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만리 7월 19일 금요일. 여행 21일 차.
몸이 절로 귀국 모드로 돌아섰나보다. 어제 저녁까지 그리도 맛나던 커리가 오늘 아침에는 쳐다보기도 싫다. 고실한 밥이나 얼큰한 김치찌게에 별 미련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엄연한 토종 한국인이었다.
어제와 달리 아침부터 덥다. 비행기는 저녁때이니 낮시간이 충분하다. 체크아웃을 오후 한시 반으로 미루고 호텔서 푹 쉬기로했다. 창밖을 내다보며 마시는 커피 한잔. 편안하다.
마지막 남은 짜파게티를 끓였다. 부가가치를 한껏 높여놨는데 한국으로 되 가져가는 건 바보 짓이다. 당연히 라면에게도 미안한 일이다. 한 젓가락에 입 안의 느끼함이 사라지고 두 젓가락에 본래의 입맛이 돌아왔다.
이제는 배낭을 꾸려야 할 시간. 공항 검색에 대비하여 배터리 등은 휴대용 가방안에 챙겨 두는 등 신경을 좀 써야한다. 무심코 대충 했다가는 검색대 위에 온 짐을 풀게되는 수가 있다. 낭패다.
보통의 경우 오늘 처럼 여햄 마지막 날 낮시간이 온전하게 하루라면 틀림없이 어디 관광지 한군데 쯤은 둘러보려 했을 게다. 그런데 딱히 관광지랄 곳도 없는 듯하고 적극적으로 찾아보자니 이제는 그만한 열정이 식었다. 더워도 보통 더워야 말이지. 체감 온도 49도. 살인적 더위란 바로 오늘을 두고 한 말이다.
이제 귀국 시작이다. 일단 남은 루피의 소진을 위해 쇼핑쎈타를 들렀다. 남은 돈이라야 겨우 4,000루피. 쎄일 하는 청바지 한장 살 정도의 돈이다. 청바지는 스타일이 안맞아 포기하고 맞춤한 회색의 체크 무늬 남방셔츠가 맘에 든다. 입어보니 치렁거리지 않아 좋다. 가격도 남은 돈에 딱 맞아 이를 구입하고도 햄버거 하나는 주문할 수 있겠다. 구매 결정. 셔츠 한장에 기분이 업되었다. 다시 이웃한 가게에 들렀다. 청바지가 몸에 잘 맞다. 오십프로 쎄일이란다. 추가 구입 결정. 청바지 두장을 사고 내처 남방셔츠를 하나 더 구입했다. 갑자기 쇼핑 백이 두둑해졌다. 여기 파키스탄은 수입품의 경우 같은 브래드라도 한국보다 훨씬 비싸지만 자체 생산한 제품들은 세계 유명상표 제품들을 주문 받아 제조하는 나라이기에 그 품질과 가격이 좋다. 번듯한 쇼핑쎈터의 유명 매장에서 쎄일 기간을 이용, 우리 돈 오만원에 청바지와 남방셔츠 각각 두장씩을 건졌으니 이만하면 성공한 쇼핑이다. 현금이 남아있지 않아서 비씨카드로 결재하니 그 내역이 바로 폰에 알려온다. 외국에서도 국내와 똑같은 시스템이 적용되는 세상이다.
쇼핑몰의 같은 층에 피자헛이 있다. 레귤러 한판으로 네명의 점심을 저렴하게 해결했다. 그 맛이 한국에서와 별반 차이가 없다. 오가는 사람들이 다들 멋쟁이다. 아울렛 처럼 운영되는 이 쇼핑 몰은 일반 서민들은 쉽게 들어올 수가 없는 공간이다.
이제 공항으로 갈 시간. 화려한 쇼핑몰을 나오니 얼마 되지 않아 올드시티를 통과한다. 창 밖에 펼쳐진 거리의 풍경이 결코 정겹지 못하다. 혼잡과 지저분, 어떻게 사나 싶다. 먼지 투성이의 거리에 냉장시설도 없이 그냥 내걸린 고기들. 심난하다. 갑자기 한국이 그립다.
도시 빈민가를 방불하는 올드시티를 벗어나니 곧바로 부촌이 나온다. 좁은 차도 하나를 경계로 거리의 풍경이 극적으로 바뀌었다. 넓게 터를 잡은 저택들이 즐비한데 외관만 보아도 그 훌륭한 설계를 알겠다. 깨끗한 거리와 정돈된 정원수. 관리된 잔디밭 등등. 겉만 보아도 훌륭한 주택단지. 파키스탄의 엄청난 빈부 격차를 적나라 하게 보여준다. 듣자하니 중산층의 개념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단다. 그냥 부자 아니면 가난뱅이다.
라호르 공항까지는 비록 도로가 엉망이긴 하지만 그다지 멀지 않아 쉽게 도착되었다.
암튼 덥다. 차 안이 천국이다. 공항 대합실도 덥다. 어서 비행기 내부로 들어가야 더위를 면할텐데 아직도 두시간을 더 기다려야만 한다. 목에 땀이 나서 끈적거린다. 세면대에 가서 물로 목을 적셔도 그 때 뿐. 그냥 포기하고서 주저 앉아 글이나 쓰고 있자니 그나마 잊혀져서 조금 낫다. 다행히 생각보다 일찍 탑승이 시작되었다. 중국 남방항공. 기종은 보잉 787-9, 거의 300개의 좌석을 구비한 대형 기종이다. 쾌적하다. 드디어 목에 진땀이 식었다. 비록 이코노미석이지만 무릅이 편안하다. 이제 비행 시간만 견뎌내면 집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