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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방[6318]古方4자성어71~80
고방서예명제(71)弓滿則折(궁만즉절)
[요약] (弓: 활 궁. 滿: 찰 만. 則: 곧 즉. 折: 꺽일 절)
활시위를 다 당겨 버리면 바로 끊어지게 된다는 뜻으로,
모든 일이 지나치면 잘못된다는 말.
[출전]《석성금(石成金)의 전가보(傳家寶)》
[내용] 이하 조선일보 정민의 世說新語 궁만즉절(弓滿則折)
청나라 때 석성금(石成金)이 '전가보(傳家寶)'에서 말했다.
"지금 사람들은 뜻에 통쾌한 말을 하고, 마음에 시원한 일을 하느라
온통 정신을 다 쏟아 붓는다. 정을 있는 대로 다하여 조금도 남겨두지 않고,
터럭만큼도 남에게 양보하려 들지 않는다.
성에 차야만 하고 자기 뜻대로 되어야만 한다. 옛사람은 말했다.
말은 다해야 맛이 아니고, 일은 끝장을 봐서는 안 되며, 봉창에 가득한 바람을
편 가르지 말고, 언제나 몸 돌릴 여지는 남겨 두어야 한다.
활을 너무 당기면 부러지고(弓太滿則折), 달도 가득 차면 기운다.
새겨둘 일이다."(今人說快意話, 做快意事, 都用盡心機. 做到十分盡情,
一些不留余地, 一毫不肯讓人. 方才燥脾, 方才如意. 昔人云, 話不可說盡,
事不可做盡, 莫撦滿篷風, 常留轉身地, 弓太滿則折, 月太滿則虧. 可悟也.)
오가는 말을 보면 그 시대의 품격이 보인다. 요즘 언어는 너무 강파르다.
날을 세워 악랄하다. 저마다 자기 말만 옳고 남이 틀렸다고 한다.
귀는 틀어막고 소리만 질러댄다. 대화는 없고 고성만 오간다. 경청(傾聽),
즉 귀 기울여 듣는 태도는 찾아볼 수가 없다. 하나 마나 한 말이고, 들으나
마나 한 얘기다. 그러면서도 말이 안 통해 답답하다는 얘기는 빼먹지 않는다.
전부 아니면 전무(全無)여서 중간이 없다. 그는 또 말한다. "사람 사는 세상의
온갖 경우가 어찌 일정하겠는가? 한 걸음 앞서 생각하면 끝날 때가 없고,
한 걸음 물러나 생각하면 절로 남는 즐거움이 있다."
(人世間境遇何常? 進一步想, 終無盡時, 退一步想, 自有餘樂.)
남은 무조건 틀렸고 나만 반드시 옳다는 태도로는 세상에 풀릴 문제가 없다.
상대에 대한 존중 없이는 이해는 없고 오해만 깊어진다.
신뢰가 애초에 없고 보니 뭘 해도 불신만 가중된다. 청나라 때 주석수(朱錫綬)가
'유몽속영(幽夢續影)'에서 말했다. "기분 내키는 대로 얘기해도 말은 한마디
더 적게 하라. 발길 따라 걷되 길은 한 걸음 양보하라. 붓 가는 대로 써도 글은
한 번 더 점검하라."(任氣語少一句, 任足路讓一步, 任筆文檢一番.)
머금는 뜻이 조금도 없이 쏟아내는 언어의 폭력 앞에 코 막고 귀 막고 싶어진다.
고방서예명제(72)跋山涉水(발산섭수)
跋: 밟을 발, 山: 뫼 산, 涉: 건널 섭, 水: 물 수
산 넘고 물을 건너간다는 뜻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는 것을 비유하는 말.
풀 섶 길을 가는 것을 跋이라 하고 물길을 가는 것을 涉이라 한다.
[출전]《시경(詩經) 국풍(國風) 용풍(鄘風) 재치(載馳)편》
[내용] ‘재치(載馳)’는 위(衛)나라 선공(衛宣公)의 부인인 선강(宣姜)의 딸이
허(許)나라 목공(穆公)의 부인(夫人)이 되었다. 위(衛)나라의 멸망을 슬퍼하여
위(衛)나라의 돌아가 제후(諸侯)를 위로코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음을
노래한 것이다. 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載馳載驅(재치재구) : 수레를 달리고 달려
歸唁衛侯(귀언위후) : 돌아가 위나라 임금을 위로하려고,
驅馬悠悠(구마유유) : 멀리 말을 달리고 달려
言至于漕(언지우조) : 조 땅으로 도착하리라.
大夫跋涉(대부발섭) : 대부는 산 넘고 물 건너 쫓아 오겠지만
我心則憂(아심칙우) : 내 마음은 조급해지네.
旣不我嘉(기불아가) : 나를 기꺼워하지 않지만
不能旋反(불능선반) : 내 이 뜻 돌이킬 수 없네,
視爾不臧(시이불장) : 그대들이 좋게 여기지 않는 줄 알지만
我思不遠(아사불원) : 내 생각은 돌이킬 수 없네
旣不我嘉(기불아가) : 나를 기꺼워하지 않으니,
不能旋濟(불능선제) : 곧 건널 수가 없네.
視爾不臧(시이불장) : 그대들이 좋게 여기지 않는 줄 알지만
我思不閟(아사불비) : 내 생각 막을 수 없네
跋山은 산을 넘고 고개를 넘는다는 뜻이요, 涉水는 걸어서 바다를 건넌다는
의미다. 이렇게 먼 거리를 가다보면 고생은 이루 말로는 다할 수 없다.
跋山 涉水는 그래서 많은 어려움을 겪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 됐다.
또 '좌전' 양공28년조에 "산 넘고 물 건너서 서리와 이슬을 무릅썼다
(跋山 涉川 蒙犯霜露)"라는 기록이 있다. 跋山 涉水나 跋山 涉川은 같은 뜻이다.
산 넘고 물 건너서라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고방서예명제(73)集思廣益(집사광익)
모일 집, 생각할 사, 넓을 광, 더할 익.
뜻풀이: '생각을 모아 이익을 더한다'는 뜻으로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으면 더 큰 효과와 이익을 얻을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중국 삼국시대 신기묘산의 지략가로 알려진 제갈량은 나랏일을 처리 할 때
독단적으로 하지 않았다. 그가 촉나라의 승상이 된 뒤에 하급관리들에게 내린
여군하교(與群下敎)란 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정치는 모든 사람의 의견 제시가 이루어져야 더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논쟁이 두려워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기를 꺼린다면 결국 나라가 큰 손실을
입게 된다.“고 했다.
제갈량은 항상 허심탄회 (虛心坦懷)하게 부하들의 의견을 청취하였다.
한번은 제갈량의 일처리가 치밀하지 못하였는데 동화(董和)라는 관리가 이에 대해
여러 차례 다른 의견을 제시하며 그와 논쟁을 벌였다. 이 일에 대하여 제갈량은
동화를 질책하기는 커녕 오히려 한 편의 글을 써서 그를 표창함과 동시에 여러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견을 발표하였는데 바로 여군하교(與群下敎)라는 글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용인술(用人術)이 있지만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소통’을 통한 인사 성공 사례들이다. 인사 뿐 아니라 리더가 결정을 내릴 때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아 행하면 더 좋은 결과를 낳았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은 인재를 등용할 때 사람의 좋고 나쁨에 따라 판단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에게 악의를 품고 있는 사람조차 어떤 직위에 적합한 사람이라면
그를 기용했다. 또 대통령 당선 후 노예제도 폐지 절차 문제를 놓고, 정치적 견해가
상반됐던 정적 프레더릭 더글러스를 순회특사로 임명해 연방정부가 전쟁을
수행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각주에 설명케 했다.
자신을 ‘레일 침목꾼’으로 무시하던 선배 국회의원 윌리엄 시워드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했고, 대통령 경선 패배로 평생을 링컨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새먼 체이스를 국무장관에 내정했다. 그의 이러한 끌어안기식 용인술은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남의 말을 성심성의껏 듣고 그 말을 제대로 활용하는 것은 금과옥조로 여길 만하다.
그것이 곧 공감이요, 소통이다. 상하관계가 엄한 조직일수록 윗사람은 말을 많이
들어야 귀가 뚫리고, 귀가 뚫리면 비로소 마음이 열리게 된다.
‘불통인사’, ‘소통이 안 된다’는 말이 더 이상 새롭지 않기에 링컨의 끌어안기식
용인술이나 ‘집사광익’이라는 고사성어가 더욱 와 닿는다
고방서예명제(74)國亦有染(국역유염)
(國: 나라 국, 亦: 또 역, 有: 있을 유, 染: 물들 염)
나라를 다스리는 일 또한 실을 물들이는 바와 같다는 뜻.
[출전]《묵자(墨子) 卷一 소염(所染)》
[내용] 이 성어는 묵자(墨子) 소염(所染)편에 나오는 말로,
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파란 물감에 물들이면 파란색, 노란 물감에 물들이면 노란색이 되는구나.
이렇게 물감에 따라 실의 색깔도 변하여 매번 다른 색깔을 만드니
물들이는 일이란 참으로 조심해야 할 일이다. 사람이나 나라도
이와 같아 물들이는 방법에 따라 일어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 것이다.”
子墨子言,見染絲者而嘆曰:染於蒼則蒼,染於黃則黃,所入者變,
其色亦變。五入必而已,則為五色矣。故染不可不愼也。非獨染絲然也,
國亦有染。
墨子 卷一 所染 이어 묵자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다.
옛날 순(舜)임금은 어진 신하 허유(許由)와 백양(伯陽)의 착함에 물들어 천하를
태평하게 다스렸고, 우(禹)임금은 고요(皐燿)와 백익(伯益)의 가르침,
은(殷)의 탕왕(湯王)은 이윤(伊尹)과 중훼(仲迂)의 가르침, 주(周)의
무왕(武王)은 태공망(太公望)과 주공단(周公旦)의 가르침에 물들어 천하의
제왕이 되었으며 그 공명이 천지를 뒤덮었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이
천하에서 인의를 행한 임금을 꼽으라면 반드시 이들을 들어 말한다.
그러나 하(夏)의 걸왕(桀王)은 간신 추치(推琇)의 사악함에 물들어 폭군이
되었고, 은나라의 주왕(紂王)은 숭후(崇候), 오래(惡來)의 사악함, 주나라
여왕(勵王)은 괵공 장보(長父)와 영이종(榮夷終)의 사악함, 유왕(幽王)은
부공이(傅公夷)와 채공곡(蔡公穀)의 사악함에 물들어 음탕하고 잔학무도한
짓을 하다가 결국은 나라를 잃고 자기 목숨마저 끊는 치욕을 당하였다. 그
리하여 천하에 불의를 행하여 가장 악명 높은 임금을 꼽으라면 반드시 이들을
들어 말한다. 평소에 사소하다고 생각되는 일일지라도 그것이 계속되면
습관화하여 생각과 태도가 길들여지는 것이므로 나쁜 습관이 들지 않도록
경계하는 말이다.
[출처] 나라도 이와 같아 물들이는 방법에 따라 일어나기도 하고|작성자 몽촌
고방서예명제(75)風樹之嘆(풍수지탄)
부모(父母)님 살아 계실 때 효도(孝道)하라.
돌아가신 뒤에는 효도하고 싶어도 아무 소용없는 일이라는 말.
[자해(字解)] 바람 풍(風)/ 나무 수(樹)/ 갈 지(之)/ 탄식할 탄(嘆)
[출전(出典)] 한시외전(漢詩外傳))
[동의어(同義語)] 풍수지비(風樹之悲) 풍수지감(風樹之感)
공자(孔子)의 제자(弟子) 중 한 사람인 중유(仲由)의 자(字)는 자로(子路)인데,
그가 공자를 뵙고 말하였다. “제가 부모를 섬길 때에 백 리 밖에 가서 쌀을
가져다가 봉양(奉養)을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돌아가시고 저는 초(楚)나라
대부(大富)가 되어 곡식(穀食)을 쌓아 놓고 먹게 됐지만 이제 와서는 쌀을 져다가
효도를 하고 싶어도 되지 않는군요.” 어느 날 공자는 길가에서 울고 있는
우구자(虞丘子)라는 사람을 발견하고 그 까닭을 물었다. 우구자가 대답(對答)했다.
“선생님, 나무는 조용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子息)은 봉양을
하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리지 않고 가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는 것입니다.”
중유나 우구자의 경우를 보더라도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를 함에는 살아 생전(生前)에
해야지 돌아가신 다음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漢詩外傳>에는 다음과 같은 시(詩)가 전한다. 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수욕정이풍부지,자욕양이친부대)
나무는 고요히 있고자 하나 바람은 그치지 아니하고
자식은 부모님을 봉양코자 하나 부모님은 기다리지 않으신다.
중유에게는 백 리 밖에 가서 쌀을 지고 오는 것이 몸은 고달프더라도 부모를 위한
일이기에 오히려 즐거운 일일 수 있었고, 곡식 만석(萬石)을 쌓아 놓고 먹게
되었다고 해도 부모에게 봉양할 길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도리어 슬픈 일이었던
것이다. 이는 슬프고 즐거운 것이 자기 한 몸의 궁(窮)하고 가득한데 있지 않고,
오직 부모가 계시고 안 계신 데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사람의 목숨은 끝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죽는 날이 있다는 것을
알아도 정작 그 죽음이 부모님에게 찾아올 것이라는 상상(想像)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병이 위중(危重)하여 죽음을 예감하고 있는 경우가 아니면 부모의
죽음은 언제나 자식에게 있어서는 갑자기 찾아오는 기습(奇襲)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불시에 기습을 당하고 나서야 땅을 친다. 땅을 치고 후회(後悔)를 하며,
불효(不孝)를 한탄하고 울어도 다 소용(所用)이 없는 일이 되고 만다.
고방서예명제(76)泰山北斗
[요약] (泰: 클 태. 山: 뫼 산. 北: 북녘 북. 斗: 별이름 두)
중국(中國) 제일(第一)의 명산인 태산(泰山)과 북두성(北斗星)이라는 뜻으로,
①학문(學問)ㆍ예술(藝術) 분야(分野)의 대가(大家)
②태산(泰山)과 북두칠성을 여러 사람이 우러러보듯이,
남에게 존경(尊敬)받는 뛰어난 존재(存在).
[출전]《당서(唐書)》 〈한유전(韓愈傳)〉의 찬(贊)
【내용】한유(韓愈)는 중국 당나라 때의 문학자이자 사상가로,
이백(李白), 두보(杜甫), 백거이(白居易)와 함께 당나라의 대표적 4대 시인의
한 사람이며,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로 꼽히는 중국 제일의 문장가이다.
그는 25세 때 진사과에 급제한 뒤 벼슬이 이부상서(吏部尙書)까지 되었으나
황제가 관여하는 불사(佛事)를 극간하다가 조주자사(潮州刺史)로 좌천되었다.
천성이 강직했던 한유는 그후에도 여러 차례 좌천과 파직을 당하기도 했는데,
만년에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지낸 뒤 57세의 나이로 죽었다.
한유는 순탄하지 못했던 벼슬살이와는 달리 학문과 사상 분야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친구인 유종원 등과 고문운동을 제창하여, 고문이 송대 이후
중국 산문 문체의 표준이 되게 했으며, 그의 문장은 그 모범으로 알려지는 등
후세에 영향을 주었다. 사상 분야에서는 도교와 불교를 배격하고 유가의
사상을 존중하여 공자 이래의 유학을 왕성하게 하는 데에 힘써 송대 이후의
도학(道學)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 결과 후학들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받게 되었다.
당서(唐書) 한유전(韓愈傳)의 찬(贊)에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당나라가 일어난 이래 한유는 육경(六經)의 문장으로 여러 학자들의
스승이 되었다. 그가 죽은 뒤에도 그의 학설이 천하에 떨쳤으므로 학자들은
그를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우러러보았다.” 愈가 以六經之文으로
爲諸儒倡하다. 自愈沒에 其言大行(其學盛行)하여 學者仰之하며
如泰山北斗云하다.
여기서 '태산'은 글자상으로는 큰 산이라는 뜻이지만
중국에서는 오악(五嶽)의 하나로서 성산(聖山)으로 우러러보는 산이다.
'북두'는 북두칠성을 가리키는데, 북두칠성이 모든 별의 중심적인 존재로
받들어지고 있는 데서 '북두'라는 말 자체도 뛰어난 인물을 비유할 때 사용한다.
오늘날 이 말은 '태두(泰斗)', '산두(山斗)'라는 약칭으로 통용되며,
특히 학술적 업적이 뛰어난 학자를 가리키는 데 쓰인다.
고방서예명제(77)返朴歸眞 [반박귀진]
[요약] (返: 돌이킬 반, 朴: 소박할 박, 歸: 돌아올 귀, 眞: 참 진)
순박했던 대로 되돌아가 참된 것을 회복한다.
[출전]《전국책(戰國策) 卷十一‧ 제책(齊策) 四》
[내용]전국 시대, 제(齊)나라에 안촉(顔촉)이라는 사람의 일화에서 생긴 성어다.
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안촉(顔촉)은 스스로 재주가 많다고 생각하였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집에 은거하며 자유스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제나라
선왕(宣王)이 그를 찾는다고 하자, 그는 하는 수없이 입궁하여 왕과 대화하게 되었다.
대화를 하다가 제선왕이 그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고, 신하들과 안촉이 공방을
벌렸는데 그 이론이 정연하여 왕이 승복할 뜻을 보이고 겸손하게 말했다.
"아! 좋소. 군자가 어찌 오만하겠소. 나의 행위는 스스로 욕을 부르는 것 밖에
되지 않는군요. 이제 선생의 말을 듣고 보니, 간사한 무리의 행위가 환히
들여다보이는 같구려. 나를 당신의 제자로 받아 주기를 간청하오. 안 선생은
이제부터 나와 같이 행동하고 식사하며 같은 수레를 탑시다. 부인과 자녀에게도
특별히 의복과 음식을 제공해드리지요."그러나 안촉은 제선왕의 요구를 사절하면서
말을 했다. "아름다운 옥도 산을 떠나면 그 원래의 빛깔을 잃게 됩니다.
그것이 귀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파괴를 당한다는 말이죠.
선비는 촌에서 자랐으므로 관직에 오르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로 인해서 자신의 본색을 유지하기 힘들게 될까 두렵습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서 고기 대신 소박한 음식을 수레를 타는 대신 걷는 것을(安步當車),
부귀를 누리는 대신 아무런 죄없이 사는 것을, 쾌락을 누리는 대신 청렴한 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살리고 죽이는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은 왕이고, 감히 직언을 간하는
자는 저 안촉입니다. 할 말을 다 했으니, 이제 저를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요." 안촉은 그 제안을 거절하며 머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를 하고 귀향했다.
향리에 정착하여 산에서 나온 그대로의 원옥의 입장에 돌아가 그는 한 평생 치욕을
모르고 지낼 수 있었다(知足矣, 歸眞反撲, 則終身不辱也). 宣王曰:「嗟乎!君子焉可侮哉,寡人自取病耳!及今聞君子之言,乃今聞細人之行,願請受為弟子。且顏先生與寡人游,食必太牢,出必乘車,妻子衣服麗都。」顏斶辭去曰:「夫玉生於山,制則破焉,非弗寶貴矣,然夫璞不完。士生乎鄙野,推選則祿焉,非不得尊遂也,然而形神不全。斶願得歸,晚食以當肉,安步以當車,無罪以當貴,清靜貞正以自虞。制言者王也,盡忠直言者斶也。言要道已備矣,願得賜歸,安行而反臣之邑屋。」則再拜而辭去也。斶知足矣,歸反撲,則終身不辱也。 劉向 戰國策 卷十一‧齊策四 齊宣王見顏斶 여기서 返朴歸眞(반박귀진)이라는 말이 나왔다. 원래 순박했던 대로 되돌아가서 참된 것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소박과 진실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참된 것을 회복하면 욕보는 일이 없디.
[출처] 산에서 나온 그대로의 원옥의 입장에 돌아가 |작성자 몽촌
고방서예명제(78)樂天知命(낙천지명)
(樂: 즐길 락. 天: 하늘 천. 知: 알 지. 命: 목숨 명)
하늘의 뜻에 순응(順應)하여 자기의 처지(處地)에 만족(滿足) 한다는 뜻.
[반대] 논어 제14 헌문(憲問)편에 나오는
원천우인(怨天虞人; 하늘을 원망(怨望)하면 세상 사람들도 미워진다.)
[출전]《주역(周易) 계사(繫辭)상》
[내용] 주역 계사 상편의 한 대목이다.
" .... 주역의 법칙은 하늘과 땅과 더불어 서로 같다.
그러므로 어긋남이 없다. 지혜(知)는 만물에 고루 미치고
법칙(道)은 천하를 구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잘못이 없다.
임기응변하여 널리 융통성이 있으되 방자함에 흐르지 않고,
하늘의 도를 즐겨하여, 스스로 명(命)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근심하지 않는다(樂天知命, 故不憂). 흙에 안정하고
어진 일(仁)을 돈독하게 한다. 그
러므로 능히 만물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 "
與天地相似 故不違. 知周乎萬物而道濟天下 故不過.
旁行而不流 樂天知命 故不憂. 安土 敦乎仁 故能愛.
* 계사전(繫辭傳) : 상편에서는 주역(周易)의 도리에 관한 개론을
본체적(本體的)으로 설명하였고,
하편에서는 이를 현상적(現象的)으로 설명하였다.
서예명제(79)窮當益堅(궁당익견)
곤궁해도 더욱 굳세어야 한다.
窮:궁할 궁 當:마땅할 당 益:더할 익 堅:굳셀 견
逆境 속에서도 굳건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意味로 大丈夫의 姿勢를 말함
“後漢書” “馬援傳”에 의하면 前漢 末 富豊君에 馬援이라는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 글을 배웠고 武藝에도 뛰어난 人才였는데
그저 소나 말을 기르며 살아가고 있었다. 馬援은 長成하여 郡守를
補佐하면서 그 縣을 監察하는 督郵[독우]가 됐다. 그때 罪囚를 護送하는
일을 맡게 됐는데, 이런저런 하소연을 하는 罪囚들에게 同情心을 느껴
그들을 풀어 주고 북쪽으로 逃亡을 쳤다. 그는 親舊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丈夫爲志, 窮當益堅, 老當益壯[장부위지,궁당익견,노당익장]大丈夫가 뜻을 세우면 困窮해도 더욱 굳세어야 하며, 늙어도 더욱 씩씩해야 한다.”
世上이 混亂스러워지자 馬援은 平凡한 삶을 버리고 壟西[롱서]의
嵬驍[외효]밑으로 들어가 大將이 됐다. 嵬驍는 公孫述과 손을 잡기 위해
馬援을 그 곳으로 派遣했다. 馬援과 公孫述은 같은 故鄕親舊였다.
公孫述은 當時 스스로 皇帝라 일컫고 있었는데, 馬援이 찾아왔다는 傳喝
[전갈]을 받자 天子의 衣冠에 수레를 타고 으스대며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馬援은 公孫述의 변한 모습에 크게 失望하고 儀禮的인 인사만을 하고는
곧장 돌아왔다. 그러고는 嵬驍에게 말했다.
“公孫述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우물 안에서 分手를 모르고 떠벌리기만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 뒤 馬援은 光武帝를 謁見[알현]하게 됐다. 光武帝는 馬援을 만나자
誠心誠意껏 待接하고, 각 部署를 데리고 다니며 助言할 것이 있는지 물었다.
馬援은 후한 待接에 感動해 嵬驍에게 돌아가지 않고
光武帝 麾下[휘하]에 있기로 決心했다. 馬援은 僕波將軍[복파장군]이 되어
南方의 交趾[교지]를 平定했다. 얼마 뒤에 洞庭湖 一帶의
蠻族[만족]이 叛亂을 일으키자, 光武帝가 軍隊를 派遣했지만 全滅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馬援이 自身에게 軍隊를 달라고 청하니 光武帝가 나이가
너무 많아 遠征에 無理가 있다고 하자,
예순둘의 그는 말안장을 채우고 老益壯을 誇示했다.
光武帝가 웃으면서 許諾[허락]하자, 그는 遠征길에 올랐다.
交趾-중국 한(漢)나라 때의 군(郡)의 하나.
현재의 베트남북부 통킹, 하노이 지방에 해당한다.
고방서예명제(80)在所自處(재소자처)
在: 있을 재 所: 바 소 自: 스스로 자 處: 곧 처
자신이 처해 있는 곳에 달려있다.
사람은 자신이 처해 있는 곳에 달려 있다는 환경 결정론적 시각으로 진(秦)나라
재상 이사(李斯)가 한 말이다. 초(楚)나라에서 겨우 군(郡)의 하급 관리로서
세월만 축내고 있었던 그는 어느 날 쥐 두 마리를 보고 삶의 원리를 깨닫게
되었다. 변소에 있으면서 불결한 것만 먹는 쥐는 사람이나 개가 나타나자 깜짝
놀라 도망쳤으나, 곡식 창고 안에 있는 쥐는 쌓아 놓은 깨끗한 곡식을 먹으며
사람이나 개 따위는 안중에 두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이사는 한탄했다.
사람이 어질다거나 못났다고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이런 쥐와 같아서
자신이 처해 있는 곳에 달렸을 뿐이다.
人之賢不肖譬如鼠矣, 在所自處耳 -사기 이사열전
이사의 탄식처럼 자신이 처한 환경의 차이에 따라 어떤 이는 현자(賢者)와
군자(君子)가 되는데 어떤 이는 하층의 우민(愚民)과 소인(小人)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출세를 위해 모험을 감행하기로 결심한 그는 곧바로 秦나라
승상 여불위(呂不韋)를 찾아가 그의 사인(舍人), 즉 집사가 되었고,
다시 진시황에게 소개받아 궁궐의 모든 일을 총괄하는 장사(長史)의 자리에
오른다. 그는 진시황의 절대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공을 세워 객경(客卿)이 된다.
이 과정에서 기득권의 강력한 반발에 축객당할 처지에 몰린 그는 저 유명한
‘태산불양토양 하해불택세류(泰山不讓土壤 河海不擇細流)
태산은 흙을 사양하지 않고 큰 강과 바다는 물줄기를 가리지 않는다 라는
인재 개방론을 들고나와 위기를 벗어나 진시황의 핵심 측근으로 거듭난다.
물론 과욕으로 인해 유서 위조에 가담하는 등 기회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그는 무려 22년 동안 진시황의 2인자로서 진시황을
도와 봉건제도를 폐지하고 군현제도를 실시하는 등 정치 경제 사상 문화 등
각 방면에 일대 개혁을 단행하고 시스템을 완성한 당대의 거물이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