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571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6 : 북한
대동강 물은 출렁이는데 아득하구나
‘사람이 살 만한 곳’, 아니 ‘살고 싶은 곳’은 도대체 어디를 말함인가?『논어』 「이인편(里仁篇)」에는 “마을이 인(仁)하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스스로 골라 인한 곳에 살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라는 글이 있다. 『택리지』에도 역시 이와 비슷한 내용의 복거(卜居), 즉 살 곳을 점쳐서 정한다는 개념이 있다.
이처럼 살 곳을 정하는 문제는 단순히 생활의 윤택함을 도모하는 것을 넘어서 인(仁)을 추구하고 지혜를 추구하며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의 차원이라고 볼 수 있다.필자는 1980년대 중반부터 우리나라 전 국토를 두 발로 걸었다.
크고 작은 400여 개의 산을 오르고 남한의 8대 강과 영남대로, 삼남대로, 관동대로 등을 따라가며 곳곳에 있는 문화유산과 그 땅에 뿌리내린 삶을 만났다. 그 길에서 느낀 것은 산천이 나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사실, 그 길들을 올곧게 보존해서 후세에 물려주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한발 한발 걸으며 지나온 산과 강, 그 길을 걸으며 내가 발견한 것은 바로 나였고, 처연하도록 아름다운 우리 국토였으며, 그 국토를 몸서리치도록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 책을 이중환의 『택리지』에 기반을 두고 인문지리 내지 역사지리학의 측면에서 ‘지금의 택리지’로 다시 쓰고자 했다. 이중환이 살다 간 이후 이 땅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얼마나 많은 인물들이 태어나고 사라졌는가. 그것을 시공을 뛰어넘어 시냇가에서 자갈을 고르듯 하나하나 들추어내고 싶었고, 패자 내지는 역사 속으로 숨어들었던 사람들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했다.
1945년 동서냉전체제의 산물로 남북으로 분단된 이래 60~70년의 세월이 흘렀다. 백두산에서 비롯된 백두대간이 가열차게 금강산으로 이어지고 대동강, 두만강, 압록강이 흐르는 북한은 지금 우리민족 구성원에게 그리움과 설렘으로 남아 있는 미지의 땅이다.2004년 북한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평양, 묘향산, 그리고 백두산과 구월산에 있는 단군의 흔적을 찾아가는 답사 길이었다.
양각도 호텔에서 묵었는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다가 사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혹시 북한에도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이 있습니까?” 내 말을 그 여자는 못 알아들었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이 잘 되면 기분이 나쁘다는 뜻이라고 알려주자 그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니, 가까운 사람이 잘 되면 축하해 줘야지, 왜 기분이 나쁩네까?” 하며 정색을 하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일행이 “북한에서는 사유재산이 인정이 안 되니까 논밭을 사고 팔일이 없으니 배 아플 일이 없지요.”이렇듯 남북한의 속담까지 서로 달라진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중국에서 사신들이 오가던 의주로나 경흥로, 금강산 가던 길이 그 사이에 끊어졌고, 평안도와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의 땅이 여러 이름으로 바뀌고 변하였다.우리 국토에서 이중환이 250년 전에 살 만한 곳이라고 여겼던 계곡이나 강가뿐 아니라 사는 데 적합하지 않은 곳이라 했던 바닷가에는 별장과 콘도를 비롯한 숙박업소와 음식점 등이 빼곡하고, 곳곳에는 골프장이 들어섰다.
온 나라 산에 묘지가 넘쳐 몸살을 앓고, 강은 강대로 환경오염과 직강화작업 및 댐 건설로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수많은 길이 콘크리트로 뒤덮인 채 거미줄처럼 얽혀 자동차와 기차와 비행기는 다녀도 정작 사람이 마음 놓고 걸을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수많은 나그네와 보부상들, 신경준과 이중환 그리고 김정호가 걸었던 길은 사람이 다닐 수 없는 길이 되었고,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사람의 왕래가 잦았던 강길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일찍이 성호 이익은 “정신이란 모습 속에 있는 것인데, 모습이 이미 같지 않다면 어찌 정신을 전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로 변해가는 세태를 꼬집었다. 나보다 앞서 이 길을 걸었던 매월당 김시습과 이중환 그리고 김정호 등 옛사람들에게 우리 국토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금처럼 도처에 아파트 숲이 펼쳐지거나 강가에 즐비하게 늘어선 매운탕집과 ‘가든’ 그리고 바닷가를 에워싼 저 수많은 횟집들은 없었을 것이다. 무서운 속도로 시시각각 다가오는 자동차들이 없으니 걸어가면서 충분히 자유로웠을 것이다.
영남대로를 같이 걸었던 모 방송국 PD 신현식 씨는 문경새재를 넘어서면서부터는 영남대로가 걸어다닐 만한 길이 아니라고 했다. ‘살 제 진천, 죽어 용인’이라는 말과 달리 지금의 용인 일대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몰려와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용인을 지나 성남의 판교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말 그대로 우리나라 전역이 땅 투기장으로 변한 느낌이었다.
삼남대로는 또 어떤가! 차령을 넘어 천안에 접어들면서부터는 길이 대부분 도회지를 통과하기 일쑤였다. 옛 모습을 그나마 간직하고 있는 관동대로 역시 개발의 바람이 불어 하루가 다르게 산천의 모습이 달라지고 있다. 중국의 시인 두보가 “나라는 깨져도 산과 강은 그대로”라고 노래했던 것과는 달리, 경제 개발의 여파 속에서 고개며 산이며 내를 건너 길에서 길로 이어지던 그 옛길이 자꾸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근래에 접어들어 생명 사상과 환경 문제가 대두되면서 산과 강이 새롭게 조명되고 『택리지』가 여러 형태로 논의되지만 이 시대에 맞는 『택리지』는 다시 쓰이지 않았다. 이러한 것들이 미흡하지만 이 땅의 산과 강을 오랫동안 걸어다닌 나로 하여금 『택리지』를 다시 쓰도록 부추겼다.30여 년간 우리 땅 구석구석을 두 발로 걸어온 결과물을 총 10권으로 완결하게 되었다.
역사와 지리, 인문 기행을 더해 수백 년 전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하고 선조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았던 흔적을 고스란히 담으려 노력했다. 빌딩이 산의 높이를 넘어서고, 강의 물길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산수와 지리는 우리 삶의 근간이다.
우리가 바로 지금 두 발로 선 이 땅을 자연과 사람 모두가 더불어 사는 명당으로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일 것이다.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과 함께 간절한 기도를 전하고 싶다.“간절히 원하노니, 청화자(靑華子) 선생이여!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상처 입은 사람들이 더불어 조화롭게 살 수 있도록 그대가 꿈꾸었던 이상향을 보여주십시오!”
경인년 시월 열하루날온전한 땅 전주에서 신정일<검색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