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용 작가의 그림을 보았다. / 노성두 서양미술사학자
늦여름의 어느 날 홍익대학교 근처에 있는 꼭대기 층의 작업실에서 작가와 작품을 만났다. 아직 미완성이 더러 있었다. 몇 주 뒤에 전화를 했더니 갤러리로 작품을 옮겨 놓았다는 대답이었다. 화곡동에 있는 갤러리에서 완성된 상태의 작품을 다시 한 차례 보았다. 미완성일 때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지만,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잘 정제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느 새 계절이 바뀌어 초가을이 나의 발길을 동행했다.
정현용 작가의 작품과 대면하는 순간 나는 내가 몰랐던, 그리고 결코 알고 싶지 않은 세계에 발을 내딛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작품들에서 질병에 수반하는 고통과 죽음에 대한 전혀 다른 차원의 의식과 표현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고통스런 기억의 흔적이 그의 붓 속에 녹아 있는 듯 했다.
작품들은 크기가 사람 키만큼 아주 크거나 쪽창처럼 아주 작았다. 그림은 소재들이 거의 윤곽이 식별되지 않을 만큼 어둡거나 또는 눈이 아플만큼 밝았다. 그림은 대개 풍경의 자연스러운 일부이거나 절단된 토막이었다. 공간은 일상에서 취했지만, 공간을 표현하는 방식은 비일상적이었다. 등장인물이 하나 또는 여럿이 나오거나 전혀 없었다. 곡선은 크고 장엄했으나, 직선은 편협하고 구속적이었다. 그림 속에는 순행의 움직임과 역행의 움직임이 있었다. 시간은 천천히 비틀거리며 걸어가거나 발걸음을 멈추고 드러누워 있었다.
나는 정현용 작가의 눈을 보았다. 그러나 오래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과연 어떤 고통의 권리가 한 인간으로부터 이토록 완벽하게 빛의 생명을 박탈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두 번째 그림을 보러갔을 때 작가의 시선이 보였다. 이번에는 작가의 눈을 볼 필요가 없었다. 그의 시선이 투영된 작품을 보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러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시선의 규칙이 떠올랐다.
대개 그림에는 네 가지의 시선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림 속의 등장인물이 구사하는 시선, 그림 속 등장인물들이 서로 나누는 시선, 그림 밖 감상자의 시선, 그리고 작가의 시선이 그것이다. 작가의 시선은 흔히 제 4의 시선, 창조자의 시선, 편집자의 시선으로 불리기도 한다. 객석에 앉아서 영화에 몰입하는 감상자와 가위를 들고 필름을 자르고 붙이는 편집자의 시선이 같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정현용 작가의 모든 작품은 예외 없이 제 4의 시선들을 그것도 아주 노골적인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풍경재현에서 공간을 보는 시점, 거리의 계산방식이 그랬고, 그림 속에 등장인물들이 출현할 경우 그들을 응시하는 시선의 관계나 뒤돌아선 모습을 선호하는 구성방식도 그랬다. 여기서 제 4의 시선은 고통의 바다라는 등기권리증에 자신의 인감을 찍는 작가의 소유권 주장 행위이다.
작가가 쓴 노트를 보면 “수차례 덧칠된 짙고 투명한 색채는 물을 암시한다.”고 한다. 물은 생명, 씻김, 정화, 세례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고대 신화의 스틱스 강처럼 현세와 이승을 가르는 경계이기도 하다. 바로Varro, 루키아노스Lucianos, 페트로니우스Petronius, 페르시우스Persius의 글 등에 나오는 ‘인생은 물거품과 같다’ Homo Bulla는 말도 이와 관련지을 수 있다. 고대 로마인들은 항해를 하면서 뱃전에 달라붙은 물거품이 얼마나 쉬이 사라지는지 보았고, 인간의 삶과 죽음을 수면의 위와 아래에 늘 달라붙어있는 물거품에 비유했다.
정현용 작가가 여러 차례 덧칠해서 그린 물의 이미지는 수면 위가 아니라 수면 아래에서, 물속에서 본 물의 풍경이다. 죽음의 늪 속에 가라앉아서 끝 간 데 없이 어두워지는 수면을 올려다본 적이 없다면 결코 이처럼 비극적인 청색을 짜내지 못했을 것이다. 작가가 구사하는 청색의 암도는 절망의 시간과 정확히 비례한다.
정현용 작가를 보면서 플랑드르 화가 피테르 브뢰헬Pieter Brueghel이 떠올랐다. 그의 그림 <뒬레 흐리트> Dulle Griet의 주인공 흐리트는 루시퍼의 아가리가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지옥의 입구까지 가서도 자신의 전리품을 챙겨오는 억척스런 용맹과 악착같은 탐욕의 상징이다. 붓을 든 정현용 작가는 무장을 갖춘 여전사 흐리트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인간에게 죽음은 최후의 터부이고, 죽음과 얼굴을 맞대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다. 더군다나 죽음으로부터 예술의 전리품을 챙겨서 돌아오는 영웅은 더욱 드물 것이다.
어둠과 빛은 정현용 작가의 창과 방패이다. 대부분의 그림에서 우리를 질식시키는 짙은 어둠과 달리 생경하게 빛나는 파스텔 톤의 핑크 색이나 노란 색은 바람난 처녀의 속바지처럼 감상자를 들뜨게 한다. 그러나 그의 색채에는 육체에 대한 동경이나 탐닉, 육욕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 이것들은 무형의 염원과 찰나의 환각이라는 두 짝의 맷돌이 엇갈려 돌아가면서 그 틈새로부터 비어져 나온 색에 가깝다. 침묵이 가장 수다스러운 것처럼, 왜상은 실상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여기서 환각은 죽음의 자기 통제 또는 자기 은폐의 수단으로 보인다. 그의 그림에서 일제히 들려오는 레퀴엠의 환청은 다만 작가를 숭배하기 위한 것이다. 내 귀에 들린 환청은 이랬다.
나는 위로한다, 예술의 지복한 고통을.
나는 노래한다, 아름다운 타락천사처럼.
나는 애무한다, 사탄의 부끄러운 처녀막을.
나는 고대한다, 종말의 오지 않을 도래를.
갤러리 케이아크 오시는 길
버스: 한국폴리텍1대학 강서캠퍼스에서 하차 후 어수산과 카페 베네 사잇길로 약 150m 직진하시면 화곡초등학교 정문이 보입니다. 화곡초등학교 정문 맞은편 건물 지하에 저희 갤러리가 있습니다.
지하철 5호선: 화곡역 3번 출구로 나오셔서 직진 (도보 5분), 어수산과 카페 베네 사잇길로 약 150m 직진
지하철 9호선: 가양역 8번 출구 ->마포중고등학교 정류장에서 6627 승차 ->한국폴리텍대학 하차
* 자체주차공간이 협소합니다.
차를 가져오시는 분들은 화곡본동사무소(화곡본동 주민센터) 근처 공영주차장(갤러리에서 도보 3분)에 주차를 하여주시기 바랍니다.
(공영주차장 요금: 10분/100원, 종일주차(8시간)/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