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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미술의 이해
서성록(안동대교수,미학)
1.
“슬프고 때로 추하기도 한 이 세상 속에서 아름다움과 예술을 창조하는 것보다 더 영적인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 말은 유명한 라브리공동체를 설립한 프란시스 쉐퍼박사의 아들 프랭키 쉐퍼(Franky Schaeffer)가 크리스천 미술가들에게 던진 말이다. 화가로서 뿐 아니라 다큐멘터리 영화감독까지 맡고 있는 다재다능한 시각예술가 프랭키 쉐퍼는 창조성이라는 영역이 크리스천의 생활에 있어 ‘작은’ 각주가 아니라 ‘필수적인 항목’임을 강조한다.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좋은 예술을 창조하는 것은 크리스천에게 맡겨진 귀한 소명이다. 이같은 목표는 다른 미술가에게는 훨씬 전에 잃어버린 주제이나 크리스천 미술가들이 오래 전부터 추구해온 주된 과제였다.
개신교 국가인 화란과 미국에서 각기 다른 이름으로 전개되었지만 17세기 화란파(Dutch School)와 19세기 허드슨리버 스쿨(Hudsonriver School)은 한결같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눈부신 색깔과 산란하는 광선 묘출, 그리고 정교한 솜씨로 그려내 애호가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지금도 이 미술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꾸준히 연구되어오고 있다.
그러나 현대와 들어와 아쉽게도 종래에 보아온 영감 있는 미술은 현저히 줄어든 것같다. 움직임이 크게 위축되었고, 설혹 있다고 해도 스스로를 일정한 반경 안에 가두고 생존 자체에 만족하는 것같은 인상을 받는다. 모종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측면에서라도 우리는 크리스천에게 맡겨진 예술의 창조가 원활히 진행되어가고 있는지 되짚어보아야 한다. 특히 크리스천의 미술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문제를 가볍게 넘어갈 수가 없다.
전람회장을 돌면서 느끼는 점이라면 크리스천 미술가들이 지나치게 ‘종교적인 딱지’를 붙이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은혜를 받아 감사하는 마음으로 출품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너무 안이하게 예술에 접근한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신앙고백에만 치우치다보니 하나님의 현존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만을 드러내게 된다. 하나님의 창조성,미적 질서, 피조세계의 신비를 찾기는 뒷전이고 ‘종교적’ 진리로써 얼버무리기 일쑤다.
곰곰이 가다듬어보면 ‘종교적’ 진리가 따로 있을 수가 없다. 진리란 하나이므로 여러 진리가 있을 수가 없다. 여러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가장된 진리일 뿐 진리일 수가 없다. 우리가 지닌 진리란 종교적일 뿐 아니라 사회적,철학적,자연적,역사적,심리적,우주적,예술적 진리의 총체요, 최고의 진리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은 그 자체로서 좋다. 진정한 가치를 지닌 것이라면 크리스천의 삶속에 포함되어야 한다. 예술도 예외일 수 없다. 실용적이지 않더라도 예술은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하며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의 아름다움을 보고 또 아름다움의 체험을 통하여 그 분이 지니신 아름다운 성품의 일부를 느낄 수 있게 된다. 칼빈의 말대로 “이 세계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섬광이 빛나지 않는 곳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그 가장 거대하고 아름다우며,광대한 이 우주의 구조를 그 광채의 무한한 힘에 완전히 압도당하지 않고는 잠시라도 바라볼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즉 “정교하게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는 이 세계야말로 일종의 거울이요,바로 이 거울로 달리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정관할 수 있다.”
나는 이 글에서 크리스천 미술가의 맡은 바 소임을 알아보려고 한다. 과연 하나님의 자녀로서 무엇을 하며 어떤 것들이 미술가의 시각 속에 포함되어야 할지 알아보려고 한다. 먼저 사람의 존재에 대해 간략히 짚어보겠고, 크리스천에게 있어 독특하게 나타나는 책임의 세가지 측면을 알아본 다음, 크리스천에 있어 중요한 평안이 미적인 생활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 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술품을 창작할 때 나타나는 몇가지 실제적인 문제를 점검해보려고 한다.
2.
서두를 ‘사람의 역사’에서부터 열어가 보자.
그리스의 페리클레스(Pericles) 시대에는 사람이 생각하는 능력을 지녔으므로 이것을 인간이 지닌 독특성으로 인식해왔다. 그들에 따르면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한다. 하기는 그 머리 때문에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했다.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인간의 독특성을 물질을 다루는 능력, 즉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데서 찾았다. 자연을 틀짓고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다는 시각이다. 사실 인류문명의 발달은 도구를 만들어 동식물을 지배하는데 따른 것임을 간과하기 어렵다. 그런가 하면 카시러(Ernst Cassirer)는 언어의 능력에 주목하여 상징적으로 소통하는 능력에 특히 주목하였다. 우리는 ‘말하는 존재’이며 말을 함으로써 자기의사를 전달한다. 말로써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말의 위력은 정말 놀랍고도 무섭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생각하고 물건을 다룰 줄 알고 또 말하는 인간의 능력은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특성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이상의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뭔가 미진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것은 우리가 말하려는 ‘예술’을 누락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독특성은 역시 무언가를 만들어 표현하고 그것을 통하여 다른 사람과 교감을 이루는데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예술은 아름다움에 반응하는 우리 성향의 표시이자 언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더 강력하게 소통할 수 있는 매개물이다.
사람들은 예술이 이래야 하고 혹은 저래야 한다고 말한다. 그만치 폭넓게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반증이다. 예술이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면 이런 저런 얘기가 나올 리 없었을 것이다.
지금의 상황도 그런지 의심이 들 때가 있다. 예술이 유효하다고 말하는 쪽보다는 무슨 소용이 있는지 의심하는 쪽이 더 지배적인 것같다. 전문가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예술개념이 명료하게 잡히지 않는다. 오히려 혼란만 가중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제 예술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게 되어버린 것같다.
이런 상황에서 칼빈대학교의 철학교수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olas Wolterstorff)의 주장은 흥미롭게 들린다. 그는 인간의 독특성이란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장하는데 있지 않고 ‘책임지는 존재(being responsible)’라는 사실에 있다고 말한다. 원래 인간은 이 땅을 지배하는 책임을 지고 태어난 존재로서 자연계에서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인간뿐이라고 한다. 하기는 우리는 지금까지 어떤 짐승이 다른 종의 짐승에 대해서나 우호적이라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또 자연에 대해서도 잘 가꾸고 일구며 더불어 살아가는 경우를 보기 어렵다. 짐승이 책임을 지지 않을 때도 그들은 죄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책임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어떤 사람이 나쁜 일을 저질렀을 때 법정에서 처벌을 받거나 용서를 하는 것은 인간이 책임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책임을 질 때 인간은 존귀하며 바로 거기에 인간의 독특성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 책임이란 아주 중요하다. 나 역시 책임이라면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는 사람이지만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데에 이의가 없다. 나 자신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가족, 가까운 사람들, 그리고 동료들에까지 손을 뻗쳐 도와준다는 것은 값진 일이다. 하물며 우리가 종사하는 미술계를 바람직한 쪽으로 이끌고 정말로 추구할만한 것을 추구하며 소망스러운 사실을 환기시킨다면 얼마나 보람되겠는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바람직한 문화를 창조하는 데에 앞장서야 한다.
예술은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가? 먼저 이 문제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현대의 미술가들은 ‘책임’이라는 말조차 거북스러워한다. 책임이란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유를 억누르는 말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책임’이란 당당한 권리의 행사를 말함이요, 자유를 말함이지 창작을 위축시키는 부정적인 이미지와는 구분된다.
우리가 책임을 진다는 것은 사랑과 관심없이는 불가능하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책임을 질 이유도 없다. 만일 예술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라면 책임이라는 말조차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예술은 삶의 일부로서 큰 가치를 지니며 또 생활에서 없어선 안될 산소같은 존재이기에 예술을 잘 다루어 행복한 삶을 가져다주는 잠재물로 키워 나가야 할 것이다. 무너진 담을 회복하려면 다시 세우는 길밖에 없는 것처럼 예술계 주위에 잡풀이 무성하다면 잡풀을 잘 정리해줌으로써 예술을 돌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일은 우리가 솔선수범하여 미술의 관리자가 되고 책임자로 나설 때에만 가능하다. 만일 팔장을 끼고 관망만 한다면 사태는 조금도 호전되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방관자인데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적극적으로 사태를 수습하고 복구할 사람이다.
대체로 미술가에게는 세 가지 책임이 주어졌다고 본다.
첫째는 우리를 둘러싼 자연세계를 애정을 갖고 돌보는 일이다. 자연 안에는 많은 비밀이 숨어 있는 것같다. 추워서 움추려 지내던 겨울이 지나고 다시 돌아온 봄은 따듯한 소식이며 안식없이 고통속에 지내던 밤이 지난 후의 아침빛은 감미로운 소식이다. 계절과 밤과 낮의 변화에는 어김이 없다. 그런 놀라운 변화가 없다면 어떻겠는가? 겨울의 매서운 추위는 하염없이 이어질 것이며 밤은 어둠을 몰고와 우리를 암흑 속에 가두어둘 것이다. 한치의 착오없이 진행되는 순환은 그래서 고마운 것이다.
그 뿐이랴. 바다 위에 비치는 햇빛, 들판을 아름답게 꾸미는 꽃들,깊은 숲속의 잊혀지지 않는 신비로움, 그리고 호수와 빛과 산골짜기, 이러한 것들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말 못하는 어떤 자연물들도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노래부르도록 우리의 가슴을 두드린다.
한때 자연은 인간의 지배대상으로 푸대접을 받은 적이 있다. 지금도 자연에 고통을 주는 행동은 계속되고 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사이가 돈독했던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깨지면서 우리 주변에서 새가 떠나가고 곤충이 사라지며 야생동물들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람의 깨어짐과 부서짐으로 인해 자연은 보잘것없이 되고 그럴수록 인간은 외톨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자연의 승리자가 된 것같으나 실은 파트너를 잃은 실패자, 즉 반쪽의 존재가 되었다.
원래 냇물에는 물고기가 살았고 하늘에는 새가 살았고 숲에는 곤충들이 살았다. 그들의 자리를 지켜주기는커녕 남획을 일삼는 동안 동물들은 살 터전을 박탈당했다. 자연을 잘 돌보는 일이 인간에게도 유익을 끼친다는 사실을 안지 얼마 안 된 것같다.
자연을 종속적인 개념에서 이제 수평적인 관계, 즉 동행의 관계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같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자연을 노래하는 것은 시인의 몫만은 아닐 것이다. 오래 전부터 산수묘출이나 풍경사생은 미술인들의 몫이 되어왔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길어올려 하늘과 땅은 물론이고 숲과 나무와 새들과 짐승 등 이 소중한 것들을 유지하고 보존하는데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연에 대하여 그렇게도 많은 설명이 있건만 모두가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은 아니다. 히브리서기자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 11:3)라고 기술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신성이 자연 안에 있음을 안다. 하나님의 내적 계기에 의하여 믿음으로 조명되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믿음으로 조명되지 않은 어떤 설명도 거짓일 뿐이다.
둘째는 사람에 대한 책임이다. 말이 나왔지만 이 문제만큼 소홀한 것도 없는 것같다. 입을 모아 인종차, 계급차, 빈부차, 성차별,지역차별을 거론하지만 정작 진정한 사람됨의 추구에는 인색하다. 파편화된 인간, 고장난 인간, 불구화된 인간, 황폐화된 인간을 질타하는 사람은 많아도 감싸고 아우르며 위로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지탄하는 사람은 많아도 문제를 수습하려는 사람은 적다.
근래의 미술작품을 보면 인간은 혐오스런 존재, 볼썽사나운 존재로 묘사된다. 가혹과 살육, 음란의 대상 쯤으로 그려진다. 그속을 헤아려보면 추락된 인간에 대한 의식이 도사린다. 인간은 이제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며 욕심을 불태우고 온갖 열등감과 우월감, 허탈감, 무의미, 초조와 기피증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아주 연약한 존재로 형용된다. 이것은 미술작품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같다. 우리의 실생활에서 목격되는 현상이 미술작품에 그대로 전이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핵인간’은 흥분과 환희에 몰입하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언제 어디서나 진실하고 타당한 그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그는 순간적이며 임기응변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그의 삶은 콜라주기법으로 만든 작품같이 부스러기와 주위와 연결되지 않는 단편으로만 구성된다. 자신의 생각을 다른 누구에게 강요하려는 뜻은 전혀 없는 감정과 생각들을 장난스럽게 나타내는 일로 소모한다.
미술은 언제부터인지 방향감각을 상실한 인간 편에 서온 것같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인간을 폄하하기를 좋아한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 모른다. 미술가들은 이런 인간을 야유하고 고발하며 조롱한다. 때로는 더러운 정욕에 맡겨버리는 작품을 옹호하기도 하며 그런 태도를 조장하기도 하며 그럴싸하게 미화하기도 한다. 이런 태도는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구하려 오셨다. 예수님을 잃어버린 자를 위해 오셨다. 그 분이 만난 사람들은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육체가 고장나거나 마음에 상처를 받고 살아온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만날 때 그 분은 불쌍히 여기셨고 가까운 친구가 되어 주셨다. 어째서 그 꼴이 되었느냐고 꾸짖지 않으셨다. 그냥 그 사람을 받아주셨고 위로해주셨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좀더 적극적인 해결책을 알려주셨다. 진리와 생명과 진정한 길이 어디에 있는지 그들에게 가르쳐주셨다. 그 분은 한 사람의 영혼을, 설사 그 사람이 형편없는 사람이요 인색한 사람이요 강도한 자요 남자들과 놀아난 자요 무식한 자요 심지어 살인자일지라도 따지지 않고 모두 사랑하셨다.
그들에게 구원의 밧줄과 사랑의 손길을 펼치셨다. 그분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무제한적 사랑이며 무조건적 사랑의 성격을 띤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시다. 우리가 이웃을 대할 때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지 친히 사랑의 모범이 되어주신 분이다.
셋째는 하나님과의 관계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는 땅을 다스리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책임을 지닌다. 이와 함께 우리는 그 분을 창조주로서 내 안에 모셔야 한다.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의 위엄과 비교해보기 전까지는, 결단코 자신의 비천한 상태를 충분히 인식할 수 없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해 가까이 갈수록 ‘티끌’(창 18:27)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엘리야도 자기 얼굴을 겉옷으로 가리지 않고서는 주께서 가까이 오심을 감히 견뎌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분은 영광만 지닌 분이 아니라 부성적인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신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우리를 붙들어주시며,섭리로 다스리시며, 선하심으로 양육하시며 각종의 축복으로 우리를 채워주신다. 따라서 우리는 그 분이 모든 축복의 근원이시며,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찾아서는 안되며, 이러한 모든 것을 인식하기 전에는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봉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완전한 행복은 그 분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믿게 될 때 “마치 시내를 따라 샘 근원으로 올라가는 것처럼, 그 축복의 근원에까지 인도함을 받게 된다.”
그 분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선하심을 찬양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 분이 자녀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 미술가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있으면서 그 분께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은 세가지로 축약된다. 정리하면, 땅을 잘 다스리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마지막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 경외하는 것이다.
아무 것도 책임질 것이 없는 사람은 추구할 것도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책임의식이 동반될 때 우리는 정말 행복을 느끼며 삶의 보람을 만끽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책임은 단순히 수동적인 의무수행이 아니요, 사랑의 표시이며 영혼의 미소라고 하겠다. 가슴에서 우러나온 자원하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의 고백을 드리게 된다.
3.
우리는 평안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굶주리는 아이들,버려진 노인,폭력과 강간, 그리고 두려움과 외로움에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 절망에 빠진 남녀, 좀더 넓혀 보면 우리는 포로수용소와 빈민 수용소,초만원이 된 감옥들,집단학살,어린이 유괴,고문,살인 등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자칫하면 속을 수 있다. 혼란스러워 할 수 있다. 이런 불행들이 미화되고 극적으로 묘사되며 인간의 잔인성에 대한 선풍적인 표현들 때문에 불행한 세상에 둔감해지고 심지어 그 사실 자체를 파악하는 능력이 마비될 수도 있다.
그림을 보아도 온통 불행한 세상에 대한 표현들로 얼룩져 있다. 폭력과 억압, 유괴, 불안,두려움,혼란,무질서,무정함,고독 따위는 즐겨 다루는 소재가 되며 누가 더 이것을 더 강력하게 표현하느냐 경쟁하듯이 다투어 표현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볼수록 우리는 진정한 평안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는 대신 부끄러움,죄책감,무력감 등을 느끼게 만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평안(shalom,eirenē,peace)의 근원에 눈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나우엔은 “가난한 자와 함께 가난하게 되시고 약한 자와 함께 약한 자가 되시며,거절당한 자들과 함께 거절당한 자가 되신 그 분께 당신의 눈을 고정시키라”고 말한다. 그는 절름발이,불구자,소경을 어루만지시고 그들에게 용서와 격려를 주시고 홀로 죽으시고 거절당하시고 조롱당하신 예수님께 주목할 것을 권한다.
평안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 안에는 평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불안과 싸움이 끊이지 않으며 고독의 수렁에서 헤어나오지도 못한다. 진정한 평안은 오직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온다. 그 분이 주는 평안은 심한 상처를 아물리고 불안을 기쁨으로 바꾸며 심한 고통을 행복으로 역전시킨다. 우리의 두려움은 그 분 가운데서 완전한 치유를 받는다. ‘평강의 왕’(사 9:6)이 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러 오셨기 때문이다.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그 때에 공평이 광야에 거하며 의가 아름다운 밭에 있으리니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종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 먼저 그 삼림은 우박에 상하고 성읍은 파괴되리라 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사 32:15-20)
이사야는 구체적으로 동물 사이의 평안, 그리고 동물과 사람 사이의 평안을 말한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 11:1-8)
이사야가 언급한 ‘싹’은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천사들의 찬미가운데 나온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스가랴는 예수님을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눅 1:79)고 언급하였다. 또 시므온은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눅 2:29)고 예수님을 진정한 자유를 주시는 분으로 묘사하였다. 베드로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화평의 복음’(행 10:36)을 전파할 수 있게 되었다고 밝혔다. 바울선생은 예수님을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엡 2:17) 다고 소개하였다.
예수님은 모든 차원에서 ‘평안의 왕자’가 되신다. 그 분은 종교의 차원만이 아니라 물리적 차원,사회적 차원,심리적 차원, 그리고 예술적 차원에서 평안의 주인이 되시며 공급자가 되신다.
평안이란 성경에서 연속적으로 강조되어온 말이다. 기독교 전통에서 차지하는 평안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사실 우리는 모든 관계에서 평안 가운데 지내도록 지음을 받았다. 하나님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에서 평안은 빼놓을 수 없다. 월터스토프는 “샬롬이란 적개심을 갖지 않는 상태를 지칭할 뿐 아니라 가장 최상의 평안은 즐거움(enjoyment)”이라고 말한다. 샬롬 가운데 거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기쁘게 사는 것이고 자연 속에서 즐겁게 사는 것이자 동료와 즐겁게 지내는 것이자 자신의 삶을 즐겁게 영위하는 것이다.
기쁨과 즐거움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이다. 그리스도인이 엄숙과 금욕적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는 견해는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희락 가운데 살기를 원하신다. “내가 희락을 칭찬하노니 이는 사람이 즐거워하는 것보다 해아래서 나은 것이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으로 해 아래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중에 이것이 항상 함께 있을 것이리라”(전 8:15)
그리스도인 미술가들은 샬롬을 누리지만 미술작품 가운데서 미적인 즐거움을 놓치는 경우가 있는 것같다. 샬롬은 억지로 지어야 할 부담스런 짐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누리는 자연스런 기쁨의 표현이다. 우리 심부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표시이자 안식의 기쁜 감정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살면서 미적인 즐거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건 정말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다. 그 분의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세계를 관람하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고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이 세상을 이처럼 아름답게 지으신 것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평강을 누리는 자는 미적인 만족도 누릴 수 있다. 평강은 하나님과 연합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우리의 일상 모든 부분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건한 그리스도인일수록 미적인 생활을 멀리하는 경향이 있는 것같다.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풍경화와 시와 음악은 냉장고 뒤편에 보관하고 잊어버린 복숭아같이 말라버렸다”면 어떨까? 누구든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아름다움을 분별하는 능력은 인간에게만 주신 것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잘 나타내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사람 말고 심미안을 지닌 다른 피조물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건강한 예술향유는 하나님이 주신 보너스이다. 집안 일, 직장, 텔레비전, 컴퓨터, 바쁜 일과에 지쳐 기쁨에 대한 우리의 능력이 위축되었다면 우리는 냉담한 반응을 보내는 대신 무한한 기쁨을 찾아야 한다.
“신앙의 일들은 너무 위대하므로, 우리 마음이 생동감 넘치고 강력하지 않다면 우리 마음에서 그 일들의 본질과 중요성에 어울리는 발휘는 있을 수 없다. 신앙에서처럼 우리 성향의 움직임이 활기차야만 하는 곳은 없다. 그리고 신앙에서처럼 우리의 성향의 미지근함이 해로운 곳은 없다.”
냉담과 무정함은 주님이 원하시는 열정과 생동감과는 무관한 말들이다. 그럼 기쁨의 자물쇠를 여는 열쇠는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가 위에서 말한 신앙이다. 내가 냉담과 무정함이라는 무쇠로 된 자물통에 잠겨 있을 때 나를 열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그리스도께 달려가는 것뿐이다.
하나님의 광채는 여러 곳에서 빛난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다면 그 광채를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의무적으로 그 광채를 보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예배를 의무적으로 드리지 않고 기쁘게 드리듯이 참된 감정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어린 아이가 선물을 열어보고 자신이 원하는 선물을 받았을 때 아이는 “무슨 목적으로 나는 행복하고 감사함을 느껴야 하는가?”라고 질문하지 않는다. 기쁨이란 억지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저절로 나오는 것이다. 어떤 것의 수단으로서 기뻐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서 예술을 감상하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녹색의 숲을 보면 그 자체로 좋듯이 예술품도 그 자체로서 좋은 것이다. 녹색의 숲을 노래하는 것은 자연에 아첨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예술품을 감상하는 것은 시간이 남아돌아서가 아니다. 자연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광채를 보기 때문이며 예술품에 숨어 있는 조화와 질서, 그리고 아름다움을 보기 때문이다. 기쁨을 표현할 때 비로소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 귀하며 이 모든 것들을 우리를 위하여 보존하시며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엄위로우신 권능과 자애로우신 돌보심에 감탄하게 된다.
물론 여기서 모든 예술이 유익하다는 전제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건강치 못한 예술향유는 우리의 영혼을 부패하게 만들고 수치심을 일으키고 무력감을 증폭시키며, 밑도 끝도 없는 공상의 나락에 빠져버리게 만든다. 예술 자체는 선하나 그것이 남용될 때 부패해진다. 예술도 아담의 타락 이후 죄의 오염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예술이 죄로 물들었기 때문에 정죄하는 것은 적절치 못한 생각이다. 사실 부패한 것은 예술만이 아니라 인간이 하는 모든 것까지 확장된다.
예술은 감각적이므로 이것을 저급한 것이라는 생각은 멀리 고대 철학에서 비롯되었다. 원래 플라톤주의자들은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여 물질적인 것을 부질없이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색깔이나 텍스추어, 모양, 그리고 소리 따위가 주는 감각적인 환희를 피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원론은 크리스천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물질과 정신은 모두 소중하다. 이사야는 육체 뿐만 아니라 마음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주님으로 시인한다면 우리의 몸도 그 분을 진정한 주인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고전 10:31)하는 것은 마음 뿐 아니라 육체도 그 분의 뜻에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아름다움에 반응하는 것은 아름다움을 좋아하시는 그 분의 성품을 가졌기 때문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빼어 닮은 예술가들은 얼마나 부럽고 또 행복한 존재인가?
하나님이 주신 물질적인 것이 해로울 이유가 없다. 성경에서 물리적인 피조물들이 악하게 지어졌다는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 물질계에서 볼 수 있는 색깔,텍스추어,모양,소리는 모두가 아름답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화면에 옮겨 표현하는 미술품도 아름답다.
크리스천 미술가들은 소재나 재료의 제약을 받을 필요가 없다. 크리스천들은 크리스천 철재(鐵材)를 사용하여 건물을 지을 필요가 없다. 크리스천 철재를 쓰지 않았다고 해서 크리스천 사업자로서 무슨 해로운 일을 저지른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크리스천 예술도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인격과 사상을 나타내는 일이 자연스럽듯이 나의 마음과 느낌을 나타내는 것이 자연스럽다. 내가 얼마나 기독교적인 작품을 했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나의 재능으로 인하여 감사하고 그 재능으로 이웃에 대하여, 자연에 대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사랑을 돌리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하나님께 붙들려 있는가, 의의 옷을 입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칼빈의 말처럼 우리는 눈부신 극장에 있으면서 눈먼 자가 되기 쉽다. 문제가 되는 것은 덧없는 것에 현혹되어 참된 실체를 놓치는 것이다. 감각적인 환희에 빠져 하나님께 무감각해지거나 멀리 떨어져갈 할 때도 있다. 다른 사람에 대해 책임을 다하고 못하고 오히려 자아의 진창 속에서 몸부림치기도 한다. 이런 불상사는 하잘 것 없는 것을 궁극적인 것인 양 착각하는 데서 비롯된다. 종교생활을 잘 한 부자 청년이 자신을 재산을 사랑한 나머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한 보물을 발견치 못한 것과 같다.
“진리에 뿌리는 내리고 있다면 우리들이야말로 누구보다도 더 자신감과 즐거움과 성취감을 가지고 세상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 영적인 활동과 기타 생활을 둘로 나누고 그 긴장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그러나 신앙이란 바로 하나님의 세상을 더욱 폭넓게 즐길 수 있도록 우리를 여는 자유로운 경험이어야 하며 이로 인해 우리는 각 사람의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과 자비가 더욱 풍요로워져야 한다. -- 사람들은 하늘에서 뿐 아니라 이 땅위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려고 구원을 받는다. 이 풍요로움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자녀로서의 우리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좀더 잘 이해하는 데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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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미술인들은 누구보다 더 자신감과 즐거움과 성취감을 가져야 한다. 좀더 풍성한 삶을 누릴 때에만 이웃들도 크리스천을 부러워하게 될 것이다. 창작생활도 마찬가지다. 세상과 등을 돌리고 오직 종교적인 미술에만 힘을 쏟는다면 본인은 은혜가 될지 모르나 주위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미칠지 의아하다. 이와 관련해서 나는 두가지 태도를 살펴보려고 한다. 하나는 ‘기능주의적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소재주의적 경향’이다. 전자는 작품의 기능에 관한 지나친 경도의 문제를 지닌다면, 다른 하나는 안이한 창작의 문제를 지닌다.
어떤 화가는 선교나 전도를 위한 도구로 자신의 작품을 이용한다. 그리고 작품내용도 신앙과 관련한 내용으로 채운다. 이러한 종교적인 작품에 이름을 붙이자면 ‘기능주의적 경향’일 것이다. 기능주의적 경향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태도이다. 물론 이것도 하나의 관점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아름다운 예술이 될 때 감동을 이끌어내며, 나아가 감상자에게 의미내용을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자. 예술이 예술답지 못하면 누구에게도 감동을 주지 못한다. 감동은 의무가 아니다. 당위성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보는 사람, 듣는 사람이 작품 안으로 빨려들어가면서 느끼는 정서가 바로 감동이다.
크리스천 미술이 일반인에게 어필되지 못하는 이유는 기독교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관람자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태의연한 작업방식, 그리고 기독미술이라면 이미 특정한 스타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고전양식을 답습해서는 감상자의 동의를 이끌어내기 어렵다. 기독미술이라고 전형적인 미술양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데 현실적으로 작품을 보면 대단히 조심스럽고 소극적이다.
크리스천 미술가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것같다. 교회의 지원도 전무하고 교계의 관심조차 없으니 작업에 전념할 여건이 성숙되어 있지 못하다. 일반 미술가도 살아남기 힘든데 관심조차 미미한 크리스천 미술가는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이 뛰어난 작품을 내놓지 못하는 이유로는 설득력이 모자란다. 신앙생활을 내세운 나머지 작품연구를 게을리하거나 세상의 것을 일체 인정하지 않고 외고집으로 나가는 경우, 아예 조형연습 따위는 필요없다는 식으로 나가선 곤란하다. 일반 미술에서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이 담고 있는 정신이지 작가로서의 성실성, 풍부한 기술, 호소력 있는 전달방법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갈고 닦지 않으면서 어떻게 많은 감상자들에게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겠는가? 창조적인 고민과 줄기찬 연습이 밀려난 뒷자리에 작품에 대한 수용이나 폭넓은 지지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하나의 경향은 창의성을 발휘하지 않은 상투적인 소재의 기용이다. 이러한 태도를 ‘소재주의적 경향’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는 신앙심의 호소를 표제적인 형식으로 강조한다. 성경을 그리거나 교회나 십자가를 그리거나 혹은 기도장면을 그리는 것 등이다. 이런 작품들은 익숙한 이미지들이어서 크리스천에게는 편안하게 경험된다.
그러나 소재주의적 경향은 종교적 정당성을 얻을지 모르지만 아름다움을 즐기고 창조성을 넓혀가는 데는 부족하다. 소재를 종교적인 것으로 택했다고 해서 더 신앙이 깊어지지 않으며 이웃이 구제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구제하시므로 기독교적 소재로 구제를 내세울 이유가 없지 않을까? 미술작품을 제작할 때 예배하는 심정으로 그릴 수는 있어도 그림 자체가 예배는 아니다. 우리 입술로 직접 기도를 드리고 찬송할 때 주님께서 더 기쁘게 받아주시지 않을까? 그림은 예배가 아니므로 작품을 지나치게 표제적인 것으로 한정하는 것에 신중해야 하리라 본다.
화란의 신칼빈주의자 로크 마커(Rookmaaker)도 이와 같은 의견을 피력한 적이 있다. 그는 “미술에서 크리스천이란 테마에 있지 않고 정신에 있다. 작품이 반영하는 지혜와 실체에 있다”고 하였다. 만일 우리가 소재나 테마에 집착하지 않는 입장이라면, 크리스천이 제작한 미술은 특정한 이미지나 기능에 연연하지 않고 얼마든지 기독교적 세계관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로크 마커는 예술을 ‘종교적 선전’이나 ‘거룩한 광고’로 삼지 말 것을 권고한 적이 있다. 심오한 예술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작되는 것이지 기독교적 인습의 틀을 견고히 유지하는 것과는 다르다. 렘브란트의 수난 시리즈, 바흐의 마태수난곡이 유명한 것은 그 작품들이 영혼구원이라는 목적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었으며 유의미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렇듯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은 꼭 종교적인 소재를 취했다고 해서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만드신 분일 뿐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신다. 따라서 모든 일에 있어 그 분과 교제하며 주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의 삶의 태도이다. 종교적으로 보이는 것이 우리의 소명은 아닌 셈이다.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웅변하려 애쓰거나 원래 예술이 전달할 내용이 아닌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할 때 이류로 전락하는 경우가 있다.
C.S 루이스는, 크리스천 작가의 혈관 안에 잉크 대신 혈액이 흐를 뻔했다고 유머러스하게 말한 적이 있다. 예술가가 종교적 발언을 앞세우다보면 예술이 되지 않고 억지스럽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예술은 설교가 아니기 때문에 작품형식을 통하여 감상자의 반응이나 감동을 끌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루이스는 그러기 위해 예술가는 먼저 그의 매체의 특성을 잘 이해, 터득해야 하며 작품 자체에 의해서 메시지를 드러낼 줄 알아야 한다고 보았다. 만일 그가 소설가이라면 언어구사에 능숙해야 하며 화가라면 색깔과 형태구사에 능숙해야 한다는 얘기다. 미용사가 가위질은 서툴게 하면서 어떻게 자기 직업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창조성은 로봇과 같이 일정한 프로그램에 따라 수동적으로 행동하는 것과 다르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저마다 독특한 삶 아래 창의성을 새롭고도, 자발적으로 펼칠 것을 허락하셨다. “자유로운 창조성은 위대한 창조주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피조물의 반응”(Nicolas Berdyaev)이란 말도 있다. 우리에게 주신 창조성을 풍부하게 개발하고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께 더욱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이 맞다면, 크리스천 미술가들은 자신의 창조적인 작업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이 세우신 세계를 환히 드러내고 또 그 분의 아름다운 구속적 비전을 참여한다는 뜻이 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움과 창조성을 즐거워하며 향유하고 더 열심히 무궁한 창조의 경이로움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으니 이처럼 영광스럽고 감사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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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우웬,김명희역,『영성에의 길』,IVP,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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