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성을 증득하면 아라한이다
《법화경》〈비유품〉에 있어요.
“공성(空性)을 증득해서 나아가서 더불어 32상의 자기 색신을 두어야 붓다다”라는
말이 있어요. 사리불 존자가 한 말이어요.
이게 정~말 진짜 이야기예요.
마음자리 깨쳤다고 부처다? 아니어요.
마음자리 깨친 것을 공체험이라고 그래요.
공체험 했다고 해서 붓다라고 하는 것 아니어요.
이제 거기서 더~ 공부해야 아라한이라고 했잖아요.
붓다 회상 부처님 회상 만나가지고 더~ 공부하고 선근공덕을 쌓아가지고
보살인가를 받잖아요.
그래서 이제 또 보현행원을 해가지고 붓다가 되는 것인데,
공성 증득으로만이 붓다가 다 된 양으로 생각하는 것이 선불교예요.
티베트 불교에서도 알았어요.
쌈예의 논쟁에서 알았어요.
인도의 스님 ‘까말라 실라(연화계)’죠. 벌써 알았어요.
“대승의 멸도는,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성불은 공성의 증득과 더불어
32상의 자기 색신을 두어야 한다.
그래야 야차와 인간과 천상과 용신이 부처님 몸을 보고 그들은 공경하고….
절대계에 자기 불신을 두어야, 그 부처님은 눈·코가 다 있으니까
천상 사람을 보고 그리고 용신을 보고 야차를 보고 교화를 하고,
또 그 사람들은 부처님을 보고 아주 거룩하니까 공경하고….
이런 불신을 두어야 부처다”
하는 구절이 《법화경》에 있어요.
아주 소중한 구절이어요.
그래서 티베트 밀교에서는 ‘공성의 증득만으로는 부처라고 할 수 없다’ 하는 거예요.
공성의 증득, 깨달음만 가지고 부처가 되었다고 하는 말은 ‘아니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법화경》〈비유품〉을 들이대잖습니까? 그건 맞는 거예요.
우리는 그 말을 아주 잘 본 것이라고 봐요.
티베트 밀교에서 까말라 실라가 잘 본 거예요.
까말라 실라, 인도 사람입니다.
교학적으로는 중관학파 계통이지요. 잘 본 거예요.
그런데 밀교에서는 그 보신을 만드는 연구를 기가 막히게 한 거예요.
밀교의 성불 원리를 보면 사람 죽은 것 가지고 법신으로 승화시키고,
바르도(중음계)의 의생신(意生身)이라는 것은 영체를 말하거든요.
그것을 갖다가 정광명(淨光明)을 쬐여가지고 보신이라고 하고,
태어난 것을 화신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정말 웃기는 이야기죠.
이 다음에 티베트 밀교를 설명할 때 이야기하겠지만,
그 부분은 정말로 엉터리이고 말도 아닙니다.
저 보신을 만들 때 유가녀(瑜伽女)와 성적(性的) 결합이 있잖습니까?
그건 몇 년 전에 ‘영산(靈山)’이라고 하는 잡지에서 때렸는데 그건 말도 아니어.
티베트 밀교의 그건 말도 아닙니다.
그러나 ‘공성의 증득과 더불어서 32상의 색신을 두어야 붓다이다’ 라는 말은 맞는 말이어.
공성의 증득과 더불어, 공성을 증득하면 아라한이거든요.
더 나아가라 그거라. 더~ 나아가서 절대계에 자기 불신을 얻어라.
법‧보‧화 삼신(三身)을 갖추어야 붓다다. 그게 맞지,
깨달음만으로는 절대 붓다라고 할 수 없다.
‣다겁생의 죄업장이 소멸되어야 되고
‣오역죄가 소멸되어야 되고
‣탐진치가 소멸되어야 되고
‣악과 습의 탁한 기가 소멸되어야 되고
‣천만생을 살아오는 도중에 지은 악연과 원결이 해소되어야 되고
‣은혜와 빚이 정리가 되어야 돼.
그래야 마음이 무소유가 되는 거예요.
진짜 내 영체가 모두 무소유가 되면서 즉견노사나(卽見盧舍那) 하는 거예요.
곧 부처를 보는 거예요.
이것은《화엄경》의 골수(骨髓)이고, 모든 경전의 골수입니다.
자성(自性)이 무소유임을 알면 즉견노사나 하는 거예요.
부처님을 보는 거예요.
부처님을 볼 정도가 되어야 모든 불‧보살님의 위신력으로 절대계에 자기 색신이 생깁니다.
‘견성은 공부의 시작이다!’라는 말을 내가 강조를 더 하고 싶고,
백천삼매를 다 자재할 수 있어야 되고, 대적정삼매를 통과해야 되고,
무량광을 봐야 되고, 그래서 불신(佛身)을 얻습니다. 불신을요.
이렇게 볼 때에 선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견성은 공부의 시작에 불과하지.
이제 공부의 시작에 불과하지.
이후부터는 반드시 목숨과 같이 음계를 지키고 두타행으로 나가서
나 없는 공부 무아행을 하고 보살행을 해야 보살이 되는 거예요.
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다겁생으로 무량겁을 보살행 해야 붓다가 된다는 것.
견성 후에 음계를 파하거나 대망어를 하면 무간지옥 간다는 것.
그러므로 선불교는 아니라는 것. 아니라는 것.
출처:2013년 자재 만현 큰스님 법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