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에서 우리는 특별한 노력 없이 자아(몸-생각)와 세계(다른 자아-사물-시공간)를 보고 듣고 압니다. 무심한 중에 우리는 자아와 세계를 잘 의식하며, 지금 이렇게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고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보고 듣고 아는 주인공인 의식을 추적해서 탐색하면 의식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알려지지도 않습니다. 의도적으로 의식을 찾아보면 도무지 찾을 수도 볼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의식이 두뇌 안에 자리 잡고 앉아서 눈과 귀라는 창문을 통해서 사물을 보거나 듣고, 두뇌를 사용해서 생각한다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실제 사실을 관찰하면 이런 상식과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두뇌 내부는 두개골과 뇌수로 둘러싸여 빛이 완전히 차단된 어두운 곳입니다. 그곳에는 다만 신경세포 간의 전기화학적 신호를 매개로 연결망 형성작용이 빛의 속도로 일어납니다. 현재의 과학적 추론은, 감각기관과 신경망을 통해서 전달받은 전기화학적 신호를 두뇌가 접수한 후 어떤 알 수 없는 처리 과정을 거쳐 영상과 소리와 감촉 등으로 변환시키고, 다른 한편 별도의 알 수 없는 과정을 거쳐 두뇌가 창조한 의식이 앞서와 같이 변환된 영상과 소리와 감촉을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원적 패러다임에 걸맞게 두뇌 안에서도 주·객으로 분리되는 일이 벌어진다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두뇌 내부에는 영상과 소리는 물론이고 기쁨과 슬픔, 깊은 통찰, 주체의식 그런 것이 없습니다. 발견되는 것은 신경세포 간의 전기화학적 상호작용이 전부입니다. 그러므로 의식이 있는 장소는 두뇌가 아닙니다.
의식이 두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의식은 딱 한군데를 제외하고는 달리 있을 곳이 없습니다. 그곳은 두뇌 밖의 모든 공간입니다.(Being : 두뇌를 포함한 모든 공간) 두뇌조차 의식을 담는 용기가 아니라면 의식은 그 어디에도 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식(우리)은 모든 장소 즉 모든 공간과 시간에 있고 또 그래야만 합니다.
한편, 지금 보이고 들리는 사물과 장면은 두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뇌 바깥 공간에 있는 것이 분명한 우리의 경험적 사실입니다. 이때 이 모든 사물과 장면을 보고 듣고 아는 의식 역시 두뇌 안에 위치하지 않음도 분명합니다. 즉 우리(의식)는 지금 두뇌 안에서 자아와 세계를 의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두뇌 바깥에서 자아와 세계를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분명한 사실은, 두뇌 바깥에 있는 의식이 두뇌 바깥에 있는 세상 만물(몸을 포함)을 보고 듣고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뇌 밖 공간에 보는 자인 ‘의식’과 보이는 대상인 ‘세상 만물’ 두 개가 발견되어야 하는데, 그 둘 사이를 가르는 경계선은 도무지 발견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는 자-보이는 장면, 주관-객관, 의식-세상 만물, 정신-물질, 우리-세계, 이들 반대 쌍들은 실제로는 서로 다르지 않은 같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만물은 곧 의식이고, 의식은 곧 세상 만물입니다. 우리는 세상 만물입니다.
물질이 곧 의식이고, 의식이 곧 물질이다.
色卽是空 空卽是色
(색즉시공 공즉시색)
- 반야심경
의식(우리)은 바로 의식되는 그것입니다. 의식(우리)은 보이고 들리는 사물과 장면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식(우리)은 항상 의식되는 대상과 함께 있습니다. 무엇인가가 보이고 들린다면 의식은 보이고 들리는 그것과 언제나 같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점은, 대상과 의식이 같이 있다고 해서 대상과 별도로 의식이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보통 대상은 잘 보이지만 의식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진실을 이해하고 실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비유를 들 수는 있지만 역시 비유에 불과하므로 실제와 정확하게 들어맞지 않습니다. 금으로 만든 거북이와 돼지는 모두 금일 뿐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다의 수많은 파도와 물방울은 전부 그냥 바다입니다. 다채로운 무지개 색깔은 모두 색깔 없는 햇빛입니다. 물결은 단지 물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만약 의식되는 것이 아무도 없다면(Being : 꿈도 없는 깊은 잠, 태어나기 전, 죽음 후) 의식 또한 없는 것인지 여부입니다. 의식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의식(우리)은 여전히 본래의 투명한 의식으로 있습니다. 왜냐하면, 의식되는 것 즉 세상 만물 역시 투명한 의식의 변형이기 때문입니다. 몸과 세상 만물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아는 자로서의 투명한 의식은 항상 그대로 있습니다. 물결이 있든 없든 물은 언제나 그대로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의식되는 것(몸과 세상 만물)이 곧 의식하는 의식이므로 더는 세계를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어 보지 않아야 합니다. 세계를 아는 자는 세계와 별도로 있지 않으며 세계와 한 몸으로 있습니다. 온 세상이 곧 의식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의식을 다시금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그것인 것을 우리가 어찌 다시 그것이 되거나 그것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사람이 발견한 것 중에 가장 최고의 지혜이자 보물입니다.
만약 천하를 천하에 감춘다면 찾을 방법이 없다.
若夫 藏天下於天下 而不得所遯
(약부 장천하어천하 이부득소둔)
- 장자, 대종사
이미 보는 눈인데 눈이 어찌 다시 눈을 보겠는가. 사물을 잘 본다면 곧 눈을 본 것이다. 스스로 신령하게 아는 의식도 이와 같다. 이미 의식하는 의식이 어찌 다시 의식을 의식하겠는가. 만약 의식을 의식하기를 바란다면 결코 의식할 수 없다. 다만 의식을 다시 의식할 수 없음을 안다면 그것이 곧 깨달음이다.
旣是自眼 如何更見 若知不失 卽爲見眼 自己靈知 亦復如是 旣是自心 何更求會 若欲求會 便會不得 但知不會 是卽見性
(기시자안 여하갱견 약지불실 즉위견안 자기영지 역부여시 기시자심 하갱구회 약욕구회 변회부득 단지불회 시즉견성)
- 보조지눌, 수심결
한 그루 나무가 보일 때 의식(우리)은 나무의 모습으로 있고 동시에 나무를 보고 압니다. 보는 의식과 보이는 나무가 머릿속에서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이 두뇌 안에서 밖의 나무를 쳐다보는 것이 아닙니다. 자동차 소리가 들릴 때 의식(우리)은 소리의 모습으로 있고 동시에 소리를 듣고 압니다. 의식이 두뇌 안에서 밖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와 소리는 머릿속이 아니라 엄연히 머리 바깥에서 보이고 들립니다. 나무와 소리가 객관적으로 있어서 보이고 들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고 들리므로 나무와 소리가 있게 됩니다.
냄새·맛·촉감이 느껴질 때 의식(우리)은 냄새·맛·촉감의 모습으로 있고 동시에 냄새·맛·촉감을 느끼고 압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 의식(우리)은 생각의 모습으로 있고 동시에 그 생각을 보고 압니다. 공간과 시간이 느껴질 때 의식은 공간과 시간의 모습으로 있고 동시에 공간과 시간을 느끼고 압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의식(우리)입니다.
공간은 의식이다.
無變虛空 覺所顯發
(무변허공 각소현발)
- 원각경
영겁을 관통하는 최고의 지혜를 알고자 하는가. 마땅히 세상 만물의 성질을 관찰하라. 모든 것은 의식이다.
若人慾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 화엄경
출처 : "자유롭게 살고 유쾌하게 죽기", 이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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