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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코복음 6,1-6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고 기적을 일으킬수 없는 저항을 만납니다. 그리고 동향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십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2)하고 감탄하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다른 곳에서 하신 기적들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2)
'나보다 못한 별볼일 없는 출신, 직업도 보잘 것 없는 목수인 주제에 나를 가르치다니ᆢ' 라는 뜻이지요.
나보다 가진 것 없는 이, 학벌이 변변찮은 이에게서는 배울 것도 받을 것도 없다는 생각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선입견, 편견, 자만심은 신앙의 큰 걸림돌입니다. 기적을 가로막습니다. 진정한 만남을 가로막습니다.
구원의 길이 막힙니다.
그런데 사실 선입견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나타나엘에게서도 볼수 있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1,46)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보고 듣고난 뒤에는 바로 신앙고백을 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ᆢ” (요한 1, 49)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막는 장애물을 뛰어넘는 길은 순수하고 열린 마음으로 보고 듣는 것, 누구에게나 배우려는 겸손한 마음을 기르는 것, 거부하고 싶을 때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회심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 기도하는 이의 태도입니다.
오늘 하느님은 나의 삶의 길에서 어떻게 나에게 다가오실지 모릅니다. 어떻게 맞으시렵니까?
(천 사비나 수녀님)
2월5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복음: 마르코 6,1-6
“너를 안다.”라는 말은 “너를 무시해.”라는 뜻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방식은 ‘안다’라는 착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유년기와 가족 등을 다 알고 있기에 예수님을 안다고 착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안다고 말할 때 이미 모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몇 명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기적을 일으키시지 못하고 그 고을을 떠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다라는 말은 “더는 믿고 희망할 수 있는 게 없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아는 것을 믿고 희망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내가 누군가를 안다고 생각하면 그 누군가를 창조했다는 뜻입니다.
스마트폰을 아는 것은 다른 스마트폰이 아니라 그 스마트폰을 만든 당사자뿐입니다.
스마트폰끼리 서로 상대를 안다고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개와 고양이가 서로 상대를 안다고 주장할 수 있다면 그것을 보는 인간으로선 얼마나 웃길까요?
우리는 결코 남을 안다고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 교만이 그 사람을 가두고 그 사람과의 더 친밀관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전에 말씀드린 예화지만 이 내용과는 너무도 잘 어울리는 것이기에 한 번 더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락 토마스(Rock Thomas)는 캐나다 농촌에 살던 촌뜨기 꼬맹이였습니다.
그는 항상 자기 자신을 ‘패배자, 노동자, 애정 결핍’으로 정의했습니다.
사실, 이 정체성은 자신이 규정한 것 같았지만 실제로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향 때문입니다.
토마스의 어머니는 도망쳤고 아버지는 돈만 가져다 쓰는 아이를 비난했습니다.
아버지는 14살 때 놀자고 말하는 토마스를 돈이 땅 파서 나오는 줄 아느냐며 심하게 비난했습니다.
이후 토마스가 노동으로 돈을 벌어 열일곱 살이 되니 독립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에게 유일한 성공의 척도는 돈이었고 돈을 버는 이유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독립한 이후에도 몸이 부서질 정도로 일을 했고 그 덕분에 어느 정도 부유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엄마로부터 아버지가 암으로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게 됩니다.
아버지는 입원비도, 세금도 내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토마스는 지금까지 자신이 모아놓은 돈으로 병원비와 세금을 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아는 아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그런 돈을 줄 리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지도 못하고 다시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올 때 토마스는 한없이 울었습니다.
여전히 패배자이자 노동자이며 애정 결핍에 묶여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부동산 회사에 취직하여 혼자 야근을 하던 중 지배인이 그를 보고 칭찬을 해 주었습니다.
“정말 성실한 친구네. 이렇게 열심히 일해주어서 고맙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칭찬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지배인은 약간 당황하면서도 다 듣고 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혹시 자네 좋아하는 사람 있는가?”
“예? 아, 예. 한 명 있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요.”
“그렇군, 혹시 존경하는 이유가 있나?” “터프하고 핸섬한 사람이기 때문이죠.”
“그래? 그렇다면 임무를 주겠네.
오늘부터 길을 걷거나, 일하거나, 밥을 먹을 때마다 ‘나는 터프하고 핸섬한 사람’이라는 말을 500번 반복하게.”
정말 500번이냐고 놀라며 되물었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듣게. 인간의 뇌는 언제든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어.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모습을 끝없이 반복해서 상기시킨다면 자네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다고 해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이지.
문제는 많은 사람이 자신이 되고픈 게 아니라
‘남들이 자신에게 원하는 모습’을 만들기 위해 뇌를 길들인다는 거야.”
한 번도 이런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그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터프하고 핸섬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습니다.
가슴이 북받쳐 눈물이 났습니다.
그로부터 5년 후 그는 지역 최고의 부동산 중개인이자 비즈니스맨이 되었습니다.
목표를 이룬 지금은 ‘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을 쉼 없이 반복하며 또 한 번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출처: ‘당신의 인생을 180도 뒤집는 방법’, 체인지 그라운드, 유튜브]
락 토마스에게 “난 널 알아.”라고 말하는 아버지와, “넌 뭐든지 될 수 있어.”라고 말하던
직장 상사 중 누가 토마스를 진정으로 안 사람일까요?
토마스를 안다고 규정하지 않은 직장 상사입니다.
안다고 할 때 모르는 것이고, 모른다고 할 때 아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우주에 관한 책을 본 기억이 납니다.
아주 어렸을 때라 광활한 우주의 흑백 사진만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 ‘우주의 끝이 있는가, 없는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답은 “모르겠다.”였습니다.
우주도 하나의 물체인데 끝이 있는지, 없는지도 인간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한 사람이 우주보다 더 신비하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주도 모르는데 한 인간을 어떻게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나도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안다고 할 때 그 사람에 대한 더 이상의 믿음이나 희망, 더 나아가 사랑이 커질 수 없습니다.
믿음과 희망, 사랑은 그 사람을 마치 새장에서 밖으로 새를 풀어놓는 것처럼 내가 그 사람을 규정하지 않을 때 훨훨 날아가 더 커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전에 백종원 씨하면 떠오르는 것이 ‘설탕’이었고, 음식이 맵고 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선입관이 있는 사람들은 골목 식당에서 그의 레시피와 충고를 따르지 않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다시 손님이 떨어지고 장사가 안되며 그 탓을 백종원 씨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백종원 씨는 남이 자신을 안다고 할 때 거기에 갇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규정하는 사람만 피해를 봅니다.
절대 내가 인간을 안다고 규정하여 그 인간을 안 하느님까지 안다고 규정하는 교만의 실수를 저지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다 하느님까지도 내가 만들어낸 한계에 가둬버릴 수 있습니다.
또 남이 나를 안다고 말할 때 그 말에 갇히지 맙시다.
“당신이 나를 만들었습니까?”라고 반문하십시오.
나를 아시는 분은 나를 만드신 하느님뿐입니다.
나를 안다고 나를 규정하는 사람을 벗어나야 하늘 높이 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도 우리 자신을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한 존재입니다.
사람을 모른다고 할 때 그 사람을 만든 하느님도 모르게 됩니다.
그래야 그분을 믿고 희망할 수 있게 되며 그래야 사랑이 증가합니다.
인간이 무언가를 안다고 할 때 그는 자신도 자리에 멈춰 움직일 수 없게 되고 남도 그렇게 만들어버립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5일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복음: 마르 6,1-6:
주님, 제가 당신 불멸의 영광에 도달하게 하소서!
오늘 축일은 맞이하시는 아가타 동정 순교자는 체칠리아, 루치아, 아녜스 성녀와 더불어 로마 교회의 네 동정 순교자로 널리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아가타는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시절, 이탈리아의 최남단 시칠리아 섬 카타니아 지방 명망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다방면에 출중했던 그녀는 당시 총독의 눈에 띄게 됩니다.
아가타에게 완전히 빠져 제 정신을 못 차리게 된 총독은 그녀가 싫다는 데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청혼을 거듭합니다.
그럴 때마다 단호하게 청혼을 거부하자 심기가 완전히 불편해진 총독은 그녀가 그리스도교 신자임을 알고 법정으로 넘깁니다.
재판정에서 아가타는 갖은 잔혹한 형벌을 다 받지만 꿋꿋하게 견뎌냅니다.
한 차례 끔찍한 고문을 잘 견뎌낸 그녀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다시 옥으로 돌아갈 때마치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처럼 만면에 희색을 띤 채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갔으며, 고문으로 인한 처절한 고통을 기도로써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모든 고통을 주님께 봉헌하였습니다.
다음날 다시 재판정으로 끌려 나온 아가타의 태도는 더욱 의연했었고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습니다.
형리들은 빨갛게 달군 쇠로 그녀의 가슴을 도려냈지만 그 끔찍한 고통 중에서도 그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정결에 대한 사랑으로 이와 같은 형벌을 받고 있습니다.
제 구세주 하느님, 이 고통을 잘 참아 이기도록 도와주소서.”
다시 감방으로 돌아온 다음 날 베드로 사도가 치료 약을 가지고 나타나자 아가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베드로 사도님! 저는 세상의 약으로 제 육신을 고치는 것을 절대로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새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아가타의 의연한 모습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총독은 날카로운 유리 파편과 불타고 있는 석탄 위에 아가타를 뒹굴게 했다고 합니다.
전신에 화상을 입고 숨을 거두어가던 그녀는 이윽고 마지막 순간이 오자 다음과 같은 기도를 바쳤다고 합니다.
“착한 스승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님, 당신은 제가 박해자의 고통을 이기게 하셨으니 감사하나이다.
주님, 제가 당신 불멸의 영광에 도달하게 하소서.”
오직 주님과 온전히 일치해 있었던 아가타였기에 그 어떤 외부로부터의 고통에도 좌지우지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두려운 것 오직 한 가지는 주님과 멀어지는 것뿐이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4주간 수요일 강론>
(2025. 2. 5. 수)(마르 6,1-6)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평범하든 특별하든, 지금 여기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 6,1-6).”
1) 나자렛 사람들이 한 말은, “목수는 목수 일이나
할 것이지, 어찌 감히 메시아 행세를 하면서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하는가?” 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목수’ 라는 직업과 가난한 집안이라는 것 때문에, 예수님과 예수님의 집안을 그 전부터 무시하고 업신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의 말씀이 ‘지혜의 말씀’이라는 것을, 즉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들었고,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을 기적으로 알아보긴 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말씀’의 은총과 ‘기적’은, 평범한 사람을 통해서는
오지 않는다는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못마땅하게 여겼다.’ 라는 말은, 그들이 ‘말씀’을
‘말씀’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고, ‘기적’을 ‘기적’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알아듣고 알아본다고 해서 꼭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모르고 살던 이방인들은 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데, 하느님을 잘 알고 있고 믿고 있다고 자처하는 너희는 왜 나의 복음을 거부하는가?”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 가신 것은 존경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였는데, 구원받기를 거부하면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존경’이라는 말은, 나자렛 사람들이 ‘말씀’의 은총과 ‘기적’을 ‘무시’했음을 암시합니다.>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라는 말은,
“기적을 일으킬 기회가 없었다.” 라는 뜻입니다.
몇몇 병자 외에는 청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즉 사람들이 받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치유의 은총을 주시려고 해도 주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라는 말은,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셨다.” 라는 뜻입니다.
2)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요한복음에 있는 ‘예루살렘 주민들’이 한 말에 연결됩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메시아께서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말은, 메시아는 일반인들과는 다른 신비스러운 존재라는 고정관념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라는 말은, 나자렛의 가난한 목수라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는 예수에게는 신비감이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8-29)”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라는 말씀은, “내가 나자렛의 목수라는 것을 너희는 알고 있지만, 그것은 나를 아는 것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라는 말씀은,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하느님을 잘 안다고 자부하지만 모르고 있다.”, 즉 “너희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모르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참된 신앙인이라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바로 알아보고 믿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3) 메시아는 신비스럽게 오시는 존재라는 생각도, 반대로 평범한 사람으로 오신다는 생각도, 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일상생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도, 모두 다 잘못된 고정관념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이 마음대로 판단할 수 없고, 마음대로 규정지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집안의 아기로 태어나셨지만, 끝까지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모습만 유지하신 것은 아닙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모습도 보았고, 영광스럽게 변모하시는 모습도 보았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특별하고 신비스러운 모습이든지 평범한 모습이든지 간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믿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