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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스데반 황
지혜 여인의 설교
잠언 1:20-33
20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21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22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23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24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25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26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27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 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28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29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30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
31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32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33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
오늘 본문은 누구를 듣느냐에 따라 멸망과 복이 결정이 나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지혜 여인과 식사를 하며 지혜 여인의 말을 들으면 영생과 은혜와 평강과 풍성함이 따라오지만, 내 속의 어리석음을 따라 마귀와 악인과 죄의 음성을 들으면 멸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지혜를 의인화하고 있습니다. 즉, 지혜를 인격체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사실 지혜 그 자체는 인격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격체로 구현되는 지혜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무한한 지혜를 가지고 계시며 또한 지혜의 근원이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혜를 얻으려면 지혜의 근원이시고 무한한 지혜를 지니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한 개념이 바로“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잠언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으로 표현되며,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에게는 지식과 지혜의 근본인 것입니다.
한편, 지혜가 의인화되는 것은 시적인 표현에 속할 수 있습니다. 태양이 웃는다거나 땅이 분노하였다는 표현은 비 인격체를 마치 인격체처럼 말하는 시적 표현입니다. 하지만 잠언이 하나님의 계시이며 또한 시적인 표현을 넘어서는 영적인 진리라고 본다면, 지혜 그 자체는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으며 또한 지혜의 존재의 뿌리는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의인화된 지혜는 지혜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성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의인화된 지혜의 존재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가리킬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오늘 지혜의 설교는 하나님이 친히 하시는 설교라고 보아도 지장이 없는 것입니다. 나아가 지혜가 ‘사람에게’ 설교하고 있고, 또한 23절이 말하는 것처럼 “내 영”을 부어준다면, 잠언 1장에서 의인화된 지혜는 영원한 말씀이신 말씀 하나님이요, 또한 아버지와 함께 영을 보내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지지하는 잠언 내의 강력한 증거는 잠언 8장입니다.
[
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23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24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25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26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27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28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29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31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잠 8:22-31)
이 구절에서는 지혜는 창조자이시며 하나님과 함께 영원토록 존재하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분은 영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 외에 다른 분이 없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물론 잠언에 나오는 지혜에 관한 모든 인격적인 표현에 대해 그리스도와 연관시키는 것은 무리입니다. 하지만, 창조와 관련되거나 구원과 관련되어 사람들을 부르며 중보 사역을 감당하는 개념이라면 이는 하나님 자신에게 속하면서도 또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의 역할을 하는 그리스도로 보아야 합당합니다.
따라서 신약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라고 부릅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특히 누가복음 11장 49절을 보면,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눅 11:49).
고 말합니다.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 정경이 완성되기 전까지 선지자와 사도라는 직분이 교회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보내신 분은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뚜렷하게 그리스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지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2-3).
고 증언합니다.
아무튼 지혜의 의인화, 그리고 지혜 그 자체는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최근 신학 흐름을 보면 성경 외의 고대 문헌들을 참고하면서 지혜를 하나님과 떼어내어 어떤 추상적인 개념 또는 힘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혜 개념은 비성경적이며, 예수님 당시의 헬라 지혜 개념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지혜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 지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성삼위일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혜를 말할 때, 하나님 그분, 그리고 그분의 영, 또는 그분의 말씀과 함께 지혜를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재미난 것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 본문 잠언 1장 20-22절의 모습과 유사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길거리에서, 광장에서, 시끄러운 길목에서,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깝다고 하시며 복음을 전하시면서 회개를 외치셨습니다.
[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마 4:23-25)
[
1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더라
](마 13:1-3)
그 무리들 중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심지어 로마 병사들도 있었습니다.
[
32 예수에 대하여 무리가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아랫사람들을 보내니라.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40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41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43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44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요 7:32, 37-44)
아무튼 우리는 본문에서 설교하는 지혜 여인과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파하는 장면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우리는 본문 및 예수님의 복음 전파를 통해서 몇 가지 참된 교훈의 특징에 대하여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참된 지혜를 알려주는 설교는 누구에게든지 열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복음과 지혜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도리어 지혜는 목이 터지도록 광장과 거리와 성문에서 크게 외칩니다. 그리고 간절히 외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와 진리와 복음의 특징입니다. 마치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공기와 물이 모든 피조물에게 허용되듯이,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의 설교는 감추어진 비밀이 아닙니다. 그 설교가 들리지 않는 이유는 듣는 사람들의 죄 때문이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어서 그러한 것이지 결코 지혜의 설교 그 자체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따라서 귀가 있고 귀가 열린 자는 누구든지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진리가 지혜 여인의 설교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외치셨습니다.
둘째, 지혜 여인의 설교 내용은 당당하며 간절하며 분명하고 단순합니다. 22절에 보니, 지혜 설교자는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고 애원합니다. 간절히 당부합니다. 지혜 여인은 누구든지 설교를 듣고 아무도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도록 하늘의 생명수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역시 모든 사람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생명수를 제시합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6-17).
그러므로 마치 소수만이 깨달을 수 있는 진리인양 말하며, 모든 사람에게 떳떳하게 알리지 못하는 어떤 비밀스러운 내용을 가르치는 집단이나 교주가 있다면 이는 참된 지혜와 참된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 설교자 역시 지혜 여인과 같은 진실하고 거룩한 설교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선포되기 위한 것이요, 그 내용도 분명하고 단순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복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멸망할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들은 지혜의 빛을 그들의 수건으로 가립니다. 지혜의 설교를 듣지 않으려고 수건으로 귀를 막습니다. 밝은 대낮인데, 굴 속에 들어가서 빛이 들어오는 곳을 모두 수건으로 차단합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질 것입니다”(고후 3:16).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면 지혜 설교자가 외칩니다.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22절).
지혜 설교자의 청중 가운데는 어리석은 자들, 거만한 자들, 미련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첫째, “어리석은 자”는 원어로 (페티)입니다. 그들의 특징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페티)는 (파타ㅎ)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인데, 마음이 열려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줏대가 없으며 주인이 없는 마음을 뜻합니다. 마음이 열려서 모든 유혹과 미혹과 덫이 던져져도 다 받아들입니다. 이단이 와도 좋고, 죄의 유혹이 들어와도 좋고, 악인이 그 마음에 들어오려고 해도 마음 문을 열어주는 자를 말합니다. 간략하게 말하면,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는 자요, 거짓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이며,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 헷갈리는 사람이고, 그저 원초적인 본능에 따라 돼지처럼 먹을 것과 따스한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죄이든 의이든 거짓이든 진실이든 이러한 영적인 것에 무관심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양심을 속이든 말든, 그저 자신의 육체의 본능을 채우는데 급급한 사람으로서 모든 잡귀들과 악인들과 유혹들에 대해 마음이 활짝 열려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잠 24:28). 따라서 언제나 꾀임에 잘 넘어가는 사람이 어리석은 자, 곧 (페티)입니다.
이에 잠언 14장 15절은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느니라”고 증언합니다. 특히 그는 음녀의 달콤한 유혹에 그대로 걸려듭니다.
[
6 내가 내 집 들창으로, 살창으로 내다 보다가
7 어리석은 자 중에, 젊은이 가운데에 한 지혜 없는 자를 보았노라
8 그가 거리를 지나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하여 그의 집쪽으로 가는데
9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에라
10 그 때에 기생의 옷을 입은 간교한 여인이 그를 맞더라
](잠 7:6-10).
특히 성경에서는 우상 신을 따르는 자는 마귀의 미혹에 빠진 (페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신 11:16).
둘째, 거만한 자는 원어로 (라촌)입니다. 원어의 뜻은 비웃는 자, 조롱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22절에서,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라고 되어 있는데 이 뜻은 “거만한 자들은 남들을 비웃으며, 또는 비방하며 희열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기 자랑, 남의 흉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만한 자들은 집에 가면 가족들과 함께 모든 사람들을 흉보며 함께 희열을 느낍니다.
거만한 자의 특징은 교만과 거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 질서에 도전하며 권위를 비웃고 조롱하고 대드는 데서 희열을 느낍니다. 그들은 죄를 가볍게 여기며, 하나님의 심판을 비웃고, 부모나 상위 권위 질서가 내리는 징계나 책망에 대해 도전하며 대드는 성향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자기에게 어떤 잘못을 지적하면 지독하게 화를 내는 특징이 있습니다. 심지어 사랑으로 그의 그릇된 점을 말해주는 사람에게도 분노하며 악을 행합니다.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느니라”(잠 9:7).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잠 9:8).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잠 13:1).
자녀들 중에 거만한 자들은 부모에게 대들며 부모를 조롱하는 특징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잠언은 그들에게 심판을 예언합니다.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잠 30:17).
베드로후서를 보면 그들은 당돌하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느니라”(벧후 2:10).
또한 그들은 ‘기롱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권위와 말씀을 인정하지 않고 주의 심판에 대해 조롱합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 3:3-4).
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죄와 의의 구분선마저 자기들이 정하고 하나님이 틀렸다고 말하는 자리까지 나아갑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동성 연애에 관한 것입니다. 즉, 죄를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 예수님을 향해 조롱하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조롱합니다.
[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롬 1:24-27, 32)
재미난 사실은 어리석은 자들이 거만한 자를 만나면 놀랍게도 거만한 자에게 매력을 느끼고 그들 편에 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거만한 자는 공동체에서 당을 짓는데 주동자이며 항상 다툼을 만들어냅니다. 따라서 거만한 자를 쫓아내야 공동체가 조용해집니다.
“거만한 자를 쫓아내면 다툼이 쉬고 싸움과 수욕이 그치느니라”(잠 22:10).
주 하나님은 참으로 거만한 자를 미워하고 싫어하십니다. 더 나아가 거만한 자를 비웃으십니다.
“진실로 그(여호와)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로다”(잠 3:34).
거만한 자는 신약에서는 교만한 자로 대치됩니다.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셋째, 미련한 자는 원어로 (크실)이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더디다, 무겁다, 느리다”라는 뜻입니다. 22절을 보면, 미련한 자는 참 지식을 미워하며 싫어합니다. 그들은 참된 지식을 배우기를 싫어하며, 따라서 바른 지식과 관련하여 게으름을 드러냅니다. 성경은 바른 지식이며 생명과 구원의 관한 지혜를 주는 참된 지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련한 자는 평생을 살면서도 성경을 일독도 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참 지식이 부담되고 싫기 때문입니다.
신기한 것은 미련한 자의 특징은 고집이 센 것입니다. 즉, 미련은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강퍅한 의지의 문제입니다.
구약의 사무엘상 25장을 보면, 나발이라는 부자가 나옵니다. 그는 미련하며 고집이 셌습니다. 그의 아내 아비가일은 남편을 잘 알기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삼상 25:25).
미련한 나발은 감사를 모르던 자요, 참된 지식이 없는 자로서 오직 재물만 모아놓던 자였는데, 모은 재산을 써보지도 못하고 갑자기 죽게 됩니다.
“아침에 나발이 포도주에서 깬 후에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 일을 말하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삼상 25:37-38).
고집만 지독히 센 미련한 자의 특징은 멸망이 바로 코 앞에 있는데도 가만히 있거나 그 길을 계속 걷는데 있습니다. 그의 눈은 바른 길을 보지 않기 때문에 자꾸 이상한 곳으로 헛발을 내디딥니다. “미련한 자는 눈을 땅 끝에 두느니라”(잠 17:24). 즉, 삶의 바른 목적을 붙들지 못하고, 무엇을 할지 몰라서 아무렇게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참 지식과 지혜를 가진 부모나 주의 종들에게는 근심과 골치거리가 됩니다.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잠 17:25).
그는 지식을 싫어하고 미워하기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미련한 자는 지금 당장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본능을 만족시킬 흥미 거리만 있으면 안일하고 게으른 상태에 머뭅니다. 미련의 극치는 이유 없는 고집 때문에 부모와 선생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즉, 지혜를 싫어하고 지식을 싫어하며 그냥 미련한 상태에 있으려고 고집을 부립니다.
이들은 오늘 망한다고 해도 엉덩이를 움직이지 않으면, 가난으로 굶어 죽는다고 해도 신경조차 쓰지 않고 하루 종일 잠만 잡니다.
그러므로 미련한 자는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에서 늘 해를 끼치는 골칫덩어리가 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의 말을 들어주면 언제나 문제가 생깁니다.
“너는 미련한 자의 앞을 떠나라 그 입술에 지식 있음을 보지 못함이니라”(잠 14:7).
나아가 미련한 자는 죄와 관련한 못된 짓을 자주 합니다. 만일 미련한 아내를 두거나 남편을 둔 사람은 날마다 속이 뒤집혀서 죽을 지경이 될 것입니다.
“미련한 자는 행악으로 낙을 삼느니라”(잠 10:23).
그리고 미련한 자는 입만 벌리면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거나 실족 시키거나 싸움을 걸거나 다툼을 일으킵니다.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의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의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잠 18:6-7).
아무튼 잠언만 보아도 미련한 자에 대한 언급이 85개 이상이 나옵니다. 사실 우리 모두에게 미련한 면들이 다들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미련 때문에 잘 될 수 있는 일들을 망쳐놓고 공동체 내에서의 대인 관계를 파괴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미련을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참된 지식이 필요합니다. 참된 교훈을 소중히 여기고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공부를 해야 합니다. 지혜 여인의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 어떻게든 자신을 쳐 복종시켜서 미련을 뽑아내야 합니다. 그래야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튼 22절에 의하면 미련한 자의 가장 큰 특징은 지식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지혜 설교자가 모든 청중에게, 무리에게 외칩니다.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지혜자의 설교의 핵심은 회개입니다.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나의 영을 부어주겠다”고 합니다. 지혜의 영을 받으면, 그 사람은 계속 지혜 여인의 설교를 깨닫고 계속 지혜롭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회개하지 않으면 때가 되어 기회가 사라질 것인데, 그 이후에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때는 지혜 설교자가 그들의 신음 소리나 고통 소리나 기도나 비참에 대해 신경 쓰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지혜를 멸시하였고 듣기 싫어하였고 비웃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결국 지혜를 업신여겼습니다. 이제 기회는 지나갔고 돌이키는 것은 불가능해졌습니다.
그 결과는 광풍같이 임하는 재앙과 공포와 두려움이며, 무한한 근심과 슬픔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지혜가 그들을 조금도 도울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평생 동안 지혜를 거절하고 무시하고 배척하고 조롱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혜의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입니다. 그러나 그 참음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자와 거만한 자, 그리고 미련한 자에게 무한하고 영원한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의 문이 닫히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네, 죽음의 때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인간에게 주어진 기간은 최대 120년입니다. 그 이후는 이 땅에서 누구의 음성을 듣고 따랐는지에 따라 영원한 운명이 갈라집니다.
지혜의 음성을 거절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멸시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결과는 언제나 광풍같이 임하는 재앙과 공포와 두려움이며, 무한한 근심과 슬픔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지혜 설교자의 말씀을 듣기 바랍니다. 미련함을 회개하고 거만함을 회개하고 어리석음을 회개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지혜의 영이신 성령을 받을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가장 깊은 지혜를 계속 이해하며 알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영혼의 지각과 지식과 통찰력을 증가시켜 주실 것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 역시 지혜 설교자의 음성을 따르지 않고 내 안의 죄의 음성을 따르면, 마찬가지로 미련함과 어리석음과 교만에 떨어져 수치와 비참과 궁핍과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물과 피로 거듭난 사람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를 건져내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인생은 그만큼 비참과 슬픔과 궁핍과 고통을 지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늘의 지혜는 단지 어떤 지식이나 정보가 아닙니다. 하늘의 지혜는 도덕적이며 영적이며 생명과 삶과 성품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살아계신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과 거룩이 무한하신 영원한 지혜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 거만한 자, 미련한 자는 지혜의 절규를 거부하고 결국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리에 서지 못하게 됩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도다”(잠 1:24-25).
하나님이 어리석은 자, 거만한 자, 미련한 자에게 계속적으로 절규하시면서 간절히 당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주의 은혜와 겸손, 그리고 그 사랑이 보이지 않습니까?
참된 의사요 위대한 의사가 환자를 받았는데 영원한 죽음을 향하는 환자였습니다. 그 의사는 사랑이 많고 긍휼이 많은지라 어디를 수술하면 낫는지 알려줍니다. 그러나 그 환자는 의사에게 욕하고 도망가고 무시하고 거절합니다. 심지어 망치와 가시 면류관과 못을 가져와서 그 의사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그 환자는 이 위대한 의사를 조롱하였고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의사는 어리석은 이 환자에 의해 십자가 상에서 못 박혀 죽으면서도 마지막 호흡을 마칠 때까지 그에게 회개하고 치료를 받으라고 권합니다. 왜 그러했습니까? 그 환자를 불쌍히 여겨 살리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통해, 그리고 사람 안에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를 몰랐다고 부인할 수 없습니다.
[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었도다
](롬 1:18-22)
또한 하나님은 그들에게 양심을 주셔서 하나님의 지혜의 음성을 평생 듣게 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
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6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롬 2:12, 14-16)
그럼에도 어리석은 자, 거만한 자, 미련한 자는 계속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무시하고 대적하였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독생하신 아들, 곧 지혜 그 자체를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게 하셔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멸망을 향하는 어리석은 자들, 거만한 자들, 미련한 자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그 아들, 그 말씀, 그 선물, 그 지혜까지 거절하고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그들은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는도다”(잠 1:31-32).
이러한 길을 택한 자들로는 벨사살이 있고, 가룟 유다가 있고, 심지어 에서도 있습니다. 물론 사울 왕도 있고, 구리 장색 알렉산더도 있고, 가인도 있고, 아하스 왕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걷는 인생 길이 어디로 가는지 확인하기 바랍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도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 확인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길이 만일 어리석고, 거만하고, 미련한 길이라면 그 길은 수치와 비참과 고통과 멸망으로 향하는 길인 줄 알고 더 이상 그 길을 걷지 말고 다른 길, 곧 생명을 길을 찾아서 가기를 바랍니다. 거듭난 신자라면 육체와 죄악의 길을 버리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복음의 길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돌아오는 방법은 회개입니다. 어리석음, 거만, 미련을 회개하기 바랍니다. 회개라는 것은 나의 가던 길이 멸망으로 향하던 길인 것을 의식하고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지혜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신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 멋대로 살던 삶에서 벗어나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철저하게 순종하기 바랍니다.
지혜의 영으로 충만한 설교자 바울이 외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행 17:30-31).
장래의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친히 증인이 되실 것입니다. 그분은 지혜로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시고 만유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지혜로 우리에게 양심을 주시고 양심을 지키도록 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심지어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오셔서 복음을 외치시며 마지막 기회를 주시고 누구든지 구원을 얻도록 하신 분이십니다.
아직 그 아들 덕분에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때문에 사랑을 접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천국은 열려있으며 아들의 보혈로 그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두 팔을 벌리시고 누구든지 그 문으로 들어오면 영접할 준비가 되어 계십니다.
이 얼마나 자비와 긍휼이 많은 주 하나님이십니까? 누구든지 그 자비를 받으려면 지혜 여인의 설교를 듣고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잠 1:33).
멸망의 길에서 돌아서서 의의 길로 오시기 바랍니다. 죄악의 길에서 거룩의 길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의 길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불신자이든 신자이든 이 시간 영원한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돌아가면, 생명과 지혜와 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안전과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4-17).
그러면서 외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요 14:10-11).
회개하고 주의 약속의 말씀을 믿을 때,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한 말씀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지혜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활짝 열릴 것입니다. 그때 돌 같은 마음이 녹을 것이며, 그 동안 모르고 지났던 생명 길이 보이고 하늘의 지혜의 말씀이 들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의 그 환희와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기쁨과 평강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보혈로부터 하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입니다. 하늘의 지혜가 주는 이러한 기쁨을 맛본 자는 이 세상의 잠시 있다 사라질 그러한 기쁨을 부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지혜 여인과 식사를 하며 지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는 자는 무한한 지혜를 얻음으로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될 것이며 마침내 무한한 생명과 행복과 감사와 평강으로 영원히 차고 넘치는 새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 여인,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계속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그리고 복음을 귀하게 여기고 마음속에 새기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히 2:1-3).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지혜이며 마지막 은혜입니다. 복음은 온 세상을 향해 어디든 전파되고 있습니다. 그 부름은 간절하며 공개적이며 투명하며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결코 하나님의 마지막 부름을 외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심지어 지혜 설교자는 손을 내밀어 여러분을 붙들려고 합니다. 이때 뿌리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마 7:24-27)
영원한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를 거절하는 자에게는 소멸하는 불이 임할 것입니다.
[
7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살후 1:7-9)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히 12:27-29)
모든 것을 흔드는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여전히 어리석음과 거만과 미련한 상태에 있든지 아니면 회개하고 지혜 여인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인생 길에서 스스로 내린 결정에 따라 각각 영원한 열매를 먹게 될 것입니다. 멸망의 열매를 먹게 되든지, 영생의 열매를 먹게 될 것입니다. 그 이후는 더 이상 기회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직도 외치시며 기다리십니다. 언제까지 기다리십니까? 여러분의 호흡이 마치는 직전까지 기다리십니다. 지금 여러분은 누구를 듣습니까? 하나님입니까 사탄입니까? 성경입니까 썩어 없어질 세상입니까? 하늘의 지혜의 음성입니까? 아니면 내 마음 속의 죄의 음성입니까? 누구를 듣고 살아갑니까?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음성, 곧 복음을 듣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지혜를 영접하며 영생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33절).
본문 33절에서 듣는다는 것은 마음으로 받아서 소중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혜의 가장 깊은 지혜인 십자가로 나아오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성령을 받아서 새로운 지혜의 삶을 시작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