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는데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먹었다.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께 “저것 보십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다윗의 일행이 굶주렸을 때에
다윗이 한 일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그는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서 그 일행과 함께 제단에 차려놓은 빵을 먹지 않았느냐?
그것은 사제들밖에는 다윗도 그 일행도 먹을 수 없는 빵이었다.
또 안식일에 성전 안에서는 사제들이 안식일의 규정을 어겨도
그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책에서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잘 들어라.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나에게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너희는 무죄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단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태 12,1-8)
신학교 아침기도 시간의 풍경. 성당은 학년별로 모여 앉도록 좌석 배치가 되어 있다.
그래서 아침기도와 묵상을 하는 뒷모습만 봐도 학년 구분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졸고 있는 뒷모습이 학년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아래 학년일수록 머리의 출렁임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해가 다르게 조는 기술은 늘어나고 신학교 전 과정을 마무리할 때쯤이면
꿈속에 있으면서도 거의 머리를 움직이지 않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사제품을 준비하는 신학생 시절이나 성품성사를 받을 때 가졌던 열정과 정의가
사제생활 중에도 변함없이 지켜나가기가 참 어렵다.
심지어는 사제들이 강론을 통해 강조하는 신앙생활의 모범은 오로지 신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인 양 강론 따로 생활 따로인 경우도 있다.
본당에서도 처음 시작하는 신앙인들이 기존의 신자들보다 더 순수하고 열심인 것을
자주 보게 된다. 더 많이 알고, 더 오랜 기간 신앙생활을 한 분들이 사랑의 공동체를
만드는 데 오히려 장애가 될 때도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사제로서 한 해 한 해 햇수를 더해가는 것, 본당에서 직책(봉사자리)이 하나씩
더 늘어나는 것, 더 책임있는 자리를 맡게 된다는 것은 어쩌면 바리사이파가
될 수 있는 유혹이 더 가까이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정신차릴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