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철이 죽은지 10년이 되었다.
지금 방송에서 신해철 다큐가 나온다.
10년전, 한국 의료계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무색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이동한 지가 꽤 되었지만, 신해철이 의료사고로 죽었다는 말을 동네 이발소에서 듣게 되니 참담했다.
의료사고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시대적 병폐에 곧잘 돌직구를 날리던 그였지만 죽음의 순간까지 이렇게 온몸으로 돌직구를 남기고 떠나다니!
1988년 MBC 대학가요제에 마지막 팀으로 무대에 오른 그에게 아나운서가 대기실에서 기다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을 때
“빨리 집에 가서 엄마 얼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라며 너스레인지 진심인지 모를 말을 했던 해맑은 미소년이었던 그는 마왕처럼 몸집을 불리면서 음악을 통해 우리 사회의 빈약한 공론의 장에서 맹활약을 해왔다.
그는 내가 하는 대중문화연구 수업에 초대하면 기꺼이 와서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어주곤 했다.
나는
“아직 단 한 번의 후회도 느껴 본 적은 없어. 다시 시간을 돌린대도 선택은 항상 너야”
로 시작하는 노래를 동성동본 결혼을 선택한 이들을 응원하는 노래인 줄 모르고 좋아했었다.
알고 보면 그의 노래 대부분은 누군가를 응원하는 노래였고 시대와 긴밀한 관계 속에서 살아갔기에 장르적 경계를 종횡무진 넘나들 수 있었던 듯하다.
세월호 희생자를 애도하는 백일 음악회에서 고 이보미 학생과 김장훈씨의 ‘거위의 꿈’ 녹음 작업에 도움을 주었다는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1987년에 대학에 입학한 학번답게 그는 ‘나’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들을 음악으로 만들어 왔다.
나는 그가 간통죄나 동성동본 금혼과 같이 개인이 스스로 해결해야 할 영역까지 관리하려는 봉건적인 법에서부터 스크린쿼터나 소리바다, 영어 공교육 문제 등 우리 사회의 천민자본주의적 행태에 이르기까지 거침없는 발언을 통해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 시민’의 전형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를 비롯한 90년대에 출현한 굵직한 대중음악가들은 ‘나’로부터 시작하는 대단한 음유시인이자 노래꾼들이며, 개인과 사회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실한 감각이 있었다.
2000년대 후반, 시장이 모든 삶의 영역을 압도하는 경향이 역력해지고 시장이 제조한 스타들이 판을 치게 되면서 이런 예술가들을 점점 찾기 어려워지고 있다. 그렇다. 이런 시대에 ‘실존적 명석함’과 용기를 갖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런 명석함과 용기를 가진 예술가들이 만든 노래 한 구절은 참으로 큰 힘을 갖고 있다. 엄청난 衝擊을 받거나 심신이 지쳤을 때 떠오르는 어떤 가락을 흥얼거리게 되면서 우리는 마음의 평정을 되찾지 않는가?
그 고픔을 그대로 두면 얼어붙어 버린 심장을 가진 괴물과 같은 존재가 생겨나게 된다. 위장에 음식이 들어가지 않으면 배가 고프듯이 가슴과 머릿속도 마찬가지다.
배고픔 못지않은 마음의 ‘고픔’이 있는 것이고 그 고픔을 제대로 충족시킬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애도의 정이 온라인, 오프라인상에서 넘쳐흐르고 있다.
그 애도하는 마음들을 읽으면서
“우리의 미래는 수세기에 걸친 전쟁의 기억이 아니라 덧없이 지나간 공감의 순간들에서 발견될지도 모른다”
고 한 하워드 진의 말을 떠올린다.
마음의 고픔을 외면하고 애도의 시간을 생략하면서 돌진했던 폭력의 시대,
“굳건한 안보 위에 다시 뛰는 한국 경제!”
라는 구호를 여전히 외치는 조울증의 사회를 등지고 큰 별 하나가 떠나갔다.
함께 늙어갈 음유시인을 잃는다는 것은 너무나 슬픈 일이다. 그를 애도하는 기억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 다시 시대의 吟遊詩人들이 모이는 자리를 찾아가 보려 한다. 어쩌면 魔王은 그런 곳 어딘가에서 홀가분한 웃음을 짓고 있을 것이다. 평안하시기를!
다시 한 번 신해철을 哀悼한다.