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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이야기 569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7 : 제주도
제주도의 어업과 해녀
제주도는 해안선의 길이가 253킬로미터쯤 되고, 깊이가 100미터 안팎의 바다 밑에 대륙봉이 넓게 퍼져 있다. 바닷물의 온도가 바닷고기들이 살기에 가장 적합하고 따뜻한 대마 난류가 흘러드는 곳이라서 어족이 풍부한 곳이다.
오랜 옛날부터 제주도 일대에서는 해녀라고 부르는 잠녀와 포작배가 중심이 되어 바닷말과 조개류를 따는 잠수업과 테우 곧 떼배를 타고 그물이나 낚시로 고기를 잡는 두 가지 어업이 발달했다.
『고려사』 문종 7년인 계사년 「2월」조에 “탐라국 왕자 수운나(殊雲那)가 자기 아들 배융교위(陪戎校尉) 고물(古物) 등을 보내어 우각(牛角)ㆍ우황(牛黃)ㆍ우피(牛皮)ㆍ나욱(螺肉)ㆍ비자(榧子)ㆍ해조(海藻)ㆍ구갑(龜甲) 등 물품을 바쳤다. 왕이 탐라국 왕자에게 중호장군(中虎將軍) 벼슬을 임명하고 공복(公服)ㆍ은대(銀臺)ㆍ비단ㆍ약품 등을 주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고려사』 1079년 「11월」조에 “임신일에 탐라의 구당사(句當使) 윤응균(尹應均)이 별처럼 번쩍거리는 큰 진주 두 개를 바쳤다. 당시 사람들이 이것을 야명주(夜明珠)라고 하였다”는 글이 실려 있다. 몽골에서도 사람을 보내어 제주에서 진주를 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에도 해녀들이 바다에 나가 ‘나잠업’으로 진주를 채취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제주 앞바다에는 전복ㆍ오징어ㆍ갈치ㆍ옥도미ㆍ고등어 같은 해산물을 잡는 어부들도 많았지만 조개류와 미역을 따내는 잠녀들도 많았다.
조선 중기만 해도 잠녀들과 드물게 남자들까지 알몸으로 바다에 들어가서 낫으로 전복과 미역 같은 해산물을 채취했다. 그런데 그 당시의 풍속이 그러해서 그런지 남자나 여자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고 그 해산물로 곡식과 옷을 장만해 생활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잠녀들이나 어부들의 삶은 신산하기만 했다. 부임한 관리가 탐관오리이면 내야 할 공물의 양을 지나치게 많이 책정했다. 그때는 한 해 동안 쉴 틈도 없이 물질을 해도 그 양을 채우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제주에는 남자들이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풍랑에 휩쓸려 죽는 경우가 많아 여자가 남아돌아 거지마저 처첩을 거느리고 사는데, 전복을 따내는 일을 맡은 ‘포작배’는 홀아비로 늙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 그것은 임금에게 진상하는 전복의 수량이 매우 많고, 더구나 관리들이 공물을 핑계로 제 잇속을 채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포작배는 아무리 애써 일해도 이것을 다 채우지 못하고 더러 일하다가 지쳐 빠져 죽거나 견디다 못해 도망쳐 버리기도 한다. 그런데 포작배가 열에 두셋만 남게 되어도 공물의 양은 줄지 않기 때문에 그 몸은 바다에 오래 있고, 그 아내는 옥에 오래 갇혀 원한을 품고 견디는 모습을 말로 다할 수 없다.
해녀들은 물 위에 떠오를 때마다 ‘호오이’ 하면서 한꺼번에 막혔던 숨을 몰아쉰다. 이때 나는 소리를 ‘숨비소리’라고도 한다.
김상헌이 지은 『남사록』에 실린 글이다. 제주목사로 부임해서 그러한 사실을 수도 없이 목격한 이원진이 쓴 『탐라지』에도 그와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다.
포작은 제주도의 방언으로 포작(匏作) 또는 포작(浦作)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제주도에서 오랜 옛날부터 활동하는 해녀는 바닷속에 들어가서 해삼ㆍ전복ㆍ미역 따위를 따내는 것을 업으로 삼는 여자로 잠녀(潛女) 또는 잠수(潛嫂)라고도 부른다.
해녀들은 특별한 장치가 없는 나장어법으로 제1종 공동어장인 수심 10미터 내외의 얕은 바다에서 소라ㆍ전복ㆍ미역ㆍ톳ㆍ우뭇가사리 등을 채취하고 가끔씩 작살로 물고기를 잡기도 한다. 해녀는 우리나라와 일본에만 분포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의 해녀는 한반도의 각 해안과 여러 섬에 흩어져 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이 제주도 해녀들이고 제주도에 몰려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해녀가 약 2만여 명에 이르렀는데, 지금은 그 수효가 많이 줄었다.
해녀들이 받는 불이익이 있었다. 그것은 해안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산촌이나 해촌을 업신여기는 것이었다. “어업은 일반적으로 천하게 여겨졌다. 양촌의 남자가 바닷가 해촌의 신부를 며느리로 삼지 않는 이유는 벌거벗고 물속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세이이치의 『제주도』에 실린 글이다. 하지만 그런 시절도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해녀들의 수입이 좋아지면서 “왜 산골 색시를 데려오나, 물에도 못 들어가는 여자를”이라는 생각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바다에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해녀의 기원은 인류가 바다에서 먹을 것을 구하기 시작한 원시산업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해녀의 발상지를 대체로 제주도로 보는데, 그 이유는 제주의 여러 곳에 어부와 해녀를 관장하는 신당(神堂)이 오래전부터 전해 오기 때문이다.
해녀가 제일 처음 문헌에 나타난 것은 고려 숙종 10년인 1105년 탐라군의 구당사(句當使)로 부임한 윤응균의 글이다. 그 당시 해녀들이 옷을 입지 않고 조업을 하자 “해녀들의 나체(裸體) 조업을 금한다”는 금지령을 내렸다. 조선 인조 때 제주목사가 다음과 같은 엄명을 내렸다. “남녀가 어울려 바다에서 조업하는 것을 금한다.” 그러나 그 엄명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제주 해녀1)들의 일은 이어져 온 가업이나 특수한 혈통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제주의 여성들은 척박한 기후 조건 때문에 밭에서 김을 매거나 바다에서 물질을 해야 하는 필연적인 운명에 순종하여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제주의 소녀들은 7∼8세 때부터 헤엄치는 연습을 시작했고, 12∼13세가 되면 어머니로부터 스티로폼으로 동그랗게 만들어 물에 뜨는 ‘두렁박’을 받아 얕은 데서 깊은 데로 헤엄쳐 들어가는 연습을 했다. 15∼16세가 되면 바다에서 조업을 시작하여 비로소 잠녀, 즉 해녀가 되었다. 17∼18세가 되면 제 한몫을 하는 해녀로 활동한다.
이때부터 40세 전후까지가 가장 왕성한 활동시기이며 대체로 60세 전후까지 이어진다. 해녀들은 그 기량에 따라 상군(上軍)ㆍ중군(中軍)ㆍ하군(下軍)의 계층으로 나뉜다. 해녀들은 대부분 농사일을 겸하고 있고, 한여름에 일을 많이 하지만 일 년 내내 물질을 하는 해녀들도 많다.
보통 해녀들은 수심 5미터에서 30초쯤 작업을 하다가 물 위에 떠오르지만, 필요한 경우에는 수심 20미터까지 들어가 2분 이상 물속에서 견디기도 한다. 해녀들은 물 위로 떠오를 때마다 ‘호오이’ 하면서 한꺼번에 막혔던 숨을 몰아쉰다.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한 이 과도환기작용(過度換氣作用)을 ‘숨비소리ㆍ숨비질소리ㆍ솔비소리ㆍ솜비질소리’라는 다양한 이름으로 부른다.
바닷가에 나간 해녀들은 탈의장이나 바위틈에서 해녀복으로 갈아입고, ‘눈’이라고 부르는 물안경을 낀다. 해녀들이 부력을 이용하여 가슴에 안고 헤엄을 치는 도구를 ‘테왁(태왁. 그물로 주머니처럼 짜서 채취한 해산물을 담는 것. 아가리가 좁고 그물 테두리에 뒤웅박이 달려 있어 그물이 가라앉지 않도록 함)’이라고 한다. 그 밑에는 채취한 해물을 담는 자루 모양의 ‘망사리(박새기 또는 망아리)’가 달려 있다. 무자맥질을 할 때는 테왁과 망사리를 물 위에 띄워놓는다.
또 전복을 캐는 길쭉한 쇠붙이인 ‘빗창(어획도구. 30센티미터가량의 단단한 무쇠칼)’, 해조류를 베는 ‘정게호미’라는 낫과 조개 등을 캐는 쇠꼬챙이 갈퀴인 ‘갈고리’도 있다. 또한 물고기를 쏘아 잡는 작살인 ‘소살’과 해녀들의 머리가 흩어지지 않도록 동여매는 수건, 잠수복(무명 잠수복 대신 고무 잠수복) 등이 해녀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물품들이다.
“모자반덩이를 집으로 삼아 눌 고개를 어머니로 삼아 요 바다에 내 살았으니, 어느 바다가 걸릴 것이랴.”
해녀들이 부르는 노랫소리처럼 바다를 집으로 살아가면서도 그 바다는 그날그날의 매 순간이 이승과 저승의 교차점이었다. 그래서 ‘너른 바다 앞을 재어 한길 두길 들어가니 저승길이 오락가락’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물질을 하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았다. 오죽했으면 “해녀의 아기는 이레 만에 밥을 먹인다”라는 속담이 만들어졌을까? 그래서 그런지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슬프기 그지없다.
산디 쌀은 산 넘어가고, 나락 쌀은 물 넘어온다.
불쌍하다, 좁쌀의 팔자. 정지에서 노는구나.
맷돌 갈아 품을 파니, 적삼 앞이 모지라지고.
방아 찧어 품을 파니, 치마 앞이 모지라진다.
어떤 새는 낮에 울고 어떤 새는 밤에도 울리.
그 새 저 새 날 닮은 새야 밤낮 몰라 울음새러라.
성님 성님 사촌 성님 설운 설운 나랑 죽거든
앞동산도 묻지 말고 뒷동산도 묻지 말고 가시밭에 묻어 줌서.
해녀상제주 해녀는 바닷가 곳곳에서 물질을 하며 생계를 책임졌다. 그래서 지금도 해녀를 쉽게 볼 수 있으며 바닷가 곳곳에 해녀상이 세워져 있다.
지금은 여러 가지로 보완된 해녀복이 있지만 조선시대 전기만 해도 알몸으로 바다에 나가 물질을 했다. 그것이 금지되면서 해녀들은 흰 무명저고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바다에 나갔다. 머릿수건과 저고리의 빛깔이 흰 것을 썼다. 그것은 그 당시 다른 옷을 선택할 여지도 없었지만 무엇보다도 상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메밀꽃이 피는 초가을에 남양 쪽에서 물려오는 ‘번직귀’라고 부르는 상어 떼가 흰 빛깔을 두려워한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얀 색의 옷을 입었던 해녀들이 지금은 검은색 잠수복을 입고 물질을 하게 되었다.
해녀들이 작업을 하는 것도 ‘갓물질’과 ‘뱃물질’로 나뉜다. 해녀들이 떼를 지어 헤엄쳐 나가서 물질을 하는 경우를 ‘갓물질’이라 하고, 15명 내외씩 배를 타고 나가서 치르는 작업을 ‘뱃물질’이라고 부른다. 뱃물질은 제각기 선주와 맺은 1년 단위의 계약에 따르고 선주도 함께 출어를 나간다. 해녀들은 자기 지방에서만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방이나 외국으로 나가 몇 개월씩 작업을 하기도 한다.
제주 해녀들은 19세기 말부터 경북이나 강원도뿐만이 아니라 남해인 일대를 누비며 물질을 했다. 심지어 객주(客主)의 인솔에 따라 블라디보스토크와 요동 반도의 다롄과 산둥성의 칭다오까지 나갔다.
돛단배를 타고 먼 곳으로 떠날 때 ‘요이시나 요이시나’라는 민요를 부르며 며칠씩 노를 저어 먼 나라로 노를 저어 갔다고 한다. 이들은 봄에 나갔다가 가을에 돌아왔다. 뭍으로 나간 해녀들은 그곳에서 남자들을 만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다른 지역의 해녀들과 달리 제주 해녀들은 20미터의 바닷속까지 들어가 2분 남짓을 견딜 수가 있고, 추운 겨울에도 물질을 할 수 있는 내한력(耐寒力)을 갖추었다. 또 아기를 낳기 전후에도 작업을 하는 등 비상한 기량과 정신력을 가졌다. 그래서 ‘해녀’를 떠올리면 제주 해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월 속에 해녀들은 대부분 60세가 넘었고, 젊은 해녀들은 가뭄에 콩 나는 것만큼이나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렇게 해녀가 모진 노동에 종사하고 있을 때 제주도의 남자들은 어떤 일로 소일했을까? 대개 어린아이를 양육하거나 삼삼오오 모여서 잡담을 하고, 낮잠을 자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어쩌다가 바닷가에 나가 여자들의 자맥질 광경을 보고 있으면, “개한테나 물려서 가거라” 하는 호통을 듣고서 후다닥 도망쳤다. 이것이 해녀를 아내로 둔 제주도 바닷가 남자들의 역할이었다.
세상이 변화하다가 보니 가끔씩 다문화가정의 젊은 며느리들이 해녀가 되었다는 소식을 뉴스를 통해 듣기도 한다. 그들이 물질을 나갈 때 배를 저어가면서 불렀다는 노랫가락인 「해녀 노래」가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것은 1971년 8월 26일이었다.
1. 요벤드 레 에헤 끊어진들 에헤 신서란이 에헤 씨말랐더냐 에헤
2. 유리잔을 에헤 눈에다 붙이고 에헤 두렁박을 에헤 가슴에 안고 에헤
3. 우리 배는 에헤 잘도 간다 에헤 참매끼 에헤 가슴에 안고 에헤
(후렴) 이어도 사나 에헤 이어도 사나 에헤 어잇잇 에헤 이엇 사나 에헤 총각차라 에헤 물에 들 에헤 양식 싸라 에헤 물에 들자 에헤 요밸 타고 에헤 어딜 갈꼬 에헤 진도 바다 에헤 골로 간다 에헤
4. 바람일랑 에헤 밥으로 먹고 에헤 구름으로 똥을 싸 물결일랑 집안을 삼아 집안을 삼아 섧은 어머니 떼어두고 섧은 어미 떼어두고 에헤 이어도 사나 에헤 부모 동생 에헤 한강 바다 에헤 집을 삼아 집안 삼아 한강 바다 집안 삼아 에헤
5. 너른 바다 에헤 앞을 재어 에헤 한길 두길 들어가 통합 대합 비쭉비쭉 이어도 사나 미역귀가 너훌너훌 미역에 정신 들여 에헤 이어도 사나 에헤 미역만 에헤 하다 보니 에헤 숨 막히는 줄 모르는구나 숨막히는 줄 모르는구나 에헤
해녀박물관구좌읍 하도리에 세워진 해녀박물관은 제주의 어촌과 해녀의 일생을 전시해 놓은 곳이다. 해녀의 삶은 곧 제주 사람들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