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귀에 경 읽기
"쇠귀에 경 일기" 우이독경(牛耳讀經)이라고도 쓰지만,
동아시아의 대륙문화와 무관한 순수한 우리 속담이다.
"아무리 가르치고 일러주어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점을 뜻한다.
빠알리 불전의 잡부 니까야에 속하는 《담마빠다(법구경)》에도
이와 유사한 교훈을 담은 가르침을 찾을 수 있다. "어리석은 자가
일생동안 지혜로운 이를 섬긴다고 하더라도 그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숟가락이 국의 맛을 알지 못하듯." (김서리 역) "숟가락이 국 맛을 모른다."
참으로 멋진 비유다. 불교에 오래 몸을 담고 있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혀 체화되지 않은 사람은 '국 맛을 모르는 숟가락'과 같으리라.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독경 소리를 듣고도
그 의미를 모르는 '소'와 다름없으리라. 불법승 삼보에 대한
믿음 없이 불전을 들척이는 사람 역시 이와 같으리라.
『대품반야경』에 대한 용수보살의 주석서인 『대지도론』에서는 믿음 없이
불교를 연구하는 것이 헛수고라는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유로써 설명한다.
"어떤 사람이 손이 온전한 채로 보배가 가득한 산에 들어가면 자유롭게 보배를
가져올 수 있다. ··· 불교에 대한 믿음 없다는 것은 손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손이 없이 보배가 가득한 산에 들어간다면 단 하나의 보배도 가져올 수 없다.
믿음이 없는 것도 이와 같아서 부처님 가르침의 보배산에
들어간다고 해도 전혀 소득이 없다."
불교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불전은 그저 교양서적일 뿐이리라.
또는 불교에 대한 믿음 없이 불교를 연구하는 사람에게 불전은
그저 인문학적 분석의 소재일 뿐, 자신의 삶과 통찰에 긍정적인
변화를 주지 못하리라. 마치 손이 없이 보배산에 들어가듯이.
『대지도론』에서는 이런 보배산의 비유에 이어서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믿음을 갖는다면,
이 사람은 능히 나의 큰 가르침의 바다에 들어와서 사문과(沙門果)를
얻게 되니 삭발염의(削髮染衣)한 것이 헛되지 않으리라.
그러나 만일 믿음이 없다면 그 사람은 내가 가르친 진리의 바다에 들어올 수가
없으니, 이는 마치 고목에서 꽃이 피지 못하고 열매가 맺지 못하는 것과
같아서 비록 삭발염의하고서 온갖 불전들 독송해도 전혀 소득이 없느니라."
팔만대장경 가운데 가장 논리적인 불전을 꼽으라면 용수보살의
『중론』이 단연 으뜸이 될 것이다 .『중론』은 총 27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 장인 제1 관인연품 서두와 마지막 장인 제27 관사견품의
말미를 다음과 같은 믿음의 게송'으로 장식한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불상부단(不常不斷)이며,
불일불이(不一不異)이고 불래불거(不來不去)이며,
온갖 희론(戱論)을 제거해주고, 상서로운 연기법을 가르치신 부처님,
최고의 설법자이신 그분께 예배드립니다."
(제1장 서두의 귀경게) "대성왕(大成王) 고따마께서
연민의 마음에서 이 법을 설하셔서 모든 견해를 다 끊어 주셨기에
저는 이제 머리 조아려 예배드립니다."(제27장 말미)
『중론』에서 아무리 현란한 논리를 구사하여 모든 현상의 공성을 논증해도,
불교에 대한 믿음을 갖는 사람에 한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불전은 그저 인문학적 교양서가 될 뿐이다.
쇠귀에 읽어주는 경과 같고, 숟가락에 대한 국과 같고
손이 없는 사람이 둘러보는 보배산과 같을 뿐이다.
속담 속에 담은 불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