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르 5, 21-43
오늘 복음 묵상은 제 1독서 히브리서로부터 시작해봅니다.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 붙는 죄를 벗어버리고.."(12,1)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죄란 우리를 자유롭게 두지 않습니다. 나를 타인으로 부터 분리하게 만들고,자채하면서 자기 자신과도 분리시킵니다.
그러기에 죄의 다른 이름은 작은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히브리서는 죄를 벗어버리라고 합니다. 우리가 달려야 할길을 꾸준히 달리면서(12,1) 말이지요. 그 구체적인 예시가 오늘 복음에 나오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질병과 죽음은 죄의 결과라는 시대적인 통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야이로는 그마을의 내노라는 회당장이면서도 촌각을 다투는 자신의 딸을 위해 자신보다도 젊은 예수님의 발앞에 자신을 낮추어 엎드립니다.
열두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인은(자타가 인정하는 죄인이었던 )감히 그분옷에 손을 댑니다..
그렇게 그들은 죽었던 딸을 돌려받고 그 힘겹던 고질병은 치유를 받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달릴길을 꾸준히, 최선을 다해서 달린것이지요.
신앙은 자신에서 벗어나 낯선 선택을 해 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12,2) 말이지요.
회당장 야이로가 사랑하는 딸을 위해서 자신의 위신보다 예수님을 더 바라보아 딸을 돌려 받습니다.
열두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인이 사회적 통념보다 예수님을 더 바라보아 치유를 받습니다.
믿음은 그분을 더 바라보며 불가능해 보이는 모험을? 가능케 합니다.
그렇게 믿음은 그분을 내안에, 세상안에 모셔오는 열쇠가 됩니다..
"주님, 당신얼굴 이 종에게 비추시고,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제가 당신을 불렀으니,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오늘 영성체송)
(정 루치아나 수녀님)
2월4일 [연중 제4주간 화요일]
마르코 5,21-43
불가능한 일은 없다. 불가능하다는 생각만 존재할 뿐이다.
두 장애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한 청년은 축구, 레슬링, 권투 등 만능선수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979년 권투 시합에서 사고를 당해 하반신을 못 쓰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앞으로 몇 년 동안 치료를 받고 보조기를 쓰면 혼자서 걸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친구들에게 산에 데려다 달라고 했습니다.
정상에 다다르자, 그는 그를 산에 옮겨 준 친구들에게 잠깐만 자리를 피해 달라고 하고는
숨겨 가지고 온 권총으로 자살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24세였습니다.
다른 한 청년은 어느 날 불량배들에게 칼을 맞고 하반신이 마비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는 투지로 노력한 끝에 낙하산 점프의 묘기를 보였고, 특별 장비를 갖춘 자동차를 운전하고 다니며 혼자서 취사, 세탁, 청소 등을 하며 생활합니다.
그는 또한 휠체어 스포츠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관한 세 권의 사진첩을 출간하였습니다.
시련이 없는 삶은 없습니다.
시련은 어떤 식으로든 찾아옵니다.
그 시련을 대하는 자세가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고 실패로도 이끕니다.
그 시련을 대하는 자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주위에 그런 믿음을 줄 사람이 없다면 안 좋은 결말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믿음을 굳건히 지켜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혈병 여인과 회당장은 그러나 믿음을 방해하는 많은 장애들을 만납니다.
하혈병 여인은 처음에 돈이 좀 있었습니다.
돈과 의사의 말을 믿었습니다.
전 재산을 다 날렸다면 의사들은 이제 포기하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혈병 걸린 여인은 포기를 몰랐습니다.
믿음을 저해하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회당장은 예수님을 모시고 가다가 믿음이 약한 종을 만납니다.
종이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자 회당장은 주저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그런 예수님을 비웃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어떻게 하셨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믿음도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약한 사람들 가운데 있으면 혼자 강한 믿음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믿음을 약하게 만드는 모든 사람들을 쳐내셨습니다.
우리 주위에 믿음을 약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면 먼저 그것을 끊어버릴 용기부터 있어야합니다.
그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심지어 믿음을 비웃으면 내쫓아버리십시오.
불가능은 없다는 믿음을 주는 사람과 가까이하십시오.
미국의 마리온 라이스 하트 여사는 경비행기를 타고 대서양을 횡단해 유명해진 사람입니다.
경비행기로 그것도 여자가, 84세의 나이로 대서양을 횡단을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하트 여사가 비행을 배우기 시작한지 겨우 2달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비행을 시작한 이유도 ‘혼자 시간을 때우기에 아주 좋다’는 이유뿐이었습니다.
단순히 비행을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라 나이가 들면 많아지는 혼자 있는 시간을 규모 있게 보내려다보니 나온 생각이었습니다.
이후로 하트 여사는 ‘나는 할머니’라는 별명으로 세계의 여러 곳을 작은 경비행기로 방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사가 도착하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환영을 했고 그 때마다 여사는 ‘기진맥진하지만 매우 행복하다’는 소감과 함께 사람들의 환대에 감사했습니다.
하트 여사의 도전은 보통 사람이라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특별함은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불가능하다고 믿으면 불가능한 것이고 가능하다 믿으면 가능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 믿으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이들을 조심합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4일 [연중 제4주간 화요일]
복음: 마르 5,21-43
우리는 이 시대 또 다른 예수님이요, 하느님의 손가락입니다!
하혈하는 여인의 치유뿐만 아니라 이미 숨이 끊어진 회당장 딸의 목숨까지 소생시키신 예수님의 전지전능한 모습에 사람들은 너무 놀라 그야말로 넋을 잃을 지경이었습니다.
‘넋’은 다른 말로 ‘혼(魂)’, ‘혼백(魂魄)’, 영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넋이라는 것은 죽어야 사라지는 것이지만, 갑작스레 큰 충격을 받을 경우, 모든 생각이나 사고가 일시 정지되는데, 이런 상태를 넋이 나갔다고 표현합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 치유나 구마, 소생은 충격적인 것이었으며, 역사상 전무후무했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놀라운 능력은 그분 안에 하느님께서 역동적으로 활동하고 계심을 드러내는 표지였습니다.
은혜롭게도 잠시나마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람들은 어쩌면 그들이 그토록 고대했던 하느님 나라를 잠시나마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이 대목에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나 던져봅니다.
왜 우리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놀라운 치유와 구마, 소생 현상을 찾아보기 힘든 것인가?
왜 우리 사제들과 수도자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주어지지 않는 것인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방식이 좀 다르지만, 예수님 시대 그 역동적이고 충격적이었던 치유와 구마, 소생 현상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손가락을 통해 이루어지던 놀라운 일들이 지금 이 시대에는 또 다른 선인들과 의인들을 통해 지속되고 있음을 저는 볼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잘 준비된 의료진들과 누군가의 피나는 연구 끝에 발명된 최첨단 의료기기들이 질병으로 인해 고통받고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치유시키고 살려내고 있습니다.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웃들을 그 고통에서 해방시키고 싶은 선한 의지를 지닌 의료진들의 얼굴은 이 시대 또 다른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어린이들, 그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난민들을 돕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그들을 존중하고 지지하며 후원하기 위해 나를 희생하는 사람들은 제2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얼마나 많은 이웃들이 소리 없이 죽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 아프고 견디기 힘들어서 겨우겨우 통증을 참아내고 신음 소리를 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대 또 다른 예수님이요,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2천년전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그 사랑의 기적을 각자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계속해나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4주간 화요일 강론>
(2025. 2. 4. 화)(마르 5,21-43)
<‘나의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가 기적을 일으킵니다.>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마르 5,22-24).”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5-36)”
1)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여자를 고치신’ 이야기는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이 이야기를 해석할 때 ‘믿음’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예수님을 믿어서 불치병을 고친 이야기”로만 해석한다면, 아주 단순한 이야기가 되어버리고, 해석하기도 편하고 강론하기도 편하게 되는데, 그런 해석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불치병을 고칠 수 있다.” 라는 오해로 이어집니다.
그 오해는 “내가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는데도
병이 낫지 않는 것은 나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라는 좌절과 절망으로 이어집니다.
“믿기만 하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또는 “믿음만 있으면 기적이 일어난다.” 같은 말은,
사이비 종교에서 흔히 하는 말입니다.
2) 정말로 예수님을 믿고 간절하게 기도해서 불치병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분명히 있지만, 병이 치유되지 않고 그 병으로 그냥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누구는 고쳐 주시고, 누구는 고쳐 주시지 않는가?
그 기준은 무엇인가? 믿음인가?
아니면 뭔가 다른 것이 더 필요한 것인가?
<34절에 있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을, 여자의 믿음이 치유의 기적을 일으켰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기적은 여자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비와 권능이 일으켰습니다.
따라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은,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시는 말씀이긴 한데, “이제부터는 믿음을 더욱 굳게 가지고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라.”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병석에 누워 있는 병자에게 문병을 가서, 병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잃지 말고 꾸준히 기도하라고
격려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 병은 주님의 뜻이다.”, 또는 “믿음만 있으면 이 병은 무조건 반드시 낫는다.” 같은 말은 하면 안 됩니다.
그런 말은 희망이 아니라 절망을 심어 주는 말입니다.
‘병에 걸리는 것’이 ‘주님의 뜻’은 아닙니다.
무슨 병이든지 간에 그것을 잘 극복하고 다시 일어서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병이 낫지 않더라도...
3)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경우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12,7ㄴ-10).”
바오로 사도는 어떤 병 때문에 평생 고생했다고 전해집니다.
<통증이 무척 심한 불치병이었습니다.>
수많은 병자들을 고쳤고, 죽은 사람을 살리기까지 했던 바오로 사도였지만, 그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가 주님께 치유의 은총을 ‘세 번이나’ 간청했는데도, 주님께서는 그 청을 들어 주기를 거절하셨습니다.
그의 병약한 몸이 오히려 주님의 힘을 증언하기
때문이라는 주님의 말씀 그대로,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목격하고 체험합니다.
4) 회당장 야이로에게, 또 열두 해 동안 하혈하던 여자에게 예수님은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죽었던 딸이 살아난 것으로 야이로의 희망이 완전히 이루어졌을까?
더 이상 희망할 것이 없는 상태가 되었을까?
여자의 경우에도, 불치병이 완치된 것으로 희망이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더 바랄 것 없는 상태에서 남은 인생이 행복하기만 했을까?
예수님 덕분에 다시 살아난 소녀도, 불치병이 완치된 여자도, 죽을 때가 되었을 때 죽었고, 그러면 그 다음에는?
‘몸의 건강’은 하느님 나라에 가는 여행길에 필요한, 또는 중요한 것이긴 한데,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고, ‘보조 수단’일 뿐입니다.
몸만 건강하고 영혼은 건강하지 못해서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 일이 생긴다면?
<지옥은 몸만 건강한 사람들이 가는 곳, 하느님 나라는 몸은 어찌 되었든지 간에 영혼이 건강한 사람들만 가는 곳.>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