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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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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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샛터,샛담,뒷담,아랫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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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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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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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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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학교앞,회관골목,방앗간골목,광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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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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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제재소골목,중계소골목,가운데담,극장주변,중앙여관골목,사거리,담배창고골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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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곡리 |
원금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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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담,웃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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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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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가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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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농리 |
원무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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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담,가운데담,아랫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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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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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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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덕리 |
위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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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담,웃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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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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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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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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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담,웃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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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천리 |
서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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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담,아랫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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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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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담,아랫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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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강리 |
도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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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담,아랫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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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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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천,저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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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리 |
탑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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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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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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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리,계한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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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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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담,아랫담,노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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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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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천거리,웃담,가운데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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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덕리 |
원명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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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담,강변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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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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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반송,쇠한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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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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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삼거리,아래삼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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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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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담,아랫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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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리 |
원오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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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담,가운데담,웃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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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곡리 |
성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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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담,웃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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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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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담,아랫담 |
장계면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역으로 백해군의 관할구역에 속했으며, 통일신라 이후 757년(경덕왕 16년)에 군현의 명칭 변경에 따라 백해군을 벽계군으로 개칭했으며, 장계면은 벽계군의 관할 구역에 있었다. 940년(고려 태조 23년)에 벽계군이 벽계현으로 격하됐고, 995년(고려 성종 14년)에 벽계현이 장계현으로 개칭되었으며 근세 조선 1417년(태종 14년)에 장계현이 장수현에 병합될 때까지 장계면은 현청(동헌) 소재지(노평들)로서 교통과 문물이 발달하였다.
근세 조선말엽 이전에는 부ㆍ군ㆍ현내에 방을 두었으나 편의상 구역을 획정하는데 불과했다. 이 시기에 장계면은 임현내방으로 부르다 뒤에 노평(현청 소재지) 동쪽을 계동방 또는 임동방, 서쪽을 계서방 또는 임서방으로 불렀다. 근세 조선 1895년(고종 32년)에 23부, 331군을 두는 지방 관제 개정에 따라 방을면으로 고치면서 임현내면으로 고쳐 불렀다. 1917년 면제 공포로 임현내면을 계내면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면은 말단행정기구의 중요 역할을 했다.
그 당시 장계천 이남(현 장계리, 동남동<동평들>과 남산마을) 은 계남면에 속했으나 그뒤부터 동남동(동평들)은 장계리에, 남산마을은 삼봉리에 편입되어 장계시장을 형성하게 되었고, 면세가 대폭 확장되었다. 장계면은 태백간(소백산맥)이 남으로 힘차게 뻗다가 남덕유산을 이루는 데 그 발치에 두문봉, 추락봉, 노고봉, 백화산 등 형제봉들이 정답게 둘러쳐져 있는 오목한 넓은 분지에 한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이렇듯 산간부에서는 보기 힘든 넓은 한들에서 생산되는 곡식을 자급 자족은 물론 외화 획득의 주산물이 되기도 한다.
장계면의 지형은 동으로는 육십령과 경계를 이루어 경남 함양군 서상면과 접해 있고, 남으로는 동평들을 흐르는 실개천이 경계가 되어 계남면과 접해 있고 서로는 산정수동하는 동정대재와 경계를 이루어 천천면과 접해 있고, 북으로는 깁재와 경계를 이루어 계북면과 인접해 있다.
또한 덕유산에서 발원한 장계천과 장안산에서 발원한 유천이 장계면 한들의 젖줄 역할을 하며 천천면으로 굽이쳐 흐른다. 또한 장계면 중심부를 관통하여 동(경남), 서(전주)로 연결되는 26번 국도와 남(남원), 북(무주)으로 연결되는 19번 국도는 면의 중심지인 장계리에 십자로를 형성하고 있어 동부산악권의 교통 요충지가 되고 있다. 또한 1993년 11월 1일 계내면을 장계면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다음은 재의 이름이다. ① 덜먹재(원금곡~가항) ② 아리랑고개(장계, 장계~계남, 구억밭) ③ 깁재(장계, 호덕 ~ 계북 압곡) ④ 육십령(장계, 명덕~함양 서상면) ⑤ 노루고개 (장계 ~ 천천)이다.
장계면에 분포돼 있는 성씨는 45성에 83본이며, 김해김씨가 317호로 제일 많고, 밀양 박씨 283호, 전주 이씨가 282호다. 대곡리 주촌마을은 충절의 표상, 의암 주논개의 생장지이기도 하다. 장계면의 면적은 67.77㎢이며, 표고는 해발 360m이다. 인구는 2004년 6월 현재 5,0671명이다. 장계면의 행정구역은 법정리수 10, 분리 (마을)수 30, 반수 78, 자연마을수 36이다.
<자료출처 : 장수군지> |
1. 장계(長溪)
[동동] : 해방촌,아랫담,가운데뜸,웃담
[서동] : 아랫담,장계하숙골목,방천뚝,거창여관골목,사거리,회관골목
[남동] : 시장통,아랫장터,쌀점통,방앗간골목
[북동] : 중샛터,샛담,뒷담,아랫담
[문화] : 문화
[중동] : 신촌,학교앞,회관골목,방앗간골목,광담
[신동] : 영남제재소골목,중계소골목,가운데담,극장주변,중앙여관골목,사거리,담 배창고 골목
옛날 한씨가 이룩한 마을이라 하여 한들이라고 불렀다는 말이 있으나 큰들(한들)에 자리 잡았다고 해서 대평리로 불렀다. 그 후 상대(지금의 동남동) 하대(지금의 신/중/서북동)로 분리하였는데 다시 중하대(중동) 전하대(서동) 후하대(북동)의 4개리로 분할하였다. 이렇듯 4개리로 분리되어 오다가 다시 1구(서동), 2구(중동,신동), 3구(북동,중샛터), 4구(동동,남동)로 재분할 되었다. 그 후 1953년 경 다시 동,서,남,북,중,신동 등 6개동으로 구역이 개편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장계는 동부산악권의 교통의 요지로서 상업이 발달하고 있으며, 특히 대전과 진주간 고속도로가 관통되고 군산과 포항사이가 4차선으로 뚫리면 큰 도시로 발전할 전망이 크다
<자료출처 : 장수군지>
2. 금곡(金谷)
[원금] : 곡아랫담,웃담
[동정] : 동정,가항
금곡마을과 망남마을 중간지점에 동촌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300여년전 동촌마을이 형성된 것을 정재호(나주정씨)라는 분이 나주에서 살다 14세의 어린 나이에 양친을 잃고 부지할 곳이 없어 정처없이 문전걸식 하며 떠돌아 다니다 이곳에 돌담집을 짓고 정착하여 살다보니 박, 권, 이, 유, 김씨 등이 모여들어 10여호의 취락이 형성되어 마을이름을 동촌이라 부르며, 살아가던 어느날 노인 한 분이 정재호 집에 찾아와서 하는 말이 「마을넘어 칡넝쿨이 우거진 곳(현 금곡마을)에 새터를 잡아 성주하면 당대에 백석은 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지려 하자 까닭을 물으니,
그 터는 가마혈 때문에 밥이 그득해서 부자가 된다는 것이다. 또한 주변에 있는 산줄기, 고개, 돌, 골짝 등에도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뒤에 있는 산고개를 「곱돌고개」뒤들골짝을 「노다지골」, 재넘어 골짜기를 「차돌배기」라고 부르면 뒷날 「부자방망이」가 될 것이며 그때가 되면 내말을 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동촌 사람들은 노인의 말대로 새터를 잡고 마을이름을 쇠끼미(쇠가마, 금곡)라 불렀다. 이 마을에는 나주정씨가 세거하면서 정금남의 사당을 모시고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의 금곡마을에는 주변에 질이 좋은 대리석이 깔려있어 이대리석을 개발하면서 그 옛날 노인의 선견지명을 촌노들은 목청을 돋구어 가며 들려준다.<자료출처 : 장수군지>
3. 무농(務農)
[원무농[ : 웃담,가운데담,아랫담
[망남[ : 망남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년전 샛땀(봉서뫼동옆-서문성인씨논)에 새터를 잡은 사람이 안음 서문씨였고, 조금 뒤에 안터(정씨 조묘밑)에 새터를 잡은 사람이 봉산이씨였다고 한다. 이들이 새터를 잡았을 때에는 풍수지리상의 허점을 몰랐으나 살아가면서 여러가지 허점이 나타났다. 그러나 불현 듯 명당자리라고 해서 새터를 잡은 것이 지금의「모릉이」이다. 두 성씨가 논과 밭을 일구며 정답게 사는 사이에 충주박씨와 경주김씨가 들어와 살면서 점차로 마을이 커졌다고 한다. 「모릉이」란 말은 「산모서리」란 뜻이다.
<자료출처 : 장수군지>
4. 금덕(錦德)
[위동] : 아랫담,웃담
[침동] : 침동
[호덕] : 아랫담,웃담
침동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300여년전 임실군 성수면에서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고달프게 살아가던 한 과수(동래성씨, 입장수중시조, 선교랑, 정유지의 부인, 밀양손씨)가 노쇠해지자 친정이 있는 위동마을 근처로 이사해서 살았다. 친정부모와 동기간을 의지하며 살아가던 어느날 갑자기 친정아버지가 별세하여 슬픔속에 장례준비를 분주히 하느라 행랑방 앞을 무심결에 지나다 들으니 지관이 오빠에게 하는 말이 아버지의장지가 명당자리라는 것이었다. 밤이 되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욕심이 생겼다.
손씨부인은 그 길로 빈 물동이를 들고 가서 천광구덩이에 물을 길어다 부었다. 이튿날 아침 운구전에 장사차비를 위해 장지로 떠났던 친족중의 한 사람이 급히 돌아와서 상주에게 하는 말이 명당이라던 장지의 천관구덩이에 물이 고여있다는 것이다. 순식간에 상가는 소동이 벌어졌다. 상주들은 지관을 불러 호통을 치고는 다른 장지를 급히 물색토록 했다.
새 장지에 무사히 장례를 치루고 돌아온 친정오빠에게 손씨부인은 그날밤 가련한 얼굴을 지으며 애원했다. 「오라버니, 자식들도 아직 미거하고, 산도 없는 터에 몸은 늙어 죽어서 들어갈 곳이나 마련했으면 하는 생각 간절했지만 그럴 처지가 못되었는데 오늘 물구덩이라 버린 곳을 저의 시위지지로 돌려 주실 수는 없을런지요?」하고 간청하자, 오빠는 순순히 응락했다.
그후 손씨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자식들은 이곳에 안장했다고 하며 「숙부인밀양손씨지묘」라고 새겨진 비가 서 있는데 이곳이 대호명당이라는 것이다. 손씨부인의 자손들은 묘소에서 가까운 언덕아래에 집을 짓고 논밭을 일구며, 정씨취락을 형성하였는데 이 마을이 침동마을이다. 침동에는 대호명당의 발음으로 정씨들이 세거하면서 벌족했으나 지금은 몇집이 살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자료출처 : 장수군지>
5. 송천(松泉)
[서변] : 웃담,아랫담
[신기] : 웃담,아랫담
6. 월강(月岡)
[도장] : 웃담,아랫담
[풍저] : 풍천,저동
7. 삼봉(三峰)
[탑동] : 탑동
[금정] : 곡리,계한들
[남산] : 웃담,아랫담,노평
[평지] : 세천거리,웃담,가운데담
8. 명덕(明德)
[원명덕] : 아랫담,강변담
[반송] : 원반송,쇠한바
[양삼] : 양지,삼거리,아래삼거리
[지보] : 웃담,아랫담
호덕마을은 200여년전만해도 오솔길마저 희미하게 나 있는 첩첩산중이었다. 이곳에 마을이 생긴 유래는 다음과 같다. 옛날 한 선비가 이곳을 지나다 날이 저물어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데 저만치 불빛이 있기에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 보니까 호랑이의 눈에서 발하는 빛이었다. 순간 선비는 놀랐으나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히 바라보니 선비를 해치려는 호랑이가 아니라 어디론가 길을 인도하려는 듯 꼬리를 흔들고 있지 않은가? 이상하게 생각한 선비는 한 발자국 다가섰다. 그러자 호랑이는 눈에서 더욱 빛을 발하며 앞서가기 시작했다.
선비는 뒤를 따라 덤풀을 헤치고, 내를 건너고, 언덕을 넘어갔다. 얼마동안을 따르다보니 아담한 기와집 문앞에 이르렀다. 순간 호랑이는 간곳이 없고 한 노인이 대문을 열며 반갑게 맞이했다. 선비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피로에 겹쳐 곤한 잠에 빠졌다. 이튿날 아침 눈을 떠보니 노인도, 기와집도 간곳이 없고 누워 있는 곳은 겹겹이 우거진 풀섶 위였다.
선비는 벌떡 일어나 지난밤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사방을 둘러보니 산이 겹겹이 싸여 있으나 기분은 안방에서 자고 일어난 훈훈함 바로 그것이었다. 산세를 살펴보니 뒤로는 산등성이가 포근히 옹위하고 좌우의 산봉이 이쪽으로 안아주고 있다. 앞으로는 맑은 개울이 흐르고 물건너 저만치에는 노적봉이 솟아있다.
선비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새터를 잡고 전답을 일구면서 살게 되었다. 선비가 사는 곳을 호랑이가 일러주었기에 「호덕」이라 이름하고 뒷산 높은 봉을「악호봉」이라 하였으며 산아래 양지바른 언덕을 불당재라 불렀다. 뒤에 불당재에는 불당을 지었는데 금덕사이며 지금의 성관사이다. <자료출처 : 장수군지>
9. 오동(梧桐)
[원오동] : 아랫담,가운데담,웃담
10. 대곡(大谷)
[성곡] : 아랫담,웃담
[주촌] : 웃담,아랫담
장계에서 26번 국도를 따라 육십령쪽으로 4km쯤 가다 오동, 대곡의 군도를 따라 3.5km쯤 거슬러 올라가면 깊숙한 산골에 40호 정도의 농가가 있는데 이 마을이 만고의 충열이며, 한국여성의 귀감이 되는 의암 주논개이 태생지인 주촌마을이다. 400여년전 범바위골(주촌의 건너편에 있었다)에 사는 주달문이라는 학자가 이곳에 새터를 잡아 서당을 차리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고 한다 . 장수삼절이 주벽이요, 충렬의 여신으로 추앙받는 의암 주논개가 이 마을에서 출생하여 13세까지 성장하면서 부친 주달문에게서 글을 배웠기 때문에 주씨의 마을이라는 뜻에서 주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의암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마을 입구에는 주논개님을 낳기 위해 공을 드렸다는 성황당이 지금도 마을의「지킴이」로 남아 있다. 매년 정초가 되면「지킴이」인 조탑과 노송앞에 제수를 차려놓고 마을의 안녕을 비는 산신제를 지낸다. 지금은 저수지(대곡호)로 변했지만 논개님의 생가터에는 부친에게 조석으로 정화수를 떠다 드려 해수병을 낳게 했다는 약수천이 남아 있었다.
마을앞 동쪽으로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은 민재(소백산맥)가 있다. 이 재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큰 재이며, 논개님이 어릴 때 숙부 주달무에 의해 풍천마을에 사는 백치불구인 김풍헌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려 하자 칠흑 같은 그믐밤에 홀홀단신 이 재를 넘어 외가에 피신했다는 애절한 사연이 담겨있다. 생가지에는 장수초대 교육감을 지낸 김상근씨가 앞장서서 세웠다는 의랑 주논개 생장향수명불망비각이 우뚝 서있다.
이렇듯 이 마을은 의암 주논개에 관한 유적과 전설이 서려 있는데, 마을 아래에 대곡호를 막게 되어, 마을이 온통 제당속으로 들어 감에 따라 훨씬 위쪽에 새터를 잡아서 논개님의 생가복원을 하고 유적도 같이 옮겼다. <자료출처 : 장수군지>
천천면(天川面)
장판리 |
장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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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골,상담,중담,하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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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리 |
반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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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담,웃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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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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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막담,뒷담,아랫담,중담,웃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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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리 |
하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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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신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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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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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리,중리웃담,상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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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리 |
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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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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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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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담,중담,웃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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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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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담,웃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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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고리 |
삼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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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담,웃담,창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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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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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담,아랫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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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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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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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덕리 |
검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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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담,아랫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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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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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담,아랫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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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송리 |
조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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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담,웃담,신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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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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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중반,하반,영등포반,뒷골,앞골,취락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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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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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담,중담,상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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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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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담,웃담,양명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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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광리 |
용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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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신,용암웃담,용암아랫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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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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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밖앗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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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리 |
쌍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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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담,쌍암웃담,쌍암아랫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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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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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자,오공,월천 |
|
신흥 |
|
신흥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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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리 |
구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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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신전웃담,신전아랫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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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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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담,웃담,신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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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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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 |
천천면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역으로 우평현의 관할구역에 속했으나, 통일신라 이후 757년(경덕왕 16년)에 군, 현의 명칭을 고침에 따라 고택현으로 개칭되면서 천천면은 고택현의 관할구역에 속했다. 이때까지 현청의 소재지는 천천면의 관내인 남양리 앞 덕들에 있었다. 940년(고려 태조 23년) 고택현이 장천현으로 개칭되면서 현청 소재지도 덕들에서 장수읍 관내(선창리)로 옮겻다. 뒤에 현의 명칭이 장수현, 장수군으로 바뀌었으나, 천천면은 우금까지 그 관할 구역에 있다.
근세 조선말엽 이후에는 부ㆍ군ㆍ현내에 방을 두었지만, 편의상 구역을 획정하는 역할만 한 듯하다. 이 시기에 천천면의 지형은 동족으로 법화산 줄기와 서쪽으로 북노령 줄기가 다같이 북쪽으로 뻗어간 어간에 분지가 남북으로 길게 펼쳐졌는데 왕대들 좁은목 북쪽 일원을 신북방으로 부른 듯하며, 1895년(고종 32년)에 전국에 23부 331군을 설치하는 지방 관제 개정에 따라 방을 면으로 고치면서 신북방을 수북면으로 고쳐 부르게 됐다. 1917년 면제 공포로 신북면을 천천면으로 개칭했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천천면은 노령산맥의 종산으로 불리는 장안산이 태백정간에서 갈려 나와, 수분재를 디딤돌로, 팔공산을 솟구친 다음 그 한줄기가 북으로 대덕산, 성수산 등 주봉을 이루면서 계룡산 부소산까지 뻗어 북노령을 이루었는 데 면의 서북쪽은 북노령과 방고개재(현재 방곡치로 잘못기재 됐음)가 경계가 되어 계남면과 장계면에 인접해 있고, 남쪽은 왕대들 좁은목을 장수천이 천천천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남북으로 길게 펼쳐진 천천들의 복판을 흐르다가 성수산에서 발원한 와룡천이 덕들에서 합류하여 기름진 천천들의 역할을 하면서 북쪽으로 유유히 흘러서 진안으로 빠진다. 또한 천천면을 십자로 관통하는 26번 국도<서-(전주)-동--(장계)>와 719번 지방도<남(장수)ㆍ북(금산)>는 천천면의 동맥 역할을 한다.
다음은 재의 이름이다. (1) 노래골재(판둔~시모장) (2) 절터골재(판둔~장척) (3)대판고개(판둔~왕여봉) (4) 하리고개(장척~하신) (5) 중고개(장척~중상<중리>) (6) 매봉재(장척~중상) (7) 신광재(하신~신광) (8) 미재(하신~미재) (9) 겨레재(삼장~돈촌) (10) 서낭댕이고개(장양~용신) (11) 섯밭재(구신~평신) (12) 팽이바우재(평지~신기) (13) 벗밭재(천천<반월>~계남<중방>) (14) 싸리재(천천<반월>~계남) (15) 벗밭재(천천<박곡>~계남<난평>) (16) 외기재(천천<와룡리중상~진안군) (17) 홍두깨재(천천<조선>~진안읍) (18) 노리개재(천천<와룡리 중상>~진안군) (19) 방고개재(천천<조선>~진안읍) (20) 방어재(천천<여드름터>~계남<침령>) (21) 기계재(천천<신흥>~진안군) (22)괴개재(천천<구신>~진안군) (23) 부서머리재(천천<부연>~진안군) (24) 빈지재(천천<부연>~진안군) (25) 질마재 (천천<중동>~진안군) 이다.
천천면에 분포되어 있는 성씨는 61성에 112본이며, 밀양박씨가 98호로 제일 많고, 김해김씨 91호, 연안송씨 63호, 청주한씨 50호, 경주이씨 51호 순으로 분포를 이루고 있다. 천천면의 면적은 83.99㎢이며, 표고는 해발 340m이다. 행정구역은 법정리 10, 분리(마을) 25, 자연마을 39, 관할구역 69반이다. 인구는 3,231명(남 1,585명, 여 1,646명) 이며 1,115가구가 살고 있다. (2003년 6월 현재) <자료출처 : 장수군지>
1. 장판(壯板) - 장자골 > 장자올
[장척] : 뒷골, 윗담, 아랫담
천천면 장판리 마을은 송탄에서 장수로 가는 길가 왕이봉(王離峰-왕이 쉬었다 떠난 봉우리-왜이봉) 계곡에 위치하고 있으며 삼국지에 나오는 그 유명한 장판교 싸움의 고사와 관련이 있는 마을이다. 유비가 조조의 대군에 쫓겨 장판교 근처에 왔을 때 조자룡은 난군중에서 유비의 어린아들 아두를 구해 가슴에 안고 일당천으로 길을 찾아 본진에 돌아오니 어린 아두는 색색 자고 있었다는 말은 너무 유명하다.
맨처음 강씨가 들어왔고 그다음 천씨 그다음 우씨가 들어와서 마을이 생성되었다 한다.
이곳에는 절의를 세우고 순사한 장수삼절의 하나인 타루비가 있다. 원님 조종면이 말을 타고 이곳 비탈을 지날 때 갑자기 꿩이 푸드득 하고 날으니 그 소리에 말이 놀라 뛰는 바람에 원님이 소에 빠져 죽으니 의로움이 하늘에 닿았다. 140여년이 지난 뒤에 현감 최수형이 백씨의 절의를 사도의 귀감으로 삼아 장척마을 입구 비탈에 타루비를 세웠다.
판둔(너듬이) 부락이 원래 장판리에 속했었는데 장수읍으로 편입되었다.
2. 월곡(月谷) - 박실
[반월] : 아랫담,웃담
[박곡] : 주막담,뒷담,아랫담,중담,웃담
천천면 월곡리 박곡마을은 성종조에 등과하여 그후 강원감사를 지내다가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지금의 계남땅으로 낙향한 파은박수기 선생이 여생을 훈육에 힘쓰다 세상을 마치니 지금의 박실옆 산록에 묘를 쓰고 그 옆에 귀후재를 짓고 제사를 지냈다. 그후부터 이마을을 박감사의 묘가 있는 골짜기라고 해서 박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다.
3. 와룡(臥龍) - 배랭이
[하신] : 하리,신광 -신광사
[중상] : 중리, 중리웃담, 상리 - 와룡리 휴양림
4. 남양(南陽)
[내기] - 안터
[이방] - 이뱅이 - 천천농공단지
[돈촌] - 돌매기 - 덕덜갱변
5. 삼고(三顧) - 삼장골
[삼장] : 아랫담,웃담,창리
[운곡] : 웃담, 아랫담
[중동] : 정동,중기
천천면 삼고리 마을은 삼장마을이라고도 하며 천천 소재지에서 장수로 가는 2km지점 도로옆 성수산 계곡에 위치하고 있다. 장수로 가는 길초로 덕대산계곡에 와룡, 남양마을이 있는데 이는 삼국지에 나오는 중국고사와 관련이 있는 이름들이다. 옛날 어느 전략가가 이곳을 지나다보니 삼국지에서 나오는 지형과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동명이라 전해지고 있다.
운곡 - 구름실 > 굼실
옛날 신선이 운곡마을을 지나다 물 맑고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바위에 갓을 벗어놓고 쉬고 있는데 건너마을에 살고 있는 촌노 한 분이 너무나 인정없는 짓을 하여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이때 신선이 하는 말이 「이곳에 마을을 이루게 되면 부귀 영화를 누릴 것」이라고 말한 뒤 그곳을 떠나 어디론지 사라졌다고 한다.
그 뒤 앞을 다투어 지금의 갓바위들에 이사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으나 부귀영화는커녕 도둑과 화재로 마을에 재앙이 잇따르자 그제야 신선의 노여움을 받았음을 깨달은 마을민은 지금의 터에 하나 둘 이사하여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부터 이 마을을 「구름골」「구름실」이라 하여 운곡마을이 형성되었다. 또한 그때 신선이 갓을 벗어 놓고 쉬고 간 바위가 지금도 있으며 이 바위를 이름지어 부르고 있다. 운곡마을에 주축을 이룬 성씨는 김씨이다.
6. 봉덕(鳳德)
검덕 : 웃담,아랫담
고금 : 웃담,아랫담
옛날에 아름다운 선녀가 밤이 되면 현재의 천천면 고금마을 뒷산 옥녀봉에 수십명이 내려와 목욕을 하고 칠보단장이 끝나면 이 마을 뒷골에 모여 들어 베를 짰다하여 방직골이라 불렀다 한다. 베를 짜다 쉬는 시간이면 간바위에 올라 앉아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 한다. 그후 옥녀봉을 뒤로 간바위와 방직골을 좌우로 하여 부락이 형성되었는데 옛날 선녀가 거문고를 탔다하여 두드릴 고[鼓]자와 거문고 금[琴]을 따서 [鼓琴]이라 이름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주요 성씨는 청주 한씨가 대부분이다. 이 마을의 새마을 사업은 본 도에서도 우수마을로 표창도 받은 앞서가는 마을이다.<자료출처 : 장수군지>
7. 춘송(春松)
천천면 춘송리 송탄마을은 면소재지 마을이다. 연산군의 폭정이 극에 달했던 기묘사화때 조정의 많은 공경대부 및 충신열사들이 귀양하고 혹은 사사되니 뜻있는 지사들은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서 진저리를 느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지금의 송탄에 와서 터를 잡고 은둔생활을 했다. 송탄마을의 옆을 흐르는 천천천은 냇물이 많고 맑으며 주변의 경치가 좋아 송탄 장응두 선생은 낮이면 냇가에 나가 고기잡고 밤이면 글을 읽으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이 동네 이름을 그분의 호를 따서 송탄이라 불렀으며 송탄어적이라고 해서 장수팔경의 하나이다.<자료출처 : 장수군지>
[조신] : 아랫담, 웃담, 신촌 - 새재
[송탄] : 상반, 중반, 하반, 영등포반, 뒷골, 앞골, 취락반
[춘동] : 아랫담, 중담, 상담 - 봄골 > 봉골
[장양] : 아랫담, 웃담, 양명동
8. 용광(龍光)
[용신] : 광신, 용암웃담, 용암아랫담
[광산] : 안동, 밖앗담
9. 오봉(五峰)
[쌍암] : 안산담, 쌍암웃담, 쌍암아랫담
[오옥] : 옥자, 오공, 월천
[신흥] : 신흥
10. 연평(蓮坪)
[구신] : 구상, 신전웃담, 신전아랫담
[평신] : 아랫담, 웃담, 신기
[부연] : 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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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러번 읽고 또 읽어도 잃어버리곤 하지만 그래도 고향에 관한 정보이기에 또 읽게 되지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