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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들의 경건
딤전 2:8-15
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9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10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11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12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14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딤전 2:8-15 / 나는 권면합니다. 남자들은 죄를 짓거나 분이나 원한을 품지 말고 어디서나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시오. 9-10) 여자들도 단정한 태도와 복장을 하며 조용하고 분별력 있게 행동하시오. 그리스도인이 된 여자는 머리를 화려하게 꾸미거나, 보석이나 값비싼 옷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려고 하지 말고 선행과 친절로 단장하시오. 11) 여자들은 조용하고 겸손하게 듣고 배워야 합니다. 12) 여자는 결코 남자를 가르치거나 다스리려고 하지 마시오. 교회에서 모임이 있을 때에는 조용히 있으시오. 13) 하나님께서 아담을 먼저 만들고 하와는 나중에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14) 사단에게 속아 넘어간 것도 아담이 아니라 하와였습니다. 15) 그러나 만일 여자들이 자녀를 기르면서 하나님을 믿고 조용하고 순결하게 사랑에 넘치는 생활을 한다면 그들은 구원받을 것입니다.
바울은 남녀 성도들이 행동과 질서에 대해 교훈합니다. 남성의 거룩한 기도 생활에 대한 권면과 여성들은 미덕과 선행으로 외모보다 내면을 단장할 것을 권면합니다. 이어 창조 원리를 근거로 남녀 간의 기본 질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남자들의 경건(8) 당시 회당에서 남자들이 기도를 인도했던 관례가 있었습니다. 공중 예배시 장로들이 자연스럽게 기도 순서를 맡았고 회중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지 남자들이 대표로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특별히 이들에게 요구되는 기도의 태도를 권면합니다. 분노와 다툼이 없는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손을 들어 기도하는 것은 당시 보편적인 기도의 자세입니다. 바울은 기도의 자세가 아니라 기도자의 영적인 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흠이 없고 정결한 생활을 하는 가운데 손을 들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분노와 다툼 등으로 더럽혀진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중요한 것은 몸의 자세가 아니라 우리 영혼이 가지고 있는 내면적인 태도입니다.
여자들의 경건(9-15) 남자들을 향한 권면에 비해 여자들에게는 길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에베소교회에 일부 여자들 때문에 생겨난 무질서와 영적 혼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자 성도들 중의 일부가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사치하고 무질서한 과거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공중 예배에서도 단정치 못한 복장과 모습으로 임하고 지나친 신앙적 열심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교회의 혼란을 가져왔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바울은 여자들을 향한 권면을 ‘이와 같이’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8절에 남자들에게 권면하였던 것처럼 여자들도 거룩함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미덕과 선행으로 외모보다 내면을 단장하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행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남녀 간의 질서에 대해서 권면합니다(11-15). 바울은 창조의 원리에서 그 근거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남녀의 기본적인 평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남녀의 질서를 무시하여 혼란을 가져온 여자들을 향한 권면입니다. 바울은 정숙함으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서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여자들이 신앙 안에서 자녀를 낳아 양육하며 믿음의 가치를 이어나가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역할과 책임이 있습니다. 동일한 것은 언제나 경건과 거룩함을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적용: 내면의 정결함없이 손만 들고 기도하는 것처럼, 형식만 남아있는 신앙의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흘려보내야 합니다. 하지만 먹고살기에 바빠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십자가를 통해 구원해 주시고 다른 사람을 구원하도록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변 사람에게 전하라 하신 복음을 전하며 그들을 죄와 죽음의 삶에서 새 생명, 영원한 삶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 설 교 >
교회 안의 질서
디모데전서 2:8-15 / 최정인 목사
도입 Introduction: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There is neither Jew nor Greek, slave nor free, male nor female, for you are all one in Christ Jesus” (갈라디아서 Galatians 3:28).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도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은 공동체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서열은 없지만, 질서는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대리기관(agency)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을 위한 대리기관으로서의 한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아가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처럼 서열이 없는 공동체, 하지만 질서는 있는 공동체를 추구해야 합니다. 교회는 무계급 사회를 추구하지만, 그것이 무질서 사회를 추구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가정도 이와 똑같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은 작은 교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가정은 서열이 없지만, 질서는 있는 공동체를 추구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이방인이 구원받기 위해서 유대교인 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다룹니다. 유대교도 출신 그리스도인은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에게 할례 등의 유대교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요구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만일 우리의 구원이 할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신 것이라고 역설했습니다. 그래서 5:6에서 그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할례를 받았다고 구원을 받거나 못 받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할례를 받지 않았다고 해서 구원을 받거나 못 받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사랑으로써 그 자체를 드러냅니다.
성도와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세상의 사람과 다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삼위일체 하나님처럼 서열은 없지만, 계급은 없지만, 차별은 없지만, 질서는 있는 공동체를 이룹니다. 제가 주보에 써드린 갈라디아서 3:28을 봅시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네, 역시 이 말씀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조건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서열, 계급, 차별이 있지만, 교회에는 서열, 계급, 차별이 없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에 있는 가장 대표적인 세 가지 차별을 듭니다. (1) 유대인과 헬라인은 세상에 있는 인종 차별을 드러냅니다. (2) 종이나 자유인은 세상이 있는 신분 차별을 드러냅니다. (3) 남자와 여자는 세상에 있는 성차별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에게 주신 이 계시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왕국은 이 세 가지로 대표되는 각종 차별이 완전히 사라지는 공동체를 통하여 이루어짐을 말씀하십니다.
차별과 구별. 이 둘은 서로 비슷해 보이지만, 그 의미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순결의 문제입니다. 구별은 지혜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차별과 구별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남녀의 차별은 없어야 하지만, 남녀의 구별은 있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3:28은 우리 주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의 목적과도 같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이 말씀에 거역한다면, 우리는 주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디모데전서 2:8-15는 마치 갈라디아서 3:28에 역행하는 듯한 말씀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차별은 없지만, 구별은 있어야 한다는 관점으로 보면 어떻게 읽힐까요? 서열과 계급은 없지만, 질서는 있어야 한다는 관점으로 본다면 어떻게 읽힐까요? 오늘 우리는 디모데전서 2:8-15 말씀을 “교회 안의 질서”라는 제목으로 함께 나눕니다.
1. “오직 선행으로” “But with good deeds” (8-10).
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오늘 본문은 8절부터 15절까지 여덟 절입니다. 이 여덟 절 중에서 8절 한 절만 남자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나머지 일곱 절은 모두 여자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8절 말씀은 여자에게는 해당하지 않고, 9절부터 15절까지 말씀은 남자에게는 해당하지 않을까요? 단연코 그렇지 않습니다.
8절에서 사도 바울은 먼저 에베소 교회 안의 남자들에게 권면합니다. 사도 바울이 남자들에게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역으로 생각하면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더 기도에 집중하지 못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남자들은 오히려 분노와 다툼에 많은 힘을 소모했습니다. 그리하여 에베소 교회 공동체가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가정과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로서 남자는 여자보다 더 많은 무게를 그 어깨에 집니다. 그러나 그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분노하고 다투기 쉽습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은 사람에게 호소하지 말고, 하나님께 호소하라는 것입니다. 분노하고 다투며 삿대질하던 그 손을 거룩하게 하나님께 들어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분노하고 하나님을 상대로 다투셔도 됩니다. 구약의 많은 시인은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그런 기도를 듣지 못하도록 골방을 찾아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행하십니다. 물론 제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말씀은 여자가 기도하지 말라는 말씀은 전혀 아닙니다.
9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이제 9절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여자 성도에게 권면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인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많습니다. 그것은 역으로 그만큼 에베소 지역의 여자 성도가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고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9절은 여인의 아름다움과 치장에 관한 말씀입니다. “단정하게 옷을 입으세요.”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단정함의 기준은 한 사회의 통념에 근거합니다. 더 나아가 어른이며 성도인 우리는 다른 사람의 옷차림을 단정하지 않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여도 그것이 객관적인 판단인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씀은 스스로 자신이 적용해야 합니다. 물론 남자와 여자에게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세요.”라는 말씀과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마세요.”라는 말씀은 내적인 아름다움이 외적인 치장보다는 훨씬 더 차원 높은 아름다움이라는 뜻입니다. 메노나이트나 아미시 공동체의 여인들은 이런 말씀을 문자적으로 따릅니다. 이슬람교 공동체에서는 여인의 복장에 대한 더 여러 가지 규정이 있습니다. 히잡은 ‘베일’을 뜻하는 말로, 머리와 목과 얼굴의 일부를 가리는 것입니다. 아바야는 상체부터 무릎 정도까지 가리고 맨손은 드러나는 복장입니다. 차도르 혹은 니캅은 눈과 맨손을 제외한 신체 전부를 가리는 복장입니다. 부르카는 몸 전체를 가리고 손 부분과 눈 부분만 망사 같은 것으로 처리한 복장입니다. 이슬람교에서 이러한 여인을 위한 복장 규정이 있는 이유는 여인을 남자에게서 보호하고, 나아가 여인이 남자에게 죄의 유혹을 주는 대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집 안에서는 이러한 규정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굳이 이슬람교의 예를 생각하는 이유는 남자나 여자를 막론하고 한 사회에서의 복장에 관한 적정선이 어디인가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제가 이 설교단에서 “우리 교회 성도는 다음 주일부터 교회에 올 때, 모든 여자는 긴 치마를 입고, 모든 남자는 양복에 넥타이를 착용하세요.”라고 한다면, 저는 아마도 거의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입니다. 복장은 상식선에서 각자 형편대로 취하는 것입니다. 저도 한 번은 어느 옷을 입고 유튜브 방송을 하였는데, 어느 분이 목사가 그렇게 비싼 옷을 입으면 많은 분이 상처를 받는다는 항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가 입은 옷이 값이 아주 비싼 명품과 비슷해 보였나 봅니다. 제가 그분께 제 옷의 가격이 $10 정도 된 것이라고 해서 오해가 풀렸습니다. 이렇게 “비싸다, 비싸지 않다”라는 것도 그 사회의 통념을 따르는 것입니다. 20년 전에 우리 교회 성도가 타던 차와 지금 우리 교회 성도가 타는 차를 비교하면, 뚜렷한 변화를 분명히 감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10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이제 10절에서 사도 바울은 진정한 아름다움은 선행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여자와 남자는 선한 행동으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꾸어 나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잠언 11:22은 재미있는 표현으로 내적인 아름다움과 외적 아름다움을 묘사합니다.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 고리 같으니라” 이 말씀이 어찌 여인에게만 해당하겠습니까? 품위와 아름다움은 행동거지에서 나오는 것이지 옷이나 화장이나 장신구 등의 치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은 선한 행동을 낳습니다. 그래서 잠언의 유명한 말씀을 하나 더 인용해 보겠습니다. 잠언 31:30입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고운 것이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이 헛된 이유는 그것이 점점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과거 한때 아름답지 않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사시면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외적인 아름다움이 점점 사라져 갈 때, 내적인 하나님을 경외함과 선행이 점점 많아지면 하나님 앞에서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여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남자에게도 똑같이 적용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2. “오직 조용할지니라”(11-12).
11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이제 11절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서의 남자와 여자 사이의 질서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추정해 본다면, 에베소 교회에서 여자 성도가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도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워야 합니다. 남자는 불순종해도 되고, 조용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12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여자 성도에게 남자를 가르치거나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당대에 교회 밖에서도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거나 주관하는 것이 매우 희박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왕국에서, 교회 안에서, 우리는 서열은 없지만, 질서는 있는 공동체를 추구해야 합니다. 서열이 없는 공동체는 우리의 이상입니다. 질서는 그 공동체의 문화 같은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적용한다면, 여자가 교회 안에서 남자를 가르치거나 설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3:28을 적용한다면, 여자가 교회 안에서 남자를 대상으로 가르치거나 설교하는 것은 가능한 대로 순종해야 하는 일입니다.
2000년 전 초대교회에서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는 일이 없었을까요?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의 일 년 육 개월 동안의 선교 결과로 태어났습니다. 오랜 기간을 여러 사역자가 수고한 결과로 탄생한 고린도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열정을 우리는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오늘날의 교회와 견주어도 절대 빠지지 않을 정도로 모든 문제를 가지고 있는 교회, 소위 “종합병원”이라 불리는 교회였습니다. 특별히 남자와 여자 성도 사이의 질서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14:33-36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특수한 상황에서 어떤 특정한 여자 성도를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원칙은 질서와 화평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무질서와 불화를 멀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1:4-5를 읽어보면, 고린도교회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모두 기도하고 예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하거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 남녀 사이에 성차별은 없어야 하지만, 질서와 화평은 반드시 추구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러한 주제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한 공동체의 말씀에 대한 이해와 성숙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와 세상은 분명히 구분됩니다. 하지만, 교회와 세상은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만일 세상은 점점 더 성차별이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교회는 계속해서 성차별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교회의 문화와 세상의 문화가 역전되는 상황이 발생할 것입니다. 미국에서 노예의 문제로 남과 북이 심하게 분열되고 내전까지 하면서 수많은 생명을 잃은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때 많은 그리스도인이 성경 시대에 노예제도가 있었음을 근거로 노예제도를 정당화하였습니다. 세상은 인종 차별, 신분 차별, 성 차별을 극복하는데, 교회는 이러한 차별을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말씀으로 옹호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주님에 대한 모독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이러한 차별이 교회 안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방향성이 이러한 차별을 없애면서도 그 공동체의 질서를 지키는 균형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3.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If they continue in faith, love and holiness with propriety” (13-15).
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13절부터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서의 남녀 성도 사이의 질서를 창조질서부터 근거를 들어 설명합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은 땅의 흙으로 아담을 지으시고,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지으셨습니다. 아담이 먼저 흙을 재료로 하여 지음을 받았고, 하와는 아담의 일부를 재료로 하여 지음을 받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1:8-9는 이 말씀을 좀 더 자세하게 서술합니다.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저는 이 말씀을 남자와 여자 사이의 계급, 서열, 차별이 아니라 질서라고 이해합니다. 에베소서 5:22, 25 말씀은 각각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가정 공동체이든 교회 공동체이든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이처럼 차별이 없는 질서를 추구해야 합니다.
14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더 나아가 14절에서 사도 바울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처음의 죄를 범한 이는 하와임을 지적합니다. 하와는 뱀의 유혹에 속아 하나님의 말씀을 고의로 불순종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둘 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것을 먹지 않는 것이 선이고, 그것을 먹는 것이 악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들은 즉각 아담과 하와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그 나무의 열매는 선악을 알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율법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뱀으로 나타난 사탄은 “반드시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한 마디 ‘not’을 넣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정반대로 바꾸었습니다. 사탄의 꿈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에게도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이 되라고 역설합니다. 사탄은 여인에게 선악의 기준이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에게로 바뀌어야 진정한 지혜를 얻고 진정한 하나님이 된다고 유혹합니다. 여인은 사탄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에 고의로, 자의로 불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즉각 남편에게도 그 열매를 주었고, 남편도 그 열매를 먹음으로써 둘 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순서로 따지면 하와가 먼저, 다음에 아담이 죄를 범한 것이 됩니다. 하지만, 누가 죄를 범했느냐고 하면 아담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아담이 아담과 하와 사이, 더 나아가 결국은 모든 인류의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이제 15절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여자 성도에게 정숙함, 믿음, 사랑, 거룩함, 해산 등을 구원과 결부하여 말씀합니다. 먼저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득의(justification)의 구원이 아니라, 성화(sanctification)의 구원입니다. 이는 영적 탄생이 아니라 영적 성장, 성숙을 의미하는 구원입니다. 그러면 남자나 여자나 정숙함, 믿음, 사랑, 거룩함은 똑같이 요구되는 신앙 성장의 덕목입니다. 그러면 여자의 해산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말씀은 창세기 3:16을 보아야 합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부부 사이에서 아내가 임신하면, 입덧부터 시작하여 몸의 변화를 날마다 견디며, 죽음을 감수하며 해산하게 됩니다. 임신의 고통을 크게 더하신다는 말씀은 선악과의 범죄 이전에 임신과 출산을 하였다면 그 고통이 비교도 되지 않게 적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임신과 출산 그 자체가 선악과의 범죄 결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의 고통을 크게 더하는 것이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여인이 결혼하지 않거나 임신과 출산을 하지 않으면 성화의 구원을 하지 못한다는 말씀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에서 결혼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을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말씀할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은 오히려 자신이 선택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 앞에서의 본연의 삶을 충실하게 사는 것이 성화의 삶에 근본이라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남자는 창세기 3:17 말씀을 순종함으로 성화의 구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이 말씀을 통하여 남자가 자기 아내와 자녀를 부양하기 위해서 힘들게 노동해야 하는 것이 남자의 본연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 성화의 구원에 참여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 Conclusion: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Now I want you to realize that the head of every man is Christ, and the head of the woman is man, and the head of Christ is God” (고린도전서 1 Corinthians 11:3).
제가 주보에 써드린 고린도전서 11:3을 봅시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차별, 계급, 서열은 없습니다. 그러나 질서는 있습니다. 질서는 화평을 가져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에 차별과 계급과 서열은 없습니다. 삼위 하나님은 사랑과 화평의 한 하나님으로 존재하십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는 이렇게 평등하지만, 질서가 있는 공동체를 추구합니다. 사랑과 화평이 넘치는 공동체를 추구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왕국의 백성으로 부름 받아 차별이 없는 공동체를 이루어야 할 사명이 가집니다.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충성스럽게 할 때, 우리는 우리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존경하는 나날을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살 때, 교회는 세상을 영적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세상은 날마다 차별을 없애는데, 교회가 차별을 주도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교회로 돌아오겠습니까? 이제 우리에게 주님께서 순결과 지혜를 더하시기를 위하여 구합시다. 반주해 주시는 동안 이 한주도 차별은 없애고 질서와 화평을 추구하는 우리 가정과 교회 공동체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주의 자녀가 되기를 위하여 주님께 간절히 구합시다. 다 함께 기도합시다.
신자들에게 마땅한 것
디모데전서 2:8~3:13 / 이수영 목사
본문 2:10 하반절에 보면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끝에 바로 이어지는 3:14-15에서는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내용은 신자들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2:8-15이고 둘째는 3:1-13입니다. 첫째 부분에서는 교회 안에서 남자 성도와 여자 성도 각각의 처신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둘째 부분에서는 교회에서 감독과 집사의 직분을 맡을 신자들의 자격요건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볼 때 남녀나 감독이든 집사든 그 직분 여하를 가리지 않고 무릇 신자들이 마땅히 행할 바가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2:8을 보면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합니다. “손을 들어” 기도하는 것은 고대의 자연스러운 기도자세였습니다.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은 그러므로 이상한 것도 아니고 못할 것도 아닙니다. 찬송 부를 때 박수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꼭 박수치며 찬송해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경건한 예배분위기를 해치지만 않는다면 못 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요점은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기도를 드리라는 데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기도하는 사람들이 분노하고 다투며 거룩하지 못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2:9-15에서는 집중적으로 교회 안에서 여성들의 처신문제를 다룹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배경에 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다른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에베소 교회도 영지주의자 집단의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단에서는 여자들이 선교에 있어서 주도적이고 공격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혼인과 성관계와 자녀출산의 포기를 요구하는 등 여성들이 그들의 성적 역할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한편 이에 편승해서 예수를 믿게 되고 교회에 들어왔지만 남을 가르치기에는 아직 경험이나 지식이나 그리스도인의 성숙함이 부족한 여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었다고 믿는 자유를 남용하며 옷차림도 자유분방하게 하고 유대인의 문화적 정서와는 맞지 않게 교회 안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9-15절은 이러한 주장과 현상들에 대한 반응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먼저 2:9-10을 봅니다: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땋은 머리나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무조건 금지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그 당시 지나친 사치나 자기과시의 표지로 여겨져 신자들 간에 덕이 되지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힘써야 할 단장은 옷차림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선행에 의해서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비싼 옷으로 자기 몸을 단장한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서 선행으로 교회를 단장할 줄은 모른다면 교회가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음 본문 2:11-14입니다: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우리는 이 말을 그 자체로 영원불변하는 법으로 받아들이려는 데 대해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도 이미 말했지만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 에베소 교회에는 아직 신앙의 경험과 지식과 성숙함이 부족한 여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를 남용하여 교회 안에서 무분별하게 발언하는가 하면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성경적 가치를 부정하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쉽게 속아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여자들의 무분별한 발언의 자제를 권면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한 것은 에베소 교회에서 영지주의적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여자들이 더 잘 속아 넘어가는 것을 안 사도 바울이 하와가 먼저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아담도 같이 죄를 범했던 과거의 일을 예로 들어 여성들의 자제와 신중을 권면한 것입니다. 결코 모든 죄의 근원은 여자에게 있고 남자들은 모두 여자 때문에 억울하게 죄에 빠지게 된 것이며 따라서 세상의 모든 여자들은 다시는 남자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논리를 성립시켜주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2:15도 바로 이해해야 할 말입니다: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여자들이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물론 여자들은 애를 낳아야 구원을 얻는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미혼여성이나 자녀 없는 여성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전혀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 출산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것은 영지주의자 집단의 여성 지도자들이 성관계와 혼인과 자녀출산을 포기할 것을 요구한 데 대한 사도 바울의 대답인 것입니다. 구원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여성성과 그 역할을 거부함으로써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으로 얻는 것이라고 반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1:27-28) 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복입니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따르지 않고 혼인하며 자녀를 출산하는 등 자연적이고 정상적인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면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기만 하면 다 구원을 얻는 것임을 가르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본문 2:11-15의 말은 당대의 교회 안에서 영지주의 이단의 주장을 교정하려 한 것이지 모든 시대에 걸쳐서 동서를 막론하고 여성의 역할을 제한하는 법률이 아닌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남녀가 각각 마땅히 해야 할 바를 가르친 사도 바울은 이어서 교회의 지도자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들에 관하여 언급합니다. 하지만 이 덕목들은 감독이나 집사의 직분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하고만 상관이 있는 덕목이 아닙니다. 무릇 모든 신자들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힘쓸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감독에 관한 사도 바울의 권면입니다. 3:2-7을 봅니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고 한 데서 “책망할 것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는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람들 사이에서 지도자로서 요구되는 자격을 두루 갖추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 아내의 남편이 되는 것”은 법적으로든 은밀하게 행해지든 일부다처제를 분명히 반대하는 표현입니다.
매사에 말이나 행동을 절제하며 신중해야 합니다.
단정해야 합니다.
나그네를 잘 대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잘 가르칠 줄 알아야 합니다.
술을 즐기지 않아야 합니다.
구타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해야 합니다. 질서 있는 가정은 교회공동체의 질서와 생활의 기초가 되고 모형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는 다름 아니라 마귀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어 불순종의 죄를 짓게 만든 죄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명하시기를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6-17)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4-5) 하며 속여 죄를 범하게 만든 죄입니다.
외인에게서도 선하다고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집사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도 대동소이합니다. 먼저 본문 3:8-9절에서는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합니다. “믿음의 비밀을 가졌다”는 말은 믿음에 관하여 뭔가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구원의 진리를 소유했다는 뜻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전에는 숨겨져 있었다는 뜻으로 비밀이란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계획을 드러내셨고, 사도들이 전해준 대로 복음을 알고 믿으면 구원을 얻게 된다는 진리를 깨달아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3:10-12에서 계속해서 말하기를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맡게 할 것이요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합니다. 여기서도 사도 바울은 가정을 잘 다스려야 함에 다시 반복합니다. 남자나 여자나 신자들은 교회를 섬기는 일뿐 아니라 가정에도 충실해야 함을 새삼 깨우쳐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으로 본문 3:13에서 교회를 신실하게 섬긴 이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을 언급합니다: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아름다운 지위”란 교회 안에서 칭찬받고 존경받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는다”는 것은 보다 성숙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설 용기를 얻는다는 뜻입니다. 제직으로 교회를 섬긴 끝에 교인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고 성숙한 믿음의 일꾼이었다고 주님으로부터 인정받는 것보다 더 기쁘고 복되고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장로가 되고 안수집사나 권사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인들의 마음속에 아름답게 기억되고 훗날 주님 앞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었다고 인정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역할
딤전 2:8-15 / 박조준 목사
여러분이 아시는대로 디모데전서는 목회서신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교회 안에서는 지도자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 교회의 지도자로서 기도의 책 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두 가지 면에서 기도의 자세를 말합니다. 첫째는 소극적인 면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분노와 다툼이 없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오 늘 주신 말씀 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 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특별히 유의해야 할 것은 내 마음속에 분노가 없어야 합니다. 뿐 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다툼이 없어야 합니다. 분노는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이고 다툼은 밖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생활에서 분노와 다툼은 결정적인 장애물이 되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산상보훈에서 가르치신 기도의 교훈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교훈입니다. 마태 복음 5장 22, 23절을 보세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 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 물을 제단에 드리러 가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했습니다. 인간관계가 잘못된 것이 기도 생활에 얼마나 심각한 장애가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 다. 이것은 산상보훈에서 아주 강조된 진리 중에 하나입니다. 마태복음 6장 12절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일부분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했습니다. 주기도 의 핵심 가운데 하나도 남을 용서하고 그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죄 를 사하여 달라는 기도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기도문 다음에 나오는 마태복음 6장 1 4, 15절에 뭐랬어요?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말씀했습니 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기도문 전체에서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고자 하셨던 것은 올바른 인간관계입니다. 기도하기를 원하십니까? 그 기도에 응답 받기를 원하십니까? 올바른 인간관계 를 맺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가장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 사도나 베드 로 사도를 포함한 모든 사도들이 강조했던 기도의 교훈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에서 지도자로 세움을 받아 사역하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올바른 인간관계를 먼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맡겨 주신 사역은 근본적으로 신령한 사역 입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사역은 기도 없이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분노와 다툼입니다. 내 속에 분노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다툼이 없습니까? 다툼까지는 없다해도 마음 속에 미움 같은 것은 없습니까? 그것은 기도에 합당한 자리가 아닙니다. 먼저 우리는 죄를 자백 하고 용서를 구하고 이웃을 용서하므로 다른 사람들과의 잘못된 관계를 회복해야만 합니다. 그 런 다음에야 하나님이 응답하실 수 있는 참으로 하나님을 움직이는 진정한 기도가 가능한 것입 니다. 이것이 오늘 주신 말씀의 핵심입니다. 그러면 둘째로 적극적인 면으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 를 원하노라 했습니다. 이 말은 손을 깨끗이 씻고 손을 들고 기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기도할 때 늘 손을 들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히브리 전통을 따르게 되면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이 일상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했 던 기도의 자세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하나님을 열망하고 신뢰하는 마음을 표현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손을 들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자세입니 까? 그러므로 손을 든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손을 들어 기도한다고 할 때 그 손이 거룩 한 손인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사야서 1장 10-17절까지의 말씀을 한번 찾아서 같이 읽어 보실까요?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 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 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 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 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 손 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 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은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 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여러분 죄는 언제나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습니다. 하나님의 귀가 어두워 듣지 못하심이 아니요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있으면 아무리 기 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 담이 무엇입니까? 죄의 감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습 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을 헐어 버려야 합니다. 시편 24편 3절을 보세요.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손 이 깨끗하다는 말 다음에 마음이 청결하다는 말이 나옵니다. 손이 깨끗하다는 것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적인 청결을 의미합니다. 요단을 건너야 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도 너희 스스로를 성결케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만 깨끗한 그릇을 쓰시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기도하는 일에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 다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 나올 때마다 주님 앞에 나의 소원을 아뢸 때마다 생각해야 할 것은 나 와 이웃과의 관계가 옳게 되어있나 그리고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있나를 살펴야 합 니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했습 니다. 그러면 여기서 보는대로 남자에 대해서 말씀했는데 여자들은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 까? 그런 말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1장 5절을 보세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여성들이 기도한 것 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성의 기도를 금지한 곳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늘 생각되는 말씀 8절은 여성은 기도를 안해도 좋다거나 기도는 남성만의 특권이라고 강조 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해야 하지만 특별히 교회에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남성들에게는 더 중요한 책임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는 기도로서 사역을 해야 합니다. 기도로서 다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성을 교회의 지도자로 세웠을 뿐 아니라 한 가정의 머리로 세웠습니다. 그러 므로 가정의 모든 일을 다스리는 가장들의 중요한 책임 행사도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책임지고 계신 남성 여러분, 거룩한 손을 들어 내 식구들을 위해서 기도하십 니까? 분노와 다툼을 버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남성 지도자로서의 기도의 책임을 강조한 다음, 여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 다. 그런데 이 부분은 현대 교회에서 많은 논란을 가져오고 있는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극단적인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가 자유주의적인 견해입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오늘 주신 말씀의 내용은 그 당시의 문화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오늘의 문화에 는 절대로 적용될 수 없다는 해석입니다. 이것은 소위 여성 해방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논리입니다. 사실 오늘 생각하게 되는 말씀처럼 여성의 순복을 강력한 어조로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 성경 에 다시 없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여성들이 그렇게 순복해야 하는 이유를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들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12절 이하의 말씀을 읽어보실까요?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 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남성을 먼저 세 우시고 그 남성을 돕기 위한 협조자로서 여성을 지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도력을 남성에게 기대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문화적인 협상이 아니라 창조의 원리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둘째는 율법주의적인 견해입니다. 이것은 자유주의자의 견해하고는 정반대입니다. 이 사람들은 오늘 생각하게 되는 말씀을 마지 막 부분에 근거해서 여성은 일체 교회 사역에 관여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여 성들이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까지 금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주신 말씀을 바로 이해 하기 위해서 조금 전에 언급했던 고린도전서 11장 5절을 다시 한번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 다.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여기서 보면 초대 교회에서 여성들이 기도를 했고 예언도 했습니다. 소극적인 의미에서 예언 을 앞으로 일어날 일에 관한 말 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예언을 폭넓은 설교 일 수도 있습니다. 가령 구약 성경의 아모스의 예언 같은 것을 보게 되면 앞으로 올 어떤 사건에 대한 가르침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사회의 부정을 고발한다든지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바 른 뜻을 전달하기 위한 교훈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초대 교회에 서도 여자들이 기도하고 예언했습니다. 바울이 이 구절을 기록한 것은 기도나 예언을 금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대로 머리에 쓰는 수건을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가령 오늘 카 톨릭 교회에서는 미사때 여자들이 수건을 씁니다. 개신교 가운데도 1830년 영국에서 일어난 교 단 가운데 하나인 Plumouth Brethren이라는 교파에서는 여성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 예배를 드 립니다. 수건을 왜 씁니까? 그것은 바로 순종하기 위해서 입니다. 권위에 대한 순종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남성에 대한 순종을 의미한다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창조의 질서에 대해서 제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 하겠습니다 라는 표시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고린도나 소아시아 지역의 여성들이 수건을 벗은 일이 생겨났던 모양입니다. 이것은 여성의 자유를 주장하는 표현이 있다고 봅니다. 복음은 여성 들에게 해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자마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 음받은 자의 고귀한 모습을 발견하기 시작했고 자연히 여성들을 속박하고 있었던 그동안의 전통 적인 굴레를 벗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복음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여성이 자유를 얻게 되자 자유를 남용하기 시작했 습니다. 가령 여성들이 사치스러운 삶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디모데전서는 그 당시 에 베소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보낸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는 당시 소아시아에서 매우 중요한 무역도시였으며 경제적으로 풍요했었습니다. 여성들은 이 풍요의 특원을 이용해서 사치 스러운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신 말씀에 보면 여성들이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외적인 단장이 아니라 내적인 인격의 단장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에베소교회에서는 지도자의 권위에 대해서 도전하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우 리도 남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을 못할 것 무어냐 하게 된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디까지나 동동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자나 여자에게 다 른 역할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우열의 개념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고린도전서 11장 3절에 보면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이 남자가 여성 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입니다. 그것은 단지 역할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이 한 가정을 세울 때 가정에서 지도 자격을 여성이 아닌 남성에게 기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경륜이 고 가르침이고 계획입니다. 바울이 염려하고 경계한 것은 여성들의 사역 그 자체가 아니라 자기의 위치인 순종의 자리에 서 벗어난 사역이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0절을 보세요.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여자 는 일편 순종하므로 종용히 배우라 했습니다. 여기 종용히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방해하거나 지배하려는 의도가 없이 집중하려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강조된 점은 종용 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우라 는데 있습니다. 좀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서 듣는 자세, 집중한다는 자세를 가지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당 시 여자들 중에는 배우려는 생각이 전혀 없이 자신들이 조금 아는 것만 가지고 남을 가르치는, 그래서 지도자의 역할을 무시하고 교회를 혼란케 하는 일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바울 은 그런 여자들을 향해서 배움의 자리에 다시 서서 집중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 십시다.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사실 이 말씀은 11절과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바울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강조점을 뒤에 두곤 했습니 다. 여기서도 강조하는 것은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말한 것이 아니라 남자를 주관하는 것에 대 해서 말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르치는 것으로 남자를 주관하는 자리까지 나아가는 것입니 다. 이 말씀 역시 가르치는 사역 자체를 금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여자가 왜 순복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나 하는데 대해서 바울 사도는 두 가지 이유로 설명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3절에 보세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자가 순복해야 하는 것은 창조의 원리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시고 그를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그 다음에 하와를 지으시면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창세기 2장 18절에 보세요.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셨습니다. 돕는 역할 이것이 여성이 서야 할 고유한 삶의 자세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제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만 제가 오늘까지 이렇게 목회할 수 있었던 것은 첫째는 하나님의 도우심이고 사람으로는 제 아내 의 헌신적인 도움이었음을 간증합니다. 누가 나를 아무리 도와준다고 해도 내 아내만큼 나를 도 와 준 사람은 없습니다. 이 도움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지도자의 역할을 기대하셨고 하와에게는 돕는 역할을 기대하셨습니다. 그 래서 두 사람이 서로 보완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멋진 한 쌍이 될 것을 기대하신 것입니 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이유는 오늘 주신 말씀 14절에 있습니다.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하와가 먼저 꾀임을 받아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세기 3:6) 아담이 하와를 사랑했기 때문에 하와를 따라 먹었습니다. 부부가 사 랑하면 여자 말 듣지 않는 남편 있습니까? 아담의 경우도 그렇게 된 줄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자가 속임을 당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 타락의 사건에서 주도적으로 행동한 사람은 아담이 아니라 하와였습니다. 어느 신학자가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남자는 다소 이성적으로 지으신 반면 여자는 다소 감정적으로 지으셨다고 합니다. 이 두 가지는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러나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더 감정적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해서 그릇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의 지도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두 사람이 함께 서로의 역할을 보완해야 하지만 하나님은 지도자의 역 할을 남자에게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gahn & tott도 여성 목사 안수를 찬성했습니다. 그의 이론은 여자가 목사로 되었을 때 남자 목사를 돕는 역할을 한다면 제한할 필요가 무엇이 겠는가 했습니다. 문제는 방법이 아니라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하신 그 본래의 정신 앞 에 얼마나 순종할 수 있는가 하는 그 정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마지막 메시지는 하나님이 여자를 지으신 본래의 의도는 순종의 자리며 이 순종을 통해서만 여자가 참으로 여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다.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 라 이 말씀은 오래하기 쉬운 부분입니다. 여기 나오는 구원 이란 말은 영적인 구원을 의미하는 말만은 아닙니다. 건강한 삶의 자리 또 는 진정한 인간됨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여자가 언제 여자로서의 건강함을 유지하는 삶의 자리에 설 수 있습니까? 그것은 정절로서 믿 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할 때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여기 여자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네 가지 덕목을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정절, 믿음, 사랑 그리고 거룩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은 내가 무슨 일을 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 만일에 여자가 무엇을 가르치다가 교만해지고 인격적 으로 탈선하기 시작하면 그는 하나님이 그를 세워 주신 순복의 자리, 돕는 역할의 자리를 스스 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 대한 반항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 교훈을 주었습니다. 남성 지도자에게는 기도의 책임이 강조되었습니다. 분노하지 말고 다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 습니다. 남성들은 흥분하기 쉽고 싸움하기 쉽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실 영적인 사역 은 기도 없이는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에 기도를 강조한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어떤 책 임을 맡았던지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므로 그 사역을 바로 감당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성은 하나님이 나를 세워 주신 그 본래의 자리, 순복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여성다 움을 잃어버리지 않고 향기를 발하면서 맡은 책임을 바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남자나 여자나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각자의 책임을 바로 잘 감당해서 가정에는 행복이, 교회에는 부흥이, 사회에는 유익을 끼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
딤전 2:8-10 / 양향모 목사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인해서 전 세계가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우리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문제가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대형교회들은 모여서 예배드리지 못하고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고 소규모의 교회도 일부 교인들만 모여서 오전 예배만 드리고 있습니다.
교회가 예배만 드리는 곳이 아니라 모여서 성경공부도 하고 기도회도 하고 또 서로 음식을 나누면서 교제도 하고 우리 서로가 천국을 향하여 가는 거룩한 무리라는 것을 서로 확인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겨우 오전 예배만 드리고 그것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을 마스크로 막고 서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앉아서 그냥 설교나 듣고 예배를 구경만 하는 이상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어떤 신학교 교수라는 사람이 텔레비전 프로에 나와서 생명은 귀한 것이기 때문에 모여서 예배드리지 말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정말로 화가 났습니다. 저런 사람을 누가 신학교 교수로 청했는가 따져보고 싶었습니다.
우리나라에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람이 연간 3~4천 명이라고 합니다. 하루에 10명 이상이 교통사고로 죽습니다. 다쳐서 병원에 가고 불구로 살게 되는 사람은 엄청 많습니다. 그런데도 차를 없애라고 하지 않습니다. 죽는 사람도 있고 불구가 되는 사람도 있지만 그만큼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술이나 담배로 인해서 일찍 죽는 사람도 통계는 없지만 엄청 많을 것입니다. 술 담배는 우리 몸을 해치는 몹시 나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술 담배는 없애지 않고 나라에서 담배를 만들고 술이나 담배에다가 세금을 부쳐서 장사합니다.
에이즈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가고 있고 동성애나 잘못된 성관계로 인해서 생기는 질병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그 치료를 위해서 많은 나라의 돈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동성애를 나쁜 것임을 교육하거나 금지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동성애를 허락하고 조장하려는 법을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가면 생명을 잃기 때문에 교회에 가서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참 이상한 사상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술 담배 안 하고 동성에 빠지지 않고 악한 일 하지 않고 평안한 삶을 살기 때문에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보다 평균수명이 10여 년쯤 높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교회는 생명을 살리는 곳이고 육신의 생명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존재하는 곳인데 도대체 교회를 뭐로 알고 생명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교회에 가지 말라니요? 참 이상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이 교회에 모여서 예배드릴 때의 교훈이 들어 있기 때문에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이런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가 국가 정책에 협조하는 마음으로 방역 당국이 정한 규정을 지키며 이렇게 조심스럽게 예배를 드리지만 예배는 교회의 핵심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배운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6)라고 했습니다. 주일 마다가 아니고 날마다 모였고 모일 때마다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에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날이 가까이 올수록 모임을 폐하려고 하는 자들이 많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라고 했습니다.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을 방해하는 세력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지 모이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신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이 되는 말씀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하는 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자만 교회에서 기도해야 하고 여자는 교회에서 앞에 나와서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남자와 여자가 평등한 사회에서 이런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 말씀은 당시에나 해당이 되는 말씀이고 오늘날은 무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남자와 여자가 하는 일을 구별하기 위해서 기록한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예배에 있어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드릴 때 어떻게 기도해야 하고 또 예배 참석하는 사람들이 어떤 몸가짐을 가져야 하느냐에 대한 말씀입니다.
당시의 상황에서 남자들이 주로 기도를 했기 때문에 기도할 때 주의점이고 당시에도 많은 여성들이 주로 예배에 참석했기 때문에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어떤 몸가짐을 가져야 할 것인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본문 10절에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어떤 자세로 참석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나서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즉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마땅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을 잘 들으시고 우리가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시고 예배드릴 때 어떤 자세로 예배드려야 하는 가를 생각해보시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본문 8절에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그러므로”는 1절의 말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1절에서는 누구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지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2:1-2)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라고 했습니다.
1절의 기도가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의 기도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그렇게 기도하는 이유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곳입니다. 기도가 예배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는 것은 우리를 통하여 세상 모든 사람들이 진리를 알고 구원을 받아서 저들의 생명이 이 세상의 생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1절의 기도하라는 말씀을 이어받아서 그 기도를 할 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각처에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각처라고 하는 것은 세상 어디에서나 기도해도 된다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예배를 드리는 처소마다 라고 해석을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오늘날처럼 교회당 건물이 따로 지어진 것은 없었고 가정에서나 특별한 장소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예배 드리는 곳 어디에서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기도하라는 것은 남자만 기도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자들도 예배 시에 기도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당시에는 남자들이 예배를 인도했고 대표기도를 남자들이 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기도할 때 꼭 손을 들고 기도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기도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 기도할 때 손을 들고 기도하기도 했기 때문에 그 장면을 그렇게 기록했습니다.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대목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기도하면서 혹은 기도하기 전에 화를 내거나 다투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예배드리면서 싸우고 성질을 부리고 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서는 기도하는 사람이 평소에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특별히 대표로 공예배에 기도를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평소에 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화를 내거나 말다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분노가 있는 사람은 불평불만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늘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은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차라리 기도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하나님께 책망을 많이 받은 일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그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고 오히려 원망하는 사람은 여지없이 책망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원리도 서로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참 좋은 사람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은 참 피곤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주변에 원망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이 쉽게 옮깁니다. 그 원망이 다른 사람에게도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주변에 감사하는 사람을 친구로 많이 두시기 바랍니다. 자녀들 앞에서 원망하고 불평하는 말을 하지 마시고 감사하는 말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도 감사를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감사를 드리면 더 많은 감사 거리를 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툼이 없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조금만 양보하고 조금만 남을 배려하면 다툼이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변에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은 사람 때문에 늘 시빗거리가 생기지만 조금만 참고 양보하면 다투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거룩한 손이란 손을 드는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든 그 손으로 평소에 나쁜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한 삶을 산 사람이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화를 내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다투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사는 것이 손해 보는 일 같지만 그러나 자신에게 참 행복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도 장수하는 비결일 뿐만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 이르게 하는 너무나 귀한 삶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기도하라고 하면서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 세상 사람들에게 악을 행한다면 진리를 아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본문 9-10절 말씀에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라고 한 것은 앞 절의 말씀과 같이라는 말입니다. 교회에서 기도할 때 특별히 대표기도를 하는 남자들의 예를 들어서 기도하기 전에 평소의 그의 삶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사는 것처럼 예배에 참석하는 여자들도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자들만 이렇게 살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단지 당시의 여자들에게 있어서 이런 문제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 잘못들을 지적하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자들에게 있어서 예나 지금이나 가장 큰 문제는 꾸미고 치장하는 문제입니다. 여자들은 더욱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에 시대는 달라도 다 꾸미고 치장하는 일에 제일 큰 관심을 가지고 삽니다.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라고 했습니다. 옷을 입을 때 단정한 옷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너무 화려하거나 너무 초라한 옷을 입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무 화려하게 옷을 입어서 시선을 끌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나 남루한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옷으로 단장을 하기보다는 소박함과 정절로서 단장하라고 했습니다. 옷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라는 것입니다. 소박이라는 말은 ‘예절’이나 ‘고상함’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예의가 바르고 고상한 몸가짐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옷은 화려하게 입었으나 교양이나 예절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화려한 옷은 입지 않았더라도 몸가짐이나 마음가짐이 예의가 바르고 고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옷뿐만 아니라 치장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세상 사람들처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땋은 머리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머리 손질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에 땋은 머리란 머리를 높게 땋아 올리는 것을 말하는 데 부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자들이 머리를 높이 땋아 올려서 나는 부자라고 사람들에게 자랑했다고 합니다.
금이나 진주로 치장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금이나 진주 장식으로 몸을 치장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보석으로 몸을 치장하는 것도 역시 자기의 부를 자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값진 옷을 입지 말라고 했습니다. 비싼 옷은 비싼 만큼 좋은 점이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비싼 옷이란 요즘 말로 하면 유명 브랜드 옷을 말합니다. 실용성과는 상관없이 유명 메이커 옷을 사 입는 것 역시 자신의 부를 자랑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세상의 부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오직 선행으로 자신을 단장하라고 했습니다. 화려하고 비싼 옷을 입고 금이나 진주로 자신을 치장하고 자랑하려고 하지 말고 선한 일을 많이 함으로써 자신을 치장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그냥 아무렇게나 살다가 와서 예배드릴 때만 예수님을 믿는 것처럼 하고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 때도 그리스도인답게 살다가 그런 바른 몸과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은 우리 자신이 흉악한 죄인임을 고백하고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이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 죄인이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는 사람처럼 겉모습을 화려하게 꾸미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은 이 세상에서 부자로 화려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 세상은 가난하게 살지라도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이 세상의 부를 자랑하려는 사람은 그 의미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악을 행하면서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예배에 참석하는 그리스도인이 어떤 자세로 예배에 참석해야 하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분노와 다툼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하고 행실이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세상 사람들처럼 아무렇게나 살다가 교회에 와서 기도만 그렇게 해서는 안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알고 겸손하게 단정한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화려한 모습으로 자신의 부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삶을 사는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예배는 우리 육신의 생명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참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을 진실되게 고백해야 합니다. 말로서만 아니라 삶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위대한 믿음과 진실한 고백이 우리의 육신의 생명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까지 인도하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자의 구원
딤전 2장 11~15절 / 김경호 목사
여러분은 이 말에 ‘아멘’하십니까?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노예가 된 사람 아니고는 적어도 이 말에 동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본문은 여자가 구원 받는 길을 다르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정숙과 해산(표준새번역), 정절과 출산(개역), 순결과 출산(공동번역)으로..... 여자는 이런 것들을 통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는 왜곡된 번역의 경우를 소개했지만 이것은 번역상의 잘못이 아니고 본문 자체가 가진 한계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다행히 창세기의 인간창조이야기를 재해석한 것이기에 이 본문 자체가 이미 성서의 권위를 부여 받고 있기는 하지만 창세기의 원문을 바르게 해석한 것인가를 따져 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아무래도 창세기 본문이 1차 자료이고 딤전의 본문은 그것을 해석한 제 2차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되어야할 두 가지 이유를 듭니다. 첫째는 순서로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지음 받았고, 둘째는 여자가 먼저 속임 당해 죄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맞는지 창세기를 살펴봅시다.
첫째, 남자와 여자는 동시에 창조되었습니다. 먼저 지음받은 ‘아담’(Adam)은 ‘남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인류’라는 뜻입니다. 아담 말고 분명하게 남자를 지칭하는 말은 이쉬(ish)이고, 여자는 이샤(isha)입니다. 이 구분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창2:23)에서 입니다. 번역에서는 그 맛이 깨집니다. 원어로는 “ish에서 나왔으니 isha라 하리라” 예를들면, “곰에서 나왔으니 곰탱이라 하리라”와 같이 말의 반복되는 맛을 살린 언어유희적 표현입니다. 여기서야 처음으로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 나타납니다. 하긴, 여자가 없는데 어찌 남자가 있겠습니까? 아담은 남녀를 구분하기 전에 “사람, 인류”를 말할 뿐입니다. 그러나 여자를 만드시므로 그와 동시에 그의 상대인 남자도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전 아담은 성의 구분이 없는 인간일 뿐입니다.
그러나 영어의 Man을 사람 또는 남자로 보듯이(사실 이것은 “남자만이 사람이다”는 가부장제의 산물이다)백번 양보해서 아담을 남자로 본다고 하면, 창2:17의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은 여자는 생겨나기도 전에 남자와 맺은 계약입니다. 그때 여자는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책임은 여자에게 묻고, 죄는 여자에게 뒤집어씌웁니까? 적어도 둘 중에 하나를 말해야지 둘을 다 말하는 것은 억지입니다.
바울에 대한 변론
그 당시의 유대교의 상황을 보면 이런 배경을 이해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교는 여자는 인격이 아니라 단지 물건입니다. 여자에게는 교육을 하지 않으며 유대인에게 생명같이 중요한 율법의 교육도 꼭 필요한 것 이외에는 하지 않습니다. 여자를 가르치는 것은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일’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성들은 배우기 위해 회당 모임에 나갔지만 단지 여성들은 듣기위해서 갈 뿐입니다. 그들이 회당 모임에 참석하더라도 한 쪽 구석에 막을 치고 그 안에 격리된 채로 있어야 했습니다. 여성이 앞에 나와 순서를 맡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성이 회중 앞에 몸을 드러내는 것은 회중을 모독하는 행위이고, 결혼한 여자가 그렇게 하는 것은 이혼의 사유가 됩니다. 여성은 종교적 절기에 참여할 의무도 없습니다. 여성은 노예와 동일한 등급이었습니다. 이 때 랍비들은 공식석상에서 “하나님, 나를 이방인, 노예, 여자로 만들지 않으심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랍비 벤 요하난은 “너희 가정을 개방하고 가난한 자를 영접하라 그러나 그렇게 하더라도 여자들과는 많이 이야기 하지 말라 여자들과 얘기를 많이 하는 자는 자신에게 악을 초래하고 율법의 일을 게을리 하게 되어 마지막에는 게헨나(지옥)에 사는 자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유대교가 이런데 비해 그 당시 교회는 노예와 여성과 가난한자를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모두가 형제 자매로 동등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교회로 몰려들었고 교회에서 중심적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바울 서신에도 보면 많은 여성들이 교회에 중심적 역할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심지어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이 남편보다 항상 먼저 언급되는 여성도 있습니다. 유일하게 해방된 공간이 교회였으므로 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교회로 몰려들었으며 특히 여성들의 참여가 두드러지게 교회에서 드러났다고 합니다. 바울은 이런 상황 속에서 그 속도를 조정하고 싶었으며 여성들이 지나치게 발언하는 것을 통해 교회가 로마라는 사회와의 심한 격차를 가지는 것을 조정해 보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여성차별적 발언들을 변론하는 논리입니다.
분명 이런 변론에는 진실이 있습니다. 그 당시 교회 공동체가 가지는 혁명성과 하층민들에게 무서울 정도로 파급해 나가는 속도감이 로마 정부가 기독교를 박해하게 된 원인이 되었고 바울도 이를 우려해 조정하려고 했다는 것도 이해 가능한 설명입니다만 아무튼 이 본문은 오늘 우리가 대하기에는 아무리 성서에 대해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신자라 할지라도 매우 곤혹스러워하는 본문이고 역사적 한계를 명확히 가진 본문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제 세계는 양성 간에도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남성지배의 문화는 아무리 저항하고 발버둥치며 과거로 돌아가려해도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남성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고 해도 이미 지나가는 시대의 그림자입니다. 남성들은 남성이 가정에서 제왕처럼 군림하던 시대의 향수를 아쉬워하지만 이제 이미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을 손바닥으로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대해 말하면서 인간의 욕망 충족의 구조는 다른 동물들과는 구별된다고 보았습니다. 동물은 일차적 욕구가 채워지면 만족하지만 인간은 일차적으로 욕구가 채워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것이 타인에 의해 인정받고 받아들여질 때라야 만족한다는 것이 다른 점이라고 합니다. 좋은 집에 사는 사람은 좋은 환경에서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남들이 그것을 부러워하고 인정해주고 나아가서 칭찬해 주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한 여성에게 푹 빠진 남성이 그 여성과 친해지고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가 그렇게 바라던 것이지만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그 둘의 사이를 인정해 주어야 만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타인의 인정을 욕구 충족의 기반으로 할 때, 필연적으로 인간은 사로의 투쟁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채워지면 곧바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일차적 욕구충족인데 비해 인간은 그에 만족치 않고 무수한 타인의 인정을 받기위해 무한정으로 욕구충족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그것을 채울 수 있는 조건이나 자연 재화는 한정적이기 때문에 인간은 또 다른 인간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는 서로간의 결전의 장이 됩니다. 이러한 결전은 치열하게 전개되고 최후의 강자 두 사람만이 남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 간에 최후의 결전이 벌어지게 되는데 여기서 승리한 사람은 영원한 주인이고 여기서 패배한 사람은 노예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러나 비극은 여기에 있습니다. 최후의 승자가 되기까지는 매우 목표가 뚜렸하고 활기 넘치는 삶이 되지만 막상 자신이 최후의 승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은 심한 허무감에 사로잡힙니다. 이미 주인과 노예로 나누어진 다음에는 주인은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지 못하게 됩니다. 주인은 기껏해야 노예에게서 자신의 욕망을 인정받을 뿐인데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노예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혼 초에 신혼부부들이 서로 초기에 잡아 놓아야 된다는 생각에 힘겨루기를 하는 것들을 가끔 보게 됩니다. 이것은 큰 오산입니다. 사람은 누가 누구에게 잡혀서 살 수는 없는 존재이고 잡고 살아도 안 되는 존재입니다. 상대를 완전하게 휘어잡아서 내가 무엇이라고 해도 “예”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을 때, 그는 이미 같이 삶을 살아갈 가치가 없는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는 한쪽의 불행이 아니라 양쪽 모두의 불행입니다. 배우자는 이미 인생의 동반자가 아니고 자신의 동물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삶으로 전락하는 것을 말합니다. 서로 존중하며 영혼의 교감이 없는 삶, 그것은 얼마나 비참한 생활입니까?
우리는 지배하고 종속 시켜야 만족을 누리는 욕망의 체계를 변화시켜야합니다. 사실 우리의 교육구조 인간관, 세계관은 능률과 성과, 업적 위주의 물질주의적 가치척도로 포장한 세계를 우리들 앞에 제시합니다. 일등, 일류학교, A학점, 출세, 성공, 높은 자리, 부 이런 것들이 우리들의 삶을 측량하는 성공의 척도가 아닙니까? 이런 가치관 속에서 어떤 인간이 나오겠습니까? 더불어 함께 살고 공존하고 서로 존중하고 인정해주는데서 자신의 기쁨을 찾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구조로 바꾸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성씨 폐지에 대하여
우리교회에 문양**전도사님이 양성으로 자신의 이름을 표현하십니다. 가부장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은 우스개 삼아 “문양**”와 “이최**”가 만나면 그들이 낳는 아이의 이름은 “문양이최** ”(웃음) 이렇게 가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몇 대 지나면 세상의 온갖 성씨가 다 나와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하고 염려합니다. 저는 우리들의 부르는 이름으로 그냥 각자의 이름이면 되지 꼭 성씨를 꼭 부쳐야 되나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그러면 호주제니 뭐니 하는 것도 자연히 없어지게 됩니다. 성씨를 통해 그 가문과 혈통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당장 바로 위의 어머니부터 모계 일체의 혈통이 사라지는 반쪽 혈통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좋은 조상에 대한 기억이면 괜찮은데 그렇지 못한 행적에 대한 기억이면 그것은 스스로에 채워지는 족쇄요 또한 또 다른 연좌제에 불과할 것입니다. 성서의 이름도 성이 없습니다. ‘엘리야’ ‘엘리사’하니까 성이 ‘엘’씨 인 것 같지만(웃음) 그냥 모두가 이름입니다. 제 이름이면 됐지 뭘 자기가 책임도 못 지는 조상의 이름을, 그것도 반쪽짜리 이름을 줄줄 달고 살아야 합니까? 저는 이혼한 후, 다시 재혼한 가정의 아이들이 한 가정 안에 다른 성을 가지고 사는 것으로 인해 부작용이 심각한 것을 보게 됩니다. 호주제 때문에 성을 바꾸는 것은 금지되어 있고 재판 등 복잡한 절차와 그럴만한 사유 없이는 성을 바꿀 수 없다고 하니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존재
창 2:18에 여자는 '남자를 돕는 배필'(개역)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를 돕는 존재'로 지음 받았으니 남자 시중이나 드는 것이 여성창조의 목적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돕는다'는 말은 에첼(ezer)인데 이것의 동사형인 아찰(azar)은 주어가 하나님일 때만 쓰는 동사로서 '하나님께서 직접 도우시는 존재'란 뜻입니다. 여자를 '남자를 돕는 존재'로 보기보다는 그(남자)를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도우시는 짝을 주셨다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배필이란 말 크네그도(kenegdo)역시 correspondence, counterpart로서 대등한 위치의 상대자를 말합니다. 창세기의 남녀관계는 사랑과 존경으로 이루어지는 남녀결합을 말합니다. “당신은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입니다”(창 2:23) 이보다 더 한 사랑의 고백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남녀는 구원의 동반자로 서로 보완, 성숙해 가면서 완성해가는 존재라는 것을 말합니다.
여자를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서도 성차별주의자들은 말합니다. “사람의 뼈가 200여개 정도 되는데 그중에 부분인 하나로 만들었으니 여자는 남자보다도 엄청 그 재료에서 부터 모자란 존재다”고 합니다. 또는 평등주의자들은 말합니다. 머리뼈로 했으면 남자의 머리 위에 군림하고, 발뼈로 했으면 짓밟히며 살 텐데 갈비뼈로 하셨으니 얼마나 평등하게 지음 받았느냐고요(일동 웃음). 그런데 이 이야기가 태초의 사람인 아담을 누가 보고 쓴 것이 아니라 다윗 왕조 때에 쓰여진 창조에 대한 신앙고백이라는 것을 볼 때, 이미 자신의 짝이 그의 부모에서 유래되었고 그가 속한 가문에서 유래되었다는 것 쯤은 발생학적으로 자명히 알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배우자의 사랑스러움과 정겨움이 너무 넘쳐서 이 사람은 도대체 나 아닌 어떤 다른 존재에서 유래되었다고 하기 힘들다. 당신의 그 사랑스러움과 정겨움으로 보니 당신이야말로 다름아닌 내 몸의 일부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입니다”라는 고백 일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어린 아기를 품에 안고 그 부모들이 흔히 던지는 말처럼 “이런 놈(존재)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가?” 하는 그 뿌리에 대한 답변일 것입니다. 아담이 하와를 처음 보고 한 말 “당신은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입니다”라는 고백에 대한 증빙적 이야기가 여자를 갈비뼈로 지으셨다는 여자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러한 관계는 “서로 알몸으로 어울려 살되 부끄러움을 모르는” 관계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완벽한 조화와 완전한 개방을 말합니다. 더 이상 자기 자신을 꾸며대지 않아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다 보여도 꾸밈없이 가감 없이 그를 다 이해하고 받아 줄 수 있는 세계를 말합니다. 사람과 사람 간에 무슨 일이든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남에게 신뢰를 잊게 될 까봐 얼마나 많은 일에 자기를 꾸며대고 치장하며 삽니까? 주변의 사람들과 말할 수 없는 벽을 쌓고 그 담 안에 스스로 갇혀 답답해하며 살지 않습니까? 그러나 본래 에덴에서의 이상적인 관계는 남녀, 빈부, 신분, 학력, 나이 등등의 모든 차이가 갖는 배타성을 극복하고 완벽하게 이해하는 사회입니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고, 용납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누구를 부끄러워하거나 정죄하지 않는 사회를 말합니다.
오늘 여성의 주간을 맞이하여 여자의 구원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는데 여성의 종속은 곧 남성의 동물적 삶을 의미하며, 여성의 구원은 곧 더불어 남성의 구원이기도 하다는 것을 생각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